덕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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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세조의 서자로 어머니 근빈 박씨에게는 장남이다. 친형제로 남동생 창원군이 있다. 전주 이씨 덕원군파의 파시조이다.
2. 생애
아버지 세조가 즉위한 후인 1458년(세조 4년) 8월에 덕원군에 봉해졌다. 14세에 혼인하면서 세조에게 사저 60여 칸을 하사받고 건천동에서[2] 거주했다. 아버지 세조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세조가 거둥할 때는 항상 함께 했다.
이복동생 예종이 즉위한 뒤, 남이의 옥사를 평정한 공으로 ‘수충보사정란익대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에 책록되었다. 조카 성종이 왕이 된 후에는 종부시도제조에 임명되어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관장하고 선대 왕들의 제향소를 관리했다.
3. 사망
1498년(연산군 4년) 8월 9일에[3] 건천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49세.[4]
묘는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당현리에 있으며 부인 경주 김씨와 함께 합장되어있다. 원래 왕자가 죽으면 나라에서 예장을 내렸는데 덕원군은 생전에 남긴 유지를 따라 어떤 예장도 받지 않아 다른 왕자들의 묘소보다 초라했다. 현재는 후손들이 비석과 석물을 갖추어 놓았다.#
세조의 4남 1녀 중에서 제일 오래 살았다. 유난히 20세를 넘기지 못하고 일찍 요절했던 세조의 적자들[5] 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지는 부분.
4. 여담
- 1471년(성종 2년) 행호선사 극유가 전라도 고창군에 있는 선운사를 중건할 것을 청하자 이에 찬성하며 직접 발원문과 선가혼기를 써주고 후원해주었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선운사의 많은 건물과 물품들이 불탔으나 덕원군이 쓴 글들은 남아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 세조가 온양온천에 가다가 경기도 진위군 종덕면 막금리에 들렀을 때 덕원군이 세조에게 이 땅을 자신에게 내려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 땅이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당현리로, 덕원군의 묘가 자리한 곳이다. 덕원군의 호인 ‘종덕암(宗德菴)’도 여기서 유래했다.
5. 가족과 후손
4명의 정실부인 사이에서 10남을 두었다. 이 중 둘째 아들 덕진군은 덕원군의 동생 창원군의 양자로 입적했다. 남은 9남의 후손들 중 3남은 후사를 두지 못했고, 나머지 6남의 후손들이 현재까지 남아 전주 이씨 덕원군파를 형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