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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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성종의 후궁. 본명은 은소사(銀召史), 또는 은소이(銀召伊)로 알려져 있다. 사대부인 엄산수(嚴山壽)의 적녀(嫡女)[1] 다.
2. 생애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엄씨의 셋째오빠 엄계가 1456년생이고 또 위로 맏언니 엄금소사가 있어서 1458년 이후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1477년에 후궁인 엄씨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등장했고, 이 때 귀인 정씨와 함께 성종의 총애를 받아 폐비 윤씨의 질투를 받았다고 하니 이때 이미 10대 후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481년(성종 12) 3월 11일에 공신옹주를 낳았는데, 정씨에게는 외동딸이 된다. 이 딸이 한명회의 손자인 한경침과 혼인하면서 살게 된 저택을 수리하는 일이 지나치다고 상소가 올라올 정도로 성종이 후하게 대접했다. 남편인 성종이 살아있을 때는 나름대로 평온한 삶을 누린 듯.
그러나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성종 대에 있었던 익명서 사건이 다시 들춰지게 된다.
한 통의 익명서가 덕종의 후궁인 권 숙의의 집안에 떨어졌다. 당시 권 숙의는 궁중에 있는 여러 후궁들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역할을 맡고 있었고, 인수대비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익명서의 내용은 "엄 숙의가 정 숙용과 더불어 중궁과 원자를 모해한다"는 것으로 당시 대비전과 성종은 곧 왕비의 자작극으로 판단한다. 이외에 여러가지 일들로 믿음을 잃게 되는 바람에 왕비는 폐출된 뒤 사사된다. 사실 폐비 윤씨는 죽음을 자초하듯 여러가지 일을 저지른 바 있다. 익명서도 그 중의 하나였을 뿐이지만, 어쨌든 여기서 성종의 그 많은 후궁 중 '엄 숙의'와 '정 숙용'이라고 이름이 언급된 자체가 폐비 윤씨의 정적이라는 뜻이다. 폐비 윤씨가 정적으로 생각했든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든 중요하지 않다. 연산군에게는 그저 좋은 빌미였을 뿐.지난 정유년 3월 20일에 엄 숙의(嚴淑儀)가 정 숙용(鄭淑容)과 더불어 중궁 및 원자를 모해(謀害)한다는 글 두 통과 비상(砒礵) 약간과 압승책(壓勝冊) 한 권을 작은 상자에 담아 가지고 백저포(白苧布) 보자기로 싸서, 권 감찰(權監察)의 집 사람이라 일컫고 권 숙의(權淑儀)의 【권 숙의는 덕종(德宗)의 후궁으로, 여러 숙의를 총괄하여 다스렸다.】 집에 던졌는데, 권숙의의 집 사람이 그 상자를 가지고 대궐에 나아와서 숙의에게 바쳤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 6월 5일 경인 4번째기사
결국 귀인 정씨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3. 후손
엄씨의 딸인 공신옹주(恭愼翁主)는 옹주의 작위를 빼앗기고, 폐서인이 된 후 유배되었다. 이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두 모녀 모두 복위되었다. 공신옹주는 유배 시 남편 한경침(韓景琛)[2] 의 신위를 유배지에 가져가서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내고 무엇이든 신위에 먼저 천신한 뒤에 입에 대었고,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옹주를 존경했다고 한다.
공신옹주는 중종반정 이후 사면되었으며, 후에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중종은 정문(貞門)을 세워 표창하고 곡식을 내려주었다. 공신옹주는 어머니와 남편을 위한 제사를 지내면서 평생 수절했고, 69세에 사망했다.
4. 대중매체에서
폐비 윤씨를 모함하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단단히 한몫을 한 후궁으로 유명해서인지,성종과 연산군 시대를 다룬 사극들에선 반드시 귀인 정씨와 더불어 쌍둥이처럼 세트로 나온다.
- 이미지[3] - MBC 《설중매》
- 최정원[4] - KBS 《한명회》
- 추영미 - KBS 《장녹수》
- 윤유선 - KBS 《왕과 비》
- 한소정 - SBS 《왕과 나》
- 박탐희[5] - JTBC 《인수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