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복음침례회

 

1. 개요
3. 금수원(錦繡院)
4. 수사 상황
5. 비판
6. 기타


1. 개요


기독교 교단 중 하나로 흔히 구원파로 불리는 3개의 분파 중에 하나로 권신찬-유병언 계열의 분파이다. 구원파는 침례회라는 이름을 쓰지만 기독교한국침례회, 혹은 침례교회와는 별개의 단체이다. [1][2]
한국 구원파의 시조로 알려진 권신찬은 본래 예장통합 경북노회에 소속된 대구칠성교회 목사였다. 권신찬 목사와 유병언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1960년대 초 대구의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였던 권신찬 목사는 네덜란드의 선교사 길기수 (Keith Glas) 씨를 초청하여 집회를 했는데 그의 집회 설교에서“여러분 거듭났습니까?”라고 하는 강한 외침에 자극을 받은 바 있고 그 후 한달쯤 후에 주일설교를 준비하는 중에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라는 말씀에 부딪혔다. 그는 평소 예수를 믿고 의롭게 살려고 최선을 다하면서도 양심에 부족함을 느끼는 갈등과 목회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쌓였던 율법과 현실적인 신앙생활 사이의 괴리에서 고민해 왔다. 그러다가 위의 로마서 말씀에서 사람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믿어짐으로서 마음의 갈등이 해결된 것이다. 그는 하루 종일 미친 듯이 “내 죄 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찬송가 210장)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그는 목회생활 10년 만에 거듭난 체험을 하고 변화되었다. (자서전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99쪽) 그리고 그는 그 후 성경에 나오는 세례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다.”는 뜻을 가진 침례(浸禮)라는 것을 알고, 장로교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물을 뿌리는 세례가 아닌 물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를 받았다. 이 일로 장로교회의 헌법에 어긋난다는 명목으로 장로교회의 목사직에서 면직되었다. 그러나 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복음 전도자의 길을 가게 되었으며 #

그 무렵 또 다른 장로교회 20대 청년이었던 유병언씨는 젊은 나이에 신앙생활과 현실과의 갈등으로 고민해 오던 중 역시 같은 네델란드 선교사 길기수씨의 집회설교 중 마태복음 22장 1-14절을 듣게 되었다. 그중에 특히 22:8-12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이 말씀을 듣는 중에 예복은 사람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의임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깨닫고 의의 옷을 입고 거듭나는 경험을 했으며 그는 미국의 또 다른 선교사 딕 요크 씨가 운영하는 선교학교에서 평신도 전도인의 훈련을 받았다. 그 후 유병언씨와 권신찬 목사는 함께 ‘평신도복음선교회’(기독교복음침례회 전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전도인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날로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

유병언은 이후 극동방송국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권신찬 목사는 1965년 은혜의 아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설교를 시작하였으며, 1971년 극동방송국을 운영했던 팀선교부와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전신인 평신도복음선교회와 한국어방송 공동운영계약을 맺고, 유병언이 부국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권신찬의 사위인 유병언은 초창기 대구지역 자신의 집 '칠성예배당'을 본거지로 삼아 활동했다. 이후 서울, 인천, 안양 등지로 영역을 넓혔다. 유병언은 1971년 그가 부국장으로 취임할 당시, 팀선교부 소속 미국 선교사들의 제안을 받아 서울 약수동 성동 교회에서 팀선교부 소속 미국인 선교사 3명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팀선교부는 미국 남침례회 소속이며 극동방송국을 설립한 단체이다. 이전에는 유병언이 극동방송국에서 안수했다고 서술하였으나, 기독교 언론사는 노회 또는 연회가 아니며 당회도 아니다.[3] 당해 평신도 복음 선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한다면 이 역시 일반 선교단체가 목사 안수를 하는 예를 찾기 어렵다. 선교사 개개인이 목사 안수를 준다는 것은 더욱 더 상상할 수 없다. 유병언은 장인과 달리 목사 안수를 받은 적도 없는 셈이다.
이후 유병언은 사업가로 변신하여 1974년 부도 직전의 부실기업인 삼우트레이딩을 채권대신 인수하게 된다. 그리고 1976년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교인들 사이에는 '유 사장'으로 통하기도 했다. 이후 1982년 세모그룹으로 상호를 바꾸었다. 사업을 하는 것과 관련하여서 본인이 주도하는 삼우트레이딩과 주식회사 세모 등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자 교회'라며 '기업이 곧 교회'라는 논리를 폈다고 정동섭 목사가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기독교복음침례회는 이것은 오해고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속죄를 이루어 놓으신 사실을,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며, 특정 개인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든가 기도나 예배라는 교리는 가진 적이 없고, 회사를 통해 해당 교단의 상당수 신도들이 취업하여 함께 일한 사실은 있으나 그외 많은 신도들이 각자 다양한 직종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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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유병언은 오대양 사건에 연루의혹을 받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이와는 무관하고 별건인 이미 수년 전 무혐의 처리 된 적이 있는 상습 사기 혐의로 징역 4년을 살게 된다. 과거 세 번의 검찰 수사 결과에서 오대양 사건과 유병언, 그리고 구원파의 연관성은 확인할수 없었고, 2014년 5월 21일 인천 지방검찰청이 공문을 통해 "당시 수사기록 검토 결과 집단자살이 구원파 측이나 유병언 회장과 관계 있다거나 5공 정권의 비호가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고 재확인 해주면서 다시 한번 보도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세간에는 유병언이 오대양 사건의 배후로서 알려졌고, 이에 대해 본인의 억울함을 밝힌 적도 있다 . #
1997년 자신이 이끄는 세모 그룹이 무너진 이후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복음침례회 내에서 자문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모 그룹이 무너진 지 10여 년만에 수천 억 대의 재산을 다시 확보하고 해외에까지 부동산을 보유했다고 보도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으나, 추후에 이 재산은 개인의 재산이 아닌 대부분 기독교복음침례회 신도들이 만든 영농조합의 재산이었던 것으로 정정보도 되었다. 대부분 유기농 농산물 재배를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
교인끼리의 결혼을 중요시 여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단은 꽤 큰 편이라 전국의 웬만한 도시마다 지교회를 거의 하나씩은 가지고 있으며 외국지교회도 있다. 신도로 확인되지 않으면 조회해 볼 수 있는 자료가 매우 한정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성경 공부와 관련하여서는 기독교복음침례회는 매주 토요일마다 포럼 형태로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년 전국적인 규모로 수련회(수양회)를 하여 거의 모든 교인이 참석하는 성경탐구모임를 주최하는데 규모가 매우 크며 그 안에는 장터가 서기도 한다. 오랫동안 유기농을 고수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고 고급 품질을 선호하고 가격은 비싼 편이다. 안성의 시설 자체는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언론에 언급된 '아방궁'과는 거리가 멀다. 교파 이름에 '침례'가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침례교식 세례를 하는데 온 몸을 물에 집어넣는 침례 방식으로 세례를 준다.
한때 교인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교세가 위축되었다. 현재는 전국 10여 곳 이상의 교회를 운영하며 10000여명의 신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금수원 압수 수색 당시 집결했던 교인수가 천명 남짓이었으며, 또한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에 한국 정부의 교회 탄압을 막아달라고 글을 올린 후 5월 15일까지 지지서명 한사람의 숫자가 8,032명이었으나 마지막 마감때에는 10만명이 넘어서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아마 해외지부 인원이 참가한듯 하다) 이러한 점을 살펴볼 때 관련된 사람들의 숫자는 많으나 수양회에서 배포하는 노트 앞면 자료집의 수양회 등록 인원을 볼때 최고 3만명의 인원을 기록하였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최근에 연속적으로 8000명대를 기록한것을 볼때에 실질적 국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8000이상 10000명 이하로 추측할수 있다.

2.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세간의 주목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금 주목받았고 당시 쏟아져 나온 언론보도들과 이후에 바로 잡혀지는 정정/반론보도들이 이어진다.
참사 당시, 청해진해운의 선원들과 선장이 구원파 신도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논란이 커졌었다. 심지어 선장과 선원들이 사람들을 버려두고 도망친 것도 구원파 신도라는 점과 연계되어 구원받은 자신들은 구원받은 선민이고 다른 이들은 구원받지 않아서 신의 진노를 받아 죽을 자들이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겠느냐라거나, 한번 구원을 받으면 죄를 지어도 된다는 교리가 있다는 루머들이 제기되기도 했다. 내국인들일 경우 신도들만 뽑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부족한 실력의 인원도 선원으로 모집하여 악재가 겹쳤다는 추측도 있었다. KBS 뉴스9 동영상 1분 20초부터
하지만, 추후에 많은 부분들이 정정되었다. 당시 가장 먼저 퇴선했던 세월호 선장 및 승무원들은 모두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신도가 아닌 것으로 알려졌으며, 세월호 선원 중 기독교복음침례회 신도는 의사자로 지정된 정현선 씨 외 1명에 불과했다. 또한, 교인이 아니면 채용을 하지 않는다거나 종교 교육을 통해 교인을 만든 사실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준석 선장 및 이준석 선장의 부인은 기독교복음침례회의 교인이 아니고 직원의 약 10% 남짓만이 신도라고 한다. #
그리고 구원 받은 이후에 어떠한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교리를 가르친 적도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
이는 당시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참사의 구조 책임에 대한 따가운 여론의 질책을 무마하기 위해서, 기독교복음침례회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한 오보인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당시 구조 책임에 대한 여론을 돌리기 위한 청와대의 의도는 이정현 홍보수석과 KBS보도국장과의 녹취 대화에서 확인 할 수 있으며, 세월호 특별조사 위원회에서 발표한 세월호 보도와 구원파 관련 날짜별 보도 횟수 추이를 봐도 확인할 수 있다. #

3. 금수원(錦繡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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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서동대로 5908 (상삼리 1), 마전초등학교 바로 건너편.
경기도 안성시 위치. 정식명칭 기독교복음침례회 안성교회. 통칭 '금수원'이라 불린다. 금수원이라는 이름은 구원파가 땅을 사기 전부터 사용하던 명칭으로, 한자표기는 공식적으로는 錦繡院. 본래 한 영농법인의 농장이었는데 수양회장으로 쓰기 위해 매입한 장소라고 한다. [4]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03
전체 면적은 23만 제곱미터..구원파에서 구입하기 전에는 조경 목적의 농장이었고 이후에 교회 건물들과 농사를 위한 비닐하우스, 건조장, 양식장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또한 금수원 내에는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초창기 인물이자 유병언 회장의 장인인 권신찬의 묘역이 있다.[5]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449&aid=0000022131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01161337297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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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검찰과 경찰을 막고 농성할 때의 모습. 구원파에서는 여러 차례 성명서와 기자 회견을 통해 입장을 밝혔고 종교탄압을 중단, 공권력의 교회 진입을 반대,불공평 수사의 즉각적 시정을 촉구, 구원파를 살인집단, 테러집단 등으로 근거없이 매도하고 기독교복음침례회와 관련 인사들의 명예를 근거없이 손상시키는 것을 조장하거나 묵인하는 보도지침을 즉각 취소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4/05/15/20140515001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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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내부를 공개했을 때의 기자회견 세팅. 구원파 측에서 5월 18일 내부를 일부 공개하였다.
이 와중에
등은 출입이 제한되었다. 이때는 평화로운 모습만 보여줬는데 종교시설은 제외하고 농/목축 시설만 보여줘서 그런거다. 미안하지만 사실 그게 끝이 맞다 기자회견장 옆에 큰 건물은 그냥 강당이고 정식명칭은 대강당이다. 강당 내부의 맨앞 거대한 스크린을 제외하면 강당은 별거없다. 여기서 성경 포럼등이 이루어진다 (포럼의 내용은 그냥 성경이고 수양회 기간에 포럼이 끝나면 청소년부에서 박수를 치다가 혼나는 경우가 있다. 박수치는 사유는 포럼이 지루하고 피곤하고 포럼이 끝나면 취침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어른들이 알기때문에 혼낸다) 이외에도 나머지 건물들도 비슷하고 수양회 기간을 제외하면 대강당(안성지부 교회로 쓰인다)을 제외한 나머지 장소는 장터가 열리거나, 창고로 쓰거나, 비어있다. 언론에서 보도한 아방궁과는 거리가 멀다.
금수원내에 유병언외 일부를 제외한 많은 수의 수배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제기되어 검,경의 진입이 논의 되기도 했다. 그러나 거짓이였다
그리고 검찰이 오대양 자살 사건 재판당시의 결과를 다시 확인시킨다는 약속아래 조건부로 검찰을 들여보냈었다. 참고로 결과는 무죄. 유병언은 결과적으로 오대양 사건을 조사하는 것으로 들어가 관련 없는 상습사기 혐의로 4년 징역을 살았고 기독교복음침례회도 그 여파로 오해의 낙인 아래서 오랜 시간을 지냈다.
서울, 수원에서 동아방송예술대학교로 가는 시외버스가 금수원 앞을 지나며, 35번, 37번, 370번, 380번이 금수원 앞에 정차한다. 그렇다고 금수원 앞에서 직접 내릴 생각은 하지 말자. 이로 인해 금수원 압수수색이 진행될 때 38번 국도의 일부구간이 통제되어 동아방송예술대학교 측에서 임시로 셔틀버스를 안성터미널까지 운행하였다.

4. 수사 상황


검찰이 용산구 삼각지에 위치한 구원파의 본부, 그리고 유병언 가의 기업들을 전격 압수 수색을 했다. # 청해진해운을 산하 기업으로 두면서도 선박 관리를 제대로 안 한 것에 덧붙여서, 겨우 10년 만에 수천억대의 자산을 회복한 과정에서 탈세와 불법 증여가 있었던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구원파 교회가 유병언 일가의 건설사 트라이곤코리아에 258억 원을 시중 이자보다 낮은 이자로 장기 대출해준 사실이 포착되어 구원파 역시 주목을 받았다. 종교시설을 압수 수색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인데, 그만큼 수사 당국에서 기독교복음침례회와 세모 그룹 사이의 유착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약 세월호 참사에 구원파의 영향이 직간접적으로 미쳐있다고 한다면 한국판 옴진리교 취급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현재까지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구원파의 연관 관계는 밝혀진 사실이 없다.
유병언 가의 기업들을 전격 압수 수색을 하는 과정에서 유병언의 최측근 참모라며 5명이 밝혀졌는데 5명 모두 나이가 50~70대인 여자다.당시 뉴스보도에 의하면 유병언 구원파 조직원들을 조직하고 도피를 지휘하는 '김엄마'라고 불리는 여성이 존재한다고 전해졌으나, 이 역시도 엄마라는 호칭은 결혼한 여신도들을 편하게 부르는 말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며, 김엄마는 도피 총괄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나중에 정정보도 된 적이 있다. http://news.tf.co.kr/read/life/1530525.htm
2014년 5월 기준으로 유병언과 그의 아들인 유대균은 특경법 위반 혐의로 각각 현상금이 5억, 1억이 걸렸다. 현상금은 세금을 떼지 않고 전액 현찰로 지급된다. 구원파는 세월호 사건의 원인 규명을 위해 세월호사건 진실 규명 포럼을 개최한다며 5억원을 내걸었다. #
2014년 6월에는 구원파 신도가 사회 전반에 분포되어 있어 검,경찰 요직내에서도 유병언 일당을 돕고 있다라는 식의 추측성 보도가 나올 정도로 시국이 불안정한 상황이었다.이 부분 역시 검찰이 수사에 나섰으나 그 결과 사실이라고 확인될만한 근거가 없었음이 확인되었고, 국과수를 통해 유 전 회장의 사망 시점이 확인됨에 따라서 기독교복음침례회에서 유 전 회장의 도피를 조직적으로 도왔던 사실은 없음이 밝혀졌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407312018827680
2014년 7월, 유병언으로 추측되는 사체가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국과수의 부검 결과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사인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가 밝혀진 바 없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7033782 자세한 사항은 유병언/도피기록에서 보도록 하자.
'''6월 11일 D-DAY'''
경찰의 진입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새볔경에 경찰 6천여 명[6] 금수원주위 배치 보도. 정문주위로 여경 50여명이 배치되었으며 이유는 연행시 남성 검,경 성추행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07:40분경 YTN보도 기준 '''
구원파의 공식 입장 발표가 시작되었다. 성명 발표자는 당시 조계웅 대변인.
성명 내용 요약에서 구원파 입장에 따르면 세월호는 금수원과 관련이 없으며 피해자임을 호소했다. 앞서 언급했던 세월호 진실 규명 자금 중 신도들의 모금으로 2억원이 모였다고 발표했으며 5억원이 모이면 진실을 규명하는 자에게 5억원을 지급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그외에는 검찰에 대한 불신을 밝힌 상태이며 국민의 호소를 요구하였다.
5억원이 모일 경우 다음 주 중에 포럼을 개최해서 검찰을 제외하고 논의를 한다는 계획을 세운 상태라고 한다.
'''07:57분경 YTN보도 기준 '''
금수원 진입 작전시 사용되는 영장은 압수수색 영장, 체포 영장이라고 한다.
YTN보도 기준으로 집회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가 장착된 확성기 차량을 사용중이고 범죄자 호송차량이 목격되었으며 경찰 기동대가 거의 진입포인트에 붙어있을 정도였다.
YTN 헤드라인 보도로 경찰 특수차량이 도착하였으며 경찰, 소방헬기가 상공을 선회하였는데 혹시모를 사고를 대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8시 17분 YTN보도 기준 '''
경찰 진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목표는 유병언일당의 신변과 '두엄마' 라고 불리우는 핵심 조력자 체포다.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신분증을 지참한 상태에서 기자의 진입 또한 허락하였다. 경찰 측은 총력전을 벌일 예정으로 보도서 추측되었다.
'''기타 미디어측의 견해, 향후 작전 '''
물리적 충돌이 거의 없었으나 체포대상 외에 일부 신도연행이 있었다. 그 과정중 온건파 신도가 개입돼서 경찰 수사에 협조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디까지 협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유혈사태는 막은 것으로 보인다.
검경은 6월 12날 날이 밝는 대로 금수원내에 수색을 계속할 예정이라고 밝혔으며 혹시모를 유병언의 금수원 잠복을 대비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세월호 진실 규명 세미나'''
예고한데로 6월 15일 세월호 진실 규명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부실한 내용을 걷어내느라 2명만 참가하게 됐다고 한다. 보도 내용으로는 예상외로 상당히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구원파 측은 앞으로 1주마다 집회를 개최하겠다고 한다.
'''6월 15일 채널 A 보도 기준'''
구원파는 어느 정도 정상적인 예배를 하였으며 그와중에 유병언을 제외한 8명의 수배자들이 재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자수한 신엄마의 진술로는 지역 태권도 협회 회원인 자신의 딸과 장남 유대균이 함께 도피중이라고 한다.

5. 비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년이 지난 2021년 2월 2일부터 구원파 비판 글을 신고해 탄압하기 시작했다. 피해사례

6. 기타


1. 언론보도백서를 만들었다. 2014년 4월 16일부터 9월 15일까지 지상파, 종합편성채널, 보도전문채널, 일간지, 인터넷언론 등 310여 곳 언론사에서 쏟아낸 8만 5000여건의 구원파 관련 보도를 전수 조사해 이 중 1만 6000여건에 대해 사실과 다른 내용에 관하여 유례없는 정정 및 반론보도청구에 나섰다. 이러한 내용들이 받아들여졌고 굉장히 많은 정정 및 반론 보도를 받게 되었는데 백서에는 이러한 정정·반론 보도문을 받기까지의 과정이 나와 있다.#
그때 당시 언중위의 조정건수가 다른 연도의 평균보다 7-8배나 높아질 정도였는데 <언론중재> 기고글에는 이에 대해 세월호 사고 보도는 전대미문의 대규모 언론조정 대상이었으며, 언론중재위원회는 물론 언론사도 사상 초유의 경험을 했다며 막대한 규모의 조정폭탄에 대한 1차 책임은 언론사들에 있었고, 언론사들이 직접 취재하지 않은 정보를 기사화해 마구잡이식으로 내보냈다라고 언급되기도 했다. 당시 취재를 하거나 반론만 들었어도 천편일률적인 오보가 수백 건씩 쏟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기사링크

[1] 침례회 참조[2] 참고로 한국 개신교계에서 정통 개신교계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침례교회는 기독교한국침례회(약칭 '기침'), 성서침례교회와 김기동의 베뢰아 신학으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한국침례교회연합(약칭 '한침'), 그리고 한국독립교회및선교단체연합회(약칭 '한독선연' 혹은 '카이캄')에 소속된 침례교회 뿐이다.[3] 회중교회 운동적 전통에서는 개교회, 즉 당회에서 평신도 목사를 세웠다.[4] 금수의 한자는 금수강산할때의 그 금수다. 錦繡園이라는 보도가 많았으나 정정보도되었고, 구원파가 땅을 사기 오래 전부터 붙여진 이름이라 종교적 의미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5] TV조선에서 단독취재하여 장례식과 무덤 사진도 보여준 바 있다. 그 외에도 권신찬 목사의 묘비석 바로 아래에 비밀 토굴이 있다거나 금수원 내에 지하벙커 시설 등이 있다는 말도 있었지만 이 발언을 근거로 검찰이 금수원 진입 당시 음파탐지기, 탐침봉 등의 장비를 동원하여 금수원을 수색한 결과, 지하 시설물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정정보도 된 적이 있다[6] 대부분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