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도
1. 중세 기사 도덕
Chivalry code (영어)
Chevalerie (프랑스어)
Código caballeresco/caballería (스페인어)
caballārius (중세 라틴어)
12~13세기쯤에 발전했던 일련의 행동 규범으로, 비록 단일화된 문서 같은 것은 없지만 후대의 문학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비공식적인 규범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런 기사도 같은 것은 무사들이 지배하는 사회 체계를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때 규범과 도덕이 생기며 더해서 미학적인 특징이 더해지게 된다. 규율과 도덕을 지키는 것이 보다 멋지고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는 것으로 심리적으로 이를 중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기사도나 부시도 같은 것에는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과 규범, 그리고 미적인 관점이 집중되어 만들어진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부시도가 그랬던것처럼, 기사도 또한 제대로 지켜지기는 커녕 정면에서 위반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슬람권에서도 푸트와 (فتوة), 후루시야 (فروسية)라고 이름으로 존재하는 관념인데, 전자가 우리가 아는 문화적, 미학적 코드로서 '기사도'에 더 가깝고 후자는 좀 더 기술적인 의미에서 '기마술'에 가깝다.
1.1. 역사
수많은 분쟁과 정치적 권력싸움으로 10, 11세기 유럽은 불안정한 상황이 되었는데, 그 와중에 교회는 점차적으로 귀족들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교회는 '하느님의 평화운동'을 선포하며, 기사 계급을 교회에 봉사하는 쪽으로 이끌어 나갔다. 기사도라 부르는 생활양식 내지 윤리체계를 등장시킨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기사들의 목적은 신앙의 수호자, 약자들, 즉 과부, 고아, 교회의 방패막이 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문학작품에서 기사들의 이상적인 모습이 나오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기사도는 처음에는 전사들의 단순한 신조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하나의 행동틀로 발전했고, 기사에게 요구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충성과 독실한 신앙, 겸허, 용맹, 사랑, 관용, 그리고 부녀자와 약자보호 등이었다.
이러한 기사도 정신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유럽으로 확산되어 백년전쟁 같은 경우 프랑스와 영국 기사들간의 아름다운(?) 기사도의 일화들을 많이 남겼다. 프랑스의 궁정작가이자 음유시인이었던 장 프루아사르의 프루아사르 연대기에 따르면 정정당당하게 기사와 종자를 뽑아 30대 30으로 편을 갈라서 맞짱을 뜨는가 하면 유명한 30명의 결투, 상대를 죽이지 않고 부상만 입혀서 몸값을 받고 풀어주는등 지금 시각에서 보면 전쟁에서 참으로 신사적인 행동들이 많았다. 물론 급박한 상황이 되면 포로도 학살하고 약탈도 마구 저지르고 다 그나물에 그밥이 되긴 한다.
강인한 무를 숭상함[1][2] 과 동시에 레이디에게 친절하고 명예를 중시하고 그 외 기타 등등... 확실히 개중 몇몇은 지키면 존경받을 만한 것들이기는 하다. 그러나 여기 나온 내용들이 기사도의 모든 것이라 착각하면 곤란한 것이, 중세는 천년이라는 긴 세월이었고 당연히 기사도 또한 시대에 따라 발전해왔다.
다만 이와 동시에 이들이 권력층에 드는 만큼 편의적인 부분도 더해지게 되는데 이런 부분에서 다른 계급-주로 하류계급에게 커다란 폐해를 끼치는 경우가 생겼다. 무력과 권력을 이용해서 약자를 괴롭히는 것은 비열한 짓이지만 신분질서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약자를 희생해서라도 지켜져야 한다. 기사도에서 말하는 레이디는 적어도 동급 혹은 상위 신분의 여성을 의미한다. 집안의 여성이 모욕을 당하면 그건 여성의 명예가 아닌 가부장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간주하여 결투가 이루어지는 등 매우 주관적인 명예이다.
이러한 기사도 정신은 중세 이후 기사 계급 자체가 사라지면서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는 귀족과 같은 상류 계급 전체의 일반적인 도덕 규범으로 바뀌게 된다. 특히 포로나 사신에 대한 대우라던가 장교(귀족)에 대한 존중 같은것은 기사도적 전투 관습의 연장이었다.
1.2. 기사도의 덕목과 오해
'''19세기'''에 거론된 기사도는 다음과 같다.[3]
다만 19세기는 이미 기사의 시대가 아니고, 더군다나 중세가 까이던 시절임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교도(불신자)에 대한 언급은 중세의 정신으로 보자면 상당히 의심스러운데, 예를들어 기사도 문학의 꽃인 샤를마뉴의 12기사 이야기에서는 그리스도교측(샤를마뉴)과 이슬람교측(마르실리우스)이 동맹을 맺어 공동의 적(세리카네 왕 그라다소)에게 맞서기도 하며, 롤랑은 '생판 처음보는 이교도' 타타르왕 아그리칸과 싸울때도 매우 정중하게 대하였다. 심지어 롤랑과 아그리칸은 싸우던 중 밤이 깊어지자 동이트면 다시 싸우자면서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기도 했으며,[5] 더군다나 처음에 롤랑과 아그리칸이 싸움을 시작할때는, 롤랑은 아그리칸이 자신의 손에 죽으면 이교도이기에 천국에 못갈까봐 걱정했을 정도였다.물론 그리스도인이면 기쁘게 죽여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옛 유럽인들이 생각하던 기사도는 '이교도에게마저 자비로운' 롤랑의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11세기 롤랑의 노래에 실린 것을 영어로 번역한 것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중세 까기'의 연장선인지, 기사도를 '폭력 집단의 폭력성이 그리스도교가 섞이면서 순화되어 튀어나온 부산물' 수준으로 해석하는 시선도 있다. 심지어 나무위키 해당문서에서는 과거에 '조폭미화물'이라는 극언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이는 많은 기사가 기사도에서 추구하는 것처럼 정의로운 존재라 보기 어렵다는 것을 그 근거로 한다.
다만 힘을 갖춘 무인들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라는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분명히 그 나름대로의 긍정적 의미가 있으며, 오히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집단 대부분이 규범을 준수하는 경우가 훨씬 드물다. 까놓고 말해서, 조선시대 선비들 대부분이 유교적 덕목의 모델을 완벽히 준수하며 살았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기사도의 의의는 무력을 갖춘 집단에게 도덕적 모델을 제시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군인이 무장하지 않은 자를 공격하거나, 약탈하는건 매우 더러운 행위로 간주됨을 잊어선 안된다.
우리는 중세 세속 귀족 계층의 중심 이념인 기사도가 받은 조롱과 같은, 무지에 바탕을 둔 비판을 경계해야 한다.
한때 위선적이고 시대착오적이라는 조롱을 받았지만, 이제 우리는 기사도적 이상이 당대인들 사이에서 순수하게 수용되었으며 전사들의 훈련과 동기부여, 그리고 사회적 응집력의 원천으로서 유용한 기능을 제공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비록 그러한 이해가 우리를 과거의 이상에 대한 무비판적인 존경으로 이끌거나, 현대의 삶에 부활시키려는 운동으로 이끌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은 낯선 사고방식들을 무지에 근거해 배척하는 실수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Christopher Dyer, ''Standards of Living in the Later Middle Ages''.
2. 스타크래프트 2 해설위원 황영재
전 GomEXP, 현 아프리카TV GSL 해설위원. 황영재 문서 참고. 3번항목과 간접적 연관이 있다.
3. 젝스키스 정규 2집 앨범 타이틀곡
4. 관련 문서
[1] 이게 지나친 나머지 중세 초기에는 문맹을 자랑으로 여겼다거나 하는 등의 부작용을 낳은 것은 별론으로 하자.[2] 1204년 제 4차 십자군 전쟁에서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십자군 기사들은 동로마인들이 용감하게 싸울 줄을 모르고 글만 쓰는 겁쟁이라고 조롱하기 위해서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에서 일부러 글을 쓰는 흉내를 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4차 십자군 전쟁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지키던 동로마 군대는 십자군보다 훨씬 많았지만, 불과 100명의 십자군 기사들이 성벽에 올라가자 겁에 질려 달아날 만큼 나약하고 겁이 많았다(...)[3] Gautier, Léon (1891). Chivalry. / 영어 번역: Henry Frith.[4]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가 싸운 백년전쟁 당시,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고용한 용병부대인 제노아 석궁병들이 영국 장궁병들의 화살을 맞고 후퇴하자, 프랑스 기사들은 제노아 석궁병들한테 달려들어 죽여버렸다. 그들이 적 앞에서 도망친 비열한 겁쟁이여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5] 다만 결국 상황이 악화되어 밤 중에 싸움이 재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