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원(독립운동가)
金圭元.
생몰기간: 1925년 01월 08일[1] / 01월 18일[2] ~ 2002년 1월 16일 (향년 77세)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925년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부산부[3] 에서 태어났다. 일찍 일본으로 유학을 가, 효고현 아마가사키시(尼崎市)에 있는 칸사이학원고등상업학교(關西學院高等商業學校)에 다니던 중 일본인들의 차별과 조선인들의 처참한 생활을 보면서 민족 의식을 키웠다.
1943년 6월 경부터 항일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여 조선총독부 총무국 문서과에 근무하던 친구 서원수에게 “나는 조선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자네도 이에 협력하기 바란다." 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그 해 8월 귀국해서는 그를 직접 만나 독립운동에 힘쓸 것을 격려하였다. 이외에도 부산 해운대 철도원, 아마가사키시에 살고있던 또 다른 친구들에게 “조선 동포의 구제를 위해 조선 청년은 끝까지 노력하자”는 취지의 서신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을 선전, 권유하였다. #
그러다가 1943년 10월 28일 효고현(兵庫縣) 가와니시시((川西市))에 있는 가와니시 항공기 회사 작업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년 뒤 9월 11일 고베 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8.15 광복 이후에는 부산수산대학교 교수와 대한중석 전무를 역임하고 포항제철 창설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 1993년에는 대한민국 정부에게서 항일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2002년 1월 16일 인천 길병원에서 별세하였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 #
친손녀가 전 SBS 아나운서 김민형이다.#
생몰기간: 1925년 01월 08일[1] / 01월 18일[2] ~ 2002년 1월 16일 (향년 77세)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925년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부산부[3] 에서 태어났다. 일찍 일본으로 유학을 가, 효고현 아마가사키시(尼崎市)에 있는 칸사이학원고등상업학교(關西學院高等商業學校)에 다니던 중 일본인들의 차별과 조선인들의 처참한 생활을 보면서 민족 의식을 키웠다.
1943년 6월 경부터 항일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여 조선총독부 총무국 문서과에 근무하던 친구 서원수에게 “나는 조선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자네도 이에 협력하기 바란다." 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그 해 8월 귀국해서는 그를 직접 만나 독립운동에 힘쓸 것을 격려하였다. 이외에도 부산 해운대 철도원, 아마가사키시에 살고있던 또 다른 친구들에게 “조선 동포의 구제를 위해 조선 청년은 끝까지 노력하자”는 취지의 서신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을 선전, 권유하였다. #
그러다가 1943년 10월 28일 효고현(兵庫縣) 가와니시시((川西市))에 있는 가와니시 항공기 회사 작업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년 뒤 9월 11일 고베 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8.15 광복 이후에는 부산수산대학교 교수와 대한중석 전무를 역임하고 포항제철 창설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 1993년에는 대한민국 정부에게서 항일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2002년 1월 16일 인천 길병원에서 별세하였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 #
친손녀가 전 SBS 아나운서 김민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