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 경찰

 


1. 개요
2. 계급
3. 출판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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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의 경찰관. 세이난 전쟁에 참전한 경찰관들. 그 당시 경찰은 일본군(신식 군대)의 별동대로 간주되어 같이 참전한 적도 있다.

1. 개요


일본 제국 시절의 보통경찰. 내무성 산하의 기관이었다.
메이지 유신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면서 각 번은 번 소속의 군대에 치안을 맡겼는데 이들은 군인이었지 경찰은 아니었다. 곧이어 사츠마 출신의 카와지 토시요시(川路 利良, 1834-1879)는 서유럽을 방문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보통경찰에 감탄했다. 그는 귀국한 직후에 프랑스 경찰의 관제를 기반으로 보통경찰을 창설했는데, 1872년에 설립한 사법성의 경보료(警保寮)를 1874년에 내무성의 경보국(警保局)으로 개편하면서 영국의 런던광역경찰청을 벤치마킹해 내무성 직속의 경시청을 창설했다.
일본 제국의 보통경찰은 프랑스 제3공화국독일 제2제국경찰행정법을 본받아 내무성 직할의 경보국과 도쿄 시내의 경시청에서 근무하면서 내무대신에게 복종하는 중앙경찰 및 도도부현을 다스리는 현청에서 근무하면서 현지사에게 복종하는 지방경찰로 인사체계가 분리되어 있었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민정문관이 XX군수로 승진한 뒤에 XX경찰서장으로 부임하는 순환근무도 흔했다. 당연히 일본 본토의 현청 직제를 모방하여 조선총독부의 13개 도청에서는 도지사의 지휘를 받는 5개의 부국(경찰부, 내무부, 재무부, 농상부, 광공부)이 설치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일제시대의 한반도에서 경기도청의 경찰부는 지금의 지방경찰청(행정자치부 직할의 광역경찰청)과 전혀 다른 직제로서 경기도청 직할의 경찰담당 부국에 불과했다.
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은 보통경찰의 1개 부서로서 내무성 경보국(일본 본토)과 총독부 경무국(일제강점기 조선대만)의 지령을 따랐다. 게다가 일본 제국의 보통경찰은 프랑스의 법제를 본받았기 때문에 치안 유지라는 기능을 공유한 일본군 헌병과 경쟁하거나 대립했으며, 일본 육군일본 해군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1933년에 일어난 오사카 고스톱 사건은 아주 특별한 사건으로 평가되는데, 내무성의 보통경찰이 육군성의 장교단에게 전혀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본토의 일본인들과 조선총독부의 조선인들과 대만총독부본성인들은 제1코스(순사보→순사→순사장→순사부장→경부보→경부)와 제2코스(헌병대 부사관→순사부장→경부보→경부→경시→군수)와 제3코스(제국대학고등문관시험→경부→경시→경시정→총독부 사무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최소한 20년 이상을 경찰관으로 근무한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 제국이 패전한 뒤에 연합군 최고사령부일본 제국의 내무성을 해체하면서 기존의 보통경찰(경보국과 경시청도도부현청의 경찰부)을 모두 폐지하고, 시정촌 공안위원회의 자치경찰로서 오늘날의 일본 경찰을 새로 창설했다.

2. 계급


  • 경무국장(警務局長): 일본인만 임명되는 칙임관이자 정무직이다. 경시정과 민정문관 및 일본 육군장군일본 해군제독을 임명하여 파견했다.
  • 경시정(警視正): 현대 한국의 경무관과 똑같은 기능의 주임관. 내무성 경보국과 도쿄 경시청조선총독부 경무국과 대만총독부 경무국의 과장과 사무관 및 경무관과 경무관보를 맡았거나 47개 도도부현청(본토)과 가라후토청(사할린) 및 13개 도청(한반도)과 5개 주청(대만섬)의 경찰부장으로 근무했다. 내무성 경보국과 도쿄 경시청 및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대만총독부 경무국에서 근무하는 국장과 과장은 경부로 부임하여 연속으로 승진한 일본인 경시정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민정관청에서 전근한 일본인 민정문관도[1] 있었다. 조선인 경찰서장들 가운데 경시정으로 승진한 사람은 구연수(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경무관), ___(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경무관보), 최경진(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사무관), 윤종화(황해도청의 경찰부장) 뿐이고, 나머지는 보통경찰 계통을 아예 벗어나 XX군수로 수평이동해 XX도청의 XX부장으로 승진한 다음에 도지사와 도참여관 및 총독부 사무관과 중추원 참의로서 정년퇴직을 맞이했다.
  • 경시(警視): 현대 한국의 총경에 해당하며 주임관 4등~주임관 5등[2]에 해당하는 고등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면 경부로 임용한 뒤에 경력을 쌓아 경시로 승진했다.[3] 일본인 경시는 각 도청의 경찰부에서 경무과장(도청의 인사를 관장)과 고등경찰과장을 맡을 수가 있었지만, 조선인 경시는 차별로 인해 각 도청의 경찰부에서 보안과장과 형사과장과 위생과장 및 경찰관강습소장을 재임하거나 경찰서장으로 부임한 것이 보통이었고, 아주 가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사무관으로 승진하거나 매우 드물게 각 도청의 경찰부에서 고등경찰과장을 맡은 케이스도 있었다. 1945년 해방 당시 조선에서 일본인 48명과 조선인 21명 밖에 없었던 고위직이다. 일본 제국의 높으신 분들은 직렬의 구별을 중시하지 않았으며, 해마다 경시(지방경찰)→군수(민정문관)로 전근하거나 군수(민정문관)→경시(지방경찰)로 전근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일본 총영사관의 부영사로 외국에 파견한 조선인 경시가 받은 월급은 예전에 조선에서 근무하면서 받은 월급의 3배였다.
  • 경찰관강습소 교수: 주4~주8
  • 경부(警部): 현대 한국의 경감에 해당. 대개 판임관의 일종이나, 인사적체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승진 대신 고등관 대우를 하는 고등관 경부(현대 한국의 경정과 동급)로 대우하기도 했다. 일본인 경부는 경찰서장을 맡았으나, 조선인은 1933년까지 경찰서장에 보직되지 못했다. 총 10여명의 조선인이 경찰서장에 보직되었다. 경부에서 경시로 승진, 경찰직 군수로 승진, 고등관 경부로 잔류의 3가지 코스가 있었다. 1945년 해방 시점에서 일본인 433명 조선인 105명밖에 없었던 자리다.
  • 경부보(警部補): 판임관. 현대 한국의 경위에 해당. 여기서부터는 경찰 간부에 해당한다. 1945년 해방 기준 일본인 790명 조선인 220명이 재직중이었다.
  • 경찰관강습소 조교수, 경찰관강습소 서기: 판임관.
  • 순사부장(巡査部長): 판임 대우. 현대 한국의 경사에 해당. 보통학교 졸 학력밖에 없다면 경부고시를 통과해야 승진했다. 조선인의 경우 경찰서 주임을 맡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극소수가 주재소 수석을 맡기 시작했다.
  • 순사(巡査): 판임 대우. 현대 한국의 순경에 해당. 이들은 조선인을 현장에서 직접 탄압했으므로 사회적 인식이 나빴지만 경쟁률이 높았다. 1926~1937년 사이에는 10:1~20:1의 경쟁률을 보였다.[4] 80%의 조선인 순사가 보통학교 졸이었기에 학력 미달로 인해 판임관이 될 수 있는 기본 자격이 없었고, 순사부장 시험에 통과해야 승진할 수 있었다.
  • 순사보(巡査補): 고원. 1919년 이후 폐지되고 전원 순사로 변경되었다.[5] 헌병보조원과 동격. 조선대만에서 조선인 부역자들과 본성인 부역자들은 대부분 이 계급이었다.
참고로, 관리는 고등관(친임관[6], 칙임관[7], 주임관[8])과 판임관[9]으로 나뉜다. 고원은 임시직이거나 수습직이거나 아니면 신분보장이 되지 않거나 하는 관리로 관공서에서 잡무를 보거나, 관등이 인정되지 않는 징병된 사병이 이에 해당된다.[10] 일본 경찰의 경우 경부~경부보는 판임관이며, 그 이상은 고등관, 그 이하는 판임 대우이다. 참고로 일본군대에서 사병은 고원 대우, 하사관은 판임관 대우, 소위 이상 장교는 고등관이다. 관공서에서는 군수 이상이 고등관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친임관 - 국무대신, 총독, 육해군대장
칙임관 - 부현지사, 중장~소장, 경시총감
주임관 - 군수, 소위~대좌, 경시, 전옥(형무소장)
판임관 - 면서기, 하사관, 경부, 경부보, 간수장
고원 - 한병 상등병, 순사부장/순사장/순사, 간수부장/간수
용인 - 졸병, 순사보조원, 헌병보조원, 잡일꾼

3. 출판경찰


일본 제국의 내무성에서 경보국(警保局)의 도서과(검열과)는 각종 신문, 잡지, 단행본, 격문 등을 검열했으며 외국에서 발행되어 일본 제국의 본토와 식민지에 반입되는 간행물도 검열했다. 이들은 1928년부터 1930년대 말까지 '조선출판경찰월보'를 간행했는데, 무슨 출판물을 어떤 이유로 검열했는지 등에 대해 적어 놓아 현대 사가들에게 귀중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다. 예를 들어 방정환이 발행하던 잡지에서 아동들을 위해 세계 각국에 대해 소개하는 특집기사가 실렸는데, 그 중 '일본은 본국의 면적이 14,371평방리, ...로 우리 조선의 약 2배가 된다고 한다."는 대목을 삭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조선'''이라는 대목 때문이다.[11]
[1] 도쿄제국대학법학부를 졸업한 도야마 오사무는 조선총독부에 취직했는데, 체신국과 식산국에서 속관으로 근무했으며, 함경북도 산업부장→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보안과장 (31~34세 때)→조선총독부 전매국의 경리과장→함경북도 산업부장→전라북도 내무부장→부산부윤 등의 다양한 보직을 맡았다.[2] 서류상으로는 주4~주8[3] 현대에 제1종 국가공무원 시험 출신의 일본 경찰관은 경부보부터 시작하며 1년간 아무 사고가 없이 있으면 경부로 자동승진한다.[4] 참고자료. 참고로 현대 한국의 순경(남) 경쟁률은 38:1 정도다.[5] 참고자료: 장신, 조선총독부의 경찰 인사와 조선인 경찰(역사문제연구소), 178~180p[6] 천황이 '''친'''히 '''임'''명하는 관직, 즉 최고위관직.[7] 천황의 '''칙'''명을 받아 총리가 '''임'''명하는 관직, 즉 고위관직.[8] 총리가 천황에게 상'''주'''를 올려 '''임'''명을 허락받는 관직, 즉 중간관직.[9] 총리의 '''판'''단만으로 '''임'''명하는 관직, 즉 하급관직.[10] 지금 우리식으로 따지면 무기계약직 되기 전의 계약직 관공서 사무원들같은 건데, 일제시대의 고원이라는 건 다양한 모습이라서 일률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일테면 보통문관시험 합격자가 판임관으로 정식 임명이 되기 전에 고원 신분으로 일하기도 했고 필요한 인원들을 고원으로 뽑았다가 정식 발령을 내주기도 했다. 어쨌던 고원은 그래도 대체로 글 알고 펜대 굴려가며 일하는 인원이 주였고, 관공서에서 육체노동같은 잡일을 하는 인원들은 용인이라고 해서 고원보다 취급이 더 안 좋았다.[11] 자세한 내용은 논문 '조선출판경찰월보 에 나타난 문학작품 검열양상 연구' 및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공개한 조선출판경찰월보 원문 참조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