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수(1899)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남수는 1899년 2월 22일 경상북도 예안군 읍내면 오천리(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군자마을에서 광산 김씨 예안파 차종손인 아버지 김영도(金永燾)와 어머니 풍산 류씨 류치영(柳致榮)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안동의 명문가인 광산 김씨 예안파의 후손으로, 예안 입향조 생원 김효로(金孝盧)의 차남 김수(金綏)의 직계 종손이다.[5]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으며 류인식과 김동삼 등이 세운 최초의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와 경성부 중동학교에 재학했다.
1919년 예안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참여한 그는 1920년부터 안동지역에서 안동청년회에 참가하고 동아일보 안동지국 총무로 활약하는 등 사회운동에 참가했다. 1920년 9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안동지회 설립에 적극 참가하여, 편집부 간사로 활약하였다.
이후 상경한 그는 동향 출신인 김재봉·권오설·이준태(李準泰) 등과 함께 무산자동맹회를 결성했으며, 1922년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1923년 4월에는 동 연맹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6월 경성공무공장 여공 파업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경성고무 여공 동맹파업의 전말'이란 보도문서를 작성하고, 78개 노동단체에 발송했다가 체포돼 벌금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 해에 조선노동연맹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돼 활동했다.
1923년 11월, 그는 안동으로 내려와 양반지주 출신들인 이준태·권오설·안상길 등과 더불어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했다. 1925년 1월에 청년운동단체들을 지도하고 여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화성회를 조직하는데 앞장섰고, 상무집행위원을 맡아 주도인물이 됐다.
그리고 도산서원에서 소작료 납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소작인들을 구타하자 소작투쟁 차원에서 도산서원 철폐운동을 벌였다. 또 그해 4월에는 화요회가 계획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경남지방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런데 8월 9∼10일 이틀 동안 친일·극우 인물들이 형평사 예천지회 사무소를 파괴하고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이때 그는 조선일보 특파원으로서 그 전말을 연일 보도해 형평운동에 대한 전국적 지원을 이끌어 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안동청년연맹의 임시의장으로서 조직을 결성하고, '국제청년데이의 유래'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기도 했다. 또한 노동운동의 연장선에서 1925년 10월에 안동노우회를 결성했는데, 여기에서 김남수는 창립총회의 사회를 맡았다. 또 1925년 11월에는 기자들의 모임인 안동기우단을, 다음해 12월에는 안동기자단을 결성했다.
그 후 제3차 조선공산당에서 핵심간부로 활동하던 김남수는 1928년 9월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폐병에다가 '정신이상설'이 신문에 보도되는 등 감옥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또 1939년에는 '사문서위조행사'라는 이름 아래 다시 체포돼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45년 3월 22일에 사망했다.
김남수는 사회주의 운동을 한 경력 때문에 반공 정서가 지배적이던 대한민국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고, 광산 김씨 집안에서도 도산서원 철폐운동을 전개한 것 때문에 오랜 세월 외면받았다. 그러다 2005년에서야 그의 독립운동 행적이 밝혀지면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으며, 2008년 그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