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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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성일(金成一)은 1897년 4월 14일 평안북도 철산군 고성면 동부동(현 철산군 철산읍)에서 태어났다. 1911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3, 4년간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고학하였다.
1916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펑톈에서 독립의용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1920년경 용천군 읍동면 사악동(현 피현군 양책노동자구)으로 이주하였다. 1920년 10월 26일경 용천군에서 박운죽의 권유로 대한독립보합단(大韓獨立普合團)에 가입하였고, 같은 달 28일경 그에게서 폭탄 두 개와 군자금 모집 영수증 용지 및 경고문 등을 받아 보관하는 등 단원들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같은 해 11월 7일경에는 박운석·박초식·박운죽 등과 용천군 읍동면 건룡동·동산동에서 군자금을 모집했고, 그리고 12월 9일경 읍동면 사악동에서 재차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후 출자자를 만나 정미소를 경영하기 시작했으나, 곧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1921년 4월 25일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폭발물취체령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했으나, 같은 해 6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서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중국 상하이로 이주하여 상업에 종사했는데, 이때 김구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1932년 4월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윤봉길 의사와 함께 체포되어 4개월간 고문을 받았고, 1933년 봄 일제로부터 퇴거명령을 받아 귀국하였다.
이후 만주로 다시 건너가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7년 9월 베이징으로 이주하여 동직문(東直門) 서중가(西中街)[3] 에 거주하면서 진흥공사(震興公司) 경리로 근무했다.#
8.15 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서울특별시와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 등지에 거주하였으며, 1968년 별세하였다.
201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
김성일은 만주·내몽골 일대를 전전하며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이 태어난 곳의 지명을 이름으로 지어줬다.
장남은 베이징에서 태어나 이름이 김북경(金北京)[4] 이며, 차남은 장충동에서 태어나 김장충(金奬忠)[5] 으로, 3남은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현 아산시 온양동)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김온양(金溫陽)으로 지었다.
또 딸들의 이름 역시 내몽골 자치구의 카이루(開魯)현[6] 과 퉁랴오(通遼)시의 이름을 따서 각각 '김개로(金開魯)'·'김통료(金通遼)로 지었으며, 막내 딸의 경우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김상해(金上海)'로 지었다고 한다.#
이중 막내 아들 김온양의 차남, 즉 손자 중 한 명이 배우 김지석(金知碩)[7] 이다. 차남 김장충의 아들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김런던(金런던, London Kim)'이라고 하며, 김지석의 큰형은 출생지가 신사동이어서 본명이 '김신사(金新沙)'였는데, 세 살 때 김반석(金盤石)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김지석의 경우 부활절에 태어나 이름이 '김부활(金復活)'이 될 뻔 했으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평범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