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근(씨름)
[clearfix]
1. 소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씨름 선수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2. 생애
1911년?[1]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함흥의 영생학교[2] 를 나와 도쿄의 체조학교에 유학했다. 귀국하여 1년 가량 실업에 종사하다가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다.[3]
17세부터 씨름 대회에 참가했는데, 함남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선수권을 차지했고, 1927년 9월에 결성된 조선씨름협회가 주관한 전조선 씨름대회에서 1928년부터 8차례 우승했다. 이외에도 중앙기독교청년회가 개최한 전조선대회에 출장하여 우승하고, 여름방학에는 방방곡곡에서 열리는 씨름대회에 참가하여 모두 우승했다.
서울의 조선무도관에 적을 두고 강낙원(姜樂遠) 사범의 지도를 받았으며 유도와 권투도 연마했다.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일본군 사병으로 복무했다고 한다.[4] 다만 국민방위군 사건 재판중에는 일등병 경험도 없다는 말이 나왔고, 다른 책에도 어떤 군경력도 없는자가 하루 아침에 준장이 되었다고 나온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이 대동청년단을 방문했을 때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는 그를 보고 간부로 발탁했다는 믿지 못할 일화가 있다.[5] 군 경력이 전혀 없던 그가 준장 계급의 국민방위군 사령관이 되었고, 결국 10만명의 장정을 굶거죽거나 얼어죽게 만든 희대의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공개 총살형에 처해졌다.[6][7]
김윤근은 일제강점기 때, 지원병 출신으로 두주불사로도 유명했다.[8] 또한 김윤근은 입으로는 ‘애국, 반공, 군인과 군대의 신성한 의무’를 외쳤지만, “병사들을 개패듯”하는 무지막지한 인간이었다.[9]
[1] 1935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당시 25세라고 서술되었다.[2] 1907년 선교사에 의해 함흥에 설립된 중등학교로 1945년 해체되었다.[3] 씨름대회 입상 기록에서도 소속이 연전(延專)으로 돼 있다.[4]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5쪽[5] 사실 이승만은 남자답고 씩씩하고 특히 '''목소리가 우렁찬 사람'''을 굉장히 좋아했고 그래서 목소리가 우렁찬 사람은 보는 족족 발탁했는데 곽영주도 그렇게 발탁되어 순경에서 경무관이라는 거짓말을 하여 특진을 했다. 이는 군대로 따지면 '''하사가 준장이 된 것'''이다.[6] 이를 두고 억울하다고 두둔하는 의견도 있으나, 김윤근은 국민방위군 병사들이 굶어죽고 얼어죽는 상태인 1951년 1월 20일의 기자회견에서 "백만 국민병은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일부 불순 세력들이 국민방위군 편성에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음은 유감이다."라고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4쪽[7] 국민방위군 사건을 다룬 밀리터리 실패열전 2권에선 역사에 유래가 없는 만행이라며 김윤근을 '''"한국의 무타구치 렌야"'''라고 깠다.[8] 출처: 부산일보사/ 비화 임시수도 천일/ 1983/ 159쪽[9] 출처: 리영희/ 역정-나의 청년시대/ 창작과비평사/ 1996/ 1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