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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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은 1947년 9월 21일에 결성된 청년운동단체이다. 대동청년단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이 설립'''하였으며 설립목적은 모든 청년운동단체들의 통합이였다. 원래 지청천은 광복군을 이끌고 국내에 진주하려하였으나 연합군의 반대로 무산되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지청천은 우선 국내의 오광선에게 광복군의 국내 지대 설립을 명령한다. 우선 국내 32개 단체가 통합에 호응하여 대동청년단준비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이렇게 대동청년단의 기원이 시작되었다.
1948년 이승만의 청년단체 강제통합 명령에 따라 '대동청년단'도 대한청년단에 흡수, 통합하게 된다. '''대한청년단은 이후 자유당의 기원 세력 중 하나로 창당에 참여'''한다. 때문에 크게 보면 '''대동청년단도 자유당의 기원 세력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민주국민당에 합류한 지청천을 따르던 대청계와는 상관이 없다.[2]
한편 대동청년단의 중심 인물인 지청천은 대한국민당(1948년)에 참여한다. 당시 대한국민당(1948년)은 대한여자국민당의 임영신, 대동청년단의 지청천 등이 참여한 상태였다. 이후 대한국민당(1948년)의 핵심 인물이었던 신익희 등은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되고,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었던 한민당과 손을 잡아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게 된다. 1949년 11월 12일, 일부 의원들이 대한국민당(1949년)을 부활시키며 이승만을 외곽에서 지원하였으나 민주국민당과는 상관이 없다.
실질적으로 당수였던 지청천이 병력들[3] 이 아닌 정치세력을 이끌고 대한국민당(1948년)과 민주국민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때문에 '''대동청년단은 민주국민당의 기원 중 하나'''로 볼 수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대동청년단
한국위키-대동청년단
디지털양산문화대전-대동청년단
우익청년단의 통합과 갈등 1947년 ~19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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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은 1947년 9월 21일에 결성된 청년운동단체이다. 대동청년단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이 설립'''하였으며 설립목적은 모든 청년운동단체들의 통합이였다. 원래 지청천은 광복군을 이끌고 국내에 진주하려하였으나 연합군의 반대로 무산되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지청천은 우선 국내의 오광선에게 광복군의 국내 지대 설립을 명령한다. 우선 국내 32개 단체가 통합에 호응하여 대동청년단준비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이렇게 대동청년단의 기원이 시작되었다.
2. 대한청년단으로 강제 흡수 명령과 다른 당으로 이동
1948년 이승만의 청년단체 강제통합 명령에 따라 '대동청년단'도 대한청년단에 흡수, 통합하게 된다. '''대한청년단은 이후 자유당의 기원 세력 중 하나로 창당에 참여'''한다. 때문에 크게 보면 '''대동청년단도 자유당의 기원 세력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민주국민당에 합류한 지청천을 따르던 대청계와는 상관이 없다.[2]
한편 대동청년단의 중심 인물인 지청천은 대한국민당(1948년)에 참여한다. 당시 대한국민당(1948년)은 대한여자국민당의 임영신, 대동청년단의 지청천 등이 참여한 상태였다. 이후 대한국민당(1948년)의 핵심 인물이었던 신익희 등은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되고,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었던 한민당과 손을 잡아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게 된다. 1949년 11월 12일, 일부 의원들이 대한국민당(1949년)을 부활시키며 이승만을 외곽에서 지원하였으나 민주국민당과는 상관이 없다.
실질적으로 당수였던 지청천이 병력들[3] 이 아닌 정치세력을 이끌고 대한국민당(1948년)과 민주국민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때문에 '''대동청년단은 민주국민당의 기원 중 하나'''로 볼 수도 있다.
3. 역대 선거 결과
-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 12/198 7.88%
4. 대동청년단의 주요 인물
4.1. 준비위원회
4.2. 주요 보직 선출
5. 관련 정치단체
- 성인회
6. 관련 문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대동청년단
한국위키-대동청년단
디지털양산문화대전-대동청년단
우익청년단의 통합과 갈등 1947년 ~194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