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주

 


郭永周
1924년 ~ 19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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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하야 이후에도 계속해서 경호하던 모습
사형 집행 직전 최후의 모습


1. 개요


한국의 전직 경찰. 본관은 현풍(玄風). 지금의 대통령경호실장격인 경무대경찰서장이었으며, 이승만의 신임을 등에 업고 막강한 권력을 남용하여 월권을 행사하고 시민들을 탄압하였다. 최종 계급은 경무관이었다.

2. 생애


곽영주는 1924년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율현리(현 이천시 율현동)[1]#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경성공립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병기 병과 군조에까지 올랐다.#
8.15 광복 이후에는 고향 선배인 이정재[2]의 도움으로 수도경찰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 대통령 당시 이승만의 눈에 띄어 이승만의 경호일을 보게 되었다.
이때 뽑힌 일화가 있는데 당시 곽영주는 수도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경찰서의 보초로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승만이 경찰서를 방문한 시간에 문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곽영주를 인상깊게 보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기준으론 엄청난 덩치와[3] 우렁찬 목소리, 강렬한 마스크가 눈에 확 띄었고, 이승만은 곽영주가 자기 소개를 하면서 '곽영주라 하옵니다'라고 한 궁중어투가 맘에 들었던지 경무대 경호원으로 특채되었다.
이후 그는 이승만의 총애를 받고 1950년 경무대경찰서경위로 승진했으며, 1951년 경무대경찰서의 경감으로 승진했는데, 1955년에는 내무부 치안국의 경무과에 전보됨과 동시에 총경에 올랐다. 이듬해인 1956년에는 경무대경찰서장에 임명되었으며, 1957년에는 치안국으로 다시 전보되었다가 경무관에 승진하는 등 줄곧 출세가도를 달렸다.
물론 지금의 경찰공무원 근속승진 운영규칙과 당시 운영규칙은 판이하게 다르겠지만, 총경에서 경무관에 오르는 데도 보통 7년이 걸리는데, 곽영주는 이승만의 총애를 등에 업고 경위에서 경무관까지 7년이 걸렸으니 그야말로 파격 중에서도 파격인사라 할 수 있겠다. 허나 이런 곽영주의 승진은 공무원 사회의 인사원칙을 깡그리 무시하는 일이었고, 그 결과 공무원들 사이에선 '''대통령에게 무조건 아부해야만 출세한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을 심어주는 부작용도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곽영주가 파격 진급해 그의 영향력을 사회에 유익한 방향으로 행사했으면 그래도 다행이었겠으나, 더 큰 문제는 이후 곽영주의 행보였다. 곽영주는 이승만의 빽을 믿고 대통령 경호 임무를 넘어서는 월권을 행사하며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한다. 우선 이정재에 대한 은혜를 갚는답시고 깡패가 된 그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든 무조건 그의 편을 들어줬다. 그 결과 이정재는 경찰에 신고당해도 거의 체포당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신고한 사람이 잡혀가는 황당한 경우마저 발생하기도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개 대통령 경호실장이[4] 행정부에 사사건건 참견을 해대는 심각한 수준의 월권 행위를 저지른 셈으로, 이때 곽영주가 얼마나 설치고 다녔는지 '''부부통령(副副統領)''' 내지는 '''곽박사'''라는 별명도 얻었을 정도였다. 재미있는 건 이런 안하무인적인 월권 행태는 훗날의 유신 시절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도 충실히(?) 계승한다.
곽영주는 군 장교의 진급 심사에도 참견했는데, 자기 나름대론 자기 기준선에서 불온분자 소탕에 적극적이었는지 해당 장교의 소양보다는 당사자나 가족의 사상 관계를 캐묻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태클 걸렸던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김익렬박정희. 김익렬은 4.3 사건 당시 무분별한 경찰의 진압에 회의를 느끼고 빨치산과 일시 휴전을 맺은 탓에 '''공개장소에서 면박당해서 끌려나갔고''', 결국 1950년대 내내 찬밥 신세였다. 박정희는 형 박상희가 사회주의자에 형이 죽은 후 남로당에 가입한 경력이 있으니 당연히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김정렬 당시 국방부 장관이나 백선엽이 찾아와서 심사위원들을 일일이 설득시켜 기어이 진급시켜줬다고.[5] 그런데 곽영주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드러내도 먹히지 않자 빨갱이 색출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는지, 박정희와 김호남의 이혼 경력을 어디서 알아냈는지 들고 와 그의 여자 관계가 굉장히 문란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하자 곽영주의 앞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그는 시민들의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민들을 무력 진압'''했는데, 서대문 앞 총격사건이나 이기붕 자택(현재의 4.19 도서관 터) 발포 사건은 그의 직접 명령에 의한 것. 허나 이후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자 곽영주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잃게 되었고, 그대로 체포되어 장면 정권하에서 벌어진 재판 결과 단기형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 5.16 군사정변으로 혁명재판이 벌어지자 그는 다시 체포되었는데, 묘하게도 같은 혐의로 같이 체포된 홍진기[6]와 유충렬[7]이 사형 선고 후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20년으로 감형된 것과 달리 곽영주는 그대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결국 곽영주는 최인규, 이정재, 임화수, 신정식과 나란히 1961년 '''교수형을 당했다'''. 당연히 호사가들 사이에선 과거 곽영주와 박정희의 갈등을 지적하며 곽이 박의 원한을 사서 사형을 당했다는 말도 나왔으나, 사실 이걸 빼더라도 사형당해도 싼 사고들을[8] 치긴 했다. 굳이 문제라면 쿠데타군이 정권 유지용으로 정적 제거를 한 모양새라는 게 문제였을 뿐.
1995년 월간조선 10월호에 그가 최인규, 이정재, 임화수, 조용수, 최백근, 신정식, 한필국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을 때의 사진이 모두 공개되었다.

3. 평가


1979년 10.26 사건 당시 화장실로 도망갔던 차지철과 달리 끝까지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은 확고해서 이승만이 하야한 후에도 변함없이 옆을 지켰다. 하지만 그 충성심은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아니라 조선시대 군왕에게 바치는 것이었고 이런 시대착오적인 면모는 곧 이승만의 눈을 가리고 권력 남용과 시민 탄압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4.19 혁명 이후 구속된 기사에 의하면 곽영주는 깡패를 두둔한 적이 없고 부패도 일삼지 않았다며 끝까지 진지한 반성도 안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런 업보인지 4.19 혁명 이후 그의 장남(곽승근)이 유괴되는 씁쓸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9]
2010년 오마이뉴스가 곽영주의 손자 곽병민씨를 인터뷰했는데, 자기 조상의 흑역사를 어떻게든 옹호하려고 노력하는 다른 자유당 정권 인사들의 후손들과 달리 조부의 과오를 인정하면서 곽영주의 흑화 원인에 대해 아래와 같은 사견을 밝혔다.

'''할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을 충성으로 모시는 신하였다. 사실 그러한 인식이 문제였다. 지도자보다는 국가를 더 생각했어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이승만에 대한 충성 = 국가에 대한 충성' 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인식에서 역사와의 어긋남이 시작된 게 아닐까? 할아버지가 지난 역사에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이승만 대통령과 워낙 각별한 관계였기에 월권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위를 하지 않았을까?'''


4. 미디어



4.1. 제1공화국


대장금의 내금위장, 제5공화국에서 이규광(전두환의 처삼촌) 역을 맡았던 임문수가 연기했다.

4.2. 제2공화국


이동신이 연기했다. 첫 등장시부터 이승만에게 궁중어투를 사용해 해설자에게 제대로 까였다. 함께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보좌하는 비서관 박찬일과 경쟁, 암투를 벌이는 사이로 묘사된다.
4.19 혁명이 발발한 이후엔 계엄사령관이 된 송요찬을 포섭하려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친하게 지내던 깡패 임화수, 유지광이 계엄군에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송요찬에게 고대생 습격 사건은 시위 때문에 피해 본 노점상들이 빡쳐서 벌인 일일 뿐이라는 식으로 뻘소리를 해대면서 이들의 체포를 막으려 하지만 제대로 까임만 당한다.
결국 이승만이 하야하자 분노를 터뜨리고 허정 과도정부가 수립된 이후 경무대 발포 사건 책임자로 구속당한다.

4.3. 무풍지대


이운우[11]가 연기했다.

4.4. 야인시대


곽영주(야인시대) 항목 참조.
[1] 현풍 곽씨 집성촌이다. 묘소도 이곳에 있다고 한다.[2] 이천시 호법면 유산리 출신.[3] 1950년대에 곽영주의 신장은 무려 180cm를 훌쩍 넘었다고 한다. 전성기 김두한이 키 180cm 정도에, 몸무게 90kg이었고, 씨름꾼 출신 이정재도 180cm 근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거구. 이승만도 당시 기준으로는 꽤 장신이였는데 위의 사진을 보면 곽영주가 머리 하나는 더 나와있다. [4] 사실 곽영주가 한 짓들이 워낙 심해서 그렇지 그 시절에는 경호실장도 상당한 권력을 가진 위치다. 대통령,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대통령비서실장을 제외하면 경호실장보다 권력이 강한 행정공무원은 딱히 없다고 보면 된다.[5]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해 일본육사에 편입했고, 해방후 광복군 평진지대 중대장을 복무했기 때문에 창군기 국군을 구성한 3개 파벌(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인맥을 모두 활용할 수 있었다.[6] 조봉암을 사형시킨 법무장관이자 중앙일보의 창업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홍석조 BGF리테일 회장, 홍라희 리움미술관장의 아버지이다. 이병철과는 사돈이자 이건희의 장인이다.[7] 지금의 폐교된 벽성대학의 설립자이기도 하며, 손자가 유정현 아나운서이다.[8] 4.19혁명 당시 경무대 앞 발포, 장충단집회 방해사건 은폐[9] 참고로 범인 매석환은 정효주 1차 유괴 사건의 범인이기도 하다.[10] 1961년 당시 민단 단장[11] 제2공화국에서는 송원영역을, 제3공화국에서는 권일[10] 홍종철 1인 2역을, 코리아게이트에서는 허문도를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