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1869)

 

'''역임 지위'''
<colbgcolor=#F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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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박중양

제4대
김윤정

제5대
한규복


<colbgcolor=#062861><colcolor=#eccd7a>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김윤정
金潤晶 | Kim Yoon-jung'''

'''이름'''
<colbgcolor=#FFF> 김윤정 (金潤晶)
세이도 긴지로 (淸道 金次郞)
'''본관'''
청도 김씨
'''출생'''
1869년 6월 25일 (고종 6년)
조선 한성부
'''사망'''
1949년 10월 23일 (향년 80세)
'''직업'''
정치가, 외교관, 관료
'''최종 국적'''
[image] 대한민국
'''주요 경력'''
전라남도 참여관
경기도 참여관
충청북도지사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활
2.2. 외교관 생활
2.3. 관료 생활
2.4. 노년
2.5. 사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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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친일파도 반역자도 아니니 등용해 달라”

김윤정, 광복 후 존 하지 장군에게[1]

김윤정(金潤晶, 일본식 이름: 淸道金次郞, 1869년 6월 25일 ~ 1949년 10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이자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본관은 청도이다. 인천부 경무관 재직 시절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한 혐의로 끌려온 김구를 심문하기도 했고, 외교관으로 있을 때는 미국 국무부에 고종의 밀서를 전달해 달라던 이승만의 청을 거절하였다.
인천부 경무관으로 있다가 정부유학생으로 미국, 영국을 유학하였으며 주미조선공사관의 3등 서기관과 1등 서기관, 주미공사 직무대리 등을 역임했다. 1905년 귀국하여 태인군 군수, 1906년 인천부 부윤 겸 감리사를 역임했다.
1910년 10월 한일 합방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그해 11월 조선총독부의 특채로 등용되어 전라남도 참여관과 경기도 참여관을 거쳐 충청북도지사로 고속승진한 후 1926년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가 1945년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그의 딸 윤고려는 개화파 정치인 윤치오의 두 번째 부인으로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윤씨로 성을 바꾸기도 했다.

2. 생애



2.1. 초기 생활


한성부 출신으로 관직에 올라 인천부 경무관을 지냈다. 인천부 경무관 재직 중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의 암살범으로 지목된 김창수[2]을 심문하였다. 당시 인천부윤은 이재정이었다.
구한말에 관료생활을 하던 중 대한제국의 학부가 선발한 유학생으로 뽑혀 1897년부터 미국에 유학했다.

2.2. 외교관 생활


1903년 미국 콜로라도 대학교를 졸업한 뒤 주미공사관에 서기생으로 채용, 이후 주미한국공사관 3등 참서관, 1등 참서관, 대리공사 등을 지내며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1904년, 고종1882년 미국과 맺은 조약을 근거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의 밀서를 이승만을 통해 보냈다. 1905년 8월 4일 뉴욕시 동부 루즈벨트 대통령 별장에서 이승만과 만난 루즈벨트 대통령은 밀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귀국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할 용의가 있다"라고 답변했다. 다만 외교적인 일이므로 밀서가 아닌 위싱턴의 한국공사관을 통해 제출하라고 권유했다. 이때 고종의 밀서를 들고 온 이승만이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외면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그의 어린 아들을 설득하여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 하였으나 그는 거절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긴 뒤 영국 유학을 갔다가 그해 귀국했다.
태인군 군수를 거쳐 1906년 인천부윤으로 발령받았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1896년 치하포에서의 일본인 살인 사건으로 인천에 압송된 김구가 김윤정에게 심문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손세일은 김윤정의 나이와 유학 시기, 인천부윤 발령 시점을 고려할 때 연대가 맞지 않는다며 이를 김구의 착각으로 보았다. 그러나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당시 인천부윤 겸 인천감리사는 이재정이었고 김윤정은 인천부 경무관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1908년 3월 해항 신상회사 사원들과 미상회사 사원들 및 지사 강준, 정재홍, 한우근 등과 인천 지역의 유지들이 공동으로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려 하자 흔쾌히 동의하여 인천공립보통학교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그 뒤 관직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나 있었다.
이후 관립인천실업학교의 교장직을 맡았다가 1910년 10월의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후 사직하였다.

2.3. 관료 생활


'''1926년 충북도지사 시절 모습'''
그러나 1910년 11월 개화파 친일 관료로서 등용되어 조선총독부의 전라북도 참여관에 임명되었다. 1919년 3월 13일 전주 만세 시위의 주동자인 윤건중의 습격을 받았다. 윤건중은 행사에 참석한 김윤정을 살해하려다가 그가 재빨리 단상으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치고 수배당하였다.
1921년 3월 경기도 참여관으로 전임되었다가 그해 10월 정기인사에서 다시 경기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4월 20일부터 5월 30일까지 경기도 내 군수 30여명을 인솔하여 참여관-군수 시찰단의 한사람으로 일본 도쿄를 다녀왔다.
1925년 4월 2일에는 충청북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고등관 2등 충청북도지사, 곧이어 고등관 1등으로 승급한 뒤 이듬해 도지사직에서 물러났다. 1927년부터 여성의 취직과 직업훈련을 목적으로 조선여자직업사 설립이 추진되자 창립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1928년 1월 15일 조선여자직업사 대표이사에 선임되었다.
1926년 도지사 직에서 퇴임한 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처음 임명되었으며, 이후 중추원 참의직을 6차례나 연임하다가 광복 직전인 1945년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1935년 편찬된 총독부의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올라와 있다. 1937년 8월 방응모, 한상룡, 박흥식 등과 함께 애국금차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윤치오의 부인이며 한국 최초로 양장을 입은 여성이라는 설이 있는 윤고려가 김윤정의 딸이다. 윤고려는 본래 김씨이나 남편을 따라 성을 바꾸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전시체제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1940년 10월 전시 황민화정책 시행 당시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국민의용대 고문 등 각종 단체에 활동했다.

2.4. 노년


'''〈동아일보〉 (1946년 4월 29일 석간 2면)'''
1945년 4월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다시 1945년 6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지만 2개월 뒤인 8월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11월 환국한 김구를 찾아 자신이 경무관으로 김구를 심문하던 옛 인연을 대화하기도 했다. 돈암장의 이승만도 찾아갔으나 이승만은 미국에 밀사 파견당시 외면한 일을 기억하여 꼴도 보기 싫다며 냉대한 후 내쫓았다.

2.5. 사후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함께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두 명단에는 사위 윤치오도 포함되어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10년 김윤정의 손자 2명이 "1896년 김구가 투옥 중일 때 경무관으로서 배려한 사실 및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다."면서 국가를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결정처분취소 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에서는 “중추원 참의를 지낸 것은 그 자체로 친일 활동”이라며 “손자들이 주장하는 독립운동 지원 사실은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정한 조사범위 내에 있지 않다”며 2010년 9월 7일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3. 기타


실업계에서도 활동하여 조선상사주식회사의 사장으로 활동했다. 딸 윤고려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초기의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는 서광범, 이범진, 이승만, 김규식, 서재필, 하란사(김란사) 등과 함께 초기 조선인 미국유학생의 한 사람이었다.
[1] 후술하겠지만, 김윤정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였고, 김구를 심문하는 등 유명한 친일파였다.[2] 김구의 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