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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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재학 시절의 모습
金蘭史
1872년 9월 1일 ~ 1919년 3월 10일
1. 개요
2. 상세


1. 개요


구한말,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여성운동가, 독립운동가.

2. 상세


1872년 평양에서 김병훈의 1남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이후 서울로 이사해 평동에 머무르며 한학을 배웠다.
1893년 17살 연상의 인천항 감리서[1] 고위관리인 하상기와 결혼했다.[2]
1894년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개신교 미션스쿨이화학당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금혼 학칙[3]에 따라 거절당했다. 그러자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입으로 불어 끄면서, 교장 룰루 프라이[4]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은 이렇게 밤중처럼 캄캄합니다. 나에게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 어머니들이 배우고 알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간곡히 부탁한 끝에 그녀는 룰루 프라이 교장으로부터 입학을 허가받았다. 이후 그녀는 이화학당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고 개신교 신자가 되어 낸시(Nancy)라는 세례명을 받고 이름도 '란사'[5]로 개명했다.
1895년 김홍집 내각에서 일본으로 보낸 국비 유학생 모임인 '대조선인 일본 유학생 친목회'에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1년간 수학하고 귀국했다.
정동교회에서 열린 서재필의 '미국의 남녀 평등한 활동'이란 강연을 듣고 미국 유학을 결심, 1897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남편의 성을 따르는 미국 관습에 따라 입국신고서에 하란사(Nansa Ha)로 기재되었고, 그 후로 하란사로 알려지게 된다. 훈장증과 공훈록에도 하란사로 기재되었다가 유족의 요청으로 2018년 정정되었다.
1898년부터 워싱턴 D.C.의 하워드 대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190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하여 1906년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이는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였다.
귀국하여 모교인 이화학당에 교사로 부임하여 영어성경 등을 가르쳤고, 기숙사 사감이나 지금의 교감 격인 총학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제자 중에는 유관순이 있으며, 유관순이 가담해 활동한 학생자치단체 이문회(以文會)를 이끌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1년 영문 선교지에 윤치호가 "신(新)학교 여성들은 바느질, 요리, 빨래, 다림질하는 법을 모르고 시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는 글을 기고하자, 김란사는 "학교의 목적은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깨우친 신여성을 배출하는 것"이라고 반박문을 실었다.
1916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감리회총회에 신흥우와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머물며 미국 동포들의 단결심과 애국심을 고취하고 독립자금 모금을 호소했다.
1919년 의친왕[6]의 밀지를 받고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는 프랑스 파리로 가기 위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 갔으나, 1919년 3월 10일 동포들이 마련한 환영만찬회에 참석했다가 누군가에게 독살당했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2018년 4월 4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됐다.

[1] 대한제국 시절 부산, 인천, 원산의 개항장에서 통상 업무를 담당하던 관아[2] 하상기는 전 부인과 사별한 후 재혼임[3] 이는 어린 소녀들을 강제 조혼에서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오히려 이는 불합리한 교칙이 되었고, 2003년에 폐지되었다.[4]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후에는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5] Nancy의 음역[6] 김란사와 의친왕은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동문이다. 같은 시기에 수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