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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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錣洙
1893년 5월 25일 ~ 1986년 3월 16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호는 지운(遲耘). 이명은 김동재(金銅再, 金東宰)·김초봉(金初峯)·김창률(金昌律)·김창근(金昌根).
대한민국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사에서 이동휘, 여운형, 박진순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정도의 1세대 독립운동가였다.[1]
1893년 5월 25일 전라도 고부군 백산면 원천리(現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의 지주 양반 출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쌀장사로 재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부안군에서 가까운 이웃 동네인 고창군의 김성수의 집안 재력과 견줄 정도로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부자집 자제인데도 김철수와 동생 김광수(1903년생)는 사회주의에 심취했으며 동생 김광수는 훗날 남로당 총무부장을 역임했다.
어린 시절 10대때부터 구한말 구례 군수를 지낸 서택환이라는 한학자 밑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족주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전북 군산 금호학교 선배이자 동네 인근(고창군)의 대지주였던 김성수가 그의 부모를 설득해준 덕에 김철수는 1912년 일본 와세다대 정치과로 유학을 떠났다. 여기서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유학 생활중이던 젊은시절 1916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 중국, 대만, 베트남 등 아시아 지역 출신 유학생들이 국제주의적인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결성한 비밀결사 단체 신아동맹단에 가입해 활동하다 같은 해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우장춘과 교류하며 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1916년 도쿄제국대학 농학과 실과에 입학한 우장춘은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하여 조선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연설을 하는 강당에서 유학생 김철수가 단상에 뛰어올라 그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대학 신입생이던 우장춘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김철수를 수시로 만나게 된다. 김철수는 우장춘에게 '너의 부친 우범선이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안된다'는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준다. 그 이후 김철수와 우장춘 박사는 서로가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하고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3.1운동 전후 1921년 중국 상하이로 가서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 시기 김철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직간접적으로 활동하였으나,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에서 발생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의 내분, 1923년 국민대표회의[2] 에서 심각한 파벌대립에 크게 실망하여 국내로 귀국한다. 이 시기 김철수는 '이게 무슨 독립운동이냐?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무기력감에 빠졌단다.
국내로 귀국하면서 1920년대 중반에 결성된 조선공산당의 주요 멤버 중 한 명(ML파에 속했다)이었으며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와 가까운 사이였고 주위 사람들도 두 사람의 결혼을 권유한 적이 있었으나, 김철수에게는 고향에 이미 본처가 있던 관계로 혼인이 이어지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가문에서 억지로 맺어주는 중매 결혼을 하는 구시대 풍습과 자유 연애를 통한 결혼을 하는 새로운 풍습이 공존하는 과도기여서 지식인들의 경우 고향에는 가문에서 맺어준 본처가, 그리고 활동하는 도시에는 자유 연애를 통해 결혼한 새로운 처를 두는 사례도 있었다.
1929년 3월,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조직에 참여하여 위원장을 맡았으나 1930년 2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8년을 선고받는다. 이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가 김병로였는데, 1심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자 김병로가 그에게 항소를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는 포로일 뿐, 일본 제국주의 법률을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 거부했다. 1938년 10월 출옥했으나 1940년 여름 '시국대응사상보국연맹'이라는 전향자 단체 가입을 거부하다가 또다시 서대문예방구금소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광복을 맞을때까지 공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보냈다.
1945년, 광복을 맞자마자 출옥. 정백,이영과 같이 서울 종로 YMCA 빌딩 바로 옆의 장안빌딩에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데, 이를 '장안파 조선공산당'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구조적으로 매우 취약했다. 이들의 문제점은 강령과 규약 및 당면 활동 목표를 제시하지 못했고, 중앙당 기구 이외에는 일정한 수의 당원 및 하부조직을 갖추지 못했으며, 1920년대 해체된 조선공산당과의 계승 관계가 불분명했었기 때문이다. 결국 8월 20일, 박헌영의 주도로 결성된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 '장안파는 일개 파벌집단에 불과하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그 해체를 요구했고. 결국 결성한지 10여일만에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해체되고만다. 그래서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15일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여담으로 김철수는 박헌영하고 사이가 대단히 안좋았는데, 그의 교조주의적인 독선적 노선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박헌영의 독선적인 방식을 대놓고 성토하는 글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공산당 내에서 당원자격 무기한 정지처분을 받기까지 했을 정도다.
이후 김철수는 광복 직후 시기 좌익과 우익의 관계를 개선하는 역할을 주로 맡으면서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동조, 참여하여 통일정부 구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여운형이 암살당한 이후에는 정치에 환멸을 가지게 되어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이후 고향인 전북 부안으로 낙향해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86년 사망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유력한 사회주의 계열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가 강한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인사였는데 이는 이승만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 이 얘기에 따르면, 김철수가 중국 상하이에 있을 때, 이승만이 독립운동 자금의 횡령 혐의로 살해 위협을 받을 당시 김철수는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대납해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 본인도 정계에서 은퇴해 낙향한다는 조건으로 김철수를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목숨만 건진 것에 불과한지라, 이후에도 그와 가족들은 경찰에게 린치를 당하는 등 잦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6.25 전쟁 때는 극우파들에게 집이 불태워졌고, 빨갱이로 몰려 사형장까지 끌려갔던 수모를 겪기도 했었다. 다행히 현장 지휘관이 그를 알아보고 사지에서 구해줬지만, 집이 불타며 평소 틈틈이 써오던 항일운동 수기를 비롯한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한다.[3]
다만 김철수는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었지, 구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레닌,스탈린의 이론 등은 깊이 신봉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1930년 일본 경찰에 체포당한 후 재판 과정에서, 예심판사가 '누구를 사숙했냐'(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았냐는 의미)고 묻자, 김철수 자신은 유학자인 서택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여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이 서택환이 누구냐며 수군거렸다고 한다. 서택환의 이름을 굳이 언급할 정도면,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대해 그다지 깊이 신봉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부안군 계화면 의복리에는 그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金錣洙
1893년 5월 25일 ~ 1986년 3월 16일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호는 지운(遲耘). 이명은 김동재(金銅再, 金東宰)·김초봉(金初峯)·김창률(金昌律)·김창근(金昌根).
대한민국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사에서 이동휘, 여운형, 박진순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정도의 1세대 독립운동가였다.[1]
2. 생애
1893년 5월 25일 전라도 고부군 백산면 원천리(現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의 지주 양반 출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쌀장사로 재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부안군에서 가까운 이웃 동네인 고창군의 김성수의 집안 재력과 견줄 정도로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부자집 자제인데도 김철수와 동생 김광수(1903년생)는 사회주의에 심취했으며 동생 김광수는 훗날 남로당 총무부장을 역임했다.
어린 시절 10대때부터 구한말 구례 군수를 지낸 서택환이라는 한학자 밑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족주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전북 군산 금호학교 선배이자 동네 인근(고창군)의 대지주였던 김성수가 그의 부모를 설득해준 덕에 김철수는 1912년 일본 와세다대 정치과로 유학을 떠났다. 여기서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유학 생활중이던 젊은시절 1916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 중국, 대만, 베트남 등 아시아 지역 출신 유학생들이 국제주의적인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결성한 비밀결사 단체 신아동맹단에 가입해 활동하다 같은 해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우장춘과 교류하며 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1916년 도쿄제국대학 농학과 실과에 입학한 우장춘은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하여 조선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연설을 하는 강당에서 유학생 김철수가 단상에 뛰어올라 그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대학 신입생이던 우장춘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김철수를 수시로 만나게 된다. 김철수는 우장춘에게 '너의 부친 우범선이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안된다'는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준다. 그 이후 김철수와 우장춘 박사는 서로가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하고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3.1운동 전후 1921년 중국 상하이로 가서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 시기 김철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직간접적으로 활동하였으나,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에서 발생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의 내분, 1923년 국민대표회의[2] 에서 심각한 파벌대립에 크게 실망하여 국내로 귀국한다. 이 시기 김철수는 '이게 무슨 독립운동이냐?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무기력감에 빠졌단다.
국내로 귀국하면서 1920년대 중반에 결성된 조선공산당의 주요 멤버 중 한 명(ML파에 속했다)이었으며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와 가까운 사이였고 주위 사람들도 두 사람의 결혼을 권유한 적이 있었으나, 김철수에게는 고향에 이미 본처가 있던 관계로 혼인이 이어지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가문에서 억지로 맺어주는 중매 결혼을 하는 구시대 풍습과 자유 연애를 통한 결혼을 하는 새로운 풍습이 공존하는 과도기여서 지식인들의 경우 고향에는 가문에서 맺어준 본처가, 그리고 활동하는 도시에는 자유 연애를 통해 결혼한 새로운 처를 두는 사례도 있었다.
1929년 3월,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조직에 참여하여 위원장을 맡았으나 1930년 2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8년을 선고받는다. 이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가 김병로였는데, 1심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자 김병로가 그에게 항소를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는 포로일 뿐, 일본 제국주의 법률을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 거부했다. 1938년 10월 출옥했으나 1940년 여름 '시국대응사상보국연맹'이라는 전향자 단체 가입을 거부하다가 또다시 서대문예방구금소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광복을 맞을때까지 공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보냈다.
1945년, 광복을 맞자마자 출옥. 정백,이영과 같이 서울 종로 YMCA 빌딩 바로 옆의 장안빌딩에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데, 이를 '장안파 조선공산당'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구조적으로 매우 취약했다. 이들의 문제점은 강령과 규약 및 당면 활동 목표를 제시하지 못했고, 중앙당 기구 이외에는 일정한 수의 당원 및 하부조직을 갖추지 못했으며, 1920년대 해체된 조선공산당과의 계승 관계가 불분명했었기 때문이다. 결국 8월 20일, 박헌영의 주도로 결성된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 '장안파는 일개 파벌집단에 불과하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그 해체를 요구했고. 결국 결성한지 10여일만에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해체되고만다. 그래서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15일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여담으로 김철수는 박헌영하고 사이가 대단히 안좋았는데, 그의 교조주의적인 독선적 노선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박헌영의 독선적인 방식을 대놓고 성토하는 글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공산당 내에서 당원자격 무기한 정지처분을 받기까지 했을 정도다.
이후 김철수는 광복 직후 시기 좌익과 우익의 관계를 개선하는 역할을 주로 맡으면서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동조, 참여하여 통일정부 구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여운형이 암살당한 이후에는 정치에 환멸을 가지게 되어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이후 고향인 전북 부안으로 낙향해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86년 사망하였다.
3. 여담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유력한 사회주의 계열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가 강한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인사였는데 이는 이승만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 이 얘기에 따르면, 김철수가 중국 상하이에 있을 때, 이승만이 독립운동 자금의 횡령 혐의로 살해 위협을 받을 당시 김철수는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대납해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 본인도 정계에서 은퇴해 낙향한다는 조건으로 김철수를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목숨만 건진 것에 불과한지라, 이후에도 그와 가족들은 경찰에게 린치를 당하는 등 잦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6.25 전쟁 때는 극우파들에게 집이 불태워졌고, 빨갱이로 몰려 사형장까지 끌려갔던 수모를 겪기도 했었다. 다행히 현장 지휘관이 그를 알아보고 사지에서 구해줬지만, 집이 불타며 평소 틈틈이 써오던 항일운동 수기를 비롯한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한다.[3]
다만 김철수는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었지, 구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레닌,스탈린의 이론 등은 깊이 신봉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1930년 일본 경찰에 체포당한 후 재판 과정에서, 예심판사가 '누구를 사숙했냐'(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았냐는 의미)고 묻자, 김철수 자신은 유학자인 서택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여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이 서택환이 누구냐며 수군거렸다고 한다. 서택환의 이름을 굳이 언급할 정도면,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대해 그다지 깊이 신봉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부안군 계화면 의복리에는 그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