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막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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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극이라 불리는 초기의 나막신.
나무로 만든 신발로 '''게다와는 별개 물건이다.'''[1] 보통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사용되던 신발을 일컫는다. 중국에서는 극(屐)이라 하였고, 한국에서는 목혜(木鞋) 또는 목리(木履)라고도 불린다. 걸어다닐때는 '''딸깍''' 소리가 나기 때문에 '''딸깍발이'''라고도 불렀다.[2]
나무의 고형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나무'는 모음이 이어질 때 '남ㄱ'이 되고 자음이 이어질 때 '나모'가 되었는데 이를 통해 고형을 유추해보면 '나ᄆᆞᆨ' 정도로 추정된다. '나막신'은 여기에 '신'이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인 것.
오늘날의 하이힐처럼 기다란 나무 굽이 있으며 이 굽은 'ㅠ'모양으로 앞뒤에 두 개 달려있다. 당대에는 비 오는 날이나 바닥에 돌이 많이 있어서 걸어다니기 힘든 지형이 될 때가 많았는데 주로 그러한 상황에서 신기 위해 이러한 구조의 굽이 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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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에는 우리가 흔히 일본나막신으로 알고 있는 게다와 동일한 모양[3] 이었으나, 점차 갖신처럼 발을 넣는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두산백과 참조) 언제부터 형태가 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시대 유물 중에는 평극이 아닌 발을 넣는 나막신도 발굴되고 있다. 쌍북리의 백제 유적과 경기도 안성의 통일 신라 유적(죽주산성)에서 나무를 파 갖신 모양으로 만든 나막신[4] 이 나온 것을 볼 때 상당히 오래 전부터 두 가지 형태의 나막신이 혼용되다가 점차 갖신 형태의 나막신이 대중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서 상단 사진에 있는 백제와 신라의 나막신은 형태는 유사하지만 구멍 수나 끈을 묶는 방법에서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백제의 것은 구멍 3개로 게다와 동일하나 신라의 것은 구멍이 5개라 크게 두가지 설로 나뉘고 있다. 방법 1은 신라의 이형(짚신모양) 토기의 끈을 보고 그와 유사하게 추측한 모양이며, 방법 2는 백제의 것과 유사하게 신고 벗기 편한 슬리퍼 형태로 추측한 모양이다. 끈은 남아있는 유물이 없어 어떤 형태인지는 알 수 없으며, 둘 다 아닐수도, 둘 다일 가능성도 있다.
묘하게 현대에 들어서 한국 내에서는 이런 초창기 형태의 나막신을 오직 일본에서만 신는 고유의 신발로 보는 경향이 강한데, '''잘못된 상식이다.''' 아무래도 삼국시대 나막신에 대해서는 대중들이 상당히 무지하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 나막신을 보여주면 "이건 게다 아니냐"고 묻는다. 종이우산처럼 서브컬처 미디어의 악영향으로 볼 수 있겠다. 종이 우산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그 이유는 일본이 한국과 달리 비가 연중 고르게 오는 기후대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평극 나막신과 종이 우산 모두 중국에서 발명된 것이고 모두 우천시에 유용한 물품들인데, 이것이 일본의 지리적 환경에 잘 맞았기에 꾸준히 향유되어 올 수 있었던 것. 반면에 한국은 여름 장마철을 제외하면 비교적 강수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명맥이 거의 끊기거나(종이 우산) 우천과 관계 없는 다른 물품으로의 수렴진화(나막신)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왜색을 논하려면 맑은 날에 불필요하게 종이우산을 쓰고 평극을 신고 돌아다니는[5] 컨셉, 또는 옛 사극물(특히 고려~조선)인데 평민층이 종이우산과 평극을 향유하는 것에 한정하는 것이 적절하다.[6]
당연히 초기형에 해당하는 판자형 나막신은 한중일을 가리지 않고 고대에 널리 신었으며, 실제로 현대의 티베트나 중국 등 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초기의 나막신을 신는 경우가 많다.
달라이라마의 나막신
중국 운남 하니족의 전통 나막신 춤
네덜란드에는 클롬펀(Klompen)이라 불리는 전통 나막신이 존재한다.참조 일각에서는 클롬펀이 헨드릭 하멜 일행에 의해 조선에 전래되어 후기의 나막신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내기도 했는데, 신빙성은 떨어진다. 영문판 위키백과의 'namaksin' 항목의 설명이 그렇게 되어 있다. 성룡의 영화 성룡의 CIA에서도 등장하는데 어지간한 무기 못지않는 파괴력을 뽐낸다. 유럽에서는 옛날 프랑스에서 파업할때 나막신(sabot)을 던져서 공장 안에 있는 기계를 때려부순데서 사보타주란 단어가 유래했다는 민간어원설이 꽤 유행했었는데[7] 특성을 감안하면 꽤 그럴 듯하다.
평극이라 불리는 초기의 나막신.
1. 개요
나무로 만든 신발로 '''게다와는 별개 물건이다.'''[1] 보통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사용되던 신발을 일컫는다. 중국에서는 극(屐)이라 하였고, 한국에서는 목혜(木鞋) 또는 목리(木履)라고도 불린다. 걸어다닐때는 '''딸깍''' 소리가 나기 때문에 '''딸깍발이'''라고도 불렀다.[2]
나무의 고형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나무'는 모음이 이어질 때 '남ㄱ'이 되고 자음이 이어질 때 '나모'가 되었는데 이를 통해 고형을 유추해보면 '나ᄆᆞᆨ' 정도로 추정된다. '나막신'은 여기에 '신'이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인 것.
오늘날의 하이힐처럼 기다란 나무 굽이 있으며 이 굽은 'ㅠ'모양으로 앞뒤에 두 개 달려있다. 당대에는 비 오는 날이나 바닥에 돌이 많이 있어서 걸어다니기 힘든 지형이 될 때가 많았는데 주로 그러한 상황에서 신기 위해 이러한 구조의 굽이 발명되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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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에는 우리가 흔히 일본나막신으로 알고 있는 게다와 동일한 모양[3] 이었으나, 점차 갖신처럼 발을 넣는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두산백과 참조) 언제부터 형태가 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시대 유물 중에는 평극이 아닌 발을 넣는 나막신도 발굴되고 있다. 쌍북리의 백제 유적과 경기도 안성의 통일 신라 유적(죽주산성)에서 나무를 파 갖신 모양으로 만든 나막신[4] 이 나온 것을 볼 때 상당히 오래 전부터 두 가지 형태의 나막신이 혼용되다가 점차 갖신 형태의 나막신이 대중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서 상단 사진에 있는 백제와 신라의 나막신은 형태는 유사하지만 구멍 수나 끈을 묶는 방법에서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백제의 것은 구멍 3개로 게다와 동일하나 신라의 것은 구멍이 5개라 크게 두가지 설로 나뉘고 있다. 방법 1은 신라의 이형(짚신모양) 토기의 끈을 보고 그와 유사하게 추측한 모양이며, 방법 2는 백제의 것과 유사하게 신고 벗기 편한 슬리퍼 형태로 추측한 모양이다. 끈은 남아있는 유물이 없어 어떤 형태인지는 알 수 없으며, 둘 다 아닐수도, 둘 다일 가능성도 있다.
묘하게 현대에 들어서 한국 내에서는 이런 초창기 형태의 나막신을 오직 일본에서만 신는 고유의 신발로 보는 경향이 강한데, '''잘못된 상식이다.''' 아무래도 삼국시대 나막신에 대해서는 대중들이 상당히 무지하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 나막신을 보여주면 "이건 게다 아니냐"고 묻는다. 종이우산처럼 서브컬처 미디어의 악영향으로 볼 수 있겠다. 종이 우산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그 이유는 일본이 한국과 달리 비가 연중 고르게 오는 기후대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평극 나막신과 종이 우산 모두 중국에서 발명된 것이고 모두 우천시에 유용한 물품들인데, 이것이 일본의 지리적 환경에 잘 맞았기에 꾸준히 향유되어 올 수 있었던 것. 반면에 한국은 여름 장마철을 제외하면 비교적 강수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명맥이 거의 끊기거나(종이 우산) 우천과 관계 없는 다른 물품으로의 수렴진화(나막신)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왜색을 논하려면 맑은 날에 불필요하게 종이우산을 쓰고 평극을 신고 돌아다니는[5] 컨셉, 또는 옛 사극물(특히 고려~조선)인데 평민층이 종이우산과 평극을 향유하는 것에 한정하는 것이 적절하다.[6]
3. 해외
당연히 초기형에 해당하는 판자형 나막신은 한중일을 가리지 않고 고대에 널리 신었으며, 실제로 현대의 티베트나 중국 등 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초기의 나막신을 신는 경우가 많다.
달라이라마의 나막신
중국 운남 하니족의 전통 나막신 춤
네덜란드에는 클롬펀(Klompen)이라 불리는 전통 나막신이 존재한다.참조 일각에서는 클롬펀이 헨드릭 하멜 일행에 의해 조선에 전래되어 후기의 나막신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내기도 했는데, 신빙성은 떨어진다. 영문판 위키백과의 'namaksin' 항목의 설명이 그렇게 되어 있다. 성룡의 영화 성룡의 CIA에서도 등장하는데 어지간한 무기 못지않는 파괴력을 뽐낸다. 유럽에서는 옛날 프랑스에서 파업할때 나막신(sabot)을 던져서 공장 안에 있는 기계를 때려부순데서 사보타주란 단어가 유래했다는 민간어원설이 꽤 유행했었는데[7] 특성을 감안하면 꽤 그럴 듯하다.
[1] 참고로 상단 왼쪽에 있는 사각형 나막신은 신라 유물로서 97년 경북 경산시 임당동 유적에서 발굴됐으며, 상단 우측의 둥근 나막신은 백제 유물로서 2000년도에 시행한 충남 부여군 능산리사지(절터)의 7차 조사때 발굴된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2005년도 문화재지의 나막신 관련 논문을 참조하자. 아래의 왼쪽 나막신은 부산 용수리 가동 유적에서, 오른쪽은 충남 아산 갈매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마찬가지로 삼국시대 유물이다.[2] 딸깍발이는 가난해서 마른 날에도 나막신을 신던 옛 선비들을 지칭할 때도 사용하던 말이다. 이희승 선생의 동명 수필이 교과서에 실린 적이 있다.[3] 굽이 달려있는 납작한 바닥에 가죽이나 면끈을 달아서 조리처럼 신는것[4] 금동 신발과 상당히 유사하다.[5] 일본은 전통적으로도 맑은 날에도 평극형 신발을 신는 일이 많았다. 평극이 일상에 깊이 침투할 정도로 이들의 기후에 알맞았다는 뜻이다.[6] 조선 시대 풍속화를 보더라도 종이 우산과 평극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7] 실제 사보타주란 단어의 어원은 이것이 아니며,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