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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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
[image]
'''공로상'''
'''제89회
(2017년)'''
앤V. 코츠
프레더릭 와이즈먼
'''성룡'''
린 스터마스터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
[image]
'''이름'''
성룡
JACKIE CHAN
'''분야'''
영화
'''입성날짜'''
2002년 10월 4일
'''위치'''
6819 Hollywood Blvd






'''성룡'''
'''成龍[1]|Jackie Chan
MBE[2]'''

'''본명'''
부계식 : 방사룡(房仕龍, 팡스룽)
모계식 : 진항생(陳港生, 천강성[3])
'''출생'''
1954년 4월 7일 (70세)
영국령 홍콩[4] 빅토리아 피크
'''국적'''
[image] 영국령 홍콩 | [image] 홍콩
'''원적지'''
안후이성 우후시
'''신체'''
174cm[5][6], 75kg, AB형
'''가족'''
아내 임봉교, 아들 방조명, 딸 오탁림
'''학력'''
홍콩 공연예술학교 드라마학과
'''데뷔'''
1962년 영화 '대소황천패'
'''언어'''
광동어, 만다린, 영어, 한국어[7]
'''종교'''
개신교
'''링크'''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스턴트맨 시절
2.3. 코믹 무술 영화로 성공
3. 특징
3.1. 배우로서
3.2. 감독 및 제작자로서
4. 기타 매체와의 관계
5. 한국과의 관계
6. 비판 및 논란
6.1. 정치적 논란
6.2. 사생활 논란
7. 가족
8. 여담
9. 성가반
10. 이소룡과의 비교
11. 영화 목록
12. 성룡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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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콩 출신의 액션 배우 및 감독. '''액션 영화와 스턴트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전설적인 배우'''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파란만장한 유년기를 보낸 인물로, 집안이 가난한 탓에 정규교육조차 받지 못해 문맹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성룡은 학교에 입학한 이후 계속 장난을 치다가 1학년 무렵 퇴학을 당하게 되었고, 성룡의 아버지가 취업문제로 호주로 출국하게 되면서 우점원의 희극학교로 10년간 계약관계로 입학을 하게 되어 자연히 문맹이 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성룡의 어머니도 3년후 남편을 따라 호주로 떠나게 되면서 혼자서 생활하게 되었고 배움의 기회를 잃어 문맹이 된 그는 대본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동료가 대신 읽어준 대사를 외워 연기를 하는 등 많은 고난을 겪었다.(성룡의 철들기전 늙었노라 자서전 참조)
1980년대에 성룡이 대스타가 된 이후에도 이것이 걸림돌이 되어, 자신은 사인회에서 팬의 이름을 직접 써주지 못하는 것을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부인 임봉교는 성룡에게 대본을 읽어주다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물론 그 후에 문맹에서 벗어났고, 영어와 표준중국어도 구사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국민당비밀경찰이었는데, 태평양 전쟁국공내전의 역사적 혼란 때문에 복잡한 가족사를 갖게 되었다. 이를 다룬 개인적 영화로 용의 흔적: 성룡과 그의 잊혀진 가족이 있다.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
양친이 모두 오스트레일리아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고, 혼자 남겨진 성룡은 우점원(于占元) 희극학교(경극학교)에 들어가 10년 동안 연기와 무술 훈련을 받는다. 이때의 훈련이 어찌나 혹독했던지 성룡은 일찍이 ''고문''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8] 성룡은 10년간 학교를 다니기를 원해 입학하게 되었으나 입학 초기에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희극학교에 입학할 당시 성룡의 아버지와 우점원 사이에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1년, 3년, 10년간 희극학교의 소속으로 사망하더라도 학교측에서 일체의 배상책임이 없다는 계약을 했다고 한다. 이 우점원 희극학교 4년 선배가 홍금보고, 4년 후배가 원표였는데, 이들은 훗날 '칠소복'으로 이름을 떨친다. 1988년에 제작된 유가위 감독에 홍금보가 주연한 영화 《칠소복》이 바로 이 시절을 그려낸 영화다. 우점원(于占元)의 이름 끝 글자 원(元)을 성으로 삼아 이름을 만들었으며, 이 시절 홍금보는 '원룡', 성룡은 '원루'란 이름으로 불렸으나 이후 독립하면서 각자의 이름을 만들게 된다. 홍금보나 성룡과는 달리 원표, 원덕, 원태 등은 그 시절 그대로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2.2. 스턴트맨 시절


희극 학교를 졸업한 성룡은 선배인 홍금보의 추천으로, 이소룡 영화 《정무문》과 《용쟁호투》에서 스턴트맨으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정무문》에서는 이소룡에게 맞고 날아가서 죽는 최종보스인 일본인 관장의 스턴트를 했었는데, 당시 한 사람이 장비없이 날아간 거리로는 최고였고, 《용쟁호투》에서는 이소룡에게 맞는 장면(극중 이소룡에게 4게의 장면에 걸쳐 등장하는데, 목이 꺽이고, 엘베베이터에서 다시 나온뒤에 장봉에 맞고, 이후 다른장면에서 단봉에 맞고 물에 빠진다.)에서 이소룡의 실수로 인해 너무 세게 맞는 바람에 성룡이 부상을 입자, 이소룡이 사과의 의미로서 조연이라도 성룡을 꼭 다음 영화에 출연시켜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을 정도로 성룡은 뛰어난 실력을 지닌 스턴트맨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그러나 《용쟁호투》를 완성한 직후에 이소룡이 사망하고 말았다. 안습.[9][10]
이후, 성룡은 홍콩과 한국을 오가면서 여러 편의 무협영화에서 엑스트라로 연기하면서 연기자의 길에 나서게 된다. 이때 성룡은 그야말로 온갖 엑스트라 및 조연을 맡았는데, 심지어 에로틱 영화인 《금병매》(1974), 《花飛滿城春(화비만성춘)》(1975)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베드씬을 찍기도 했다. 이 당시에 출연한 《여경찰(女警察:영어 제목은 Police Woman)》 같은 경우는 훗날 국내에서 《성룡의 영 타이거》라는 제목을 붙여 비디오로 출시되었는데, 제목도 그렇고 마치 성룡이 주연인 양 포장된 탓에 멋모르고 빌려보던 이들이 성룡이 얼굴에 점을 붙이고 찌질이 악당 졸개로 나와 주인공인 택시기사(배우는 대만 출신 배우인 친샹린.)에게 맞아 뻗는 모습에 놀라는 추억을 겪기도 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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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이 찌질이 악당 졸개로 나오는 《성룡의 영 타이거》(1973) 국내 비디오 표지. 엉뚱한 사진을 박아놓아서 이것만 보면 전혀 예측을 할 수 없다. 그나마 엑스트라치곤 좀 비중이 높긴 하지만, 주인공에게 맞다가 애원하며 빌고, 주인공이 그냥 가자 뒤에서 비겁하게 반격하다가 맞아 나가떨어지며 퇴장한다. 여담으로 이 영화는 2016년에《성룡의 폴리스맨》 관련정보이라는 더 이상한 제목으로 재개봉 하였고 iptv에 이 제목으로 유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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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발매판 DVD도 성룡을 주연인 양 세우고 전혀 다른 사진을 갖다붙였으니 다를 거 없다.
사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는 흥행실패해서 묻혔는데 비디오 시장에 내놓는 시점에서 성룡이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중 최고로 유명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주연이고 나발이고 제일 유명한 사람의 이름값에 묻어가려는 심보가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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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타이거 장면.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왼쪽 턱 근처에 큼직한 점을 붙이고 나오는데 정말 악당 그 자체로서 나와 여자도 가차 없이 죽인다. 성룡의 얼굴이 쌍수 전이기 때문에 뭔가 낯설다. 밑 사진은 주인공에게 맞아 뻗고 빌면서 애원하던 장면인데, 나중에 자주 보여주는 익살스런 표정이 저 사진에도 보이긴 한다.
결국, 배우로서 성공할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한 성룡은 일을 접고 부모님이 살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게 된다. 그러나 1년이 채 안되어, 이소룡의 홍콩 영화 데뷔작인 《당산대형》과 《정무문》의 감독 나유(羅維, 로웨이) 감독이 《정무문》 촬영 중, 이소룡과 불화가 생긴 이래로 '''이소룡을 대체할 만한 배우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스턴트맨이 아닌 주연'''으로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는 생각에 홍콩으로 돌아온다. 오디션에 합격한 성룡[12]은 나유와 함께 《신정무문》부터 전형적인 이소룡식의 비장미와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작품에 줄기차게 출연하기 시작한다. 성룡이란 예명도 새끼 용(소룡)을 뛰어넘는 어른 용(성룡)이 되라는 뜻으로 나유가 지어준 것. 1977년작, 《풍우쌍류성》(한국 제목 : 유성검의 대결) 때부터는 쌍꺼풀 수술을 한 뒤라 외모도 배우로서 손색없는 호남형으로 바뀐다.[13] 하지만 당시 쿵후 영화는 그야말로 '마구 찍어낸 공장제 쌈마이 영화'였고, 특히 나유와 '''노예계약'''에 가까운 조건으로 고만고만한 영화를 찍던 성룡은 회의를 품으면서 점차 나유와 사이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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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꺼풀 수술 전《신정무문》에서의 성룡. 묘하게 추성훈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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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꺼풀 수술 후 《풍우쌍류성(유성검의 대결)》에서의 달라진 모습의 성룡.[14]

2.3. 코믹 무술 영화로 성공


그러던 와중에 성룡의 커리어를 역전시킨 일이 발생한다. 1978년 당시 액션 연기뿐만 아니라 서구형의 외모에 개구장이 + 훈남 인상으로 홍콩에서 대스타였던 배우 부성이[15] 스케줄 문제로 원화평 감독의 《사형도수》(1978) 주연에서 하차하자, 나유가 원화평과 오사원에 대한 의리로 사원영화사에 성룡을 잠시 대여해 준 것(…). 《사형도수》(1978)가 히트하자 원화평은 곧장 《취권》(1978)의 제작에 들어갔고 이 작품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성룡의 인지도는 수직상승하게 된다.[16] 참고로 취권으로 뜨기 전의 성룡은 진지한 역 쪽이었다. 코믹 이미지로 성공한 다음에도 《화소도》(1990), 《중안조》(1993), 《뉴 폴리스 스토리》(2004), 《신주쿠 사건》(2009), 《더 포리너》(2017)등 나름 꾸준하게 진지한 캐릭터와 내용에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 나유와 계속 영화를 찍다가는 평생 소모품으로 살다가 끝나리란 절망감에 빠져있던 성룡은 《취권》이 성공하자 '''몰래 대한민국으로 야반도주를 하려다가'''[17] 나유의 부인 유량화에게 들키게 된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량화가 '그럼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성룡에게 물었고, 성룡은 이에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나유는 성룡의 요청을 흔쾌히 허락했고, 마침내 성룡의 첫 감독작인 《소권괴초》(1979)가 제작된다. 《소권괴초》에서 그는 《취권》과 마찬가지로 코믹을 가미한 액션을 내세웠고, 괜찮은 흥행 성적을 올린다.
그러나 이때, 성룡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젊은 나이여서 그랬는지 큰 실수를 저지른다. 나유 감독과의 계약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영화사의 계약서에 서명을 해버린 것이다. 비록 몰랐다고는 해도 분명히 잘못이긴 했다. 이에 두 영화사는 성룡을 사이에 놓고 대립했고, 관련된 삼합회까지 개입하면서 일이 커진다. 이에 나유 감독은 성룡을 데리고 외국으로 도망가버린다. 이것이 이른바 “성룡 납치사건”으로, 당시 홍콩의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다. 이때 삼합회에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을뿐더러 홍콩의 액션배우나 무술배우 들도 눈치를 보던 왕우(王羽)가 개입하여 이를 해결해줬고,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성룡은 왕우가 제작하거나 관계한 영화들에 한하여 배역을 가리지 않고 출연하는 것으로 답례를 했다. 《미니 특공대》(대복성이란 제목으로 개봉하고 비디오 출시, 더빙 방영했다.), 《화소도》 등이 그 예이다.
덕분에 성룡은 골든하베스트로 이적하게 되고, 여기에서 내놓은 첫 작품이 바로 《사제출마》(1980)다. 《사제출마》는 이전까지의 홍콩 영화의 액션 연출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18] 홍콩의 영화흥행 기록도 경신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에 등장한 최종 보스이자 무시무시하게까지 보이는 악역이 바로 우리나라의 합기도 원로 황인식이다.
사제출마의 성공 이후 성룡은 이소룡처럼 할리우드에 진출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고, 때마침 골든하베스트사에서도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배틀 크리크》(1980)를 첫 작품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성룡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고,[19] 워낙에 완벽주의와 자유로운 스타일을 중시하는 그에게 헐리웃의 액션 영화의 제작과정[20]은 원칙에 치중하고 제약이 심해 답답한 방식이었다. 결국, 성룡의 첫번째 할리우드 진출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21]
첫번째 할리우드 진출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에 성룡은 홍금보 감독의 《오복성》(1983)에 출연하면서 홍콩으로 복귀, 골든하베스트의 흥행 삼총사 가화삼보의 중심이 되어 성공적으로 재기했고, 《프로젝트 A》(1984)부터는 스스로 감독과 주연을 맡아, 할리우드 체류(滯留) 시절 주변에서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다며 권하기에 접했던 버스터 키튼의 영향을 받은, 과격한 아크로바틱 묘기와 좋은 유머 감각을 결합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성룡이 홍콩으로 복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영화는 《프로텍터》(1984)라는 작품으로, 홍콩 자본에 미국인 감독 제임스 글릭켄하우스[22]가 감독한 작품이다. 참고로 성룡은 역동적이지 못한 액션에 선정적인 장면까지 삽입된 미국 편집판을 보고 경악해서[23] 엔딩이나 주요 액션 장면들을 재촬영하고, 자신이 직접 편집한 홍콩판 버전을 따로 만들어서 개봉했다. 이 재편집판의 평이 압도적으로 좋은 편이다.
이 당시의 성룡은 경극학교 시절부터 사형제지간이었던 홍금보, 원표와 같은 영화에 출연한 경우가 굉장히 많다. 때문에 당시 이 세 명을 합쳐서 가화삼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만, 이들의 영화를 그저 '세 명의 합작품'으로 도매금 취급해버리는 것은 좀 부당한 대우라고 봐야 한다. 물론, 어릴적부터 절친한 사이였으니 서로가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을 수는 있지만, 1980년대 초중반 가화삼보의 전성기에도 이들 셋은 연출과 액션에 대해 추구하던 방향성이 꽤나 달랐다. 특히 각자 자신이 주연 내지는 감독을 맡은 작품의 경우는 각자의 색이 매우 뚜렷했다. 가령 똑같이 가화삼보가 출연한 프로젝트 A(성룡 감독)와 오복성(홍금보 감독)을 비교해봐도 색이 굉장히 다르다는게 눈에 띈다. 홍금보의 스턴트팀 홍가반은 다이나믹하고 현실적인 액션과 개개인의 특성을 살린 아크로바틱한 모션을 중시한 반면, 성룡의 스턴트팀 성가반은 구성원이 똘똘 뭉쳐 치밀하게 합을 짜서,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위험한 장면을 연출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외에도 액션의 리듬감이라든가 구성 등 작은 디테일에서도 둘은 꽤 차이가 나오는편. 성룡 액션과 홍금보 액션의 차이
항상 과격한 스턴트와 액션을 선보였기 때문에 이제까지 수많은 영화를 촬영하면서 온몸에 부상을 입지 않은 곳이 없고 몇 번은 사경을 헤메기도 했다고 한다. 《프로젝트 A》(1984)부터 성룡은 고소공포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계탑에서 떨어지는 스턴트를 했다. 게다가 작 중 이 낙하장면을 여러 번 보여주는데 매 장면마다 다르다. 즉 높은 시계탑에서 떨어지는걸 여러 번 반복해서 찍었다는 것.[24]폴리스 스토리》(1985) 한 편을 찍으면서 척추 골절, 무릎 부상, 고관절 탈구라는 중상을 입었다. 1986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용형호제》를 촬영하던 도중에는 성벽을 점프해서 건너가는 장면에서, 붙잡았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머리부터 추락, 두개골이 함몰되고 말았다. 성룡은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우측의 청력을 잃었고, 머리부분만 35바늘을 꿰매는 바람에 큰 흉터가 생겼다고 한다. 이 사고 장면은 《용형호제》의 엔딩 크레딧에서 여과없이 나온다.[25] 부상을 치료한 후에 성룡은 영화의 나머지 부분을 촬영하여 영화를 완성시켰는데, 부상부위를 가리기 위해 머리를 길게 기르고 카메라 앞에 나섰다. 덕분에 영화 도입부에는 데뷔부터 고수해오던 장발을 버리고 짧게 깎은 머리를 선보였는데, 부상 이후 그 부위를 가리려다보니 영화 도입부 이후에는 다시 장발로 돌아간다. 이후 골든 하베스트의 추문회 사장은 성룡의 헤어스타일을 장발로 유지하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예전처럼 장발보다는 단정한 커트 스타일을 유지 중. 1994년 《홍번구》를 촬영할 때 교각에서 운행 중인 호버크래프트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착지를 잘못하는 바람에 우측 발목이 90도로 꺾이면서 골절상을 입었다. 깁스 자국을 가려야 했기에 운동화 모양을 본떠서 만든 특수 양말을 신고서 촬영을 마쳤다. 이 역시 엔딩 크레딧에서 확인 가능하다.
성룡의 작품에서는 스턴트 중의 사고, NG 등을 모아서 엔딩 크레딧에 올리는 전통이 있다.(이는 서구권에서 촬영된 영화에도 남아 있다.) 엔딩 크레딧의 NG 영상을 보면 성룡이 NG를 내면서 촬영 스태프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화기애애한 장면이 나오다가, 성룡이 스턴트를 하다가 다쳐서 고통스러워하거나 촬영 스태프가 다치거나 심지어는 사망자가 아닌가 싶은 사람이 실려 나가는(실제로 사망하지는 않았다.) 아찔한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성룡은 이를 통해서 '''실생활에서는 위험하니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을 함부로 따라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26]
성룡이 와이어나 대역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화 마케팅 측면에서의 과장된 수사일 뿐,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룡이 잠시 다치기라도 하면 영화 촬영 스케줄 자체가 밀려버리는데, 이는 영화사의 입장에서 엄청난 손해이며, 출연 중인 다른 배우들에게도 엄청난 피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장면에서 대역을 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비룡맹장》(1988) 후반부에서의 발차기 장면은, 극장에서 보던 관객이라도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식겁할 정도로 대역이라는 것이 티가 났다.[27] 다만, 성룡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스턴트라면[28] 대역을 쓰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대역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온전히 대역에게 스턴트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수차례 시도해서 좋은 장면을 편집에 넣기도 한다.
현재 성룡의 스턴트 팀인 성가반은 홍금보의 홍가반, 원화평의 원가반과 함께 홍콩에서 손꼽히는 스턴트 그룹이며, 보험회사에서는 여전히 그를 요주의 인물로 기피하는 블랙리스트 1순위라고 한다. 딴지일보에서는 그의 이러한 대인배 기질을 "내 몸이 특수효과" 정신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실제로 기네스북에도 '''현재 살아있는 연기자 중 가장 스턴트 액션을 많이 한 사람(Most stunts by a living actor)'''라는 제목으로 등재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신종 스포츠 파쿠르의 창시자인 세바스찬 푸캉, 다비드 벨 등이 인터뷰에서 성룡의 독창적인 액션 시퀀스에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물론 파쿠르에는 성룡식의 액션 스턴트 외에도 다양한 동작과 기술이 포함되어 있고, 무엇보다 파쿠르의 창시자인 세바스찬 푸캉, 다비드 벨 등은 직업적으로 파쿠르를 연습하고 행하는 전문가들이니 일반인은 따라하지 않는 것이 좋다.
2012년 말에는 무려 22년만에 나온 《용형호제》 3편 격의 《차이니즈 조디악》(중국명은 십이생초)에 출연했다. 제목이 《용형호제 3》가 아닌 이유는 1, 2편의 제작판권을 가진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가 문을 닫았고 영화 판권이 미국 워너브라더스로 넘어갔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참고로 권상우가 조연으로 같이 나왔다. 나온 이 영화에서 나이 예순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무척 힘들어하는데, 이것이 거의 사실상 액션 코미디물로선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말이 많았다. 사실 이 말은 스케일이 큰 '초대형' 액션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의미일 뿐, 액션 자체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라고 본인이 직접 해명했다.
2013년 2월에 개봉한 영화 《차이니즈 조디악》의 프로모션을 위해 한국을 찾아 《무릎팍 도사》와 《런닝맨》에 출연해서 아직 녹슬지 않은 그만의 재치와 인생이야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무릎팍도사》에서 강호동이 "왜 그렇게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연기하느냐"고 질문하자 성룡의 답변이 예술이었다. 예전에는 돈이 없어서 몸으로 때우려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위험한 연기를 해야만 했었지만, 이제는 어떻게 하면 팬들을 즐겁게 해주느냐가 관건이라고 한다. 물론 죽는 게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팬들이 즐거워하면 되니까 그냥 한다고.
결국 2015년 2월 22일 '''스턴트를 가장 많이 한 배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이와 동시에 가장 많은 액션 영화를 제작과 동시에 주연을 담당한 기록으로 하나 더 등재되었다.

3. 특징



3.1. 배우로서


다른 액션배우들에 비해 연기력이 상당히 출중한 편이다. 슬픔에 괴로워하는 연기에 특히나 강한데, 그런 성룡의 연기력을 제대로 맛 볼 수 있는 영화가 홍금보가 바보 형으로, 성룡이 경찰 동생으로 나오는 《용적심》과, 부하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빠진 진국영 반장 역을 맡았던 《뉴 폴리스 스토리》이다. 그 외에도 《러시아워 3》의 마지막 에펠탑 투 등, 눈물을 머금고 소리치는 장면은 성룡만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코믹 무술 이미지가 커서인지, 진지하게 나온 영화들은 해외 흥행이 신통치 않다. 《중안조(1993)》라든지, 《뉴 폴리스 스토리》, 《신주쿠 사건》 같은 영화들은 평은 괜찮을지언정, 해외 흥행은 참혹했다. 홍콩 흥행도 마찬가지로 그다지 안 좋았다. 《중안조》로 대만 금마장 영화제 및 홍콩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수상한 거와 대조적이다. 《더 포리너》는 평점도 나쁘지 않았고 예산에 비해 상당히 흥행해서 이런 징크스도 깨지는 듯.
물론 액션배우인 만큼 전문적인 파이터나 무술가들만큼 뛰어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무술 실력이 제법 강하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워낙 이미지가 코믹하다보니 되려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뛰어난 운동신경과 무술실력이 있기에 액션배우로 이렇게까지 활약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 몸이 엄청난 강골인데 안 그랬으면 하술한 사고를 당했을 때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촬영을 하면서 큼지막한 사고들을 많이 당하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강하다.

성룡의 액션 스타일 분석(한글자막 있음)

3.2. 감독 및 제작자로서


액션배우로도 유명하지만, 그보다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은 바로 감독으로서의 역량. 특히 성룡을 스타덤에 올린 1980년대 중후반의 작품들[29]은 모두 성룡이 감독을 맡았던 작품들이다. 성룡은 첫번째 할리우드 진출 시기에 접했던 버스터 키튼의 영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키튼의 영향을 받기 전의 성룡의 액션이 단순히 쿵푸에 코믹을 가미하는데 그쳤다면, 이후에는 정교하게 계산된 움직임과 과격한 스턴트를 펼쳐 보는 이들의 탄성을 절로 자아냈다. 일부 미국의 평론가나 영화 매니아들은 성룡의 영화를 접한 뒤에 '버스터 키튼의 진정한 후계자는 미국이 아니라 홍콩에서 나타났다'라는 평을 해주었을 정도.
수많은 거장들이 그랬듯, 성룡 역시 지나치게 완벽주의를 추구했기에 제작기간은 갈수록 길어졌고, 매해 홍콩영화의 최대 제작비를 스스로 갱신할 정도로 자본을 엄청나게 쏟아부었다.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가 무너진 이유중에 하나로 성룡때문에 날아간 막대한 제작비를 거론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니...결국 1980년대 후반에 단단히 맘먹고 제작한 미라클의 흥행이 그저그런 수준에 그치고[30], 주윤발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 주성치로 대표되는 엽기코믹물이 대박을 터뜨리자 성룡의 행보는 다소 주춤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성룡이 한 인터뷰에서 "나는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져가면서 영화를 찍는데, 다른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서 농담 몇마디 하고서도 내 영화보다 훨씬 수익이 좋다"라며 한숨을 쉬었다는 루머가 거의 사실처럼 돌아다닐 정도. 게다가 용형호제 촬영 당시의 부상으로 생명의 위험까지 겪었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1990년대 이후에 성룡이 감독을 맡은 작품은 드물어지고 전문적으로 영화를 공부한 다른 감독들이 성룡의 영화를 감독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 구성이나 재미에 있어서는 성룡 초기작에 영 미치지 못한다.
전성기 시절의 성룡은 아직 감독 노릇을 하기 전부터 홍콩 영화계에서 감독에게 함부로 간섭하는 배우 중 하나일 정도로 파워가 강했고,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완벽주의자였다.[31] 감독으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이후로는 더 심해져서, 자신이 감독이 아닌 영화에서도 사실상 감독처럼 권한을 휘두르는 경우도 잦았다. 때문에 감독과 성룡 사이의 불화나 트러블은 수도 없이 많았다.
가령, 《폴리스 스토리 3》를 찍을 당시, 당계레 감독과 성룡 사이에 갈등이 많았던 터라, 당계레 감독은 당시 인터뷰에서 영화 3편을 찍으면서 받을 정도의 스트레스를 이 작품 하나로 받는다며 투덜거렸고, 《중안조》 촬영 당시에는 황지강(黃志強) 감독과 의견 충돌이 있었다. 《취권2》에서는 무술 연출에 관해 의견이 엇갈려 유가량(劉家良) 감독과 대놓고 싸우다가, 빡친 유가량이 초반부의 격투 장면만 완성시킨 후에 아예 메가폰을 놔버렸다고 한다.[32] 이후 유가량은 《취권2》의 흥행에 고춧가루를 뿌리고자 유덕화를 기용해서 《취권3》를 제작, 동시에 같은 제목의 영화가 개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결과만 따지자면 되려 《취권3》가 발리고 만다.
왕정 감독의 전성기에 《성룡의 시티헌터》로 협업한 적이 있었지만, 왕정이 지나치게 다작(多作)하는데다 영화를 대충대충 찍어댄다는 이유로 성룡이 불만을 품어서 촬영 당시에는 사이가 무척 안좋았다. 왕정은 《성룡의 시티헌터》 이후로 이연걸 주연의 《탈출》(원제목은 《서담용위(鼠膽龍威)》)(1995)이라는 성룡을 까는 영화를 만들었다. 장학우[33]가 맡은 룡위란 인물의 기믹을 외모는 이소룡 짝퉁이지만, 성격이나 사생활에서는 누가 봐도 성룡임을 짐작하게끔 만들어놓고 주색잡기와 실제 무술실력은 별로라는 설정을 집어넣었으며, 한술 더 떠서 아예 스턴트를 직접 한다고 구라치고 대역을 쓰는 장면까지 등장시켰다. 그리고 룡위의 매니저를 맡은 아버지[34]와 매니저 진자강까지 성룡의 주변 인물들의 모습과 흡사하게 설정함으로서 누가 봐도 한 눈에 알게끔 만들어서 성룡을 조롱했다. 하지만 후반부에서는 룡위가 부친이 구타당하는걸 보고 분노하여 멋지게 테러리스트를 때려잡는 장면을 집어넣었다. 이에, 제아무리 서로 간의 감정이 좋지 않다고 해도, 상관도 없는 성룡의 주변인들까지 공개적으로 희화화시킨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성룡의 썬더볼트 촬영 당시에도 진가상 감독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는데, 진가상이 기획한 시나리오에 성룡이 개입해서 시나리오를 수정한 것은 물론이요, 진가상에게 감독을 맡겨놓고서 정작 레이싱 장면에는 진훈기와 당계레를 영입해서 촬영했고, 무술 장면은 홍금보에게 연출을 맡겼기 때문이다.
참고로, 성룡은 실베스타 스탤론만큼이나 각본 수정과 제작 과정에 개입을 많이 하는 편이다. 과거 두 사람은 람보 4에 같이 출연할 뻔 했는데, 역시나 각본 문제로 엄청나게 다투다가 성룡이 출연을 거부했다. 원래의 각본대로라면 성룡이 악당으로 나와서 람보 덕분에 갱생하고 람보를 돕는다는 줄거리인데, 성룡은 이 각본을 보고 아시아인 악역이 백인 덕분에 갱생하는 내용은 아시아에 대한 모독이라며 격분했다고. 그런데 어차피 성룡의 요구대로 각본을 바꿨더라도, 제작이나 연출면에서 두 배우가 서로 충돌했으리라는 전망이 압도적이다.

4. 기타 매체와의 관계


인기를 반영하는 듯 서구에서도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나왔다. 바로 《재키 찬 어드벤쳐》 시리즈. KBS에서 방영했다. 오프닝을 보아도 성룡이 나오며 마지막에 진짜 성룡과 몇 마디 인터뷰를 하는 씬도 있고, 주인공 성우가 '''진짜 성룡'''이라는 뜬소문이 있지만, 사실 James Sie와 Paul Robert Langdon이 나눠서 했다. 뒤의 진짜 성룡 목소리와 확연히 다르다.[35] 국내 더빙판에선 성룡의 전담 성우들 중 한명인 김일이 맡았다. 오프닝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약간 미국식 쌈마이 삘이 나는 전형적인 개그 애니메이션.
철권 시리즈의 레이 우롱 등 여타 캐릭터에도 영향(4편부터 성룡의 느낌이 강하다.)을 끼쳤다.
성룡을 주인공으로 한 게임도 가끔 나온다. 2013년 하드코어게이밍 101에서 성룡 특집 기사를 냈으니 여기 언급된 게임 외에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이 링크(英)를 보자.
몇 개 꼽자면, 패미컴PC 엔진으로 발매된 허드슨의 '성룡' 플랫폼 액션게임 《성룡의 액션 쿵푸》,[36] 성룡이 직접 모션캡처를 담당한 PS1로 나온 《재키 챈 스턴트 마스터》가 있고, 제작과정과 인터뷰 영상 스턴트 마스터를 비판한 STAR 영상이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스파르탄 X》도 실은 성룡 주연의 《쾌찬차》가 모티브인 게임이다. 정작 분위기는 원작과 거리가 먼 오히려 《사망유희》류의 이소룡 영화스럽게 나왔지만…그리고 비공식 해적 게임이기는 하지만, 《홍콩97》에서도 얼굴을 비춘다(…).
그러나 흑역사가 있었으니 바로 카네코에서 발매된 《재키 찬 - 쿵푸 마스터》라는 '''실사 격투게임'''이다. 비슷한 게임으로 《모탈 컴뱃》이 있다. 잔혹한 피니쉬까지 비슷하다. 이 게임에서는 성룡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에 그런다면…《재키 챈 - 쿵푸 마스터》는 카네코에서 제안해서 나온 것으로, 《성룡의 썬더볼트》에서 자세히 보면 경주차와 유니폼에 회사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이 게임은 성룡 자신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고 인정한 흑역사다. 마메 롬도 풀려서 직접 해볼 수도 있는데, 뭐라 말조차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묻어나온다. 이 게임에서 성룡은 직접 플레이어블로 고를 수는 없고, 중간보스최종보스로 등장(후속작에서는 셀렉트가 가능하다.), 3가지 배리에이션이 나오며 코스츔과 무술이 달라진다. (동물의 움직임을 흉내 낸) 오형권, 취권, 팔괘장. 코스튬에서 취권은 《취권2》 때의 복장이고, 팔괘장은 《프로젝트 A》 때의 복장이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성룡이든 간에 성룡을 쓰러뜨리면 성룡이 따봉을 준다. 근데 성룡 외에는 그렇다 할 임팩트가 없다. 나머지 플레이어 캐릭터를 담당한 배우나 전체적인 게임 분위기가 너무 싼티 나 보여서…캐릭터의 네임도 담당한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 토어스텐(Thorsten, 장발의 격투가인 남성캐릭터)은 《성룡의 썬더볼트》에서 나온 악당역의 배우이고, 김마리(Kim Maree, 레슬링을 하는 금발 여성)는 《폴리스 스토리 3》에 나오며 샘(Sam, 쿵푸보이)과 라이온(Lion, 사자탈 캐릭터)을 맡은 배우는 성가반의 스턴트팀 리더이다. 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사실 고전 게임 해상도 상으로 봤을 때, 유덕화와 생김새가 비슷하고 해당 캐릭터의 명칭 및 성씨가 하필 Lau(유)라 발생한 오류이다. 실제 유씨 캐릭터를 연기한 사람은 《성룡의 썬더볼트》에 나왔던 스턴트맨 중 한 명이며, 이 사람은 영화 내 몇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링크 그 외에는 봉술을 쓰는 여캐인 영(Young)도 있다. 링크
그런데 이 게임 후에 《재키 챈 - 성룡전설》이라는 후속작이 있다. 캐릭터나 그래픽은 그대로지만 의외로 놀랍게 게임성이 엄청나다. '''지금 나오는 격투게임 못지 않다. 정말이다.''' 대회 영상.
아무튼 이 게임은 AVGN에서도 모탈컴벳 아류작 특선 에피소드에서 언급했는데 거론된 게임들중 그나마 호평한 축에 속한다.
철권 시리즈》의 레이 우롱은 특별한 언급은 없지만, 아무리 봐도 성룡을 오마주한 캐릭터. 현재는 성우 현지화(?)를 추구하는 철권 시리즈답게 레이도 영어를 사용하지만, 전 캐릭터를 일본 성우가 담당했던 3편까지의 레이의 성우는 성룡 전담 성우였던 이시마루 히로야였다.
짱구는 못말려 미방영판의 홍콩편에서도 나온다. 악당의 졸개[스포일러]로 나오지만 실상은 국제경찰 스파이였다.

5. 한국과의 관계


'''저는 반(半)한국인입니다. (我是半個韓國)'''[37]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감소하기는 했지만, 이전에는 추석이나 설날 등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만 되면 성룡 영화를 하나씩은 개봉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TV에서도 최소한 성룡이 출연을 한 영화 한 편씩은 꼭 틀어줬다. 케이블에선 아직도 성룡이 출연을 한 영화를 잊을만 하면 틀어준다. 이는 성룡 영화가 가족들과 보기에 상당히 무난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본 문서에서 설명하듯이 성룡의 작품들은 한국에서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인지도가 높고 따라서 유소년층부터 노년층까지 전체 세대를 아우를 수 있었다. 게다가 성룡 영화는 내용이나 주제가 너무 무겁지도 난해하지도 않고 선정성이나 폭력성도 심하지 않은 코미디 액션 영화가 대부분이어서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보기에 적절한 작품들이었다. 때문에 명절=성룡 영화라는 공식이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이다.
1980년대 방영판에서는 주로 배한성이 성룡을 더빙했는데 《유성검의 대결》(왕우 주연에 성룡 악역. 재미있게도 더빙이 배한성 - 양지운 콤비였다.)이나 《권정》, 《소권괴초》, 《사제출마》 같은 방영판에서 연기했다.[38] 그러다가 1990년대 초중반부턴 장세준이 주로 연기하면서,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나 《미라클》, 《용적심》, 《쾌찬차》, 《용형호제》 같은 영화에서 연기했다. 장세준1997년 8월 불의의 여객기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후에는 홍시호(SBS, MBC), 김일(KBS)[39]을 주축으로 가끔씩은 권혁수(MBC), 윤복성(SBS), 이재용(KBS), 박지훈(MBC) 등 여러 성우가 번갈아 맡기도 했다. 그리고 《취권》은 거의 필수요소 수준으로 꼭 집어넣었다.
무명이었던 젊은 시절,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 - 홍콩 합작의 영화를 여러편 찍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많은 고생을 했고, 덕분에 한국어가 꽤나 유창해서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이는 진짜 한국인으로 오해할 정도. 홍콩 구룡반도의 '스타의 거리'에 있는 그의 동판을 보면, 핸드 프린팅과 함께 본인이 직접 쓴 4개국어로 사인이 적혀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어.
MBC의 《영원한 따거 성룡》이란 프로에서 그의 여러 가지 면모를 보여줬다. 성룡이 젊을 시절, 한국은 홍콩 영화의 촬영지로 인기가 많았는데 홍콩 땅이 좁다보니 영화 촬영할 배경도 한정적이고, 중국 대륙은 아직 개방 전이라 영화 찍기 힘들었던데다 한홍 합작영화는 많은 규제를 피할 수 있는 여러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불국사창덕궁 등에서 로케 촬영을 하게 되면서 오래 지내게 되었고[40] 이 당시 한국 음식과 문화를 익혔다고 한다. 방송 중 식사로 육개장을 먹는데, 정말 빨리 먹는다.[41] 먹고 나선 휴지로 자리를 깨끗이 닦는다…! 이 장면 후에 고아원 어린이들과 축구를 하고 짜장면을 먹는데, 김치를 달라고 귀여운 투정도 부린다. 근데 자기가 좋아하는 배추김치가 아니라 생소한 열무김치가 나오자 잠깐 시무룩해하지만, 싫은 내색 없이 맛있게 먹는다.
자신이 한국에서 밑바닥생활을 할 적에 하루 종일 쫄쫄 굶은 날이 있었는데, 이날 밤에 거리를 하염없이 걷다가 길가에 걸터 앉아 소리죽여 훌쩍거리고 있던 와중 어떤 한국인 부부가 자신에게 육개장 한 그릇을 사주었고 그 때의 감동과 고마움을 잊지 못 한다고. 당시는 한국어가 많이 서툴 때라 그저 고마움의 표시만 했다고 하는데 그게 한국에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고 아직까지도 고마워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 예능에서 A(음식이름)vs육개장을 고르는 게임을 할 때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항상 육개장을 고를 정도.
당시에 한국 여성과 사귀며 약 8년간 장거리 연애를 했다고 밝혔다. 당시에 인기배우였던 정윤희와 열애설이 나기도 했지만 이것은 사실무근으로 판명. 후에 폐간된 영화 잡지 《로드쇼》와의 인터뷰에서는 그 여성을 진정으로 사랑했었지만, 여성쪽 집안의 반대로 결국 헤어졌다고. 그리고 1984년에 대스타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몰래 그녀를 다시 만났다고 했다. 이미 그녀는 유부녀가 되었지만, 서로 오래전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고. 《무릎팍도사》에서도 그 여성에 대해 언급했는데, 만약 그 시절에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계속 연락을 취했을 것이고 아마 결혼했을 거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한국어도 이 장거리 연애 덕분에 능숙해졌다고 하는데, 당시 장발단속에 걸렸다가 한국어가 능숙해 도리어 한국인이 중국인 흉내를 내는 게 아니냐며 경찰서로 끌려간 적도 있었다고. 과거 하루하루 먹을 것을 걱정할 정도의 시절을 겪어서 그런지, 여러모로 근검소박한 생활 태도를 보여줬다. 또한 이 방송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콜렉션을 공개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취권은 코믹한 무술을 만들려던 성룡이 에 취한 채로 펼치는 권법을 만들면 어떨까 궁리하면서 동작을 하나하나 만들다가 탄생한 무술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중국의 지당권 계열 무술 중에 이미 취팔선권이 존재한다. 시조가 바로 수호전의 노지심. 거기에 다른 유파로는 이태백류가 있다는 말까지 있는데…이건 믿거나 말거나 수준인 듯. 물론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 접한 취권의 동작과는 사뭇 다르다. 취팔선에서 '술'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어 독자적으로 개량한 것으로 보는 게 맞을 듯.
한편, 신인 시절에 최무룡과 한국 - 홍콩 합작영화에서 대결을 펼친 적이 있는데, 훗날 《신화》에서 최민수와 대결, 보기 드물게 부자 2세대와 맞겨뤄본 사나이가 되었다. 그 밖에도 한국에서 촬영하거나 한국 - 홍콩 합작영화에서 여럿 나왔는데, 이 시절 악당 1, 2, 3으로 나오던 배우 가운데 조춘도 나와서 성룡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
한국에 오래 체류했었고 한국 여성과 국제연애까지 했던 덕분에 한국말과 한국노래를 꽤 할 줄 알았다. 국내 예능에서 가요를 부르는 성룡(유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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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처음 방문했을 때, 당시 한국의 대표 개그맨 인 이경규와 만나서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다시 방한했을 때, 이경규가 '''그때완 다르게 너무 늙어서 못 알아봤다며''' 놀랐지만, 다시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포즈로 같이 사진을 찍었다.
1989년, 영화 《미라클》 홍보를 하러 한국에 왔는데, 당시 한국민속촌을 한복을 입고 다니다가 때마침 수학여행 온 일본 여학생들과 만나서 여학생들이 성룡의 사인을 받느라 난리법석이 일어난 적도 있다. 이 당시에 KBS2 방송에 나와 유쾌한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내가 한국말 많이 잊어서 많이는 못해요."라고 웃으며 인터뷰를 했었다.[42] 사실 '''과거 일본에서도 성룡의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유투브에도 성룡의 일본방송 출연 영상이 많이 남아있다. 한국보다 더 한국을 대표하는 연예인이 욘사마라면, 홍콩영화의 상징은 성룡이라고 봐도 큰 이견은 없을 정도.
2009년에 자신이 소유한 전 재산에 대해 기부 의사를 밝혔다. 이때 기자가 "아들이 있으면서 왜 물려주지 않고 기부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자, "내 자식에게 능력이 있다면 내가 물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벌 것이고, 내 자식에게 능력이 없다면 물려줘봤자 탕진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또한 기부를 많이 하기로 유명한 김장훈에게 '''직접 한국어로 편지를 보내'''(쓴 사람이 스티브 유…) 그의 기부활동을 응원하고, 자신도 4,00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좀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이 4,000만 달러란 금액도 금액이지만, 애초에 김장훈은 타인에게 돈을 받아 기부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아마 그런 이유에서 실제로 제의를 했더라도 김장훈 측에서 안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외에도 비공식으로 종종 내한하여 고아원에 기부를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군입대를 피해 해외도피한 스티브 유의 중국 활동을 밀어주기 시작하면서, 2010년에 개봉한 《대병소장》(大兵小將: Little Big Soldier)에 같이 출연하기도 했다. 국내에선 그다지 이슈가 안됐지만, 스티브 유의 군입대 기피를 지적하는 이들 중에서 이런 부분을 들어 성룡까지 까는 이도 일부 있었다.
2011년 《런닝맨》에서 영상을 통해서 출연한 적이 있었다.(홍콩 특집) 미션 지령자로서 출연하여 유재석을 메뚜기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 3월 2일 녹화본에서는 슈퍼주니어 시원과 함께 실제로 출연했다. 그리고 해당 화에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귀요미스러움과 입담, 예능감으로 말도 통하지 않는 멤버들과 잘어울리며 웃음을 선사했다. 다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체력이 딸리는지 후반부엔 달리지 못하고 걸어다니기도 했다.(...)
의외로 유창한 한국어 발음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어려보인다는 말에 자신이 40세(!)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멤버들이 항의하자 '''"그럼 41?"''' 하는 모습이 압권. 거기다 하하의 폰번호 요청에 "넌 여자 아님!! 여자만 됨!"이라고 하며 송지효를 보다가 월요남친의 견제에 한판 붙자며 결투자세를 취하는 등 출중한 예능감을 뽐내셨다. 은근히 욱하는 기질도 있어, 유재석이 실수를 하자 괴성을 지르며 퍽하고 한대 치다가 다음턴에서 본인이 실수를 하자 "어 미안^^"이라고 사과를 하며, 유재석을 황당하게 만들기도 했다. 알람토크 때에는 덩실덩실 춤을 추거나 불리한 질문을 하며 상대팀들을 탈락시키는 등 종횡무진 활약. 막판에 한국의 팬들에게 인사를 해달라는 말에 '''사랑해요 쪽쪽쪽쪽쪽!!''' 하며 키스를 날리는 모습이 연세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귀요미하다.
한때 한국에선 대박 배우였고, 1979년에 개봉한 《취권》만 해도 무려 서울관객 89만 관객이라는 엄청난 대박[43]을 거둬들이면서 흥행 보증수표 역할을 했다. 그렇게 90년대 후반까지도 기본은 하던 흥행세를 이어 나아갔으나, 2000년대 와선 한국에서도 한풀 흥행이 꺾이면서 《신해혁명》처럼 개봉도 못하는 일도 벌어졌다. 2013년엔 권상우랑 합작으로 나와 화제가 된[44] 《차이니스 조디악》 개봉 전에, 한국 방문 및 한국 공중파 방송에 나와 열심히 얼굴을 드러냈지만, 전국관객 27만에 그치는 기대 이하 흥행을 기록했다.
이병헌의 결혼식에 축하 영상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했는데, 그때도 유창한 한국어를 선보였다.
2014년 1월 23일 목요일, 《해피투게더》에 성룡은 나르샤, 최시원과 같이 출연하여 야간매점 메뉴 등극까지 성공했다. 다음 영화에 초청하겠다고 해서 출연진들을 포섭했으나, 사실은 그냥 구경 오게 해주겠다는 페이크였다.
성룡의 친한파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예로, 홍콩에 가면 할리우드처럼 명예의 거리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성룡의 핸드프린팅과 사인에는 한글로 '성룡'이라고 함께 적어 놓고 있다. 그리고 2014년 1월에는 《폴리스 스토리 2014》의 내한 레드카펫 행사에서 스스로를 半한국인으로 말하기도. 링크
2천년대 중국에서 우리도 헐리웃과 한류를 넘어서자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가 한류 폄하 발언을 했다고 기사가 난 적이 있는데, 한밤의 tv연예에서 성룡 자택으로 직접 취재를 하러가자 그들을 맞이하면서 철저한 오보이자 오해라고 반박한 적이 있다.[45] 이때 재미있었던 점은 MC였던 서경석이 성룡팬인지 대놓고 취재화면 내내 성룡 쉴드를 쳤다는 것. 그 정도로 그 나이대의 한국 남성들에겐 주윤발과 함께 어린 시절의 우상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조금만 자세히 알아보면 폄하는 얼토당토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간에는 성룡이 "대장금은 마치 중국의 원조인 침술을 한국 것인양 우긴다"라고 말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이 발언의 당사자는 성룡이 아니라 장궈리라는 배우로, 둘의 발언이 같은 기사로 보도되면서 마치 성룡이 한 것 마냥 소문이 퍼졌다. 성룡이 했던 발언의 요지는 "한국 배우에 홍콩인들이 열광하며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실어주지만, 반대로 한국에서는 홍콩 영화판을 시장으로 취급하지도 않을 정도다. 이 정도로 현 홍콩 영화 시장이 무너졌으며, 우리가 바뀌지 않는다면 이러다 홍콩 영화 진짜 싸그리 망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즉 홍콩 영화인으로서 홍콩 영화의 몰락을 안타까워하고 자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지, 한류를 무시하는 발언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소재의 다양성과 좋은 시나리오로 승부하려는 한국 영화에 비해 현 홍콩 영화는 스타 몇 명이 돌려막기식 출연을 하고 있으며 B급 영화 위주로 물량으로만 승부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발언도 했다. 즉 한류 폄하는커녕, '''자기 나라 영화계를 대차게 까는''' 발언이다. 성룡이 아무리 친한이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속한 홍콩 영화계의 명운을 먼저 걱정하는 것은 당연지사.
통영시 명예시민 겸 홍보대사다. 해저터널이나 미륵산 케이블 카성룡이 직접 쓰레기를 들고 있는 사진과 함께 쓰레기 좀 버리지 말라는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한국에서 자신이 프로듀싱한 7인조 보이그룹 JJCC를 출범했으나, 이후 인기를 얻지 못하고 활동의 거의 없으며 해체된 듯 하다.
2014~15년에 성룡 영화들이 국내에서 우르르 재개봉이 이뤄졌다. 그런데 70년대 영화 소권괴초나 비도권운산을 비롯하여 프로젝트 A, 쾌찬차, 폴리스 스토리, 대복성 등이 재개봉하는 건 좋은데 전국에서 1~2개 정도 상영관에서 1, 2번 정도 대충 상영한 것이 전부였다. 홍보도 거의 없었고 포스터도 정말로 대충 만들었다. 사실상 꼼수 개봉으로 대충 상영한 거다. 덕분에 관객이 무려 1~10명 수준이었다.(...) 그나마 비도권운산이 전국 342명을 모았고 미라클이 전국 5천명을 기록했다. 그런데 굳이 위안(?)을 삼자면 성룡 영화 뿐만 아니라 오래된 재개봉 영화들이 대부분 이런 취급을 받는게 현실이다. 물론 재개봉하여 되려 첫 개봉보다 대박을 거둔 재개봉 관객 50만에 가까운 전설인 이터널 선샤인이라든지 전국 30만 관객을 넘긴 타이타닉올드보이같은 경우도 있지만 이는 상당히 특별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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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9일 평창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도 참여를 했는데, 김여정 등의 북한 특사단이 온통 언론의 주목을 가져가서 크게 다뤄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후술된 2019년의 오성홍기 찬양에 2020년에 홍콩보안법 지지 표명 등의 행보로 인해 국내에서 주가가 많이 내려간 상황이다.

6. 비판 및 논란



6.1. 정치적 논란


배우로서는 아시아 영화계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는 레전드지만, 그의 정치적 행보는 비판을 받는다.
사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정치적 색채를 별로 내보이지 않았다. 다만 A계획속집에서는 등장인물 마여룡의 입을 빌어 대륙인과의 구별되는 홍콩인의 독자성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1989년 5월 30일에는 천안문 6.4 항쟁을 지지하며 "중화 민주주의 헌정 콘서트"(民主歌聲獻中華)를 여는 등[46] 베이징과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 자신이 각본에 참여한 여러 작품(프로젝트 A, A계획속집)을 봐도 중화주의자적인 면모는 확실했다. 그러니까 홍콩인에 대한 베이징의 간섭은 거부하지만, 홍콩인이 대중화의 일원이라는 것은 전혀 부인하지 않았다.[47][48]
하지만 90년대부터 홍콩 자체영화가 쇠락하고 폴리스 스토리 3부터 중국 시장을 겨냥하거나 중국이 배경인 영화를 내면서 중국에 자주 드나들고 중국 고위층의 호의적인 대접을 받으면서 친중적인 성향이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애국주의만을 강조한다면 그려려니 넘어가줄만 하지만 지나치게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면서 눈총을 사고있다. 특히 2009년 4월에, '''"중국인은 강력한 통제를 받아야 한다. 지나친 자유는 홍콩대만처럼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발언을 해서 비난을 받았다.[49] 특히 홍콩이나 대만 등 서방식 제도가 실시되고 있는 지역으로부터는 더 강하게 비난을 받았다. 다만 이 발언이 나온 맥락을 살펴보면 앞뒤가 잘린 채 와전된 말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문제의 발언은 '''중국 내의 영화 제작'''에 대한 인터뷰에서 나온 것이다. 링크 해당 인터뷰에서 성룡은 규제가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던 홍콩의 영화 제작환경에서 작품성이 형편없는 영화가 무분별하게 쏟아져나왔던 것을 염두에 두고, '''중국의 영화 산업'''에 일정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50] 해당 발언 부분만 두고 마치 인민에 대한 통제를 주장한 것처럼 전하는 것은 편집에 의한 과대해석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2008 베이징 올림픽 성화봉송 때는 티베트 유혈진압사태에 대한 반발로 프랑스 등에서 봉송되는 성화를 끄려고 하는 등 크고 작은 시위가 생기자, '''"성화봉송을 막으려하는 자는 따끔한 쿵푸의 맛을 보여주겠다"'''라는 발언을 했다가 각종 시사평론가들의 풍자만평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발언들에 대해서, 성룡 본인이 중국 본토에도 진출하여 연예활동하는 입장이라, 중국 정부나 중국 국민에게 밉보이는 발언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란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옹호하는 소리도 있다. 성룡은 다작왕으로 중국대륙 내수용 작품도 만만찮게 다작하므로 어쩌면 이러한 친중국적 정치 행보는 영화를 위한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것. 허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회사를 비롯해 딸린(?) 식구들이 많으니, 주윤발처럼 중국 입장에서 거슬릴 수 있는 언행은 하지 않더라도, 이연걸[51]이나 다른 홍콩 배우들처럼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될 거 가지고 왜 그렇게 나서야했는가 하는 의문은 들기 마련. 특히나 성룡은 누구보다도 자유 홍콩의 산물이자 그 번영을 상징하다시피한 인물이기에 그의 정치적 스탠스는 더욱이 의아한 부분이다.
이런 태도로 인해 기회주의자로 비판받기도 하나, 그가 현재 가장 많은 인기와 지지를 얻는 지역이 미국이라는 점과 중국이 개선해야할 점에 대해서도 꾸준히 쓴소리를 한다는 점에서(이런 발언들은 잘 알려지지 않는 편이다.) 그 의도가 단순히 기회주의라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이 점에 대해 굳이 추측을 해보자면, 그에게 홍콩과 미국에서의 연예계 생활이 단순히 장밋빛으로 비춰지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성룡은 삼합회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홍콩 연예계를 누구보다 체감했던 사람이고 이와 무관하지 않게 무법지대와 같았던 홍콩 치안의 수준도 잘 알고 있었다.[52] 아마 이런 개인적인 경험으로 인해 중국 정부의 규제와 질서에서 대안을 찾고 싶은 심리가 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성룡은 할리우드에서의 경험도 긍정적으로만 반추하지 않았던 것 같다. 1980년대 초반 할리우드에 진출했을 때 상당히 푸대접을 받은 것도 있지만,[53] 성공한 이후에도 미국에서 영화 제작을 하면서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돌아가는 것에 자주 답답함과 한계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54] 완고한 감독 기질이 있는 그로서는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제작하면서 흥행과는 별개로 심적 부담과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허나 이런 것은 추측이고, 실제 이유가 어찌 되었든 성룡 스스로가 친중국적인 정치 행보를 보인다는 점은 명확한 사실이다. 성룡 본인이 무리수 돋는 발언까지 해가며 하나의 중국 원칙에 어긋나는 상황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도 보수적인 중화민족(혹은 한족)이라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참고로 중국 국민당이나 중국 공산당이나 둘은 모두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고 있으며, 대만의 민주진보당은 이에 반해 대만 독립을 추구한다.
성룡이 아직 홍콩인이었던 시절 홍콩 노년인들은 영국 지배하에서 상당히 차별을 받았고, 이는 1960년대 홍콩내의 반영폭동 으로 촉발된 바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친중성향에 영향을 주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어쨌든 전인대의 정협 의원으로까지 활동하는 걸 보면, 정치적으로는 확실히 베이징 정부인사들과 뜻을 같이 하는 듯. 2014년 홍콩 민주화 시위에 대해서도 시위대의 자제를 촉구하는 등 친정부적인 건 확실해보인다. 시위대를 지지한 주윤발과도 여러모로 비교되고 있다. 링크
하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바로 이해가 되는 면도 있다. 홍콩의 중국 반환이후 홍콩의 영화시장은 쪼그라들고 쇠퇴하고 있으며, 중국 본토 영화 시장은 계속 커져서 세계 최대가 될 것이 확실하며, 성룡은 이미 은퇴할 나이가 넘은 노년이지만, 중국 연예인 최고수익 순위 1위에 랭크될 정도 중국에서 얻는 그 수익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사실 성룡도 1990년대 중후반 홍콩스타들이 너도 나도 할리우드로 진출할 때 잠시 간을 본 적이 있는데, 러시아워 시리즈, 상하이 눈, 턱시도의 실패로 더이상 할리우드에 미련을 갖지 않는 듯하다. 영어 연기의 어색함 및 인종적 문제 때문에 할리우드에서 성룡은 철저히 동양계 무술 특화 코믹 캐릭터로 겉돌았으며, 비슷비슷한 스테레오 타입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성룡에 대한 할리우드의 반응은 식상하다는 반응이었고, 성룡 또한 이런 배역만 맡기는 할리우드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진 듯.[55] 오히려 자신을 영웅으로 대접해주고, 훨씬 더 큰 수익을 안기는 중국 시장을 자신의 주무대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히 물주인 중국 국민 정서에 맞춘 발언을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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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의 남부 분원 완공 기념식에 마잉주 당시 총통 등과 함께 참석했다. 중화 문화의 총본산으로서 국립고궁박물원의 위상[56]이나 마잉주 정부의 친중국적 양안관계 정책 등을 고려한 듯 보이지만, 과거 대만의 민주주의를 비하했던 전력을 생각하면 엇갈릴 수 있는 행보.[57] 덤으로 진품이 아닌 모조품을 분원에 부조 작품으로 기증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미국 언론에서도 성룡이 중국 애국주의 입장에서 반미적인 국제관을 가진 것을 조금 의외라는 식으로 지적한 바 있다. 2013년의 한 중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타락한 나라"라고 비판했다. 링크 본인이 할리우드 진출 초기에 당한 게 있으니 그렇겠지만...[58] 하지만 성룡은 배타적 중화주의자라기보다는 아시아 우월주의자라고 볼 만한 여지도 있다. 중국에서 떼돈을 버는 성룡 입장에서 "잃어도 무방한 시장"인 한국과 일본에는 아직까지 모두 우호적인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 국제정치학적인 입장에서 한일은 중국과 대립하는 면이 있지만, 성룡이 미국에는 저렇게 극언을 하는 반면 두 나라에 대해서는 절대로 반감을 공개적으로 내비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성룡같은 중국인 정체성이 강한 사람들은 홍콩 내에서 차별을 받았고, 이는 1960년대 홍콩내의 반영폭동으로 촉발된 바 있었다.
2018년 9월 베이징사범대학 뉴미디어전파연구센터 등이 발간한 ‘중국연예인 사회책임연구보고서(2017 - 2018)’에서 0%로 최근 행적이 묘연한 판빙빙과 함께 공동꼴찌를 기록했다. 중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자주 개진했다는데 정작 해외에선 중국공산당에 아부한다고 까이고, 국내에선 사회공헌이 없다고 까이는 것이다. 관련기사 관련기사2
2019년 6월엔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밝혀 시위대측의 비난을 받았다.#
2019년 8월에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 중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며, 오성홍기는 전 세계인의 존경 대상입니다. 홍콩은 제가 태어난 곳이고 고향입니다만 중국은 제 조국입니다"라고 발언한 바 있고, 자신의 웨이보에 자신은 오성홍기지킴이를 자처하고 있다. 일부 클릭수를 유도하는 포털에 이 포스팅이 소개되어서 중국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한국 네티즌들의 반감을 사고 있다. 다만 성룡의 포스팅은 중국 연예인들 정부가 지정해준 포스팅을 리포스팅한 것으로 딱히 성룡이 오버하는 것은 아니다. 호가, 우징, 심지어는 홍콩 국적 아이돌 잭슨(GOT7)#, 대만 국적의 라이관린# 등의 대부분의 중국활동의 중화권 탑스타들이 모두 같은 리포스팅(8월 4일자)을 하고 있다.[59]
2019년 11월 8일 남중국해 분쟁에서 중국의 영유권을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분쟁 당사자인 베트남에서 입국 금지를 당했다. 기사
성룡은 2020년 5월 30일에 홍콩 국가보안법을 배우 증지위, 리자 왕, 제작자 임건악, 황바이밍 등 영화계 인사를 비롯해서 지지 성명을 했다.#

6.2. 사생활 논란


홍콩에서는 뒷세계에 연루된 사생활 및 난잡한 여성 문제로 인해 그다지 평이 좋지 않다. 오죽하면 본명인 房仕龍을 비꼬아 房事龍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삼합회와 관련된 루머를 홍콩인들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일 정도. 언론에 공개된 사실만 보면, 처음에는 등려군과 사귀다가 임봉교와 양다리를 걸쳤다. 그러다가 등려군을 버리고 임봉교를 택했는데 문제는 임봉교가 이제 갓 스타덤에 오른 상태에서 성룡의 아들 방조명을 임신한 탓에 배우로서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은퇴해야만 했다는 사실. 그렇게 임봉교와 부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룡은 영화배우 오기리(吳綺莉, 우치리, 일레인 응)와 불륜을 저질렀고 1999년 결국 딸 오탁림(吴卓林, 우줘린, 에타 응)[60]을 사생아로 낳고 만다. 참고로 성룡은 1954년생으로 등려군이 성룡보다 연상인 1953년생이고 임봉교도 등려군과 동갑인데 오기리는 성룡의 조카뻘인 1973년생이다. 성룡의 아들 방조명이 1982년생이라 오기리가 방조명한테는 '누나'에 해당되는 나이이니...
한국에서는 2000년대까지 성룡의 사생활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대표적인 친한파 중화권 배우였기 때문에 건강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홍콩 대중들에게 이미 1980년대부터 성룡의 난잡한 사생활은 카더라로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1990년대가 되어서야 성룡이 공개적으로 활동한 대륙에서도 성룡에 대한 이런저런 가십성 소문은 상당히 많다. 다만 자국의 월드스타에 대한 흠집내기를 꺼렸기 때문인지 홍콩 언론은 그다지 성룡의 사생활에 대해 별로 그다지 캐내지 않았다.
2017년, 딸 오탁림은 연인과 함께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에 성룡은 아이가 원하면 그걸로 됐다고 하였고,[61] 모친 오기리는 오탁림을 키우지 않아서 좋고, 손자 볼 일도 없으니 더 좋다고 기사에서 밝혔다(...).[62]
성룡은 1999년 펴낸 자서전에는 이런 사실을 밝히지 않았지만 노년이 다되어 펴낸 자서전 <Never Grow Up>(2018)에서는 성매매, 외도, 사생아, 음주운전 등의 흑역사를 솔직히 고백했다.

7. 가족


  • 처 - 임봉교(林鳳嬌, 1953) 이름이 조금 알려진 여배우였으나, 1982년 혼전임신을 하고 결혼했다. 당시 한창 뜨던 성룡의 인기를 위해 10여년간 비밀에 붙이고 철저히 무명으로 살았다. 사실 혼인은 유지하고 있지만 출산 이후부터는 사실상 별거하는 듯 하며, 공개석상에 함께 나타난 적은 거의 없다.
  • 아들 - 방조명(房祖名, 1982) 언론의 눈을 피해서 미국에서 출생. 미국 명문대인 윌리엄 앤 메리 대학을 다녔으나 중퇴했다. 2009년 미국시민권 포기. 중국에서 대마초를 피우다가 걸려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2019년 현재 중국에서 연예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다.
  • 딸 - 오탁림(吳卓林, 1999) - 애인 오기리(吳綺莉, 1973)로부터 출생.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으로 유명하며, 애인과 약혼했다. 성룡은 한때 자살을 기도한 딸에게 미안함을 표시하기는 했지만, 애인이었던 오기리와는 사이가 매우 안좋은 듯. "애를 어떻게 키운거야"라고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오기리의 자살소동에는 모녀관계의 악화도 원인이 있었던 듯 하다. 성룡이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성룡은 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 매달 1800여만원의 양육비를 오기리에게 지급했다고 밝혔다.

8. 여담


  • 본명은 진항생(陳港生, 표준중국어로 천강성, 광둥어로 찬공상)[63]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은 방사룡(房仕龍, 팡스룽)이다.[64][65] 아버지 방도룡(房道龍, 팡다오룽)이 국민당군스파이(!)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66] 본명을 숨기고 '진'씨로 가장했다.[67] 그래서 성룡의 아들은 후명인 '방조명(房祖名, 팡쭈밍)'[68]으로 활동하고 있다.[69]
  • 1990년대 대한민국에서 추석, 설날 명절 때마다 만나는 반가운 스타이기도 했다. 명절 특선영화 단골손님이었기 때문.[70] 같은 사정의 외국인 배우로는 미스터 빈을 연기한 로언 앳킨슨이 있지만, 이쪽은 성룡과 달리 배우보다 캐릭터 자체가 더 유명한 편이다. 2000년대 와서는 많이 잊히고 있다.
  •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굉장한 인기를 누렸고, 인기에 힘입어 일본에서 일본어로 부른 음반도 출시해 활동한 적이 있다. #유투브 링크 실제로 80년대 일본에서는 성룡 인기의 영향으로 과감한 스턴트 액션 영화가 여려편 만들어졌다. 사나다 히로유키 같은 배우도 이 붐에 편승해 무술신과 스턴트신을 직접 해내는 영화에 자주 출연했다. 일본에 방문도 자주 했으며 우리나라처럼 일본도 성룡에게 상당한 친숙함을 느낀다.
  • 재밌는 것은 성룡은 한국에서 표준중국어(보통화)를 쓰지만(한국 영상) 일본에서는 광동어(홍콩어)를 구사한다는 점이다.(일본 영상) 유럽에서는 영어를 쓴다.(러시아 영상) 이건 중국 영화의 더빙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홍콩 영화가 개봉될 때 한국에서는 주로 보통화 더빙 버전으로, 일본에서는 원본 광동어 버전으로 개봉했기 때문. 그래서 양국에서 각각 익숙한 이미지의 언어로 말하는 듯하다. 또 이런 탓에 우리나라는 한국식 이름인 성룡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홍콩식 이름인 재키 챈이라고 부른다. 당시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광동어가 아닌 표준 중국어로 더빙된 것이 상영된 이유는 홍콩 국내판이 아닌 대만 수출판을 수입했기 때문이다. 홍콩 국내판보다 수입가가 저렴했기에 대만 수출판을 수입한 것이라고 한다.
  • 2020년 포브스 선정 전세계 배우 수입 순위 10위를 기록했다.#
  • 2017년 중국 유명인 수입 순위에서 5위를 하였다.

성룡의 실제 육성
  • 천진난만 하고 장난스런 외모와는 달리 실제 목소리는 굵직하다. 장세준의 더빙[71]과 비디오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의외라고 생각할텐데, 사실 1980년대 한국에서 상영된 성룡의 목소리는 성룡이 아닌 표준중국어 전문 성우가 더빙한 것이다. 광동어판은 모두 등영홍(鄧榮銾, Charles Tang)[72]이라는 홍콩 성우가 더빙을 했다.[73] 일반적으로 광동어는 성조가 많기 때문에 한국인이 듣는 입장에서는 표준중국어보다 거칠게 느껴진다. 성룡의 실제 목소리가 사용된건 90년대 이후부터이다. 지금이야 나이가 들어서 외모와 목소리의 갭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전성기 때에는 목소리와 외모의 갭이 상당했다.
  • 감독이자 영화제작자로서의 성룡의 현장지휘는 나름 악명이 높은 편이다. 홍금보가 거친 분위기로 스튜디오를 휘어잡는 독재자 스타일이라면,[74] 성룡은 깐깐한 결벽증 잔소리꾼 스타일이라고. 특히 스태프들이 촬영 현장에서 멋대로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절대 허용치 않는다고 한다. 성룡은 결벽증적인 부분이 있어서 주위가 지저분한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하다못해 식사를 하고나서도 자기가 직접 휴지로 식탁을 깨끗히 닦아야 직성이 풀릴정도. 영화촬영에서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완벽하게 마음에 들때까지 계속해서 재촬영을 반복해서 다들 나자빠지기 일쑤... 홍금보와 함께 촬영장에 있으면 의견 차이 때문에 서로 투닥거리기 일쑤라 촬영 스태프들을 두렵게 한다고 한다.
  • 2014년 8월 22일엔 성룡의 호화빌라에서 아들 방조명이 대만배우 가진동과 함께 대마초를 피우다 걸려 세간에 큰 충격을 줬다. 성룡도 상심이 큰 듯 추측성 기사 보도를 자제해줄 것을 당부했다. 다만 마약에 엄격한 중국이라도 당연히 다른 마약에 비해 실제 위험성이 거의 없는 대마초는 처벌 수위가 그렇게 높지 않은 수준이다. 실제로도 6개월 복역 후 출소했으며, 2016년 1월엔 부친의 항일영화로 복귀설까지 돌고 있다. 1 2 문제는 성룡이 마약퇴치 홍보대사라서 더 큰 논란이 있었다는 점이다.
  • 자신의 개인 경호원이기도 했고, 《취권2》에서 굉장한 발차기 실력의 악역으로 나오기도 했던 노혜광과 사이가 틀어지자, 퇴직금도 주지 않고 내쫓아서, 의리없는 스타로 뽑히기도 했다. 링크 그러나 이 부분은 지나치게 과장된 오보인데, 이부분은 항목을 참조할 것.
  • 성룡은 골수 폴더폰 마니아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폴더형 스마트폰인 삼성 심계천하 시리즈 SCH - W213, SM - W2014의 광고 모델을 자청했다고 한다.
  • 중화권에서는 성룡이 광고를 찍거나 홍보하는 상품/회사는 망하거나 악재가 겹친다는 징크스가 있다. 특히, 2014년 성룡의 아들인 팡쭈밍이 대마초를 피우다가 잡혔는데 정작 성룡 본인은 중국의 마약금지 홍보대사였다.(...) 그래서 반공주의 성향을 가진 중국 네티즌은 "성룡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해야한다."는 드립을 치기도 한다. 이는 '펠레의 저주'의 실상과 비슷한데, 성룡과 같은 톱스타는 당연히 출연하는 광고 및 홍보 자료가 매우 많으므로, 성룡과는 상관없이 회사의 내외부 문제로 악재를 겪는 절대적인 사례가 많다는 것 또한 당연하다. 게다가 성룡은 광고 섭외가 들어오면 잘 거절하지 않고 최대한 이를 받아줄 때가 많아서 상품의 품질이나 경영 상태가 좋지 않은 상품 및 회사의 광고에도 자주 출연한다고.
  • 탈모가 있다. M자 탈모인데, 장발은 가발을 쓰고 다니는 듯 하다. 지금껏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지만, 영화 《대병소장》의 NG영상에서 공개되었다. 진행 정도로 보아 상당히 오랫동안 탈모가 있었던 듯. 홍콩에는 성룡이 모델로 나온 발모제 및 샴푸가 있다. 하지만 이것도 허위 광고 논란에 휩싸이면서 관련 광고에서 했던 대사도 훌륭한 네타 소재가 되었다. 심지어 바이두에서 'duang'이라고 입력하여 검색하면 특수 효과가 뜬다.
  • 2014년 보이밴드 아이돌JJCC를 자신이 직접 프로듀싱했다. 멤버들이 죄다 키가 훤칠하다. 멤버 평균신장 182cm에 달할 정도로 체형이 좋다. 실제로 JJCC에서 180cm가 안되는 멤버는 에디 혼자뿐이다. 원래 2014년에 이 아이돌을 결성할 때 5인조로 결성했으나 2015년에 성룡이 직접 오디션을 개최해서 2명을 추가해 7명이 되었다. JJCC의 멤버 상당수가 이미 청가반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 그러나 그 JJCC는 망했다. 율과 산청을 프로듀스 101 시즌2에, 심바를 믹스나인에 각각 참가시켰는데 셋 모두 60위 안에 들지도 못하고 하위권의 성적으로 극초반 탈락했다. JJCC는 성룡이 인맥으로 있다 뿐이지 완전히 에이젝스와 동급이다.
  • 2016년 4월 파나마 조세회피처 자료 분석 결과 6개 이상 페이퍼 컴퍼니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발표되어 이미지를 구겼다.
  • 2015년 5월 20일 연기학원을 설립했다. 관련기사
  • 2017년 6월 18일 제 85회 르망24시 내구 레이스의 주인공은 성룡이 소유한 '재키 챈 DC 레이싱'이었는데, 경기내내 경쟁자들을 압도적으로 누른 것도 모자라서 거대 자동차 제조사인 토요타 레이싱 팀을 누르고 한 때는 포르쉐 레이싱 팀의 모든 차까지 제침으로서 종합 2위, 3위[75]를 차지하는 경사를 누리게 되었다.
  • 익스펜더블 시리즈에 몇 번 출연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 대만하고 아주 인연이 깊다. 성룡의 아버지부터가 국민당군 출신이고 전 여자친구인 등려군과 부인인 임봉교 역시 대만출신이다.
  • 2018년 12월, Never Grow Up이라는 자서전이 나왔는데 내용이 매우 충격적이다. 오탁림에 대한 이야기 등 이미 기존에도 잘 알려져있던 사실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콤플렉스를 커버하려고 친구들을 위해 하루저녁 200만 달러짜리 디너파티를 베풀기도 했고, 영국에서는 출연진을 모두 데리고 나가 2만 달러짜리 고급시계를 사주는 등 500만 달러어치 쇼핑을 한 적도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성매매와 음주운전, 도박을 일삼았다는 충격적인 일도 털어놓고 있다.
  • WEC의 레이싱팀의 공동 오너이다. 팀 이름은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잭키 찬 DC 레이싱, LMP2에 참가중이다

9. 성가반


성룡이 키워낸 스턴트맨들과 함께 작업했던 무술가들의 집단. 홍금보의 홍가반, 원화평의 원가반과 함께 홍콩 영화계에서 고난도의 스턴트 장면을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개개인이 각자의 무술을 선보이는 성향의 홍가반과는 달리, 이쪽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큰 그림을 그리는 무술을 시도하고 있다.
구성 인원들은 아래와 같다. 다만, 위키백과의 정보를 가져온 것이라 영어 이름이기도 하지만, 중국식 이름을 알더라도 얼굴이 안 알려진 사람이 많고(…), 개중에는 '''한국인'''도 있다.
※ 이전 멤버와 현재 멤버 모두 포함되어 있다.
  • Michael Tse(마이클 체, 謝天華) - 前 홍콩 TVB 소속 배우. TVB 연예인 훈련반 출신으로, 곽부성, 등췌문, 여미한 등과 동기. 대표작은 《잠행저격(潛行狙擊)》.
  • Colin Flora
  • Brad Allan (브래드 앨런, 풀 네임은 브래들리 제임스 앨런(Bradley James Allan)) : 스턴트팀의 리더. 성가반에서 최초로 아시아인이 아닌 사람. 《빅타임(Gorgeous)》에서 성룡과 함께 두 차례에 걸쳐 날렵한 일대 일 액션 장면을 연출했다. 이 영화에는 하술한 노혜광도 나오는데, 앨런을 고용한 부호의 보디가드 역할. 두 번째 싸움 중간에 앨런에게 "괜찮지?(Are you Okay?)"라고 물었다가 앨런이 노려보자 "괜찮대, 괜찮대!"라며 좋아하는 모습이 압권.
  • Paul Andreovski : 《나이스 가이》를 비롯 여러 작품에 출연했으며, 성룡의 개인 복싱 코치.
  • Anthony Carpio
  • Chris Chan (Chan Sai - Tang)
  • Chan Man - ching
  • Chan Tat - kwong (Chan Daat - Gong)
  • Andy Cheng (Cheng Kai - Chung)
  • Johnny Cheung (Cheung Yiu - Wah)
  • Danny Chow (Chow Yun - kin)
  • Joe Eigo
  • Fung Hak - on (Fung Hark - On)
  • Hon Chun
  • Dani Hu(Fok Chan Keung)
  • Louis Keung (Mak Wai - Cheung)
  • Benny Lai (베니 라이, 중국식 이름은 여강권.(Lai Keung - Kuen)) : 《폴리스 스토리2-구룡의 눈》에서 폭탄 테러범 3인방 중 한 명이자 벙어리로 출연했으며, 공중 3연각을 날리는 등 발차기만으로는 성룡을 압도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폴리스 스토리》, 《프로젝트 A 2》, 《미라클》에도 출연했으며, 국내에도 출시된 《폴리스 스토리 2》 DVD 서플먼트에 이 사람의 최근 인터뷰가 실려 있다. 촬영 당시의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 Rocky Lai (Lai Keung) - 록키 라이, 중국식 이름은 여강근. 여강권의 동생. 국내 출시된 《프로젝트 A 2》 DVD 서플먼트로 수록된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 실려 있고, 《성룡의 시티헌터》 DVD 서플먼트에는 최근 인터뷰가 실려 있다.
  • Sam Wong (Lai Sing - kwong / Wong Ming-Sing) - 스턴트 팀의 리더. 《폴리스 스토리3 - 초급경찰》에서 성룡과 직접 대련하는 동안의 공안대원으로 출연했다. 그리고 성룡이 등장하는 격투게임인 《재키 찬 - 쿵푸 마스터》에도 플레이어 캐릭터로 등장한다.(사자탈의 캐릭터도 그가 연기했다.)
  • Ben Lam (Lam Kwok - Bun)
  • Chris Li (Li Kin Sang)
  • Lee Chun-kit – Project A Part II, Police Story 2, Miracles
  • Nicky Li (니키 리, 본명은 이충지(Li Chung - Chi)) : 스턴트팀의 리더.
  • Ken Lo (켄 로, 본명은 노혜광(Lo Wai - Kwong)) : 전(前) 성룡의 개인 경호원. 《프로젝트 A 2》 초반부의 호텔을 배경으로 한 액션장면에서 성룡과 맞서 싸우는 범죄자(진혜민 분)의 대역을 했다고 한다.[76]취권2》의 후반부 대결에서 화려하기까지 했던 발차기를 보여준 인물. 이연걸의 영화에도 종종 등장하며, 한국 영화 《조폭마누라3》에도 출연. 《초급학교패왕》에서 바이슨 장군 역을 맡은 그 사람이다. 최근에는 견자단 주연의 《특수경찰》에도 출연했다.
  • Mars (화성. 본명은 Chiang Wing-fat / Feng Sing) : 성룡의 최고 대역배우. 성룡의 초기작 《용소야》에서는 준 주인공급으로 등장했다. 그 밖에도 초기작 여러 편에서 조연급으로 자주 나온다. 못생긴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스턴트 실력만큼은 정말로 뛰어나서 성룡과 오랜 기간 함께 작업했다. 최근에는 젊은 시절에 무리하게 시도했던 수많은 스턴트의 후유증으로 인해 스턴트맨 생활을 청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간간이 무술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고. 참고로 《프로젝트 A》의 시계탑에서의 추락 장면은 세번의 테이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많이 찍었으며 그 대역은 화성이 맡았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철 감독의 《독비도》에서 왕우의 아역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금연자》에서도 아역으로 출연했던 아역배우 출신.
  • Frankie Poon (Poon Bin - chung)
  • Pang Hiu Sang
  • William Tuen (Tuan Wai - Lun)
  • Wan Faat
  • Paul Wong (Wong Kwan)
  • Jon Foo (Jonathan Patrick Foo) : 중국과 아일랜드의 혼혈 배우. 《옹박: 두 번째 미션》에서 토니 쟈를 상대로 화려한 중국식 검무를 보여주었다. 《철권 시리즈》의 실사판에서는 카자마 진으로 출연했다. 프로모션 영상 토니 쟈와의 대결
  • He Jun (Hoh Gwan)
  • Ng Kong (Wu Gang)
  • Park Hyun Jin : 성가반 소속의 한국인 출신 스턴트맨. 《신화》와 《BB 프로젝트》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 Lee In Seob
  • Han Kwan Hua
  • Ron Smoorenburg - 《성룡의 CIA(Who Am I?)》에서 융 콴(Yung Kwan)과 더불어 1대 2로 옥상에서의 결투장면에 출연했던 배우. 위키백과 쪽 명단에는 없다. 본인 사이트에 의하면 성룡을 비롯한 홍콩 영화인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 내지 과소평가했다고 징징대고 있다.
  • Eddy - 성룡이 특별하게 키워서 아이돌로 만들어낸 가수. 성룡이 키운 아이돌 JJCC의 멤버이다.
2017년 중국 저장TV의 한 예능 프로그램인 '왕패대왕패'라는 프로그램에서 신작 '쿵푸요가'의 홍보차 성룡이 출연했는데, 이때 성가반의 원년 멤버들이 성룡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담은 인터뷰 영상을 방영했다. 성룡이 언제나 겸손했으며 인기와 부를 얻기 전부터 팀원들을 재정적으로 도와주고, 결국 성룡과 함께 작업한 것이 자신의 커리어에 큰 영향을 주었다며 성가반 원년 멤버들이 성룡과의 인상적인 추억들을 회고하자 스튜디오 내 많은 방청객들은 물론 성룡의 눈가도 붉어졌다.
영상 재생 후 성룡이 '원년 형제들을 못본지 오래 되어 보고 싶다.'라는 멘트를 하자 성룡과 함께 나와있던 현직 성가반 뒤로 인터뷰 영상에 출연한 원년 성가반들이 몰래 스튜디오에 들어오고, 성룡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며 눈물흘리며 재회를 기뻐했다. 스튜디오는 눈물바다...
관련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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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에 올라온 이 영상은 1,000만회 이상 조회되었다.

10. 이소룡과의 비교


성룡은 이소룡과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비교된다. 물론 성룡은 이소룡의 사망이 임박한 시절 데뷔해서 그 둘이 겹치는 작품은 단 하나밖에 없으며 여기에서조차 성룡은 보조출연자였다. 그 외에는 이소룡이 활동하던 시절은 성룡이 아직 무명이던 시절이고 성룡이 활동하던 시기는 이소룡이 이미 사망한 이후였다.
  • 영화: 성룡은 지금까지도 현역으로 수많은 영화들을 촬영하고 영화마다 임팩트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 이소룡이 본인의 임팩트를 보여준 영화는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사망유희 이렇게 5편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출연작 자체가 그린호넷에 저 5작품이 끝이지만.
  • 액션 스타일: 성룡은 아무리 잡졸이라도 여러번에 걸쳐 치고박고 하면서 쓰러뜨리는 반면 이소룡은 잡졸따위 1방이면 끝났다. 서양 배우로 따지자면 성룡이 장 클로드 반담과 유사하고 이소룡이 스티븐 시걸과 유사하다.
  • 영화배우로서: 똑같이 몸을 많이 굴리는 영화를 촬영하더라도 성룡은 스턴트의 비중이 높은 반면 이소룡은 무술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 분위기: 성룡의 영화는 코믹하고 카타르시스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하지만 이소룡의 영화는 진지하고 잔인하다.
  • 생사: 성룡은 그 많은 사고들을 당하고도 어떻게 살아남는지 그게 신기할 정도인 반면 이소룡은 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의문사를 당했다.
  • 영화 파트너: 성룡은 이소룡보다 오래 영화를 찍어서 그런지 메인 파트너가 많다. 취권 당시에는 황정리가 성룡의 파트너였으며 그 이후에는 원표, 홍금보와 같이 다니면서 감독을 돌려가며 담당하며 영화를 계속 찍었다. 반면 이소룡은 메인 파트너가 척 노리스 정도에 불과하다.

11. 영화 목록


※ 출처 - Daum 영화, 영문 위키피디아. 엑스트라, 카메오도 포함되어 있다.
1962
대소황천패
1963
양산백과 축영태
1964
진향련
1966
양호십팔표, 대취협
1970
황강여협
1971
도불유인, 귀노천, 협녀, 광동소로호
1972
정무문, 흑연비수(합기도), 당인객, 향홍과객
1973
용쟁호투, 소노호, 북지연지,[77] 분노의 주먹, 여경찰,[78][79] 철왜, 마두대결투, 매복, 석파천경, 기린장
1974
제패, 금병쌍염,[80] 사왕일후, 악호촌
1975
화비만성춘, 이소룡여아, 말잔치, 밀종성수
1976
신정무문, 소림목인항,[81] 소림문, 유성검의 대결
1977
삼십육미영권, 이소룡 일대기 생과 사, 신 당산대형
1978
사학비권, 비도권운산, 사형도수, 취권, 금강혈인, 오룡대협(소권), 흑대한
1979
소권괴초(감독), 당산비권(용권), 조수괴초
1980
사제출마(감독), 배틀 크리크[82]
1981
캐논볼
1982
용소야(감독)
1983
대복성, 소권괴초 2 - 용등호약, 오복성, 프로젝트 A(감독)
1984
쾌찬차, 캐논볼 2, 신용쌍향표
1985
프로텍터,[83], 복성고조,[84] 폴리스 스토리(감독)[85] 복성고조 2, 용적심, 닌자 썬더볼트
1986
용형호제(감독), 유계잡패군
1987
A계획속집(감독)
1988
비룡맹장,[86] 폴리스 스토리 2 - 구룡의 눈(감독)
1989
미라클(감독)
1990
액션 진기명기, 용형호제 2(감독), 화소도
1992
폴리스 스토리 3 - 초급경찰[87], 쌍룡회,[88] 성룡의 시티헌터, 서장소자
1993
프로젝트 S, 중안조
1994
취권 2
1995
성룡의 썬더볼트
1996
폴리스 스토리 4, 홍번구
1997
나이스 가이, 알란 스미시 영화
1998
러시아워, 성룡의 CIA, 뮬란(목소리)
1999
젠 엑스 캅, 희극지왕,[89] 빅타임
2000
이소룡 - 전사의 여행, 엑시덴탈 스파이, 상하이 눈
2001
러시아워 2
2002
아트 오브 액션, 턱시도
2003
트윈 이펙트, 메달리온, 상하이 나이츠
2004
트윈 이펙트 2, 뉴 폴리스 스토리, 80일간의 세계일주, 대료애미려
2005
신화 - 친스황릉의 비밀
2006
사대천왕, BB프로젝트
2007
러시아워 3
2008
쿵푸팬더(목소리), 포비든 킹덤 - 전설의 마스터를 찾아서
2009
건국대업, 성룡의 쿵푸 마스터, 신주쿠 사건
2010
대병소장, 쿵푸팬더 홀리데이 스페셜(목소리), 스파이 넥스트 도어, 베스트 키드, The Legend of Silk Boy(목소리)
2011
쿵푸팬더 2(목소리), 신해혁명, 샤오린: 최후의 결전
2012
진바오의 모험(목소리)
2013
차이니스 조디악, 개인 맞춤 제작, The Unbelievable
2014
폴리스 스토리 2014,[90] 구화영웅
2015
드래곤 블레이드,[91] 몽키킹 : 영웅의 귀환(목소리)
2016
쿵푸팬더 3(목소리), 스킵트레이스 : 합동수사,[92] 레일로드 타이거
2017
쿵푸 요가, 지구: 놀라운 하루, 넛잡 2, 레고 닌자고 무비, 더 포리너, 블리딩 스틸
2019
퇴마 포송령 천녀유혼전, 위시 드래곤, 프로젝트X, 아이언 마스크: 용패지미
2020
뱅가드#s-17(急先锋)

12. 성룡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


  • 권성 샤키 첸[93] - 수권전대 게키레인저
  • 대복성자 - 괴짜가족
  • 드래곤 대장 - 은혼(애니메이션)[94]
  • 레이 우롱 - 철권 시리즈
  • 리 - 사일런트 드래곤
  • 리다이린 - 블랙서바이벌[95]
  • 메이 - 엘라의 2048[96]
  • 마이트 가이 - 나루토
  • 제트 찬 - 이블 지니어스
  • 쳉푸 - 더블 드래곤(네오지오판)
  • 홍푸 - 아랑전설
  • 권법 유파가 취권인 모든 캐릭터들
  • 홍수몬 - 포켓몬스터(북미판)
  • 쟈키 챙 - 쟈 선생
  • 손오공, 잭키 춘[97] - 드래곤볼
  • 아타호 - 환세취호전
  • 재키 찬 - 재키찬 어드벤처
  • 친 - 홍콩97

[1] 한국어로는 성룡, 표준중국어으로는 청룽, 씽롱(광동어), 서양에서는 재키 챈, Jackie Chan이라고 부른다. 신해혁명 이후의 중국인은 모두 표준중국어 발음을 따라 쓰도록 되어 있는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자면 일단은 '청룽'이라는 표기가 맞을 것이며 한국 기자들도 실제로 그렇게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일반 언중은 수십년동안 불러온 성룡이라는 이름 대신 청룽이라는 이름에 생소해하는 상황이라 혼란이 있다. 중국어 한글 표기 논쟁 참고. 성룡 본인은 그냥 재키 찬으로 불러달라든지 아니면 한국 발음인 성룡으로 써달라고 한 바 있다. 이렇듯 표기와 대중들이 인식하는 차이와 더불어서 본인도 성룡이라 써달라는 요청도 있어서 그런지 기자들이나 대중매체에서도 다시 성룡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식 성 Chan(찬)은 하술한 진항생(천강성)에서 陳(진, 천)씨의 광동어 발음.[2] 1989년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 수훈#[3] 광동어로 찬콩쌍[4] 일부에서는 원적지인 '''안후이성 우후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링크[5] 의외로 키가 큰 사례, 키가 178cm인 자기 아들(배우 방조명)하고도 비슷하고 동료배우인 원표가 깔창을 안껴도 웬만한 팬들보다는 크다고 했다.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713/read/25681129? 키 172cm 정도인 홍금보보다도 차이나게 커보일때도 많다. 본인은 179cm라고 주장했다. 보는사람에 따라 다를수있겠지만 성룡이 장발로 활동하던시절(70년대), 장발에 무술복장을 입고 그런걸보면 키가 크고 건장해보인다.[6] 178~9cm일 가능성이 높은게, 러시 아워에서 185~6cm인 크리스 터커보다 조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174cm라면 눈에 띄게 작아야 정상. 177~8cm인이병헌과 함께 실제 키가 많이작다고 오해받는 스타중 한명이다.[7] 무명시절 한국에서 거주했던 적이 있어 한국어 구사가 가능하고, 한글로 편지를 직접 써서 보낸 적도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회화 실력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런닝맨에서 등장했을 때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가능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8]패왕별희》를 보면 경극학교에서의 교육이 얼마나 혹독한지 알 수 있다. 구타는 기본이고, 고문에 가까운 벌도 상당수.[9] 다만 성룡 본인은 이때 이소룡에게 진심으로 감동받았는지 이후에도 한 번씩 이 일화를 회상하곤 한다. 이후 인터뷰 자리나 사석에서 맞은 부위가 하필이면 코라서 지금 코가 이렇게 크다며 본인도 우스갯소리로 그때의 일을 가끔씩 이야기하고 있다.(물론 우스개소리이다. 성룡의, 코는 이후 《소림목인방》, 《신 정무문》 등에서 봐도 그 당시와 별 변함이 없다. 영화촬영 중 코뼈가 몇 번 부러졌는데, 이로 인해 치료를 받다보니 커진 것이다. 그런데 성룡의 아들 방조명도 코가 꽤 큰걸로 봐서 유전인듯.)[10] 유투브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성룡의 말에 의하면 이소룡에게 맞은 후 컷 사인이 났을 때 이소룡이 “이런 젠장!!”이라고 외치며 달려왔는데 이미 이쯤엔 더이상 아프진 않았음에도 이소룡에게 안겨있고 싶어서(?) 머리를 쥐고 아픈 척을 했더니 이소룡이 일개 스턴트맨인 자신의 이름과 배운 무술을 물어보더니 녹화하는 내내 자신을 알아주었다고 자랑을 한다. 3분 30초부터 영화는 용쟁호투고 전체 액션 시퀀스는 이 영상을 참고[11] 미국에서는 《Rumble in Hong Kong》이란 제목으로 개봉. 《성룡의 영 타이거》라는 제목은 일본에서 토에이가 《ジャッキー・チェンのヤングタイガー》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발매한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12] 나유의 부인이 《소림문》에 출연했던 성룡의 실력을 보고 추천했다고 한다.[13] 여기에도 비화(祕話)가 있다. 한 유명 무협소설작가이자 각본가가 성룡의 외모에 대해, 자신의 작품에 출연하기에는 전혀 맞지 않는 얼굴이라며 외모를 혹평한 것이다. 성룡은 그 작가와의 설전을 피하고, 조용히 성형외과를 찾아 수술을 했다고 전해진다.[14] 참고로 유성검의 대결은 왕우 주연 영화이며 성룡은 페이크 최종 보스 뒤에 나오는 진 최종 보스이다. 1980년대 명절이면 국내에서 종종 방영했는데 왕우는 양지운, 성룡은 배한성이 더빙을 맡았다.[15] 안타깝게도 부성은 1983년, 29살의 나이에 영화 촬영장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로 요절하는데, 만약 그가 계속 활동했었다면 1980년대 성룡의 위상은 지금 같지 않았으리라 평가받는다.[16] 이 당시 영화 《취권》의 인기는 실로 대단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당시 서울의 단성사 한 곳에서만 상영을 했는데도, 너무 많은 관객이 계속 몰려와 장기상영(8개월간 상영했다. 대충 설날 개봉해서 추석 때까지 이어졌다고 할 정도로 긴 기간.)을 했고, 집계된 관객수는 서울에서만 약 90만 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바가 있다. 1970년대에는 관객이 10만 명만 넘어도 성공이라고 했다. 이는 요즘으로 환산하면 1,500만 명 정도에 가까울 것이다. 이 기록은 이후 서편제의 전국 100만 명 동원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17] Jackie Chan: My Story(1998)에서 인터뷰.[18] 이전까지의 홍콩 액션은 느리면서 합을 주고 받는 약속 대련같은 액션이었지만 사제출마부터는 동작이 한층 빨라지고 진짜로 치는 것처럼 타격감이 살아있는 액션으로 바뀌게 됐다. 홍콩스핀처럼 맞는 액션도 화려해지기 시작한 때가 이 시기.[19] 심지어 미국 버라이어티 지로부터 아시아의 듣보잡 D급 배우라며 비웃는 기사로 매도당한 적도 있다.[20] 홍콩식 격투액션은 테이크당 조밀한 동작구성하에 주고받는 식이다 보니 호쾌해 보이지만 그에 비해 미국식 액션은 단타로 쓰러트리는 등 동작구성이 초라하다보니 밋밋하고 엉성한 느낌을 주며 치고받는 것보단 어지간해선 총기를 활용한다. 배틀 크리크 이후에 촬영된 1985년작 프로텍터에서도 여지없이 이 미국식 액션 공식을 따랐기에 성룡이 권총을 쏘는 장면도 있고 그의 파트너는 적과 격투할 때는 주먹 한두 방에 처리하는 등 이질감이 든다. 성룡은 이 미국식 편집판을 싫어해서 홍콩에 돌아와서는 일부 재촬영 후 편집을 다시해 홍콩판으로 새로 내놓았다.[21] 1996년, 《홍번구》가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할리우드에도 성공적으로 재진출하였다. 버라이어티 지는 12년 전의 그 D급 배우가 이젠 A급으로 할리우드에 왔다고 보도하였다. 다만, 홍콩에서 만든 영화에서는 악동부터 열혈남아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맡았지만, 2차 할리우드 진출 작품들은 캐릭터가 '웃기는 동양인 꼰대'로 굳어버렸다. 근래 들어서 나이 탓인지 젊을 때의 그 아크로바틱함이 줄어들어 많이 아쉽지만, 그래도 여전히 실력은 좋다.[22] 1950년 생의 제임스 글릭켄하우스는 1975년부터 영화 제작, 각본, 감독을 맡아 20년 동안 활약하던 미국 영화인으로, 집안이 엄청난 부자라서 누구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제작하던 인물이다. 세계적으로 페라리 광으로 유명하며, 무려 80대가 넘는 페라리, 그것도 개인 디자인으로 주문한 세계에서 1대뿐인 페라리가 수두룩하다. 2010년대에도 여전히 부자로 페라리 수집광으로 활약 중. B급 액션물 《솔져》라든지 《엑스터미네이터》(제목만 보면 《터미네이터》 아류 같지만 완전히 다르고, 화염방사기를 주무기로 싸우는 액션영웅을 다룬 작품) 같은 액션물은 흥행에 꽤 성공했고, 아들인 카메론 미셸 글릭켄하우스가 주연을 맡은 스릴러 《지옥의 슬로터》나 모험물 《타임마스터》까지 감독하고, 1995년 이후로 영화 관련 일을 안하고 있다.[23] 국내에서도 이 미국 편집판으로 개봉했는데, 여성의 앞부분 나체가 등장하는 부분과 NG장면은 잘린 채 개봉되었다. 다행히도 1989년에 세경문화영상에서 출시된 비디오판은 성룡이 편집한 홍콩판으로 출시되었다. NG장면은 일본 개봉판 및 나중에 재편집판에서 나오고, 유튜브를 찾으면 볼 수 있다.[24] 게다가 머리부터 떨어지는 장면도 있다..![25] 1986년 국내 신문광고로 '성룡이 용형호제를 찍다가 몇 바늘을 꿰맸을까'라는 퀴즈를 내기도 했었다(…).[26] 스태프 중 한명이 쓰러져 실려 나가는 장면은 영화 《폴리스 스토리4 : 간단임무》 엔딩 크레딧에서 나온다. 《용형호제》 1편 엔딩 크레딧의 경우에는 당시 성룡이 얼마나 위험한 부상을 당했는지를 보여준다.[27] 이때 대역은 전가락이 맡았다. 성룡이 부상으로 몸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대역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전소호의 동생이며 홍가반의 고참 스턴트맨이자 본인 역시 액션배우. 홍금보와 성룡, 원표가 서로 두들겨 패고 싸운 다음에 등장하는 술집에서도 엑스트라로 출연했다.[28] 문제는 그 범위가 엄청나게 넓다는것.[29] 프로젝트 A 1, 2, 폴리스 스토리 1, 2. 용형호제 1, 2.[30] 개봉 당시 벌어진 중국의 천안문 6.4 항쟁의 영향으로[31] 한 장면을 무려 1,000번 가까이 반복하여 찍은 적도 있다.[32] 유가량은 홍콩의 유명 무술가 출신으로 부친인 유심(劉湛)은 황비홍의 제자였던 임세영(林世榮)의 제자였다고 한다. 거기에 의형제인 유가휘(劉家輝, 본명 승금희(冼錦熙))와 유가영(劉家榮)도 무술가로 유명하다.[33] 공교롭게도 장학우의 영어 이름도 Jacky Cheung이다.[34] 천녀유혼에서 도사로 나온 오마(1942 - 2014)가 맡았는데 오랫동안 국내에서는 우마라고 오타로 알려졌다.[35] 물론 제작자로서 직접적으로 제작에 참여한 것은 맞다.[36] 성룡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다른 플랫폼 게임에서는 즉사로 끝날 상황들이 그냥 데미지만 입고 끝난다는 게 특징이다.[스포일러] 짱구엄마 일행을 구한 제임스 본즈인데, 실상은 노인일 뿐...[37] 폴리스 스토리 2014 한국개봉을 앞두고 프로모션을 위해 한 말인데, 중화권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성룡을 골수 중화 - 애국주의자로 알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거부감을 주었다. 어쨌든 성룡은 중화권 언론에서도 상당히 친한적인 스탠스로 알려져 있다. 성룡이 저 말을 할 법한 게 한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기도 했고, 이소룡척 노리스와의 관계를 유지했듯 성룡 역시 취권 시절부터 한국의 영화배우인 황정리와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평생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38] 한 때 1985년 2월 19일 KBS 2TV에서 방영된 당산비권에서 박일이 녹음한 적이 있다. 출처[39] 다만 김일이 SBS 폴리스 스토리4에서 딱 한 번 맡은 적도 있다.[40] 이 시기 홍콩 쿵후 영화들을 보면 불국사가 소림사 간판을 걸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다보탑과 석가탑 사이에서 와이어로 휙휙 날아가면서 액션을 벌이는 장면이 있기도. 역사물이나 무협물을 찍으려면 동아시아 전통 건축물에서 찍어야 하는데 홍콩은 좁아서 그런 곳이 거의 없다보니 별 수 없이 한국 사찰을 빌려 촬영한 것이다.[41] 여기서 성룡은 육개장의 건더기를 젓가락으로 건져 먹고, 그 뒤 밥을 살짝 적셔서 후루룩 먹는다. 혹시나 성룡식 육개장 먹기를 하고 싶다면 참고하시길.[42] 나중에 MBC 주말예능에 특별출연했을 때도 한참 중국어로 얘기하다가 이경규가 "전에 오셨을 땐 한국말 잘하시더니?"라고 묻자 한국어로 "예전에는 잘했는데 지금은 못해요"라고 대답하여 웃음을 주었다.[43] 당시에는 서울관객 20만도 대박이던 시절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1,000만 관객을 넘어선 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당시 관객집계의 신뢰성은 감안해야 하지만 실제로 당시 언론 보도도 그렇고 취권열풍이라고 하여 취권을 등장시킨 짝퉁 한국영화나 만화책도 무더기로 나올 정도로 흥행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44] 권상우가 이소룡을 동경하는 학생역할로 주연한 말죽거리 잔혹사, 성룡을 동경하는 주인공으로 나온 청춘만화를 보고 눈여겨 봤다고 한다.[45] 참고로 성룡이 김희선의 연기력에 대해 형편없다고 디스하고, 한류가 별볼일 없다고 말한 소위 한류 폄하 발언(2006)의 출전은 대만언론이라고 한다. 다만 실제론 반대로 성룡이 김희선의 결혼식에 축하 영상을 보내기도 했고, 환갑잔치에도 초대했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양호하다고 한다.[46] 이 콘서트는 진압 직전인 5월 30일 열렸는데, 성룡을 포함한 거의 모든 홍콩의 탑스타들(주윤발, 유덕화, 등려군, 증지위, 나문, 알란 탐, 장학우, 매염방) 등이 나와서 베이징 정부가 대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탄압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성룡은 이 콘서트의 마지막을 장식했다.[47] 그리고 성룡이 그 당시에도 영국의 홍콩 지배를 매우 안좋게 본 것은 확실한 듯. 80년대 당시 홍콩영화는 정점에 있었지만, 성룡은 미라클 제작중에 한국의 한 연예잡지(스크린)와의 인터뷰에서 "홍콩 정부(영국 총독부)가 영화 산업에 너무 간섭한다"라고 비판적으로 인터뷰했다. 프로젝트 A, A계획속집을 봐도, 초기 홍콩에서 영국인들의 홍콩인 차별을 은근히 꼬집고 있다.[48] 성룡이 성장해서 젊은 시절까지 홍콩은 부정부패와 빈부격차가 정말 심각했다. 중국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25대 머레이 맥클레호스 이전 홍콩총독들의 통치를 긍정하진 않는다. 28명이나되는 홍콩 총독중에 홍콩과 홍콩인들의 생활수준 향상에 제대로 기여한 사람이 정말 손꼽을 정도밖에 없는 것이다.[49] 성룡 입장에서 실드를 치자면, 당시 대만은 마잉주천수이볜에 대한 정치보복 논란으로(결국 천수이볜은 구속된다.) 국회 공성전이 계속 벌어지는 등, 정국이 엉망진창이었다. 한국에서 국회 공성전이 벌어지면 일부 정치혐오증 환자들이 "국회의원 폐지하자"는 주장을 농반진반 하는 것처럼 성룡도 비슷한 맥락 아니겠냐는 것. 하지만 농담을 진담으로 했다는 데서 굳이 길게 설명 안해도 시대에 뒤떨어졌단 비판은 피할 수 없다.[50] 물론 정부의 규제가 작품성을 보장할 것이냐의 문제는 별개다.[51] 싱가포르로 국적을 바꿨다.[52] 문제의 인터뷰 영상에서 성룡은 홍콩 시민들이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53] 캐논볼에서의 공기배역은 그렇다고 해도 람보 시리즈에서 악역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알고 출연을 취소했을 정도.[54] 홍콩에서는 만족할 만한 씬이 나올 때까지 수백 번을 반복해서 찍고 액션을 살리기 위해 롱테이크를 주로 사용했지만 미국에서는 예산이 중요하므로 그렇지 못하다는 말을 인터뷰에서 한 적이 있다.[55] 성룡의 할리우드 성공작인 2008년 베스트 키드와 2018년 더 포리너는 약간 맥락이 다르다. 베스트 키드는 배경이 중국인데다가 미중 양국인의 우정을 다룬 영화라서, 2018년의 더 포리너는 중국자본으로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서 1990년대말~2000년대 초반의 할리우드판 성룡 영화와는 조금 맥락이 다르다. 두 영화 모두 성공을 했다. 더 포리너는 블록버스터급 영화는 아니지만, 성룡이 코믹 캐릭터가 아닌 진지한 역을 맡았는데, 그럼에도 준수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수익율만 보면 이전의 할리우드판 성룡 작품보다 훨 낫다.[56] 장제스가 대만섬으로 도망갈때 값어치 좀 나가는 문화재는 싸그리 챙겨가서(...), 문화재 규모나 양이 엄청나다.[57] 물론 마잉주의 경우 당시 중국 국민당 소속 주석으로 민진당과 달리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기 때문에 크게 엇갈리진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국민당도 중국 대륙의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하나의 중국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라 공산당과 입장이 100% 일치하진 않는다.[58] 캐논볼 2와 프로텍터를 촬영했을 때, 할리우드에서 굉장한 푸대접을 받았으며, 홍번구가 히트하자 그제서야 할리우드가 성룡을 인정했다.[59] 성룡이야 본심이겠지만, 다른 배우들도 이를 거절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 이런 관제 리포스팅을 거절하면 전체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60] 오(吳)의 광동어 발음.[61] 이렇게 써놓은 것만 보면 쿨하고 좋은 부친 같아 보이지만 우줘린의 사정을 아는 중화권에서는 욕을 많이 먹었다. 거의 남 얘기 하듯 '그녀가 기쁘다면 그걸로 됐지' 한 마디만 짧게 말하고 끝냈는데, 이게 방조명의 마약 사건 때 보여줬던 모습과 너무 달라서(방조명 사태 때는 침통해하며 아버지로서 아들 잘못 키운 죄인이라며 사죄하는 것을 넘어 아들에게 못난 놈이라고 욕설을 해서 오히려 인간적인 아버지라는 평을 받았다.) 비교가 되었다. 성룡은 오탁림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었는지 오랫동안 딸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숨겼다. 이 때문에 오탁림은 홍콩에서 아동이 11세가 되면 취득하는 아동 신분증명서에 부친의 이름을 기재하는 것을 거부한 바 있다. 그래도 혈육이라고 한때 그녀가 성인이 될때까지 매달 10만 위안의 양육비를 보내거나 그녀가 자살기도를 했을 때 오기리를 책망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현재 캐나다에서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어 폐품을 주워 생계를 잇는 게 알려졌음에도 더이상의 조치나 반응을 취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62] 오탁림과 오기리는 모녀 간에 견원지간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오탁림이 오기리를 아동학대로 신고한 적도 있고. 둘의 사이가 최악일 무렵에 커밍아웃을 했으며, 그래서 오기리가 당시에 이렇게 독기 어린 반응을 보인 것. 그래도 오탁림을 걱정하긴 하는지, 오기리는 딸과 연락이 잘 안 되자 실종신고를 하기도 했고, 딸이 홍콩으로 돌아오면 꼭 심리적인 문제에 대해 치료를 받게 하겠다고 했다.[63] 홍콩에서 태어났다는 뜻. 홍콩을 한국어로 하면 향항, 보통어로 하면 샹강, 광동어로 하면 횡꽁이다. 홍콩이라는 이름이 당시 지배자였던 영국이 광동어의 음운을 수정해서 만든 이름이다.[64] 진항생은 성룡의 모계식 이름이고, 방사룡은 성룡의 부계식 이름.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본인의 부계식 이름이 밝혀진 것. 부계식, 모계식 이름을 모두 갖고 있는 정말 보기 드문 케이스다.[65]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룡 본인은 여전히 진씨로 산다. 그 이유는 진항생, 천강성, 찬공상, 재키 찬이 너무 오랫동안 사용되고 알려졌기에. 오랫동안 사용되고 알려진 이름을 바꾸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66] 다이리 밑에서 일했었다고 한다. 공식적인 인터뷰로는 비밀임무에서 잦은 총기사고를 내서 빨리 해고되어서 사업을 했던 걸로 되어 있다. [67] 해당명은 진지평(陳志平). 아내인 진월영(陳月榮)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해당명으로 살아왔다. 덤으로 광동지역은 진씨가 많기로 유명하다.[68] 본래는 진조명(陳祖明, 천쭈밍)이었으나 조부의 과거문제로 인해 성이 갈아진 케이스. [69] 한편으론 여전히 진씨(제이시 찬)로도 활동한다.[70] 요즘에는 케이블에서 방송한다.[71] 성룡의 데뷔 초기 무협극은 대체로 배한성이 담당했다.[72] 대표작은 기동전사 건담샤아 아즈나블.[73] 예를 들어 폴리스 스토리 트릴로지 중에서 1,2가 등영홍의 목소리이고 3이 성룡의 목소리이다.[74] 홍금보는 특히 스턴트에 있어서는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으며, 스턴트맨들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강렬한 스턴트를 추구하는 것으로 악명높다. 대신 강단있고 강직한 성격 덕분에 삼합회로부터 위협을 받던 중국 배우들을 보호하는데도 앞장서왔다.[75] 원래는 4위로 들어왔었으나 3위였던 레벨리온 팀의 머신 검차과정에서 규정위반이 발견되어 실격처리되었고, 3위로 올라갔다.[76] 아마도 2층에서 거꾸로 떨어지면서 대형 항아리를 몸으로 부수는 스턴트였던 듯.[77] 《금병쌍염》과 마찬가지로 단역으로 출연했는데, 염정영화라 성룡 본인이 흑역사 취급 한다. 참고로 염정영화는 우리나라로 치면 에로영화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3류 포르노는 아니다. 《북지연지》와 《금병쌍염》은 홍콩의 손꼽히는 거장인 이한상 감독의 대표작이다.[78] 성룡이 찌질이 악역 행동대장로 나옴에도 불구하고 5년 후 성룡이 《취권》으로 엄청 유명해지자 제목이 영 타이거(한국어 버전)/럼블 인 홍콩(영어 버전)으로 바뀌고 비디오시장에 나왔는데 마치 성룡이 주인공인 것처럼 포장지를 왜곡되게 묘사해 놓았다. 또한 2016년에 《성룡의 폴리스맨》이라는 제목으로 재개봉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낚여서 안빡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79] 비중이 단역 수준은 아니다. 악당들 중에는 그나마 대사가 있는 편이고, 캐릭터 자체가 플룻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요한건 이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상당히 떨어진다는 점 . 다만 당시 홍콩 사회의 모습이 어땠는지 알아보기엔 썩 괜찮은 영화다.[80] 무대랑을 도와주다 서문경에게 밉보여서 서문경 패거리에게 끔살 당하는 단역으로 출연했다.[81] 소림목인방이라고도 한다.[82] 첫번째 헐리웃 데뷔작. 그러나 헐리웃 영화 제작 스타일은 성룡과 맞지 않았고, 헐리웃 영화 스탭들은 홍콩에서 넘어온 동양배우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뜻때로 액션신을 찍었다. 결국 영화는 밋밋한 액션장면으로 흥행에도 실패했다.[83] 촬영은 1984년, 개봉은 1985년.[84] 《폴리스 스토리》 촬영준비로 바빠서 성룡이 출연한 영화 중 유독 대역 장면이 많은 작품.(《복성고조》의 개봉일은 1985년 2월이었고, 《폴리스 스토리》의 개봉일은 1985년 12월이었다.) 영화의 초반부에 홍금보(극 중 자고채 역)가 동료 죄수들에게 임청하의 사진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고, 영화 마지막 장면은 놀이공원과 놀이공원 유령의 집 내부에 있는 악당들의 아지트에서 펼쳐지는데, 홍금보(극 중 자고채 역)가 칠복성 형제들과 원표를 구하기 위해 성룡(철력위/계골초, 2가지 이름으로 나옴)의 지시에 따라 악당들과 접선하면서 성룡의 사진을 보여줄 때 성룡의 모습이 《폴리스 스토리》 극 중에 경찰으로 분한 성룡이다.[85] 이 영화야말로 성룡 본인과 성룡 팬들이 최고의 수작으로 꼽는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에 숨은 비화가 있는데 이는 바로 한국 개봉 문제다. 1985년 12월 홍콩에서 개봉한 후, 예정대로라면 1986년 새해나 설 연휴에 개봉했어야했는데, 당시 5공 정부 심의에 걸려서 1988년 7월이 되어서야 개봉했다. 이유는 사실적인 폭력(격투)장면과 비리경찰이란 주제를 들어서 개봉을 미루다 정권이 6공으로 바뀌고 나서야 겨우 개봉했다. 한국 개봉일이 7월 23일인데, 하필 하루 전날 개봉한 《영웅본색 2》에 밀려서 흥행성적은 서울관객 19만 명으로 끝났다. 《영웅본색 2》는 서울관객 26만 명.[86] 이 영화 마지막 장면인 마약공장 격투 장면에서 성룡의 대역장면이 떡하니 나온다. 베니 어키데즈와 1대1 격투에서 성룡이 사이클론킥으로 베니를 무력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조금만 자세히 보면 성룡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극 중반부 온미령과 유람선 선상 데이트 장면에서도 격투 장면이 나오는데, 유람선 야외 계단에서 몸을 뒤로 돌려 뒷발차기 하는 장면도 성룡이 아닌 대역이다.[87] 촬영은 1991년, 개봉은 1992년.[88] 홍콩 영화감독협회 기금마련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서극과 임영동이 공동감독했다. 서극은 후반부 자동차검사장 격투 장면에서 카드놀이를 하는 회사원으로 나오는데, 중간에 수염 나고 마른 사람이 바로 서극 감독이다. 이외에도 여러 감독들이 카메오로 나오는데 왕정, 오우삼, 유가량이 나오니 잘 찾아보는 것이 좋다. 특이하게도 두 명의 성룡이 주인공인데, 영상 합성 방법 중 하나인 크로마 키를 정교하게 구사하여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 화면 속 두 명의 성룡을 볼 수 있다.[89] 카메오 출연.[90] 원제는 《폴리스 스토리 2013》이고 원래 2013년 개봉 예정이었지만 연기.[91] 로마 병사들이 중국에 오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로, 로마 황제 역은 자그마치 에이드리언 브로디에, 로마 병사 역은 존 쿠삭. 최시원도 출연한다.(《해피투게더》에서의 약속을 지킨 모양.)[92]잭애스》의 쟈니 낙스빌과 판빙빙과 함께 하기로 한 작품. 연정훈도 출연한다고 한다. 원래는 2014년 말이 목표였으나 한참 연기되었고, 2016년에 개봉했다. 감독은 다이 하드 2,클리프행어, 컷스로트 아일랜드,딥 블루 씨로 알려진 레니 할린.[93] 레이 우롱과 마찬가지로 성룡의 전담 성우인 이시마루 히로야가 목소리를 담당했다.[94]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캐릭터.[95] 이름의 모티브는 웅대림(슝다이린), 기본 복장의 모티브는 이소룡이지만 격투스타일 자체는 성룡의 취권에서 모티브를 따왔다.[96] 메이는 제키 찬의 DNA를 복제한 클론소녀라는 설정이다[97] 이름이나 일부 격투 스타일에서 성룡을 오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