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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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熙昇
1896년 6월 9일 ~ 1989년 11월 27일
1. 개요
2. 생애
3. 기타 이야기거리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국어학자. 본관은 전의(全義)[1]#, 호는 일석(一石)이다. 생전에 이를 독일어에 빗대어 ein Stein - Einstein(아인슈타인)으로 부른 지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2. 생애


1896년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현 의왕시 포일동)에서 이종식(李宗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해 중퇴와 복학을 반복하며 여러 학교를 전전했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08년 상경하여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였는데, 1910년 경술국치로 폐교되어 3년만에 앞당겨 졸업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2학년으로 편입하였으나 본교생[2]과의 차별과 일본인 교사가 일본어로만 수업하는 것에 항의하여 자퇴하였다.
1912년 양정의숙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했으나 1913년 조선교육령으로 양정의숙이 폐지되고 양정고등보통학교가 되면서 다시 학교를 그만 두게 되었다. 낙향하여 무료한 세월을 보내던 중 주시경의 '국어문법'을 읽고 일생의 길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1914년 사립 신풍학교(新豊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중동학교 야간부를 1년간 다녔다. 이어 1918년 사립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직뉴주식회사(京城織紐株式會社)에 서기로 취직했다가 1919년부터 4년 반 동안 경성방직회사의 서기로 근무했다.
1923년 전문학교 입학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1925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3]를 졸업하고 30세의 늦은 나이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들어갔다. 1927년 예과를 수료하고 1930년 법문학부 문학과(조선어학)를 졸업한 후, 1930년 경성사범학교 교유가 되었다가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교수직으로 채용되어 한국어와 한국어문학을 강의했다.
1930년에 조선어학회에 들어가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1933) 및 ‘표준어사정’(1937) 사업에 깊게 관여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1945년 8월 17일까지 복역하였다. 석방된 뒤에는 경성대학,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최현배와 함께 한국 국어학계의 주요 학파를 구성하였다. 1963년에 동아일보 사장에 올랐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1989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기미독립선언서를 현대 한국어로 국역하였으며, 1961년 국어대사전[4]을 편찬하였다. 또한 민중서림의 국어중사전인 엣센스 국어사전을 감수[5]하기도 했다. 이외에 어학 논문과 문학에 관한 논문인 '인대명사소화(人代名詞小話), 조선어 '때의 조사'에 대한 관견(管見)'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1971년부터 1981년까지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임 중 한한대사전 편찬 사업을 시작했다.

3. 기타 이야기거리


일반인들에게는 교과서에 실린 수필딸깍발이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서강대학교 초대 학장인 아일랜드계 미국인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에게 '길로연'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어준 인물이기도 하다.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는 황원 성우가 배역을 맡아 출연했는데, 여기서는 서울대학교 교수라고만 간단하게 소개되어 나왔다.

[1] 대사성공파 28세손 희(熙) 항렬[2] 이 무렵 관립한성고등학교에서 경성고등보통학교로 개편이 이루어졌는데 본교생이란 한성고등학교로 입학한 학생을 말한다. 본교생은 갑(甲)반, 외국어학부 일어부 2학년에서 편입한 학생들은 을(乙)반, 영어부에서 편입한 학생들은 병(丙)반이었는데 병반 학생들은 일본어를 하지 못했다.[3] 오늘날로 치면 수학과+물리학과[4] 이 당시 국어사전의 감수자로는 이희승과 양주동이 유명했다.[5] 1989년 작고 이후의 개정판들에도 민중서림 측에서는 이희승 감수 마케팅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