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 하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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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린험에 세워져 있는 '헨드릭 하멜'의 동상
'''Hendrik Hamel'''
'''헨드릭 하멀'''
(1630년 8월 20일 ~ 1692년 2월 12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기 겸 선원. 1653년부터 1666년까지 조선에 살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써낸 것으로 유명하다. '하멜'로 알려져 있지만 네덜란드어로는 '하멀'에 가깝다.
건축가의 아들이고, 그의 대부가 시장님이었으며, 300굴덴짜리 집을 살 정도로 부유했던 인물이다.[1]
1653년 상선 스페르버르호 (Sperwer)[2] 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 제주도에서 몇개월간 억류되어 있다가[3] 일행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방인을 외부로 보내지 않는다'는 쇄국정책에 따라 억류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이방인에게도 예와 체통을 중시 여겼기 때문에 표류해 온 외부인은 송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단적으로 하멜보다 80여년전에 표류해왔던 서양인을 명나라를 통해 송환한 적이 있고 정조 때에는 영국함선 프로비던스호가 부산항에 왔을 때 물자와 식량까지 챙겨서 돌려보낸 적이 있다. 또한 이들보다 30년전에 표류해온 같은 네덜란드인 박연은 일본을 통해 송환하려 했으나 일본이 거부하여 박연이 조선에 정착하게 되었다. 하멜의 억류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매우 예외적인 사례였다.
이에 앞서 제주도에 머물 시에 먼저 조선에 표류해 정착한 얀 야너스 벨테브레(박연)를 만나 이야기도 했으나 "한번 여기 들어오게 되면 쉽게 나갈 수가 없으니까 포기하렴"이란 말만 듣게 되었다. 하멜이 두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알려졌기도 하지만 하멜이 탈출을 시도한 것은 한 번뿐이다. 먼젓번에 있었던 두 차례의 탈출 시도 중 첫 번째 탈출은 제주도에 표류한지 얼마 안되어 어부들의 배를 탈취하여 시도한 것인데 하멜은 포함되지 않았었고 탈출을 시도한 자도 다섯명 정도였다 한다. 하지만 그들은 조선 배는 타본 적이 없어 기술 미숙으로 결국 잡히고 말았다. 청나라 사신 일행에게 뛰어드는 일도 하멜은 직접 가담은 하지 않았고 그가 직접적으로 가담한 탈출 시도는 최후에 일본으로 탈출한 것 뿐이다. 다만 제주도에서 전라도로 이송되던 중에 '''군졸'''들이 죄다 배멀미로 골골거리자, 이 맥주병들을 바다에 처넣고 배를 탈취할까?라고 고민했으나 조선 배를 다룰줄도 모르고 물자도 부족하여 그만두었다.
하멜 일행은 왕명에 의해 한양으로 이송되었고 그 과정에서 하멜은 자신이 들른 조선의 고을들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기며 자신이 상륙한 이 신세계에 대해 꼼꼼히 기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나중에 하멜표류기의 기초자료가 된다. 한달여 간의 여정 끝에 한양에 도달한 하멜은 효종을 알현하였고 효종에게 일본으로 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결국 기각되어 훈련도감에 소속되었다.[4]
당시 조정에서 대외적으로 북벌을 (실현 가능성은 없었지만)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하멜 일행은 군사 기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조총을 개량하는 등 조선에서 살게 되었다는 설이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기술자들은 표류 과정에서 익사해 다 죽었고 이들에겐 별다른 기술이 없었다.[5] (하멜은 항해사였다.) 그럼 그들이 무얼 했느냐? 처음에 이들을 써먹으려던 조정은 별 수 없이 이들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서 효종의 친위대로 쓰게 했다. 이는 중앙 정부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멜은 "조선인들은 우리를 괴물로 여겼다."라고 기록하였다. 동시에 조선인들은 하멜의 하얀 피부를 신기해하였다고 한다. 반면에 조선은 하멜 일행 외에 다른 서양인을 보고는 면철(面鐵), 녹슨 철빛 얼굴을 가졌다고 기록한 적이 있다. 즉, 서양인은 붉은 피부를 지녔다고 기록한 것이다.
당시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하멜 일행은 화젯거리였고, 너도나도 구경하러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건 당시 하멜 일행의 생김새가 사람이 아니라 괴물 같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인데, 조선인들은 하멜 일행의 생김새를 희화화하며 이야깃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괴물 취급받던 하멜 일행에게 동정심을 느낀 스님들이 그들을 잘 대해주었기 때문에 하멜 일행은 스님들과 가장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외에 그들은 대갓집에 불려다니며 네덜란드 노래와 춤을 보이는 일 따위를 했고, 대갓집 하인들이 주인의 명이랍시고 속여서 이들을 불러내는 일도 있었다 한다.
그러던 중 그의 동료 두 명이 군졸로 있다가 청의 사신이 조선에 왔을때 지나가는 길에 무단으로 뛰어들어 자신들의 송환을 청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들은 헨드릭 얀스[6] 와 헨드릭 얀스 보스라는 자들로 각각 남이안과 남북산이라는 조선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헨드릭 얀스 보스가 호소하는데도 네덜란드 말을 모르는 청나라 사신들이 멀뚱히 있자 사태가 이상함을 느낀 헨드릭 얀스는 잽싸게 튀어버렸으나 곧 체포된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는 한 명의 범행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승정원일기에 한 놈은 현장에서 잡히고 한 놈은 달아났지만 체포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청 사신들에 대해 하멜은 타르타르(혹은 타타르)[7] 사신들이 네덜란드인들을 보고 스페르베르 호가 표류한 후 조선에서 취한 30만냥에 달하는 재물을 청에서 요구할까봐 조정이 불안해했으며 무엇보다 화란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조선에서 조직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청에서 의심할까봐 매우 두려워했다고 저술하고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슷한 맥락이다. 결국 조정에서 사신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먹여 이 일을 무마시키고 이들은 투옥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낙심한 나머지 음식을 거부하다 곧 죽었다고 하고 하멜은 이들이 참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리만 남겨놓았다.
어쨌든 탈출 소동은 조정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하멜 일행을 몹시 불순하고 위험한 놈들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서른셋[8] 에게 전부 곤장 50대를 선고하여 매운 맛을 보여주려 했지만 효종이 이들은 도둑질을 하러 우리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고 변호하여 태형은 피했지만 곧이어 그해 8월에 청나라 사신이 또 오게 되면서 조정엔 비상이 걸렸다.
이 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하여 조선말을 잘하는 세 명에게 또 남만인들이 상륙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전라도 해안으로 보내 인질로 삼고 청나라 사신들과의 대화 매개체를 박탈했다. 청나라 사신들은 곧 돌아갔지만 조정에선 이들을 마땅히 죽여야한다는 논의가 매우 거셌다. 그들의 직속 상관인 이완은 이들을 조선 병사들과의 결투를 붙여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면 외국인들을 무고하게 죽였다는 말은 듣지 않을 거라고 하는 등 아예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방법을 주장하며 이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했고 대다수의 조신들도 그들을 죽일 것을 청했다. 이때의 상황이 심각하여 벨테브레는 하멜에게 당신들이 만약 앞으로 3일만 더 살 수 있으면 살아남을 것이라 전했을 정도. 그 말은 앞으로 3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경고로 해석된다. 위기의식을 느낀 하멜 일행은 때마침 그들 숙소를 지나는 인평대군(효종의 동생)에게 그들의 사정을 호소하며 살려줄 것을 간청했고 동정심이 든 인평대군과 효종은 그들을 강력히 변호하며 전라병영으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벌을 마무리지었다. 하멜도 기록에 국왕과 국왕의 동생 덕에 우린 목숨을 건졌다고 저술해놨다.
이 때 일행 중 일부는 조선인 처까지 구해 자식까지 낳았다고 추정된다. 사학자들은 그들의 배우자가 무당이나 과부같은 소외된 여자들일 것이라 추측한다.[9] 처음엔 전라병영[10] 에서 7년 가량 지냈으나 현종 때 찾아온 극심한 흉년으로 나주, 순천 등으로 그룹을 나누어 이배했는데 하멜은 여수의 전라 좌수영으로 가게 되었다. 그를 인계받은 전라 좌수사 이도빈은 네덜란드 인들을 후히 대접해주며 한달에 2번씩 있는 점호를 빼곤 모든 노역을 면해주었으며 자주 연회를 베풀며 "그냥 확 일본으로 배타고 달아나는 게 어떻겠냐"(!)고 그들에게(술김에 한 농담이겠지만서도.) 탈출을 종용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멜도 그의 말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다. 하멜은 "좋은 사람(이도빈 좌수사)을 부임시켜 주신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라는 기록도 남겼다. 이도빈은 후일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다.
전라 병영에서 지내는 동안 근처의 스님들과 아주 잘 지냈다고. 유교 사회에서 배척을 당하는 스님들이 이역만리에서 '''괴물 취급''' 당하는 하멜 일행에게 동정심과 동병상련을 느껴서 자주 교류하고 화란의 얘기도 듣고 했다 한다.[출처]
그러던 중 좌수사는 총 네 번 교체되어 하멜은 다섯명의 수사를 겪게 되는데 앞서 언급한 이도빈과 정영이라는 자를 빼고는 네덜란드 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도빈이 물러난 이후 부임한 자는 네덜란드인들을 부려먹으려고 작정을 했는데 심장마비로 급사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 후임으로 온 사람도 네덜란드 인들을 착취하려는 생각은 마찬가지라서 새끼줄을 꼬아내라는 등 요구를 해댔다. 하멜 일행은 우리는 새끼줄을 꼴 줄 모른다고 하여 수사가 부여한 노역을 회피하는 한편, 저 자는 우리를 톡톡 털어먹으려고 작정한 자이며 우릴 못살게 굴 것이 틀림없다며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11] . 탈출 계획은 매우 치밀했는데 그들은 우선 배를 구하기 위해 그동안 모은 돈으로 친해진 이웃사람의 이름으로 동네 어부의 어선을 사게 되었는데 이 동네 어부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되고 거래를 무르려고 하자 원래 가격의 2-3배의 가격을 더 주고 간신히 배를 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년 동안 이 배를 이용해 바닷길로 장사를 하며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고 1666년 드디어 8명의 일행들과 극적으로 탈출해서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했다.[12]
일본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자 데지마의 네덜란드로 송환하였고 하멜은 네덜란드가 일본에 강력히 요청하면 남은 8명의 사람들도 모두 송환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일본을 통해 조선에 송환을 요구하였고 일본도 네덜란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조선에서도 이득을 얻어낼 기회라고 판단하여 조선에 송환을 요구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요청 전에 물밑 접촉이 벌어졌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물밑 접촉에 이르러서야 조선은 네덜란드인 8명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곧 조정에 보고되었고 사건이 벌어지고 몇 달이 지났는데도 지방관들에게 탈출사실이 보고되지 않고 일본을 통해 알게된 사실에 조정은 분개하고 조사를 지시한다. 일본은 이들을 송환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정보라도 더 얻어내려고 치밀하고 집요하게 심문하는 한편, 조선에는 그들을 송환해주는 대가로 통상에 관한 이익을 더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본 측이 과거 박연의 송환을 거절한 사실이 드러나며 끝나버렸으며 남은 8명에 대한 송환은 조선으로서도 이들을 데리고 있을 명분이 빈약했으므로 송환하기로 했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의 체면중시적 유교사상을 엿볼수 있는데 돌려보낼 때 중간 집결지에서 좋은 옷을 입혀 보내야 조선의 체면이 안 깎인다는 의견이 조정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결국 이들은 옷을 지급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하멜 일행은 이들이 송환되기 전에 이미 일본을 떠났는데 13년간의 임금을 지급받기 위해 동인도 회사에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것이 하멜표류기이다.[13][14]
귀국한 하멜은 동인도 회사에 13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했고 이에 대한 증거로 써서 낸 게 바로 『하멜 표류기』이다. 이 '하멜 표류기'는 크게 ‘표류기(漂流記)’와 ‘조선 왕국기(朝鮮王國記)’로 구성 되어 있는데 ‘표류기’는 네덜란드를 떠난 이후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거쳐 다시 귀국할 때까지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일지이며, 난파 경위, 조선에 표박한 이후 하멜 일행이 겪은 체험과 감상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왕국기’는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정치, 군사, 형법 제도, 종교, 교육, 교역 등 하멜이 조선에서 체류하면서 보고 들은 조선에 대한 각종 정보들을 기록한 것이다.
어쨌든 하멜은 네덜란드로 되돌아온 이후로도 선원 일을 계속해 서인도 제도에 갔다왔다는 기록과 평생 미혼으로 살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자세히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는 불명이다. 참고로 하멜과 그 일행들이 청구했던 임금이 어찌되었는고 하면 처음에 신청한 그룹에게는 배가 침몰하면 일 안한걸로 간주한다. 라면서 2년치의 봉급만 인도적인 차원에서 주고 씹어버렸지만(...) 하멜 등 7명의 2차 그룹에게는 13년 치의 봉급을 지급했는데 하멜 표류기가 너무 뜨면서[15] 동인도 회사에서 조선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져서 그랬다고 한다.
이후 하멜 표류기는 조선에 대한 지리, 언어, 풍속 등을 유럽에 소개하는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알려졌다. 이전까지 서양인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악어나 괴조가 사는 아프리카 같은 신비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16] , 이 책을 통해 조선이 더 자세히 알려졌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OC)는 하멜의 표류기를 보고 일본과의 교역보다 조선과 직접 교역하는게 유리하다고 생각하여[17] "코리아 호"라는 배까지 만들어 직접 무역을 하려고 했으나.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 이익을 남기기위해 "네덜란드가 직접 조선과 무역을 하려고 시도할 경우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류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압박하여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무역을 포기하게 된다.[18]
조선에 대한 악평이 보이는 등 우리에겐 다소 비우호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편인데,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라는 걸 회사에 강조해야 임금이나 보험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니 좋은 얘기는 거의 없다.[19] 하지만 표류 직후 우리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도로서 무색해질 정도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저술하는 등 호의적인 내용도 많다. 더불어 평생 미혼이었다. 조선에서 맺어진 처와 자식에 대한 감정도 실려있는 듯 보인다.[20]
조선에선 십수년간 하멜을 데리고 있었으면서도 하멜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조차 관심이 없었으나, 당시 일본은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그쪽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기에[21] 하멜이 조선을 탈출해서 건너오자 그날로 조사를 통해 하멜의 국적과 소속은 말할 것도 없고 하멜이 조선에서 보고 들은 모든 정보를 죄다 캐냈다. 어쨌든 일본은 조선에다 "하멜 등은 화란인으로[22] 일본의 속국민(?)[23] 들인데 어찌하여 일본에 인도하지 않고 멋대로 억류하고 재물을 강탈했느냐"고 항의하여 외교적 문제로 번지게 된다.
조선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고 일본인이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이들이 일본으로 가는 것을 원했다는 것을 알았겠냐며 적당히 무마하려 했지만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들이 조선에게 일본으로 가고자 한 사실을 분명히 밝혔고 박연이라는 통역까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조선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곧 적절한 '반박 사례'를 찾게 되는데 바로 벨테브레가 처음 조선에 왔을 때 조선에서 왜관을 통해 네덜란드로 돌려보내려 했는데 일본에서는 벨테브레가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거부했던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 측이 이걸 들이밀면서 이 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말년씨리즈에서 멍석말이의 천재라고 한다. 링크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린험에 세워져 있는 '헨드릭 하멜'의 동상
'''Hendrik Hamel'''
'''헨드릭 하멀'''
(1630년 8월 20일 ~ 1692년 2월 12일)
1. 소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기 겸 선원. 1653년부터 1666년까지 조선에 살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써낸 것으로 유명하다. '하멜'로 알려져 있지만 네덜란드어로는 '하멀'에 가깝다.
2. 조선에서의 삶
건축가의 아들이고, 그의 대부가 시장님이었으며, 300굴덴짜리 집을 살 정도로 부유했던 인물이다.[1]
1653년 상선 스페르버르호 (Sperwer)[2] 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 제주도에서 몇개월간 억류되어 있다가[3] 일행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방인을 외부로 보내지 않는다'는 쇄국정책에 따라 억류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이방인에게도 예와 체통을 중시 여겼기 때문에 표류해 온 외부인은 송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단적으로 하멜보다 80여년전에 표류해왔던 서양인을 명나라를 통해 송환한 적이 있고 정조 때에는 영국함선 프로비던스호가 부산항에 왔을 때 물자와 식량까지 챙겨서 돌려보낸 적이 있다. 또한 이들보다 30년전에 표류해온 같은 네덜란드인 박연은 일본을 통해 송환하려 했으나 일본이 거부하여 박연이 조선에 정착하게 되었다. 하멜의 억류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매우 예외적인 사례였다.
이에 앞서 제주도에 머물 시에 먼저 조선에 표류해 정착한 얀 야너스 벨테브레(박연)를 만나 이야기도 했으나 "한번 여기 들어오게 되면 쉽게 나갈 수가 없으니까 포기하렴"이란 말만 듣게 되었다. 하멜이 두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알려졌기도 하지만 하멜이 탈출을 시도한 것은 한 번뿐이다. 먼젓번에 있었던 두 차례의 탈출 시도 중 첫 번째 탈출은 제주도에 표류한지 얼마 안되어 어부들의 배를 탈취하여 시도한 것인데 하멜은 포함되지 않았었고 탈출을 시도한 자도 다섯명 정도였다 한다. 하지만 그들은 조선 배는 타본 적이 없어 기술 미숙으로 결국 잡히고 말았다. 청나라 사신 일행에게 뛰어드는 일도 하멜은 직접 가담은 하지 않았고 그가 직접적으로 가담한 탈출 시도는 최후에 일본으로 탈출한 것 뿐이다. 다만 제주도에서 전라도로 이송되던 중에 '''군졸'''들이 죄다 배멀미로 골골거리자, 이 맥주병들을 바다에 처넣고 배를 탈취할까?라고 고민했으나 조선 배를 다룰줄도 모르고 물자도 부족하여 그만두었다.
하멜 일행은 왕명에 의해 한양으로 이송되었고 그 과정에서 하멜은 자신이 들른 조선의 고을들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기며 자신이 상륙한 이 신세계에 대해 꼼꼼히 기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나중에 하멜표류기의 기초자료가 된다. 한달여 간의 여정 끝에 한양에 도달한 하멜은 효종을 알현하였고 효종에게 일본으로 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결국 기각되어 훈련도감에 소속되었다.[4]
당시 조정에서 대외적으로 북벌을 (실현 가능성은 없었지만)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하멜 일행은 군사 기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조총을 개량하는 등 조선에서 살게 되었다는 설이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기술자들은 표류 과정에서 익사해 다 죽었고 이들에겐 별다른 기술이 없었다.[5] (하멜은 항해사였다.) 그럼 그들이 무얼 했느냐? 처음에 이들을 써먹으려던 조정은 별 수 없이 이들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서 효종의 친위대로 쓰게 했다. 이는 중앙 정부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멜은 "조선인들은 우리를 괴물로 여겼다."라고 기록하였다. 동시에 조선인들은 하멜의 하얀 피부를 신기해하였다고 한다. 반면에 조선은 하멜 일행 외에 다른 서양인을 보고는 면철(面鐵), 녹슨 철빛 얼굴을 가졌다고 기록한 적이 있다. 즉, 서양인은 붉은 피부를 지녔다고 기록한 것이다.
당시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하멜 일행은 화젯거리였고, 너도나도 구경하러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건 당시 하멜 일행의 생김새가 사람이 아니라 괴물 같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인데, 조선인들은 하멜 일행의 생김새를 희화화하며 이야깃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괴물 취급받던 하멜 일행에게 동정심을 느낀 스님들이 그들을 잘 대해주었기 때문에 하멜 일행은 스님들과 가장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외에 그들은 대갓집에 불려다니며 네덜란드 노래와 춤을 보이는 일 따위를 했고, 대갓집 하인들이 주인의 명이랍시고 속여서 이들을 불러내는 일도 있었다 한다.
그러던 중 그의 동료 두 명이 군졸로 있다가 청의 사신이 조선에 왔을때 지나가는 길에 무단으로 뛰어들어 자신들의 송환을 청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들은 헨드릭 얀스[6] 와 헨드릭 얀스 보스라는 자들로 각각 남이안과 남북산이라는 조선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헨드릭 얀스 보스가 호소하는데도 네덜란드 말을 모르는 청나라 사신들이 멀뚱히 있자 사태가 이상함을 느낀 헨드릭 얀스는 잽싸게 튀어버렸으나 곧 체포된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는 한 명의 범행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승정원일기에 한 놈은 현장에서 잡히고 한 놈은 달아났지만 체포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청 사신들에 대해 하멜은 타르타르(혹은 타타르)[7] 사신들이 네덜란드인들을 보고 스페르베르 호가 표류한 후 조선에서 취한 30만냥에 달하는 재물을 청에서 요구할까봐 조정이 불안해했으며 무엇보다 화란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조선에서 조직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청에서 의심할까봐 매우 두려워했다고 저술하고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슷한 맥락이다. 결국 조정에서 사신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먹여 이 일을 무마시키고 이들은 투옥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낙심한 나머지 음식을 거부하다 곧 죽었다고 하고 하멜은 이들이 참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리만 남겨놓았다.
어쨌든 탈출 소동은 조정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하멜 일행을 몹시 불순하고 위험한 놈들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서른셋[8] 에게 전부 곤장 50대를 선고하여 매운 맛을 보여주려 했지만 효종이 이들은 도둑질을 하러 우리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고 변호하여 태형은 피했지만 곧이어 그해 8월에 청나라 사신이 또 오게 되면서 조정엔 비상이 걸렸다.
이 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하여 조선말을 잘하는 세 명에게 또 남만인들이 상륙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전라도 해안으로 보내 인질로 삼고 청나라 사신들과의 대화 매개체를 박탈했다. 청나라 사신들은 곧 돌아갔지만 조정에선 이들을 마땅히 죽여야한다는 논의가 매우 거셌다. 그들의 직속 상관인 이완은 이들을 조선 병사들과의 결투를 붙여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면 외국인들을 무고하게 죽였다는 말은 듣지 않을 거라고 하는 등 아예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방법을 주장하며 이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했고 대다수의 조신들도 그들을 죽일 것을 청했다. 이때의 상황이 심각하여 벨테브레는 하멜에게 당신들이 만약 앞으로 3일만 더 살 수 있으면 살아남을 것이라 전했을 정도. 그 말은 앞으로 3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경고로 해석된다. 위기의식을 느낀 하멜 일행은 때마침 그들 숙소를 지나는 인평대군(효종의 동생)에게 그들의 사정을 호소하며 살려줄 것을 간청했고 동정심이 든 인평대군과 효종은 그들을 강력히 변호하며 전라병영으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벌을 마무리지었다. 하멜도 기록에 국왕과 국왕의 동생 덕에 우린 목숨을 건졌다고 저술해놨다.
이 때 일행 중 일부는 조선인 처까지 구해 자식까지 낳았다고 추정된다. 사학자들은 그들의 배우자가 무당이나 과부같은 소외된 여자들일 것이라 추측한다.[9] 처음엔 전라병영[10] 에서 7년 가량 지냈으나 현종 때 찾아온 극심한 흉년으로 나주, 순천 등으로 그룹을 나누어 이배했는데 하멜은 여수의 전라 좌수영으로 가게 되었다. 그를 인계받은 전라 좌수사 이도빈은 네덜란드 인들을 후히 대접해주며 한달에 2번씩 있는 점호를 빼곤 모든 노역을 면해주었으며 자주 연회를 베풀며 "그냥 확 일본으로 배타고 달아나는 게 어떻겠냐"(!)고 그들에게(술김에 한 농담이겠지만서도.) 탈출을 종용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멜도 그의 말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다. 하멜은 "좋은 사람(이도빈 좌수사)을 부임시켜 주신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라는 기록도 남겼다. 이도빈은 후일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다.
전라 병영에서 지내는 동안 근처의 스님들과 아주 잘 지냈다고. 유교 사회에서 배척을 당하는 스님들이 이역만리에서 '''괴물 취급''' 당하는 하멜 일행에게 동정심과 동병상련을 느껴서 자주 교류하고 화란의 얘기도 듣고 했다 한다.[출처]
그러던 중 좌수사는 총 네 번 교체되어 하멜은 다섯명의 수사를 겪게 되는데 앞서 언급한 이도빈과 정영이라는 자를 빼고는 네덜란드 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도빈이 물러난 이후 부임한 자는 네덜란드인들을 부려먹으려고 작정을 했는데 심장마비로 급사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 후임으로 온 사람도 네덜란드 인들을 착취하려는 생각은 마찬가지라서 새끼줄을 꼬아내라는 등 요구를 해댔다. 하멜 일행은 우리는 새끼줄을 꼴 줄 모른다고 하여 수사가 부여한 노역을 회피하는 한편, 저 자는 우리를 톡톡 털어먹으려고 작정한 자이며 우릴 못살게 굴 것이 틀림없다며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11] . 탈출 계획은 매우 치밀했는데 그들은 우선 배를 구하기 위해 그동안 모은 돈으로 친해진 이웃사람의 이름으로 동네 어부의 어선을 사게 되었는데 이 동네 어부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되고 거래를 무르려고 하자 원래 가격의 2-3배의 가격을 더 주고 간신히 배를 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년 동안 이 배를 이용해 바닷길로 장사를 하며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고 1666년 드디어 8명의 일행들과 극적으로 탈출해서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했다.[12]
일본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자 데지마의 네덜란드로 송환하였고 하멜은 네덜란드가 일본에 강력히 요청하면 남은 8명의 사람들도 모두 송환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일본을 통해 조선에 송환을 요구하였고 일본도 네덜란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조선에서도 이득을 얻어낼 기회라고 판단하여 조선에 송환을 요구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요청 전에 물밑 접촉이 벌어졌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물밑 접촉에 이르러서야 조선은 네덜란드인 8명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곧 조정에 보고되었고 사건이 벌어지고 몇 달이 지났는데도 지방관들에게 탈출사실이 보고되지 않고 일본을 통해 알게된 사실에 조정은 분개하고 조사를 지시한다. 일본은 이들을 송환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정보라도 더 얻어내려고 치밀하고 집요하게 심문하는 한편, 조선에는 그들을 송환해주는 대가로 통상에 관한 이익을 더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본 측이 과거 박연의 송환을 거절한 사실이 드러나며 끝나버렸으며 남은 8명에 대한 송환은 조선으로서도 이들을 데리고 있을 명분이 빈약했으므로 송환하기로 했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의 체면중시적 유교사상을 엿볼수 있는데 돌려보낼 때 중간 집결지에서 좋은 옷을 입혀 보내야 조선의 체면이 안 깎인다는 의견이 조정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결국 이들은 옷을 지급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하멜 일행은 이들이 송환되기 전에 이미 일본을 떠났는데 13년간의 임금을 지급받기 위해 동인도 회사에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것이 하멜표류기이다.[13][14]
3. 하멜 표류기
귀국한 하멜은 동인도 회사에 13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했고 이에 대한 증거로 써서 낸 게 바로 『하멜 표류기』이다. 이 '하멜 표류기'는 크게 ‘표류기(漂流記)’와 ‘조선 왕국기(朝鮮王國記)’로 구성 되어 있는데 ‘표류기’는 네덜란드를 떠난 이후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거쳐 다시 귀국할 때까지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일지이며, 난파 경위, 조선에 표박한 이후 하멜 일행이 겪은 체험과 감상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왕국기’는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정치, 군사, 형법 제도, 종교, 교육, 교역 등 하멜이 조선에서 체류하면서 보고 들은 조선에 대한 각종 정보들을 기록한 것이다.
어쨌든 하멜은 네덜란드로 되돌아온 이후로도 선원 일을 계속해 서인도 제도에 갔다왔다는 기록과 평생 미혼으로 살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자세히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는 불명이다. 참고로 하멜과 그 일행들이 청구했던 임금이 어찌되었는고 하면 처음에 신청한 그룹에게는 배가 침몰하면 일 안한걸로 간주한다. 라면서 2년치의 봉급만 인도적인 차원에서 주고 씹어버렸지만(...) 하멜 등 7명의 2차 그룹에게는 13년 치의 봉급을 지급했는데 하멜 표류기가 너무 뜨면서[15] 동인도 회사에서 조선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져서 그랬다고 한다.
이후 하멜 표류기는 조선에 대한 지리, 언어, 풍속 등을 유럽에 소개하는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알려졌다. 이전까지 서양인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악어나 괴조가 사는 아프리카 같은 신비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16] , 이 책을 통해 조선이 더 자세히 알려졌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OC)는 하멜의 표류기를 보고 일본과의 교역보다 조선과 직접 교역하는게 유리하다고 생각하여[17] "코리아 호"라는 배까지 만들어 직접 무역을 하려고 했으나.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 이익을 남기기위해 "네덜란드가 직접 조선과 무역을 하려고 시도할 경우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류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압박하여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무역을 포기하게 된다.[18]
조선에 대한 악평이 보이는 등 우리에겐 다소 비우호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편인데,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라는 걸 회사에 강조해야 임금이나 보험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니 좋은 얘기는 거의 없다.[19] 하지만 표류 직후 우리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도로서 무색해질 정도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저술하는 등 호의적인 내용도 많다. 더불어 평생 미혼이었다. 조선에서 맺어진 처와 자식에 대한 감정도 실려있는 듯 보인다.[20]
4. 조선과 일본의 외교분쟁
조선에선 십수년간 하멜을 데리고 있었으면서도 하멜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조차 관심이 없었으나, 당시 일본은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그쪽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기에[21] 하멜이 조선을 탈출해서 건너오자 그날로 조사를 통해 하멜의 국적과 소속은 말할 것도 없고 하멜이 조선에서 보고 들은 모든 정보를 죄다 캐냈다. 어쨌든 일본은 조선에다 "하멜 등은 화란인으로[22] 일본의 속국민(?)[23] 들인데 어찌하여 일본에 인도하지 않고 멋대로 억류하고 재물을 강탈했느냐"고 항의하여 외교적 문제로 번지게 된다.
조선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고 일본인이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이들이 일본으로 가는 것을 원했다는 것을 알았겠냐며 적당히 무마하려 했지만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들이 조선에게 일본으로 가고자 한 사실을 분명히 밝혔고 박연이라는 통역까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조선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곧 적절한 '반박 사례'를 찾게 되는데 바로 벨테브레가 처음 조선에 왔을 때 조선에서 왜관을 통해 네덜란드로 돌려보내려 했는데 일본에서는 벨테브레가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거부했던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 측이 이걸 들이밀면서 이 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5. 매체에서
이말년씨리즈에서 멍석말이의 천재라고 한다. 링크
6. 같이보기
[1]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문서 참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당시 기준은 물론 현재 경제수준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회사였으며 무려 주식회사의 개념을 만든 곳이다.[2] 네덜란드어로 '새매'를 의미한다.[3] 이때 머무른 집이 광해군이 유배되었던 집이라 한다. 당시 제주목사이자 하멜의 일을 처리한 이는 태호 이원진인데 반계 유형원의 스승이자 성호 이익의 당숙되는 사람으로, 그가 제주목사 시절 저술한 ‘탐라지’는 조선 중기 제주도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필수 사료로 대접받고 있다.[4] 당시 일본의 기독교 탄압과 관련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하멜과 같은 요구를 조금 앞서 박연이 했었는데, 인조는 박연의 부탁을 들어주고 일본으로 보내려 했으나 일본에서는 시마바라의 난의 영향으로 "키리시탄 안받아요" 이래서 결국 박연은 조선에 남아 군에 종사했다.[5] 그러나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과 같이 조선에서 탈출한 일행 중 서양식 배를 만들수 있는 선박제조 기술자 그리고 장거리 항해에 필요한 기술을 가진 이 등 다양한 기술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당시 조선정부가 화포 기술 외엔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국제정세를 너무 몰랐던 탓이 크다.[6] 스페르버르호의 1등 항해사로 선장이 표류 중 사망했기 때문에 생존한 인원들 중 최선임자였다.[7] 하멜은 청을 이렇게 불렀다. 아시아에서는 유목민족들과 교류가 잦은 편이라 비교적 정확하게 구분해서 거란, 말갈, 여진족, 몽골 등으로 다르게 불렀지만, 유럽은 유목민족과의 교류가 거의 없어서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유럽 동부에서 주로 활동하는 유목민족들을 그냥 싸잡아서 타타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러시아가 몽골 지배를 받던 시절이는 타타르 러시아라고 불렀다. 청나라는 유목민족인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므로 유럽인들은 중국이 타타르의 지배를 받는다고 한 것이다.[8] 애초에 포류한 사람은 서른 여섯인데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배를 타고 전라도에 상륙한 지 얼마 안되어서 파울루스란 사람이 죽어 서른 다섯이 되었다.[9] 남만인이라고 모두 남(南)씨 성을 받았다. 하멜의 조선 이름은 남하면. 일행 중에는 자식이 있었다고 하며 병영 남씨라고 해서 현재도 그 후손들이 남아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의령 남씨에 별보로 편입된 상태라는 얘기도 있으며 남일도 병 영남씨라는 얘기가 있다. 다만 후자의 경우에는 신빙성이 있는 얘기인지는 다소 의문.[10] 현재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에 당시 전라병영성이 복원되어 있으며 이와 함께 병영성 동문 맞은 편에 하멜 기념관을 지어 역사문화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있다. 매년 4월 중순에 강진 전라병영성 축제를 개최한다.[출처] 역사저널 그날, 네덜란드 청년 하멜, 조선에 표류하다 편[11] 수사들이 딱히 인종차별을 했다는 언급은 없다. 하멜 일행에게 잘 대해준 이도빈과 정영은 맡은 일도 게을리 하지 않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하고, 하멜 일행을 괴롭힌 자들은 전형적인 탐관오리라 조선백성들도 싫어했다.[12] 모두 온 것은 아니라서 8명은 조선에 그대로 남은 상태였다.[13] 동인도 회사는 13년만에 돌아온 이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기 싫어서 2년치의 임금을 제시하였다.[14] 다만 살아남은 사람 중 한 명- 요리사 얀 클라에천(Jan Claeszen)으로 추정됨-은 8명이 송환될 때 이미 죽었다고 해서 돌아오지 못했는데 사실은 살아있는데 송환을 거부하였고 계속 조선에 남았다는 설이 있다.[15] 불티나게 팔려 순식간에 불역본, 독역본, 영역본이 나왔으며 17세기에 나온 책이 1885년까지 계속 판을 찍어냈다.[16] 비단 조선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에 대한 인식이 거의 이랬다. 21세기에도 일본인들이 쿵푸와 기체조를 즐긴다고 아는 사람이 있는 마당에(...), 인터넷도 TV도 없던 17세기에는 동양에 대한 온갖 판타지가 난무했다.[17] 일본은 네덜란드에서 사온 물건을 조선에 팔면서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18] 그래서 실은 일본의 방해를 피할 꼼수도 부릴 겸, 나가사키를 방문하는 조선 상인이나 사신들을 대상으로 간접 무역을 했다.[19] 이를 위해 "조선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생겼다"라는 행복한 이야기도 제외하였다. 물론 옆에 있었던 다른 선원 및 지인들이 기록하거나 문답한 내용에는 있었다. 솔직히 말해 창창한 22세부터 36세 중년이 되도록 10년 넘게 여기저기 이송다니며 각종 부역에 동원되는,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게 한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관점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20] 실제로 메마른 내용들로 가득한 표류기의 내용들 중 이상하리만치 감정이 실려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전라도 유배 중 순천, 나주 등으로 이배할 것을 명받자 "우리가 어떻게 기반을 마련했는데 떠나라니!"라며 한탄하는 내용이 있다.[21] 외국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면서 스페인, 영국과의 교류는 중단했지만서도.[22] 조선은 "아, 걔들이 화란이란 나라의 사람들이었냐? 근데 거긴 어디여?" 하는 반응이었다고.[23] 당시 일본은 조선에 네덜란드를 자국의 속국으로 왜곡 선전하여 일본이 마치 네덜란드를 종속국으로 거느리고 있는 양 왜곡하면서 조선과 네덜란드의 접촉을 철저히 막고 있었다. 물론 조선 또한 네덜란드가 일본의 속국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딱히 외교적으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는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다. 조선에는 화란(네덜란드)이 일본의 속국, 네덜란드에는 조선이 일본의 속국, 이렇게 떠든 이것들은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