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창 군무선후회의
1. 개요
1927년 1월 1일부터 1월 7일까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의 주최로 소집된 회의. 국민당의 1차 북벌로 점령된 강서성에 대한 평정과 강소-절강 지역에 대한 공격계획을 위해 마련된 회의였다.
2. 배경
동서고금의 군대가 다 그랬지만 청나라 붕괴 이후 군벌혼전에 휩싸인 중국에서 가장 절실했던 문제 중 하나는 군비의 조달이었다. 어제까지의 동지가 오늘의 원수가 되고 어제의 원수가 다시 오늘의 동지가 되어 이합집산하는 큰 원인 중 하나가 군비의 배분이었는데 국민혁명 시기의 국민혁명군 역시 군비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원래도 광저우 국민정부는 북벌군을 유지할 군비 마련에 가혹한 세금을 매겨 겨우 조달하고 있었는데 혁명 과정에서 많은 군벌들이 투항하면서 국민혁명군의 수는 폭증했고 각군의 군장들은 저마자 점령지의 재정을 장악하면서 세력 확장을 꾀했다. 반면 장제스는 재정통일과 군제 개편을 통해서 국민혁명군을 자신의 밑에 철저히 복종시키기를 원했다.
그리고 1927년 1월 시점에서 장제스의 군대는 빠듯한 군비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탕성즈, 리쭝런, 청첸, 탄옌카이 등 다른 군의 군장들의 불만이 대단하여[1] 다른 군장들은 장제스를 타도하기 위해 비밀리에 연대를 모색하기도 했다. 여기에 재정부장 쑹쯔원과 장제스의 군비 문제 관련 불화도 심각하여 쑹쯔원은 장제스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군비를 지급하지 않았고 장제스는 월권적인 화폐 발행으로 쑹쯔원을 화나게 해서 양자가 서로를 비난하는 전문이 오가기도 했다.
결국 군비에 관한 불만을 정리하고 국민혁명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새로이 점령한 영토의 안정과 쑨촨팡이 웅거하고 있는 절강-강소 지역에 대한 공격 계획을 정리하기 위해 장제스는 1926년 8월 12일 장사 군무선후회의에 이어 강서성 난창에서 두번째 군무선후회의를 소집했다.
3. 전개
3.1. 회의의 개최
1927년 1월 1일, 난창에 장제스를 필두로 탄옌카이, 주페이더, 청첸, 리쭝런, 바이충시, 탕성즈 등 각군의 군장과 주요 지휘관들, 총정치부 주임 덩옌다, 소련 군사고문 바실리 블류헤르, 중앙집행위원회 특파원, 국민정부 특파원, 국민혁명군 총참모장, 참모장, 각 군사위원, 각 총지휘관, 각 독립사단장, 각 총지휘부 및 각군, 각 독립사의 참모장, 총사령부 각처장 및 정무국장, 총사령부, 각 총지휘부, 독립사단의 소련고문들을 포합하여 총 50여명의 지휘관들이 참석했다.[2]
먼저 장제스가 개막사를 통해 군의 통일성을 강조하며 중국 국민당의 당권이 국민혁명군 내부에 작용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군제, 편제, 군수의 통합을 중시했는데 이는 국민당 상무위원회 주석인 자신을 중심으로 군이 움직여야 한다는 주장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군비 문제로 불만이 많던 각군의 군장은 군비의 지급과 군수품 확대보급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3.2. 북벌 전략 토론
먼저 장제스는 난창을 근거로 안휘, 절강, 강소 지역으로 북벌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는데 이에 대해서 블류헤르, 덩옌다, 탕성즈 등이 모두 반대했다. 탕성즈는 일찍이 호남과 호북을 공략하면서 군공을 독점하기 위해 장제스를 배제하려 시도한 적이 있는데 장제스가 장강 하류를 장악하여 군사적 권위와 명성을 얻고 부유한 상하이와 난징을 차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블류헤르의 경우, 장제스가 난징과 상하이의 병기창을 노리고 있다고 파악했다.
국민혁명 내내 국민당 좌파, 중국 공산당, 기타 군장들을 포함한 반장 세력은 장제스가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하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있었다. 또한 상하이와 난징으로의 진출은 장강 하류에 막대한 이권을 쥐고 있는 제국주의 열강을 자극할 우려가 있었다. 이 때문에 소련고문 테루니가 상하이와 국민정부 지배지역 사이에 중립지대를 설치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결국 장제스의 주장대로 일단 쑨촨팡을 토벌하는 것을 전략의 기초로 삼기로 했다. 하지만 명확하게 난징과 상하이를 공략하여 그쪽으로 전선을 확대한다고 정해지진 않았다.
3.3. 군제 개편 토론
1월 5일 장제스는 군, 사, 단, 영, 진을 단위로 3-3제로 편제되어 있던 군대 편제 중에 여를 없애고 1군 3사, 1사, 3단제의 편제로 통일하고 각군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도록 하여 총사령부에 일괄적인 통제와 일률적 지휘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또한 공식적인 난창회의록에는 없으나 한커우 민국일보에 따르면, 장제스는 각군 군장직을 철폐하고 사단 단위를 기본으로 군제를 개편할 것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장제스는 광저우 국민정부 시절부터 자신이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국민혁명군을 통솔하고 휘하의 군장직을 철폐하여 통제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친 바가 있다.[3]
이러한 군제개편을 통한 통제력 강화가 사실이라고 가정할 시에, 군장직의 철폐는 장제스가 일관적으로 추구해온 정책이기도 했으나 강서 전선에서의 패전과 군사력 손실로 인하여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어 있던 장제스의 입장에서는 국민혁명군 내부의 1인자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한가지 방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군장들 입장에서는 군비 때문에 코가 석자인건 둘째치고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를 약화하려는 술책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 결코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1월 6일에 개최된 3차 회의에서도 리쭝런 등 다른 군장들은 군비 지급고가 군수품 보급 문제만을 물고 늘어졌다.
특히 탕성즈는 휘하 병력이 우창 점령 이후 6개 사단, 11개 여단, 31개 단으로 엄청나게 증가하면서 자신의 병력을 3개군으로 재편해줄 것을 거듭 요구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4군 휘하의 천밍수 부대를 11군으로 확충하도록 하는 것은 일찍이 승인했으나 탕성즈의 요구는 군비 증가를 이유로 나중에 얘기하자며 묵살하고 있었는데 탕성즈의 불만이 커지면서 장제스는 이것을 더 이상 억누르기 힘든 상황이었다.
3.4. 폐막
1월 7일, 폐막식이 거행되었고 장제스는 군제, 군정, 군수의 통일과 그것을 위한 병력, 무기, 군수에 대한 정확한 보고와 통계가 절실하다고 강조하며 혁명의 성공을 위해 편제, 기율, 정신의 삼원칙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다시 한번 군의 통일성에 대해 호소했다. 그리고 편제정리위원회, 점검위원회, 경리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각 위원회를 통해, 편제, 경리, 군수문제를 해결하기로 대략적으로 합의, 후속 회의인 실무회의를 개최하여 2월 말까지 계속하였다.
4. 결과
2월 말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결국 각 군장들은 군제 개편에 대한 구체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고 장제스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탕성즈는 2월 초 8군 산하에서 35군과 36군을 추가로 편성하고 허젠 등을 군장으로 임명하는데 동의해야 했다. 매월 1000만원이 소요되는 군비에 대해 호북성과 강서성이 각각 300만원, 호남이 60만원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재정부가 맡아 각 성의 인화세, 관세를 재정부에 납부하기로 결정했고 우한 정부는 900만원의 화폐를 3개월에 걸쳐 발행했다. 또한 2월 9일 탕성즈가 호남성 재무위원회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1927년부터 중앙이 매월 60만원을 8군에 지급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후 군비 문제로 장제스와 난창의 불화는 심각해저 재정부장 쑹쯔원과 장제스의 사이가 크게 악화되었고 장제스는 12월 25일 쑹쯔원이 12월 1일자로 더 이상 재정부가 1군에게 군비를 지급하지 않을 것이니 군비를 현지조달하라고 통보한 전문을 인용하며 군비를 중앙에 직접 발송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임조함은 2월 6일 미하일 보로딘, 쉬첸, 쑨커 등이 1928년 2월 6일 연석회의에서 재정을 공개해 자군을 중심으로 군비를 지급하는 장제스를 비난했다고 일기에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 천도논쟁에서 패배하고 3중전회에서 권력이 대폭 축소된 장제스는 자파로 끌어들이려 했던 주페이더, 청첸 등이 도리어 반장으로 돌아서서 휘하의 1군을 제외한 모든 군과 잘해야 중립, 심각하게는 적대관계를 구축하게 되어 최악의 위기에 몰리게 되지만.... 1927년 4월에 이를 한방에 일소하게 된다.
5. 참고문헌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국국민혁명운동의 구조분석, 민두기 등 공저, 지식산업사.
- 중국국민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 민두기 등 공저, 지식산업사.
- 무한 국민정부 성립기 '천도논쟁', 황동연, 학림 13권, 연세사학연구회.
- 唐生智와 武漢國民政府, 나현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중국근현대사학회.
6. 관련문서
6.1. 국민혁명
- 국민당의 1차 북벌
- 영왕운동(1926.5.25~1927.4.1)
- 천도논쟁(1926.10~1927.3)
- 상하이 폭동(1926.10.24~1927.3.22)
- 한커우 사건(1927.1.3)
- 난징사건(1927.3.24)
- 4.12 상하이 쿠데타(1927.4.12)
- 4.15 광저우 쿠데타(1927.4.15)
- 마일사변(1927.5.21)
- 1차 산동파병(1927.5.28)
- 국공결렬(1927.7.15)
- 난창 폭동(1927.8.1~1927.10.4)
- 영한합작(1927.9.15)
- 당계전쟁(1927.10.20~1928.1.25)
- 장제스-다나카 회담(1927.11.5)
- 장황사변(1927.11.17~1927.12.11)
- 광저우 폭동(1927.12.11~1927.12.13)
-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