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창 폭동
1. 개요
1927년 8월 1일, 4.12 상하이 쿠데타와 국공결렬로 중국 국민당에서 축출된 중국 공산당이 장시성 난창에서 중국 혁명을 위해 일으킨 봉기를 말한다. 난창 기의(南昌起義), 난창 봉기라고도 한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인민해방군은 난창 봉기일을 건군 기념일로 삼고 있다. [1]
2. 배경
국민당의 1차 북벌이 한창이던 1927년,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청당에 들어갔다.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는 국공합작을 유지했으나 마일사변을 비롯한 국민당 우파 장교들의 반공 폭동이 이어지고 공산당이 직접 국민당 좌파와 연합하여 국민당 중앙 집행위원회를 장악, 개조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하여 군대를 조직하며 우한의 우파 장교들을 처벌하라는 스탈린의 '5월 지시'가 내려오는가 하면 우한 정부가 믿었던 펑위샹이 장제스와 동맹하여 분공을 요구하자 결국 왕징웨이는 7월 15일 국공결렬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에 공산당은 1927년 7월 13일, 선제적으로 국민정부 탈퇴를 선언하고 지하로 숨어들어 국민당[2] 에 대한 복수를 위한 무장봉기를 준비하게 되었다.[3] 난창은 인구 12만의 소도시지만, 장시 성의 수도이며 장제스가 일시적으로 이곳에 천도를 주장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도시였다. 마침 우한 국민정부의 탕성즈는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를 상대로 한 동정을 실시 중이라서 제2방면군 총사령관 장파쿠이 등이 구강과 난창의 1선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그런데 난창에 주둔한 상당수의 부대들은 중국 공산당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언제든지 폭동에 동원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무장봉기를 일으키면 국공합작과 혁명에 찬동하는 국민당 좌파들과 노동자, 농민들이 이에 호응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3. 전개
3.1. 계획
국공결렬 이후 중국 공산당 임시정치국 상무위원회는 리리싼, 덩중샤, 담평산, 윈다이잉 등을 강서성 주장에 파견하여 공산당을 추종하는 국민혁명군을 공산당으로 포섭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그리고 2방면군 총사령관 장파쿠이와 합작하여 토지혁명을 실시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장파쿠이가 분공조치를 따르는 모습을 보이자 리리싼이 장파쿠이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독자적인 무장 봉기를 준비하자고 주장했고 임시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이를 수용하여 독자적인 무장봉기를 준비했으니 이것이 바로 난창 폭동이다. 난창 폭동을 주도한 것은 저우언라이였는데, 장궈타오의 따르면 저우언라이는 당시 다음과 같은 구상이었다.
공산당 당중앙은 저우언라이의 이러한 계획을 승인했고 7월 20일, 저우언라이는 전적위원회 구성을 위해 난창에 파견되었고 7월 27일 난창에 도착하여 리리싼, 윈다이잉, 펑파이와 함께 전적위원회를 설립하고 저우언라이가 서기에 취임했다.
3.2. 코민테른의 저지
그런데 7월 23일 코민테른 대표 비사리온 로미나제와 하인츠 노이만이 도착했다. 당시 코민테른은 무장봉기를 조직하라고 지시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공산당의 순수한 무장봉기가 아니라 국민당 내부의 좌익을 선동하여 국민당 최고 지도부에게 저항하라는 것이었다. "오직 국민당의 혁명적 변혁이 전혀 희망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거나, 이러한 실패가 새롭고 심각한 혁명 고조와 동시에 일어난다면" 그때서야 소비에트 수립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이 코민테른과 크렘린의 방침이었고, 이에 따라 모스크바에서는 국민당 혁명위원회, 좌파 국민당이라는 틀 안에서 행동할 것을 계속 주문했다. 여기에서 기록이 엇갈리는데, 중국 공산당에서는 7월 25일 코민테른이 '만약 성공한다면 우리는 당신들의 계획이 가능하다고 본다'라고 전보를 보낸 점을 들어 당시 중공 중앙이 봉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장궈타오는 다른 회고를 내놓고 있다. 장궈타오의 회고에 따르면, 7월 26일 한커우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 상무위원회가 소집되어 장궈타오, 취추바이, 리웨이한, 장타이레이, 로미나제 등이 참석했다. 소련군 고문 바실리 블류헤르는 장파쿠이가 자신의 휘하의 제4군, 제1군, 제20군 등을 난창-남심에서 광저우로 철수할 것으로 밝혔다고 장파쿠이에게 지접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난창에서 봉기하는 것보다는 장파쿠이와 함께 광동으로 철수하는 편이 나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난창에서 봉기해봐야 봉기에 참여할 병사는 5~8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며 우세한 국민혁명군의 반격으로 동강까지 진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로미나제가 소련인 고문이 난창 폭동에 참여하는 것과 코민테른 자금이 난창 폭동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훈령이 내려왔다고 밝혔다. 결국 7월 26일의 회의는 난창 폭동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당중앙은 장궈타오를 파견하여 난창에서의 봉기를 저지하려 했다. 장궈타오는 당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7월 30일 새벽, 장궈타오가 난창에 도착했다. 원래 봉기는 7월 31일[4] 로 잡혀 있었지만, 장궈타오가 난데없이 가져온 중지 명령에 전선위원회 사람들은 극도로 분노했다. 평소에 과묵하고 온건하던 제4군 총참모 윈다이잉조차 격한 반응을 보였다."그때의 내 마음은 이상하게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찬성한 것을 지금 지시를 받고 중지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저우언라이 역시 격노했다."코민테른과 중공 중앙은 중국혁명을 짓눌렸고 몇천, 몇만의 동지들을 땅 속에 묻었다. 그들의 지도는 완전히 파탄되었다. 지금 난창 폭동은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 이제 와서 코민테른의 지시라고 하여 우리들의 행동을 저지하려 한다면 우리는 죽음을 맹세하고 반대한다. (중략) 더 이상 우리의 마음을 동요시킨다면 당신을 타도하겠다!"
장궈타오의 만류로 폭동은 7월 31일에서 8월 1일로 늦춰졌고, 장궈타오는 우한으로 돌아가지 않고[5] 폭동에 참여했다."이 명령은 중앙이 나를 파견한 목적과는 전혀 다르다. 지금 우리가 행동하지 못한다면 나는 사직할 수밖에 없다. 오늘 이 특별위원회에도 더 참석할 필요가 없다."
반면 중국 공산당의 주장에 따르면, 장궈타오가 7월 30일 난창에 파견된 것은 코민테른과 중공중앙의 봉기에 대한 자신감을 전달한 것이며 봉기가 8월 1일로 늦춰진 것은 장궈타오가 장파쿠이와 합작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3.3. 참가 부대
봉기 참여가 예정된 부대들은 제2방면군 제11군 예하 제10사단, 제24사단, 제4군 예하 제25사단 제73단, 제75단, 제20군 전부, 제5방면군 제3군 교도연대 일부, 황포군관학교 한커우 분교 생도 1개 연대, 난창 경찰 등 2~3만 명이었다. 지휘부는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주석 담평산, 비서장 오옥장, 재정위원회 주석 임조함, 농공위원회 주석 장궈타오, 선전위원회 주석 곽말약, 참모단 주석 류보청, 정치보위처장 리리싼, 총지휘 허룽(군인), 전적 총지휘 예팅이었다.[6]
1927년 7월 하순 난창으로 이동한 24사단은 장파쿠이 휘하의 예팅의 지휘를 받고 있었는데 예팅 자신이 공산주의자로, 공산당 정치장교들과 선전위원들이 2년 동안 24사단 내부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왔고 그 결과 24사단 예하 2개 연대의 병사들 대부분이 공산당원이었다. 공산당은 예팅을 11군 군장에 임명하고 당대표로 섭영진을 임명했다.
허룽의 20군은 6개 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허룽 자신은 비적 출신의 군벌로 악명이 높고 교양도 없던 인물이며 그의 부하들도 빈농과 범죄자들을 모아서 만든 4천명의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무기도 겨우 2천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수준만 갖추고 있었다. 다만 생계를 약속한 허룽에 대한 충성심은 높았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규율이 낮은 허룽 부대를 회유하기 위해 일부러 허룽에게 총지휘 직책을 부여하였지만 믿을 수 있는 예팅에게 전적 총지휘라는 실질적인 지휘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공산당은 료건오를 20군 당대표로 임명했다.
이외에 난창의 치안관이며 3군 교도연대장 겸 9군 부군장인 주더가 제5방면군 제3군의 교도연대 예하 수개 중대를 이끌고 참여했고 저우언라이가 생도 부대를 지휘했다.
3.4. 봉기와 퇴각
7월 31일에서 8월 1일로 넘어가는 새벽, 공산당의 전면적인 봉기가 시작되었다. 전 시가지에 걸쳐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소규모로 그쳤고 국민혁명군 800명이 전사하고 난창은 공산군의 점령 하에 들어왔다. 난창에 주둔한 3군, 6군, 8군 소속 4개 연대는 모두 항복하여 무장해제되었고 공산군은 은행에서 은화, 지폐 등 170만 원을 노획했다. 저우언라이는 국민당 혁명위원회를 수립하고 위원으로 자신을 포함하여 담평산, 장궈타오, 리리싼, 임조함, 우위장, 고어한, 허룽(군인), 곽말약, 윈다이잉, 하희, 서특립, 예팅, 쑤자오정, 샹중파, 한린부, 양포안, 방유하, 덩옌다, 강제환, 장시서, 팽택민 등을 위원으로 임명했다. 주더는 9군 부군장에서 9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국민당 좌파를 포섭하기 위해 쑹칭링, 천유런, 장파쿠이 등도 위원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민중의 호응은 시원치 않았으며 공산당이 주최한 집회에도 참가가 저조했다. 공산당의 입대 권고에 400명이 되지 않는 노동자들만이 입대하였다. 우한에 머물고 있던 마오쩌둥은 중앙위원회에 자신이 농민군을 이끌고 난창으로 가서 허룽을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이에 취추바이는 8월 3일 마오쩌둥을 상남특별위원회 서기로 임명했다가 마오쩌둥의 구상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7] 당일에 바로 취소했다.
한편 친공분자로 여겨지던 장파쿠이는 사실 봉기 불과 며칠 전에 제2방면군 내부의 공산분자를 축출하기로 한 회의에 참석한 터였다. 장파쿠이는 최소한 중립을 지켜주리라는 공산당의 기대를 저버리고 즉각적으로 난창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켰다. 난창에 머물러 있다가는 국민혁명군에게 토벌당할 것이 틀림 없었고 국민혁명군 제2방면군으로 칭한 공산군은 광동을 공략하여 혁명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8월 5일[8] 난창을 버리고 남하해야 했다. 당시 소련 정치국이 110만 루블 어치에 달하는 무기인 소총 1만 5천정, 탄약 1000만통, 기관총 30정, 산포와 포탄 2000발을 공산군이 점령한 항구를 통해 제공하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저우언라이는 광동으로 가서 소련이 보내준 지원을 받는다면 지역 노동자와 농민의 지지를 규합하여 2차 북벌을 단행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이는 너무 낙관적인 기대였다. 장파쿠이의 반격에 맞선 난창의 방어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고, 난창에 남겨진 소수의 부대는 자신들이 버려졌다고 생각하여 무기력하게 와해되었다.
3.5. 광동으로 가는 길
행군을 시작한지 이틀 만인 8월 7일, 선두에 섰던 차이팅카이의 10사단이 진현에 이르렀을 때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대열에서 탈주했다. 사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는데 10사단 내부에서 중국 공산당이 통제하고 있던 부대는 범맹성의 10연대 하나 뿐이었다. 이 때문에 전적위원회는 차이팅카이를 믿지 못하고 공산당원을 더 많이 투입하여 10사단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저우언라이는 그렇게 하면 오히려 차이팅카이가 반발할 것이라 여겨 반대한 바가 있었다. 차이팅카이의 이탈에 저우언라이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공산군은 8월 8일 임천에 도착했다. 3일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행군을 시작했지만 폭염과 부족한 보금품 때문에 사기 저하와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 병사들은 무거운 무기와 탄약을 버리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농민들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공산군을 공격했다. 주더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당시 차이팅카이의 부대에서 도망쳐 나온 동지의 보고에 의하면 진현까지 탈출한 제10사단의 차이팅카이가 훈시를 한다는 명목으로 간부들을 모아놓고 돌연 중공당 동지 30명을 일제히 구속, 살해한 뒤 부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이로써 제10사단의 바탕을 둔 기초는 완전히 허물어지고 만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8월 24일 공산군은 전대조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 1개 사단을 격퇴하고 회창(후이창)을 공격해 점령하여 1천 정 이상의 소총과 장비를 습득하였고 8월 27일 산터우 항구로 출발했다. 9월 1일 장정(창팅) 전투에서도 공산군이 승리했으나 부상병만 400명이 넘는 등 공산군의 인명 피해는 극심했다. 이에 공산군은 루이진에서 2주간 휴식을 취하며 지속적으로 사상 교육을 실시하며 병사들을 독전했고 500킬로미터를 이동하여 9월 24일 산터우와 조주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잔류한 공산군은 6천명에 불과했으며 3분의 1만이 무장할 수 있었다. 특히 천지탕과 서경당 등 광동파가 군사를 소집하여 공산군 토벌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루이진에서 2주나 허비한 것은 전략적인 큰 패착이었다. 다만 이때 4군 정치부 주임이었던 마오쩌탄이 홍군에 합류하였다는 성과는 있었다."먹을 것도 마실 것도 살 수 없었다. 죽 한그릇 얻기도 어려웠다. 목이 마르면 우리는 도랑에서 물을 마셨다. (중략) 대단히 많은 병사들이 병으로 죽어갔다. 병사들은 쓰러져 길가에서 계속 죽어갔다. (중략) 병사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중략) 많은 병사들이 도망갔다. (중략) 탄약의 절반을 버려졌다. (중략) 박격포를 던져 버렸고 (중략) 대포 몇 문도 분실되었다. 도망치고 병사한 병사들은 4천명에 이르렀고 (중략) 우리는 오랫동안 사람을 보지 못했다. (중략) 병 때문에 낙오한 군인을 농부들이 자주 살해하였다."
3.6. 봉기의 실패
공산군이 산터우를 점령하자 새 중앙정치국 위원 장타이레이가 홍콩을 경유하여 산터우에 도착했다. 저우언라이는 장타이레이가 북벌을 위한 무기를 가져왔다고 여겨 크게 반겼으나 장타이레이가 가져온 소식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었다. 장타이레이는 스탈린이 9월 19일, 국민당 혁명위원회라는 적당주의 간판을 내리고 중화 소비에트로 개칭할 것이며 산터우와 조주를 버리고 군대를 해풍, 육풍 지구로 이동시켜 농민과 합류, 노농홍군으로 개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알렸다. 또한 저우언라이와 장궈타오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강등당하고 담평산과 리리싼이 정치국 위원에서 파면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장궈타오와 리리싼은 상하이로 돌아가고 혁명위원회는 해체하며 담평산도 부서를 떠나고 군사는 저우언라이의 책임 아래에 둔다는 것이 중앙의 결정이었다. 당혹한 저우언라이는 장타이레이에게 말했다.
1927년 9월 30일 리지천이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이 산터우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주사제의 25사단은 전대조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에게 분산되어 있었고 허룽의 2군은 순풍에 있어서 공산군은 예팅 휘하의 24사단, 5천명의 부대만 가지고 대응할 수 있었다. 국민혁명군은 그 4배가 넘는 2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유리한 지역을 이미 선점하고 있었다. 결국 10월 3일의 탕갱 전투[9] 에서 공산군은 2천명 이상을 잃고 참패했고 패주 길에 올랐다. 말라리아를 앓고 있던 저우언라이는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쓰러져 들것에 실려 이동했다. 10월 4일, 저우언라이가 유사의 한 교회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이러한 일에 대해선 신중하게 논의하기로 합시다. 해풍, 육풍으로 가려해도 멀리 탕갱의 국민당군을 격파하지 않고는 갈 수 없으니 일체의 개혁은 이 전투를 끝낸 후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공산군 중 공산당원이 아닌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고 잔류한 공산군은 산터우 서남쪽 160킬로미터 지점의 해륙풍 지역으로 철수하면서 난창 폭동은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팽배가 해륙풍 소비에트를 건설한 해륙풍 지역에서 농민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국민혁명군 11사단의 반격으로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서 주더와 천이는 남하를 포기하고 마오쩌둥의 정강산으로 이동했고 말라리아에 걸려 쓰러진 저우언라이는 섭영진과 예팅의 도움을 받아 홍콩으로 보내졌다."여러분은 아직 여기 있습니까? 지금 중앙의 지시에 따라 우리 공산당은 중국 국민당의 깃발을 사용치 않고 중화 소비에트 깃발 아래서 단독행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이후로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부대를 떠나고 싶은 사람은 여기서 헤어집시다."
4. 이후
봉기 며칠 후 중국 공산당은 8.7 긴급회의를 소집, 천두슈를 퇴진시키고 취추바이가 주도한 강경한 취추바이노선을 도입했다. 취추바이는 난창 봉기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9월 9일 추수폭동을, 12월 11일 광저우 폭동을 일으켰지만 모두 실패하였고 결국 코민테른에게 좌경모험주의 노선이라는 비판을 듣고 실각한다.
주더가 이끄는 생존자들은 1928년, 마오쩌둥의 정강산 투쟁에 합류함으로 홍군과 소비에트 정부를 건설하였다.
5. 평가
훗날 섭영진은 이를 전략적, 전술적 재앙이라고 회고하였다. 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현재의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편찬한 중국인민해방군사(1998년작)는 난창 폭동에 대해 군사적으로 혹평하고 있다.
허나 중국인민해방군사는 정치적 의의 역시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저우언라이 평전의 저자 바르바라 바르누앙은 계속된 실패 중의 하나라고 신랄하게 쓰면서 동시에 처음으로 독자적 군사활동이 시작되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점이 인정되어 난창 폭동이 일어난 1927년 8월 1일은 현재 중국인민해방군 창설일로 기념되고 있다.
6. 대중문화
한국에서 후난성 전투라고 개봉한 건군대업이 바로 이 난창봉기를 다룬 영화이다.
7. 참고문헌
- 중국 인민해방군사, 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러빈, 민음사.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 북스.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출판 삼화.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 공산당 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8. 관련문서
8.1. 인물
8.2. 사건
8.2.1. 국민혁명
- 국민당의 1차 북벌
- 영왕운동(1926.5.25~1927.4.1)
- 천도논쟁(1926.10~1927.3)
- 상하이 폭동(1926.10.24~1927.3.22)
- 난창 군무선후회의(1927.1.1~1927.1.7)
- 한커우 사건(1927.1.3)
- 난징사건(1927.3.24)
- 4.12 상하이 쿠데타(1927.4.12)
- 4.15 광저우 쿠데타(1927.4.15)
- 마일사변(1927.5.21)
- 1차 산동파병(1927.5.28)
- 국공결렬(1927.7.15)
- 영한합작(1927.9.15)
- 당계전쟁(1927.10.20~1928.1.25)
- 장제스-다나카 회담(1927.11.5)
- 장황사변(1927.11.17~1927.12.11)
-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