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성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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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군인, 후일의 중화민국의 군벌, 다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상계군벌의 실력자였다가 몰락한 후 중국 국민당에 가입했으나 중일전쟁 때 완전히 실각한 후 국공내전 때 중국 공산당으로 전향했다. 탕멍샤오(唐孟潚)라고 자를 붙여서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엔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1920년대 후반에는 장제스의 매우 위험한 정적 중 하나였다.
2. 생애
2.1. 후난군벌 시절
1889년 후난성 융저우의 풍안현에서 부유한 상인 및 관료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7년에 서당에 들어가 고전학문을 배웠다. 1908년 후난 육군 군비 학당에 들어갔으며 우수한 성적을 거뒀으나 광서제의 죽음을 추도하는 행사에서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아 처벌당했다. 1909년 후베이 우창의 3군 중학교에 들어갔으며 같은 해에 동맹회에 들어갔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이에 참여했고 1912년 바오딩 무관학교 보병과에 1기로 입학했으며 1914년 졸업했다. 이후 호국전쟁과 호법전쟁 등에 참여했으며 1920년 11월 자오헝티가 호남내전이라고도 하는 담조전쟁 끝에 우페이푸의 지원을 받아 탄옌카이를 몰아내고[1] 후난의 지배자가 되자 휘하의 4사단장이 되었다. 하지만 후난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직예파와 결탁한 자오헝티의 결정은 직예파가 후난에 간섭하며 후난의 자치를 취소하고 자신의 밑으로 들어올 것을 간섭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이 때문에 후난 군벌들이 일관되게 추진해왔던 후난 자치의 기치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동시에 국민당 역시 후난이 북벌을 위한 주요 통로였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924년 1월에 개최된 국민당 1전대회에선 후난성 대표들도 참여했는데 그 중 한명이 마오쩌둥이었다. 공산당원이 중심이 된 국민당 세력은 후난성 깊숙히 대중운동을 벌이며 침투하고 있었다.
당시 탕성즈는 자오헝티 휘하의 바오딩 군관학교 출신의 정예부대 지휘관들이 속해 있던 호남 신파 소속으로 창더에 주둔하며 신파 군관들 사이에서 인기와 명망을 얻고 있었다. 당시 단기군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된 호남 구파 세력이 탄옌카이를 지지했기 때문에 담조전쟁이 자오헝티의 승리로 끝나자 신파의 영향력은 더욱 세졌다. 특히 탕성즈는 자신을 따르는 신파 군관들을 규합하여 자오헝티의 집권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입지가 더욱 탄탄했다. 자오헝티는 호남 접수 이후 군대 개편 작업에 착수했는데 탕성즈가 지휘하던 4사단은 섭개흠(葉開鑫)이 지휘하는 3사단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부대였다. 탕성즈는 4사단을 중심으로 후난 지방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페이푸 휘하의 우한 병기공장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부하들을 무장시켰고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후난의 특산물을 판매하였다. 또한 1924년에 경쟁군벌들을 한차례 섬멸하고 이들의 잔여 세력을 흡수함으로 탕성즈 세력은 크게 성장했다. 탕성즈는 군관강습소를 설치함으로 군관을 양성하는 한편 불교를 강요하여 병사들을 신앙심으로 묶으려 했다.
군사력 강화 외에도 치안 확보와 광산 개발, 학교 설립, 식목 사업, 구황을 실시하는 등 개혁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후난의 관료제를 대대적으로 점검하여 세금과 예산 누수를 최소화했고 도로를 정비하고 토목공사를 벌임으로 자신이 민생에 신경 쓰고 있음을 홍보했고 후난의 민심이 그를 자오헝티를 대신할 수 있는 인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쏠리게 했다.
2.2. 국민당에 합류하다
한때 자오헝티의 믿음직한 심복이었던 탕성즈는 독자적인 세력 구축과 국민당과의 접촉으로 인하여 믿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광저우의 국민당은 탕성즈를 주목하여 그와 개별적인 접촉을 시도했는데 이러한 접촉은 탕성즈가 4사단장에 임명된 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탕성즈는 수십명의 군관을 황푸군관학교에 파견하여 그곳에서 훈련을 받게 했고 국민당도 탕성즈가 파견한 장교들은 무조건 입교시킬 정도로 그와 긴밀히 협조했다. 탕성즈의 동생인 탕성밍도 황푸군관학교 4기 졸업생이 되었다. 이는 국민당이 탕성즈의 잠재력을 주목했다는 것과 더불어 황푸군관학교에 탕성즈처럼 바오딩 군관학교를 졸업한 바오딩 인맥이 많았다는 것이 크게 한몫했다. 그러다가 1925년 7월 리쭝런, 황소횡, 바이충시 등 친국민당 신계계 군벌들이 광서성을 장악하고 국민당에 입당하여 군사적 합작을 실시하자 학맥과 동향관계로 신계계와 유대관계를 맺고 있던 탕성즈와 국민당의 관계도 급진전되었다. 이들 신계계 군벌들은 인맥, 학맥을 동원하여 탕성즈와 국민당 간의 합작을 종용했고 자오헝티 밑에서 독립하고 싶었던 탕성즈도 국민당과의 합작에 적극적으로 나옴으로 양자간의 관계는 크게 밀접해졌다. 이에 1925년 11월에는 탕성즈가 황소횡을 통해 손중산주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든가 심복을 파견해 국민당에 연락처를 마련했다든가 하는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한편 자오헝티는 광서 군벌들에게 같이 힘을 합쳐서 국민당을 치자고 회유하면서 심복을 파견했는데 그 심복이 탕성즈의 친구이기도 해서 탕성즈가 자오헝티를 대신하여 후난을 차지할 야심이 있다는 의사를 타진하는 것을 도왔다. 리쭝런은 광둥, 광서, 호남 합작을 선전하며 왕징웨이 등과 탕성즈의 접촉을 조율했다. 국민당은 탕성즈에게 자신들의 연합전선에 참여할 것을 제의하며 7가지 조건을 내밀었고 탕성즈는 그 조건을 수용했음은 물론, 자신이 국민당을 지지한다는 표시로 2천원의 성금을 보내기도 했다. 한편 탕성즈는 자오헝티의 측근정치에 혐오감을 느껴 자오헝티를 멀리 했고 이 때문에 자오헝티와의 관계가 멀어졌다고 주장했는데 1925년 12월 자오헝티가 탕성즈의 세력 약화를 위해 호남의 재정과 군사를 통일하려는 개혁을 실시하려 하자 탕성즈는 크게 반발했다. 자오헝티와의 사이는 멀어지고 국민당과의 사이는 가까워진 상황에서 때마침 1925년 5.30 사건으로 벌어진 반제국주의 운동이 후난까지 확산되자 그가 국민당에 합류해야 할 이유는 더욱 명확해졌다. 국민혁명 운동의 확산으로 자오헝티마저도 각 학교에 삼민주의를 가르치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자오헝티는 이로써 후난의 반제운동을 억제하고 국민당의 북벌을 면해보려 한 모양이었지만 미흡한 조치였다. 1926년 3월 9일 국민당 호남성 당부는 3만명 규모의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자오헝티에게 24개조 요구 조건을 제출했다. 이는 호남자치를 내세운 자오헝티 군벌 정권의 해체와 국민혁명에 투신할 것을 요구하는 매우 급진적 요구였고 자오헝티가 받아들일 수 있을리 만무했다. 때맞춰 탕성즈는 법회에 참가한다는 구실로 병력을 집결시켰고 자오헝티의 근거지인 창사를 향해 진군했다.
1926년 3월 11일 사태를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자오헝티는 "성헌자치가 실패한 게 다 성장 자리 탈취하려는 탕성즈 때문이지만 나는 피 흘리는 걸 보기 싫음으로 사퇴한다"며 모든 권한을 탕성즈에게 대행시키고 자신은 창사를 떠남으로 탕성즈는 후난의 지배자가 되었고 3월 26일 공식적으로 성장에 취임했다. 국민당도 때맞춰 탕성즈에게 각종 정치적 보장 및 지지, 후난에서 축출된 탄옌카이와의 관계 등에 대해 입장을 전달해 왔고 탕성즈는 국민당에 합류할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탕성즈는 섣불리 국민당 합류를 선포했다간 우페이푸를 자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입장을 공개하진 않았다. 하지만 자오헝티 휘하의 3사단장 섭개흠은 탕성즈에 굴복하지 않고 3사단을 규합하여 탕성즈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탕성즈도 자신을 반대하는 군관들을 체포하란 명령을 내림으로 양자간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수순에 이르렀다. 결국 섭개흠은 우페이푸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고 5월 초에 탕성즈는 창사에서 축출되었다. 섭개흠은 자오헝티의 복귀를 요청했으나 이미 장쭤린에게 의탁한 상태였던 자오헝티는 거절했다. 결국 선택지가 없어진 탕성즈는 휘하의 병력 1만명을 이끌고 장제스의 북벌군에 합류, 8군 사령관이 되어 국민당의 1차 북벌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2.3. 국민혁명 합류
2.3.1. 후난 점령
북벌에 참여한 탕성즈는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창사를 공격했고 격렬한 전투 끝에 섭개흠 부대를 패퇴시키고 7월 14일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창사에 입성했다. 이어 리쭝런이 지휘하는 7군도 창사에 입성했고 창사에선 국민당을 환영하는 5만명 규모의 군중집회가 열렸다. 탕성즈와 리쭝런의 후난 점령은 줄곧 광둥을 벗어나지 못했던 국민당이 처음으로 광둥 바깥에서 거둔 군사적 업적이었다. 국민당은 후난성 의회를 해산하고 성자치를 폐지하는 한편, 탕성즈를 후난성 주석으로 하는 후난성정부를 출범시킴으로 6년에 걸친 후난의 군벌 지배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8월 11일 국민혁명군총사령관 장제스가 창사에 입성, 7군과 8군을 사열했다. 장제스는 탕성즈와 8군을 혁명의 선봉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7군과 리쭝런도 치하했다. 8월 12일 창사에서 총사령관 장제스, 총참모장 바이충시, 군사고문 바실리 블류헤르, 천궁보, 리쭝런, 탕성즈, 허잉친 등이 참여한 군사회의가 열렸다. 장제스는 호북에 대해선 수세적으로 나서고 우선 강서 지역을 먼저 공격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양호 지역을 장악하려는 탕성즈에 대한 견제이기도 했다. 일단 국민당의 주력이 강서성을 공격하는 사이에 우한의 우페이푸가 탕성즈와 싸울 것이니 양자가 모두 지쳐 있는 틈을 타서 강서성을 점령한 국민당이 북상하여 우한을 장악한다는 것이 장제스의 '선강서 후호북' 계획이었다. 하지만 리쭝런은 재빨리 우한을 공격하는 것이 나으며 회유 가능성이 있는 강서의 쑨촨팡을 공격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반대했다. 탕성즈도 우한 공격에 찬성하며 우한과 강서를 동시에 공격하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했다. 결국 장제스와 블류헤르도 리쭝런의 주장에 동조하여 우한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2.3.2. 우한 점령
이후 1926년 8월 우한 공격에 있어 탕성즈는 중앙군 총지휘를 맡았다. 이 시기에 이르러 탕성즈에 저항하던 잔여 후난군벌들도 모두 국민당에 합류했다. 1927년 3월 섭개흠도 국민당에 합류하여 국민당 5군에 편입되었고 격전 끝에 우한과 호북의 주요 요충지들이 모두 함락되면서 우페이푸는 완전히 몰락했고 국민당은 호북 지역을 장악했다. 호북과 호남의 민중들도 자경단을 결성하는 한편 국민당의 북벌에 적극적으로 합류했다. 한편 우한은 점령하는데 큰 공을 세운 탕성즈의 정치적 지위는 올라갔으나 그만큼 총사령관 장제스와의 정치적 대립도 심화되어갔다. 우선 우한 공격에 광동 출신 4군이 참여하는데에 탕성즈는 반대를 표한 바가 있으며 이후 중국 최고의 군수공장 중 하나인 한양병기창 장악을 두고 장제스와 탕성즈는 대립했다. 결국 4군은 우한 공격에 동원되었으나 정쟁으로 인해 우한 함락은 다소 늦춰졌으며 한양병기창은 총사령관 휘하의 우한 행영에 배속되었고 병기창의 무기들은 고루 분배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원래 탕성즈는 소련고문들의 불신과 장파쿠이를 비롯한 우페이푸 군대의 견제로 인하여 장제스와 대항할 힘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으나 호북에서 항복한 병사들을 대대적으로 흡수하면서 세력이 급격히 확장되었고 이 때문에 장제스와 자웅을 겨뤄 볼 정도의 세력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일본, 소련, 공산당에도 우호적 제스처를 보내면서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려 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탕성즈가 수구 군인들의 축이라 여겨 그의 입당을 거부했고 탕성즈 역시 자신의 군대가 급속히 공산화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1927년에 이르면 탕성즈는 무려 3개 군을 거느리게 되었고 장제스는 반장 세력의 폭발을 우려하여 탕성즈의 여러 강력한 요구들을 부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수용하였다.[2] 이에 여러 군벌들이 너도나도 승격을 요구하여 우한에만 무려 7개 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강서에 주둔한 광서 파벌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반장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강서 공격 도중에 천궁보 등이 장제스를 대신하여 탕성즈의 우한 군정 장악을 저지하고 소련에서 보내온 원조 물자의 배분, 군비의 배당 문제 등에 있어 7군과 8군 등은 장제스에게서 소외되어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3]
2.3.3. 쑨촨팡과의 대결 및 8군 개혁
한편 우한을 점령한 장제스는 자신이 바실리 블류헤르의 군사적 능력에 눌려 다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고[4] 이에 자기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무리하게 강서의 쑨촨팡과의 전쟁을 개시했다. 이에 4군과 7군이 동원되어 쑨촨팡과의 대결에 나섰다. 장제스는 일시적으로 승리했으나 쑨촨팡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탕성즈의 8군은 우한에서 방관만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일각에선 탕성즈가 장제스를 제거하기 위해 쑨촨팡과 힘을 합칠 것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실제로 쑨촨팡의 계획은 탕성즈를 국민당에서 이탈시켜 탕성즈와 연합하여 국민당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탕성즈는 자신의 군대가 혁명군임을 강조하면서 군사들을 혁명사상으로 무장시키고 쑨촨팡에게 끝내 합류하진 않았다. 물론 그가 실시한 군사개혁 움직임은 8군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강화려는 목적도 강했다.
하지만 8군은 군벌 출신이란 한계 때문인지 군조직 자체에서 군벌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고 이 때문에 강도높은 군사 훈련 및 공산당과의 제휴가 이뤄졌다. 이러한 공산당과의 제휴는 탕성즈의 공산당 회유와도 관계가 있지만 공산당이 8군에서 군벌 냄새를 지워버리고 8군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도 섞여 있었다. 어쨌거나 탕성즈는 8군이 군벌군이 아니라 혁명군이라는 이미지 세탁이 필요했고 공산당도 8군에 영향력을 심을 필요가 있었으므로 양자의 이해 관계가 합치되어 한동안 탕성즈의 8군 내부의 정치력 강화 작업이 이어졌다.
2.4. 4.12 상하이 쿠데타와 우한 정부 참여
그러던 중 1926년 11월 26일 국민당 중앙정치회의가 정부를 우한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면서 12월 13일 국민정부위원, 중앙집행위원들이 모여 우한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이 때문에 난창을 수도로 삼자고 주장한 장제스와 우한정부는 격렬한 마찰을 빚게 됐고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장제스의 정치적 권위를 무시하고 난창의 중앙집행위원을 우한으로 옮겨버렸다. 우한정부를 설득하려던 장제스의 우한 방문은 실패로 끝났고 오히려 쟝제스를 옆에서 보좌하던 바실리 블류헤르는 장제스를 따라가지 않고 우한에 잔류함으로 장제스의 입지는 계속 축소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우한정부는 군권이 당권을 제한하는 것을 방지한단 구실로 국민당 3중 전회가 결의안을 통과시켜 장제스의 권한을 대거 회수했다. 장제스는 이것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로 받아들이고 극도로 분노하여 집기를 부수며 가히 발광하였다. 한편 탕성즈는 국민당 최고의결기구인 임시연석회의에 참여하게 됨으로 입지를 굳혔다. 4월초 군사위원회는 장제스의 군사권을 약화시키고 국민혁명군을 집단군체제로 개편, 탕성즈를 제1집단군 4방면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로써 탕성즈는 우한국민정부의 군사적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1926년 12월 3일 탕성즈는 호북 서부지역(악서) 작전 동원령을 선포하면서 군비 120만원을 요구했다. 결국 12월 13일 임시연석회의 1차 회의는 탕성즈의 호북 서부지역 진공 작전을 승인했고 4개 군을 주었다. 장제스는 탕성즈에게 20만원의 군비를 할당하면서 쑹쯔원 등과 연계하여 탕성즈의 독주를 견제하려 했다. 이에 탕성즈는 불만을 토로하며 군비지급을 요구했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8군의 군비를 우한 정부가 지불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1927년 1월의 난창회의에서 탕성즈는 그간 원했던 8군의 확편과 군비 확보를 얻어냈다. 장제스가 점령하고 있던 강서는 부유한 지역이 아니라서 장제스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우한도 노골적으로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탕성즈의 편에 섰다. 결국 장제스는 발악적인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후 장제스가 난징국민정부를 수립하면서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의 대립 시기가 열리게 되었다.
한편 광저우에서도 4.15 쿠데타로 광저우와 우한의 연계가 끊기며 우한 정부는 재정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이에 우한 정부는 위기를 타개하고자 펑위샹과 동맹을 맺고 북벌을 재개했으며 총사령관으로 탕성즈를 임명하였다. 우한 정부는 허난의 지배권을 펑위샹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펑위샹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려 했고 탕성즈는 이에 군대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탕성즈는 하남에서 하남의 재원을 확보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선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탕성즈 휘하의 허극상, 허젠 등이 잇달아 봉기하는 등 마일사변으로 우한 정부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펑위샹은 얼마 안가서 장제스와 손을 잡아 버렸고 우한 정부가 국공결렬을 선택하면서 우한과 난징의 대립은 누가 더 군사적으로 우세한가에 정통성이 갈리게 되었다. 1927년 6월 우한 정부는 병력을 재편하여 탕성즈와 장파쿠이를 중심으로 4집단군을 편성해 난징 정부를 무력으로 복속하고자 했다. 8월 7일 장파쿠이가 난창을 점령하고 12일에 탕성즈가 안경을 점령했는데 때맞춰 봉천군벌들이 장제스를 압박하면서 장제스는 위기에 몰렸다.
2.5. 당계전쟁과 몰락
결국 8월 12일, 리쭝런과 바이충시로부터 하야 말고는 답이 없다는 압박을 받은 장제스는 하야를 통전하고 일본으로 외유를 떠났다. 장제스 타도란 명분이 사라진 장파쿠이와 탕성즈는 더 이상 난징을 공격할 수 없었고 노산 군사회의 이후 난징을 향해 진군하던 동정군은 행동을 중지했다. 우한 정부는 장제스가 없어진 난징 정부를 쉽게 접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8월 19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25차 확대회의에서 왕징웨이의 제의에 따라 난징으로의 천도를 선포하고 장제스, 후한민, 차이위안페이, 리지선, 장런제 등의 당적 박탈 조치를 취소했다. 이후 서산회의파를 망라한 난징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가 성립되면서 영한합작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탕성즈는 난징 합류를 거절하고 특별위원회가 광서파에 장악된 것에 불만을 품은 왕징웨이, 천궁보, 구멍위 등과 함께 9월 21일 우한 정치분회를 조직, 5인으로 구성된 정무위원회를 두어 특별위원회에 대항하고 호북, 호남, 안휘 3개 성을 지배하였다. 특별위원회는 우한 정치분회 취소를 요구했으나 탕성즈는 이를 묵살했다. 또한 탕성즈는 리쭝런의 동진 정지를 요구했으나 탕성즈는 새로운 재원 확보를 위해 이를 무시하고 계속 동진, 9월에 이르러 탕성즈가 난징 정부가 기존에 수립한 안휘성 정부를 무시하고 휘하의 35군 군장 허젠을 주석에 임명하면서 세력 확장을 꾀했다.
탕성즈의 안하무인적인 깽판에 분노한 난징 국민정부는 10월 20일, 탕성즈 토벌을 선포하였고 당계전쟁이 발생했다. 여기에 펑위샹, 청첸, 주페이더, 리지선 등 세력가들이 대부분 동조하면서 탕성즈는 하남, 안휘, 강서, 광동 방면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아 11월 11일에 하야,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고 한때 장제스를 위협할 정도의 그의 위세는 거짓말처럼 증발해버렸다. 자세한 것은 당계전쟁 문서 참조.
2.6. 반장전쟁
하야한 장제스는 유학을 명목으로 일본으로 외유를 떠났고, 쑹메이링의 어머니 예계진을 만나 쑹메이링과의 결혼을 허락받았다. 광서파벌은 탕성즈를 토벌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제스 하야와 함께 장제스 개인에게 쏟아지던 지원이 중지되면서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고 왕징웨이가 장제스와 합작을 결정하면서 장제스 복귀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거기에 공산당이 난창 폭동,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 등을 잇달아 일으키면서 장제스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결국 광서파마저도 장제스의 복귀를 요청하게 되었고 장제스 복귀를 요청하는 시위와 군중대회까지 개최되었다. 장제스는 세계일주 계획을 중단하고 11월 10일 중국으로 귀국하였고 쑹메이링과 결혼하여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1928년 1월 4일, 장제스가 탄옌카이의 영접을 받으며 난징에 도착했고 국민당 4전대회가 개최되었다. 1월 9일 장제스는 복직을 선언했고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을 나서 중국 통일을 완수했다. 초라하게 쫓겨났던 탕성즈는 1929년 장제스에게 다시 붙었다. 1928년 편견회의를 시작으로 심화된 군벌 들간의 갈등 끝에 반장전쟁이 발발했고 계계군벌이 1929년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을 무단해임한 호남 사건을 일으키자 장제스는 탕성즈를 신임 군사참의원장에 임명, 그에게 호북에 있는 옛 부하들을 다시 규합하는 것을 허락하면서 다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탕성즈는 1929년 10월에 펑위샹이 2차 장풍전쟁을 일으키자 장제스의 편에 서서 이를 토벌했으나 1929년 12월 호당구국군 제4로군 총사령관에 취임, 장당전쟁을 일으켜 다시 장제스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박살나고 홍콩으로 쫓겨났다.(...)
1931년에는 광저우 국민정부에 합류하는데 9월 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조성된 초당파적 협력 분위기에 난징 정부에 합류하여 군사 참의원 원장이 되었으며 1935년에 이급상장 겸 훈련총감으로 승진했다. 1936년 서안 사건이 터졌을 때는 장쉐량에게 설득하는 전보를 보내 나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한다.
2.7.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베이핑, 톈진 등이 함락되어 화북이 무너지는 한편 상하이 전투에서 국민당군이 패배하면서 난징은 바람 앞에 등불이 되었다. 결국 모두가 난징을 사수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난징에서 철수하기로 하였는데, 탕성즈만이 난징을 적의 손에 쉽게 넘겨줄 수 없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장제스도 동의하여 탕성즈가 휘하의 15만 병사들을 거느리고 난징을 사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탕성즈 휘하의 병사들은 상하이에서의 패전으로 겨우 수습한 패잔병들이 대부분이라 무기와 사기가 형편없었다.[5] 게다가 탕성즈는 성벽 안에서의 싸움만을 고집하여 성바깥에서 지형을 이용한 지연전을 펼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결국 일본군이 공격해오자 탕성즈는 최후통첩을 무시하고 항전하여 그대로 난징 전투로 이어진다. 한동안 잘 맞서 싸웠지만 일본군이 성문을 폭파하고 독가스를 살포하여 방어선을 무너뜨리자 결국 전군에 후퇴 명령을 내린다. 문제는 후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는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병력을 방기하고 도주해버렸다는 것. 일본군은 상하이에서 고생했던 것을 복수하겠답시고 무차별적인 학살과 강간을 벌여 20세기 최악의 학살 중 하나인 난징 대학살이 벌어지게 된다.
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몰락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룽윈 등과 함께 반장운동을 재개하였다.
2.8. 국공내전과 말년
이후 군사위원회 위원을 하다가 1947년에 후난성 둥안현에서 국민대회 대표로 당선되었다. 1948년 총통부 전략고문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평화를 주선하며 상하이와 난징을 오갔다. 그러던 중 국공내전이 발발한 시점에선 후난성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조용히 지내다가 국민당의 몰락이 확실해지자 창사에서 린뱌오 군대와 맞서던 바이충시의 뒤통수를 날려 후난성장 청첸, 1병단 사령관 천밍런과 함께 8월 4일 반란을 일으켰고 바이충시는 이들을 체포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헝양으로 퇴각했다. 이를 후난 기의라 하며, 이를 통해 후난 성을 공산당에 통째로 들이바쳤다. 그 뒤 후난 성 부성장, 후난 성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상무위원 등을 지내며 한동안 잘 나갔다.
그러던 중 1961년 11월 직장암이 발생하여 입원했고 12월에 천이(陳毅) 원수가 병문안을 와서 "국민당의 1급 상장(타국의 상급대장에 상응하는 계급)들 중에서 당신만이 인민해방군에 합류했다"라고 위로했다. 하지만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자 큰 충격을 받고 참여를 거부했다. 1968년 린뱌오 등이 그에게 문화대혁명에 참여하여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을 공격할 것을 요구하자 거부했는데 이에 그들이 권총까지 겨누며 윽박지르자 크게 화를 내며 옷을 걷어부치고 "내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살아남았는데 너희들을 두려워할 것 같으냐!"라고 호통 쳐서 이들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반동으로 몰려 조리돌림당한 다음에 수감되었는데 직장암이 재발하여 1970년 4월 6일 사망했다. 1981년에 복권되어 추도회가 열리는 것이 허락되었다.
3. 종교
독실한 불자로, '불교도 장군'이란 별명이 있었다. 법회를 군사들의 군기 증진을 위해 적극 활용했으며, 본인도 장교들과 자주 법회에 참여했고, 군종 승려들을 데리고 다녔다. 이 때문에 왼손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을, 오른손에는 불경을 들고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4.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위키피디아 영어판 탕성즈 문서
- 위키피디아 중국어판 탕성즈 문서
- 바이두 백과 탕성즈 문서
- 蔣介石의 '第1次 下野'와 復職, 김영신, 중국학보 44권, 한국중국학회.
- 제 1 차 국공합작기 왕정위의 (汪精衛) 정치적 역할과 혁명전략의 변화 - 무한국민정부 시기를 중심으로 -, 이재령, 사학지 25권, 단국대학교사학회.
- 唐生智와 武漢國民政府, 나현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무한 국민정부 성립기 '천도논쟁', 황동연, 학림 13권, 연세사학연구회.
- 中央特別委員會의 役割과 活動, 김영신, 동국사학 36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 民國 初期(1912 - 1920) 湖南軍閥의 形成, 김세호, 동아시아역사연구 4권, 동아시아역사연구회.
- 1920年代初 조항척 軍閥政權의 政治的 性格, 김세호, 역사학보 113, 역사학회.
- 湖南軍閥政權의 崩壞와 變貌 : 唐生智의 執權過程(1923-1926)을 중심으로, 김세호, 중국근현대사연구 3권, 중국근현대사학회.
5. 관련문서
5.1. 인물
5.2. 사건
[1] 자오헝티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탄옌카이는 휘하의 병력을 인솔하여 국민당에 합류하였고 자신의 군사력을 담보로 거기서 상당한 지위를 확보했다.[2] 예컨대 자신 휘하의 사단장들을 군단장으로 승진시켜 달라는 요구라든가...[3] 예컨대 장제스가 탕성즈에게 지급하기로 약속한 군비는 2700만원 중 30만원이었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탕성즈가 자체조달하고 있었고 소련에서 지원한 무기들은 대부분 장제스가 독점했다. 흔히 장제스가 중일전쟁 때 미국 원조물자를 독점했니 어쩌니 하지만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 그랬던 것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중이 아니라 군벌전쟁 와중이었다.[4] 블류헤르마저 장제스는 자기 없인 아무것도 못한다고 뽐내기도 할 정도였다.[5] 그래도 13만명 이상이 있었고 또 당시 아시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87, 88사단과 두위밍 산하의 장갑병단이 있었다. 독일식 훈련을 받고 독일제 무기를 쓴 이 부대는 비록 상당수가 상하이에서 갈렸지만 그래도 꽤 살아남았고 이들의 정신상태 및 전투력은 일본군을 압도해 독일식 사단을 중심으로 성 외 요지를 요새화 해 지연전을 했더라면 중국에게 더욱 유리했을거라는 게 역사학자들 대부분의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