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함 사건
1. 소개
1926년 3월 20일, 국민당의 권력구도를 통째로 바꿔버린 정변. 3.20 사건, 3.20 정변이라고도 부른다. 중화민국 측에서는 공산당이 장제스를 납치하기 위해 수작을 벌이다 발각된 것이라 주장하고 공산당 측에서는 장제스가 공산당을 공격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지만 사건의 주모자와 원인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어느 쪽이 확고히 맞다고 단정 짓기 어려운 상태다.
2. 배경
2.1.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제스는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수사, 쉬충즈 숙청 등을 통해 왕징웨이의 집권을 도왔고 중국 국민당의 제일가는 군사 실력자로 성장하게 되었다. 광동 동부의 천중밍을 상대로 한 2차례의 동정에서 장제스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어 천중밍을 완전히 축출했다. 장제스는 원래 국민당 좌파나 공산당원에게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고 쑨원이 연소용공에 찬성한다는 것을 알자[1] 연소용공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왕징웨이 집권에도 협조했다. 소련 고문들은 장제스가 '너무나 쉽게 격정에 휩싸이고 난 뒤 똑같이 너무나 쉽게 의기소침해져 중용의 도를 지키지 못하고, 냉정함과 확고부동한 면이 부족하다'며 일부 혹평을 하기도 했지만 그를 국민당의 자코뱅파, '파탄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긴밀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이 덕에 1926년 1월 1일 개최된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왕징웨이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어 중앙집행위원회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정치적 입지를 닦은 장제스는 펑위샹에 맞서 장쭤린의 봉천군벌, 우페이푸의 직예군벌, 옌시산의 염계군벌이 연합하여 일으킨 직봉풍전쟁을 보고 북방 군벌들이 내분에 휩싸여있는 틈을 타서 쑨원의 유지였던 북벌을 시행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공산당과 소련은 국민당의 기반과 노동자, 농민 정책의 실시가 불충분하여 북벌을 실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였고 이에 장제스의 북벌 주장을 반대했다. 그리고 장징장을 비롯하여 국민당 우파와의 관계가 상당히 돈독했고 서산회의파 제명에도 반대한 장제스의 성분을 의심하는 과격한 공산당원들은 장제스의 존재를 방해물로 여기고 장제스에 대한 반장, 도장 분위기를 연출하며 장제스를 비난했다. 북벌에 가장 반대하는 사람은 수석 군사고문인 키산카[2] 로, 그는 노골적으로 북벌에 반대하며 북벌이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장제스를 배제하고 왕징웨이와 다른 군사 실력자들을 지원했다.
북벌 문제와 키산카와의 갈등으로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이 심해졌고 불안한 조짐이 보였다. 3월에 들어서자 정치주임 교관 고어한이 황포군관학교가 혁명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하였고 노골적으로 "우리 단체 안에도 한 사람의 돤치루이가 있다. 북방의 돤치루이를 타도하려면 먼저 이쪽의 돤치루이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2월 3일, 장제스와 돈독하던 미하일 보로딘이 본국의 소환에 따라 귀국한다는 구실로 중국 북방으로 이동하고 적대적인 키산카가 소련 고문단장이 되자 장제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3월 7일, 군교 교육장 덩옌다가 장제스를 비방하는 삐라가 등사 인쇄되어 배포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3] 장제스의 공식 전기에 따르면, 이때 장제스를 노린 두 차례의 암살 시도가 행해졌다고 한다. 공산당의 갈등을 비롯한 정치적 난관으로 인해 장제스는 극도의 불안감과 피로를 호소하며 정치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었고 중산함 사건 직전에는 산터우로 가서 요양할 것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장제스의 비서가 된 천리푸는 장제스가 조울증과 분노 조절 장애에 시달린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2.2.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갈등
공산당의 북벌 반대에 분노한 장제스는 2월 1일 국민혁명군 총감 임명을 거부하고 2월 2일, 광저우 위수사령관 및 군사위원회 위원 자리도 사직하겠다고 나섰다. 왕징웨이가 이에 답하지 않자 2월 27일,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찾아 사직서의 수리와 북벌에 반대하는 키산카의 귀국 중 택일하라고 요구했다.
장왕관계의 악화는, 단순히 귀 얇은 왕징웨이가 키산카 등 소련 고문의 말에 혹하여 북벌을 외면한다는 장제스 측의 주장보다는 더 복잡한 정황이 있었다. 당시 국민당 내부에서 장제스가 가장 강력한 군사실력자임을 사실이었으나 탄옌카이, 리지선, 주페이더을 비롯하여 무시할 수 없는 군사실력자들이 존재했다. 왕징웨이는 이들 사이를 중재하며 권위를 행사하곤 했는데 이는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장제스에게만 의존할 수 없었던 왕징웨이가 여러 군사실력자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게다가 왕징웨이는 이러한 군사적 권위의 확보를 키산카와 협력해서 행했고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노하며 그 의도를 의심했다."혁명의 실권을 소련인의 손에 넘길 수는 없습니다. 코민테른과 제휴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한계가 있어야 하며, 자주적인 입장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2월 중순, 장제스는 정치적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이 문제를 왕징웨이와 상의했다. 왕징웨이는 소련 외유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장제스는 문건을 정리하고 여행비를 홍콩 달러로 환전한 다음에 부두로 향했다. 그때 차 안에서 비서 천리푸가 어째서 광저우에 머무르지 않은 상태에서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이에 마음이 바뀐 장제스는 집으로 가자고 했다가 다시 차를 부두로 향하게 했다. 그러자 천리푸가 강하게 물었다.
장제스는 이번에는 단호하게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장제스는 자신이 소련 외유를 취소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만일 우리가 떠나면 누가 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습니까?"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친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소련이 합작하여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나는 이때, 만일 내가 광동을 떠나지 않으면 뜻밖의 사건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사직이 정식으로 승인되지 않았다. 만일 스스로 광동을 떠나면 직무를 포기하고 달아난 죄를 입게 되는 것이다."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충돌이 격화된 사건은 왕마오궁(王懋功) 사건이었다. 원래 왕마오궁은 쉬충즈의 부하 출신으로, 쉬충즈 숙청 이후 제1군 2사단장에 임명되었는데 장제스는 그를 광저우 위수사령관 대리로 임명할 정도로 신뢰했었다. 그런데 왕징웨이와 키산카가 왕마오궁에게 접근하여 그에게 3만원의 군비를 지급하자 격분한 장제스는 왕마오궁이 키산카의 사주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고 주장하며 2월 26일, 왕마오궁을 체포하여 2사단장 자리에서 해임했다. 배경한 교수는 왕마오궁 사건을, 장제스가 왕징웨이에게 보내는 경고로 해석하고 있다.
3. 전개
3.1. 중산함의 출항
장제스와 왕징웨이, 공산당의 갈등이 깊어지던 가운데 중산함이 출항했다. 중산함은 원래 영풍함 사건 때 쑨원의 목숨을 구할 때 결정적인 공을 세운 기함인 영풍함으로 쑨원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중산함으로 개명되었다.
사건의 문제가 된 중산함이 출항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26년 3월 18일 오후 6시, 황푸군관학교 교통계 직원 리스융이 교장판공청 주임 쿵칭루이에게서 상선 한척이 토비들의 습격을 받았으니 순시선 1척과 위병 16명을 파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리스융은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 사무실에 전화해 순시선 파견을 요청했고 광저우 판사처 교통계 직원 왕쉐천이 이를 교통계장 어우양중에게 보고했다. 이때 전화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왕쉐천은 요청의 주체가 교육장 덩옌다라고 생각하여 보고하고 해군국에 교섭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교섭을 기다리지 않고 순시선 1척을 파견하였다.
해군국을 찾아간 어우양중은 마침 자리를 비운 해군국장 리즈룽 대신에 해군국 참모청 작전과장 쩌주이에게 자신의 직원이 교육장으로부터 교장의 명령을 전달받았다고 하면서 병함 2척을 황푸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말을 들은 쩌우이는 상황이 급박할지도 모른다 여겨 보벽함을 황푸로 파견한 다음에 리즈룽에게 편지를 보내 사정을 알리고 중산함과 자유함 두척 중 어느 배를 보낼 지 결정해달라고 하였다. 리즈룽은 자유함을 파견하기 위해 함장 셰충젠과 접촉했으나 자유함이 수리 중인지라 중산함을 보내기로 하고 어우양중에게 정식 공문서를 보낼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보벽함과 중산함 함장에게도 공식 명령서 교부를 요청했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순시선 한척 파견 요구가 병함 두어척 파견 요구로 바뀌고, 교장판공청 주임의 요청이 교육장을 통한 교장의 명령으로 바뀐 것이 보인다.
8시 30분, 해군국으로 돌아온 어우양중이 10시에 황푸로 전화해 해군국과 교섭하여 병함(보벽함) 1척을 보냈으니 12시 쯤 도착할 것인데 보초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조치해달라고 전했다. 중산함은 19일 오전 7시에 출항, 황푸에 도착했다. 황푸에 도착한 후 대리함장 장퉁신은 교육장 덩옌다를 만나려 했으나 그가 바빠 부관 황전우를 대신 만났다. 장퉁신은 황전우에게 리즈룽의 명령서를 황전우에게 보여주고 장제스의 명령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이 시점에서 리즈룽은 소련조사단이 중산함을 시찰하려 한다는 쩌우이의 보고를 받고 장제스에게 중산함 회항이 가능하냐고 전화로 묻게 되었다. '''당연히 배의 출항을 명령한 적이 없던 장제스는 경악했다.'''
3.2. 3.20 정변
위에서 봤듯이, 중산함의 출항은 오해로 빚어진 단순 사고로 보였다. 그런데 이때 장제스의 주변에는 매우 정황이 수상쩍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926년 3월 18일 아침, 왕징웨이의 아내 천비쥔이 장제스의 집에 두시간 동안 다섯 차례나 전화하여 장제스의 일정에 대해 물은 일이 발생했다. 전화가 왔을 때 장제스는 부재 중이어서 장제스의 아내 천제루가 전화를 받았다. 천비쥔은 당뇨병을 앓고 있는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전화했다고 하면서 장제스가 언제 황푸로 가는지, 어느 부두로 가는지를 물었다. 천비쥔은 매우 부유한 상속녀로 도도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장제스에게 일방적으로 이혼당해서 장제스에게 적대적인 회고록을 남긴 천제루조차도 그날 천비쥔의 전화는 매우 수상했다는 회고를 하고 있다.
장제스가 집으로 돌아오자 천제루는 황포군관학교에 가는 시간을 늦추라고 했다. 이에 장제스가 황포군관학교에 전화를 걸자 중산함이 황푸 섬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고 3월 18일에서 3월 19일로 넘어가는 자정, 공산당원 후궁몐이 찾아와 장제스와 긴급한 대화를 나누었다. 3월 19일 아침이 되자 다시 정체불명의 전화가 장제스의 행방을 추궁했고 장제스는 급히 집을 뛰쳐나갔다. 그 사이에 교도주임 덩옌다가 초조한 모습으로 장제스의 집을 방문했다. 천리푸는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장제스가 돌아온 뒤인 오전 10시, 리즈룽이 전화 상으로 전날 밤 황푸에 파견한 중산함을 돌아오게 해도 되겠냐고 물어왔다.
저녁 6시가 되어 중산함은 광저우로 돌아가긴 했으나 군함의 증기를 끊지도 않고 무기도 전투대형으로 배치해 놓았다. 장제스는 이 시점에서 자신에 대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호문요새 사령이자 장제스의 측근인 진조영의 증언에 따르면, 장제스는 처음에는 산터우로 달아나 재기를 꾀하기로 하고 산터우로 가는 배표를 구입하여 자동차를 타고 부두로 가다가 마음을 바꿔서 광저우 시내로 돌아왔다고 한다. 한편 장제스의 행방을 묻는 전화가 사방에서 쏟아졌는데 그 중에는 또 천비쥔이 있었다. 천리푸의 회고에 따르면, 세번째로 전화했을 때도 장제스가 없다는 대답을 들은 천비쥔은 천리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전화를 세게 끊어버렸다고 한다.리즈룽:중산함을 광저우로 되돌려 참관단에 참관시키고 싶은데, 좋겠습니까?
장제스:중산함은 언제 황푸에 갔는가?
리즈룽:어젯밤입니다.
장제스:나는 황푸로 가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자네가 광저우에 회항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면 된다. 나에게 물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리즈룽:중산함을 회항시킨 것은 교장의 명령입니다.
장제스:그 명령문을 가져와보라.
리즈룽:그것은 전화에 의한 명령이었습니다.
장제스는 광저우로 달려가 해군학교 부교장이자 쑨원주의학회 회원 어우양거(歐陽格)에게 함대사령 권한을 부여하여 중산함을 진압하고 리즈룽을 구속, 심문할 것을 지시했다. 저녁 7시, 어우양거가 파병한 위병들이 리즈룽의 집으로 찾아가 왜 중산함이 여전히 시동을 걸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마침 회항보고를 위해 장퉁신이 리즈룽의 집에 와 있던 참이라 리즈룽은 장퉁신의 말을 인용하여 기적 연돌이 고장나 수리하느라 시동이 걸려 있다고 대답했다. 3월 20일로 넘어가는 자정을 기해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장제스는 시멘트 공장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사실상 장제스의 친위부대인 제1군과 우톄청의 공안 병력을 동원해서 기차역과 중앙은행을 포위했으며 소련 고문들의 집을 봉쇄했다. 장제스는 주페이더에게 자신에게 동참할 것을 요청했지만 주페이더는 이를 따르지 않고 탄옌카이와 이 일을 상의하러 갔다.
새벽 3시, 왕바이링이 지휘하는 20사단 병력이 리즈룽을 체포하여 20사단 본부로 압송했다. 리즈룽은 어우양거와 어우양중이 공모하여 자신을 음해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장제스의 부하들에 의해 중산함도 점거되었다. 파공위원회 총본부가 급습당해 1천명의 규찰대의 무장이 해제되었으며 저우언라이를 비롯하여 국민당과 국민혁명군 내부의 공산당원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었다. 소련 고문들은 자택이 포위되고 위병들이 무장해제당한 것에 대해 항의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키산카는 급히 장제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수취인 부재라는 이유로 돌아왔다. 이른바 3.20 사건, 3.20 정변이었다.
3.3. 키산카의 추방
한편 왕징웨이는 3월 18일부터 당뇨병으로 몸이 아파서 집에서 와병한 상태였다가 20일 아침 천궁보의 보고를 듣고 정변 발생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잠시 후 주페이더와 탄옌카이가 방문했는데 이들은 조금 전 장제스를 만나 왕징웨이에게 보내는 장제스의 편지를 들고 온 상태였다. 편지 내용은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어쩔 수 없이 긴급조치를 취해야하며 이를 양해해달라는 것이었다. 왕징웨이는 크게 화를 내며 자신에 대한 모반이 아니냐고 했다. 왕징웨이는 탄옌카이, 주페이더에게 장제스를 제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탄옌카이와 주페이더는 2군과 3군의 부군장들을 통해 출동명령을 내릴 수는 있지만 장제스를 제지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했다. 왕징웨이는 리지선에게도 군대를 출동시켜달라고 요청했지만 리지선은 계엄령이 선포되어 광저우를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하며 거절했다. 즉 장제스를 제외한 군사 실력자들은 장제스를 따라 정변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왕징웨이의 편에 서지도 않은 것이다.
국민정부 주석 겸 군사위원회 주석인 자신의 명령이 전혀 통하지 않자 왕징웨이는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다. 20일 오후, 장제스가 직접 왕징웨이를 찾아와 이것이 공산당에 대한 행동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다음날인 21일에도 그를 문병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크게 화를 내며 장제스를 비난했고 장제스는 3월 23일 왕징웨이가 국민당에 충성하지 않고 공산당에 충성했다고 그를 비난했다.
이후 장제스는 정변 정리 단계에 신속히 착수하였다. 그는 파업 노동자들을 포위한 군대를 철수시킨 다음에 노동자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으며 리즈룽 등을 석방했고 리즈룽을 체포한 군관을 대신 체포했다.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이 소련의 개가 되어 민족을 배신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반대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장제스는 러시아인들의 구금을 풀었지만 키산카 등에게 중국을 떠날 것을 종용했다. 이날, 소련 광저우 주재 영사관 대표가 "이것은 고문단 안의 특정 개인에 대한 문제인가? 아니면 소련 전체에 대한 문제인가?"라고 물었다. 장제스는 당연히 소련 전체를 적으로 삼고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광저우를 방문 중이던 부브노프 사절단은 장제스의 주장을 납득하고 키산카의 소환 등에 동의했으며 북벌의 조기 실시와 홍콩 파업의 중단 등도 동의했다. 왕징웨이의 입장에서는, 소련이 장제스의 행동에 대해 강하게 나서 장제스 견제에 나섰어야 했지만 오히려 장제스의 요구를 받아들이자 소련이 장제스의 의향만 존중하다고 생각한 왕징웨이는 마지막 희망까지 잃고 말았다.
3월 22일 중앙정치위원회가 소집되어 소련고문단 대표 키산카 등 ‘의견이 맞지 않는 소련 동지’들에게 중국을 떠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소련 고문단도 자신들의 과오와 오류에 대해 인정하고 반성해야 했다.
- 1. 러시아인이 중국의 풍속, 관습에 무지했기 때문에 중국의 반감을 초래했다.
- 2.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을 점차적으로 개혁하려 하지 않고 공공연히 공산당 세력의 확충에 전념하였으며, 각 부서에서 지휘권을 장악하려 했기 때문에 국민당원의 분노를 샀다.
각 군장들도 찬성했으나 상신서는 불문에 붙여졌고 처벌이 이루어지진 않았다."이번 사건의 발생에 즈음해서는 긴급을 요하기 때문에 비상조치를 취했다. 그 때무에 사전에 보고할 시간이 없었고, 독단 전행의 죄는 피할 수 없는 바가 있다. 다만 심야이기도 하고, 약간이라도 시간을 늦추었으면 기회를 잃었을 것이다. 임기응변의 조치는 부득이했다. 스스로 엄중히 처분할 것을 바라며, 이로써 징계의 뜻을 나타내고, 기율을 숙정해야 한다."
3.4. 왕징웨이의 외유
한편 왕징웨이는 3월 22일 중앙정치위원회 회의 이후 중앙상무위원회에 병가를 내고 잠적해버렸다. 3월 23일에 그의 측근 천궁보가 직접 그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잠적에 장제스도 당황하여 중앙정치위원회 결의에서 왕징웨이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후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몇차례 화해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뤄지지 않았고 왕징웨이는 4월 1일 프랑스로 떠나기로 결정, 장제스에게 자신의 관인을 내주어버렸다. 왕징웨이는 중앙감찰위원 장런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4월 9일, 장제스는 편지를 보내 왕징웨이에게 황포군관학교 경비 삭감, 키산카가 횡포를 부리는데도 키산카의 편만 든 것, 왕징웨이가 우유부단하고 자주성이 없다는 것 등 10가지 불만을 지적했다.
왕징웨이는 5월 11일 홍콩을 거쳐 프랑스로 떠나버렸다. 장제스는 쑹쯔원을 시켜 왕징웨이에게 돌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왕징웨이는 듣지 않았다.[5] 훗날왕징웨이는 자신이 막강한 정치적 실권을 가진 상태에서 어째서 그렇게 잠적해버렸냐는 질문에 장제스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배경한 교수는 왕징웨이의 외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후 후한민도 왕징웨이의 실각을 틈타 귀국했으나 왕징웨이는 후한민을 압박하여 홍콩으로 외유하도록 강요했고 5월 11일, 후한민은 왕징웨이와 같은 배를 타고(...) 홍콩으로 떠났다.
3.5. 당무정리변법
4월 29일, 중산함 사건 소식을 듣고 경악한 미하일 보로딘이 광저우로 돌아왔다. 장제스는 보로딘에게 소련에서 귀국한 후한민이 그를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위협하며 국민당 내부에서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치를 요구했다. 보로딘은 통일 전선 유지를 위해 온화한 태도로 장제스의 요구를 거의 다 수용했고 수 차례의 협의 끝에 1926년 5월 15일 국민당 제2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에 제출했다. 이를 당무정리변법, 혹은 당무정리안이라 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의 초안은 공산당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 문제되어 공산당을 기타 정당으로, 국공 연석회의를 연석회의로 수정하고 공산당원의 비율에 대해 규정한 3조가 추가되어 최종적인 당무정리안은 다음과 같았다.
1926년 7월 12일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천두슈는 "국민정부 내부의 정치적 상황 내지는 국민정부의 실력 등 여러 면에서 볼 때 북벌의 시기는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면서 북벌의 실행에 대해 비판했지만 중국 공산당은 "노동자, 농민의 역량 재고와 공고, 민족운동의 영도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대자산계급 상대 소자산계급의 투쟁강화로 국민혁명의 영도권 확보"를 공산당의 우선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조직문제, 선전공작, 노농운동 관련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 민중운동과 연대한 광범한 민족혁명 운동을 전개한다는 조건으로 북벌에 적극 협력하여 세력을 확장하기로 결정했다.[6]
4. 분석
중산함 사건에 대한 분석은 크게 다음과 같다.
4.1. 공산당 음모론
우선, 공산당과 소련이 장제스의 주장처럼 정말로 음모를 꾸몄다는 주장이다. 장제스의 측근이며 호문요새 사령인 진조영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장제스 본인도 자신을 납치하려는 시도에 대한 자구책이라 주장하며 천비쥔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그 증거라 보았다. 허샹닝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리즈룽은 중산함을 이동시켜 군교와 광저우의 교통을 차단한 뒤, 군교를 왕징웨이에게 인도하도록 장제스를 협박할 생각이었다. 장제스와 비서인 천리푸 두 사람의 소련행 여권도 사전에 준비되어 있었다. 불온한 움직임을 안 장제스는 19일에 은밀히 작은 배를 타고 황푸에서 광저우로 갔다. 그날 오후 중산함도 역시 광저우로 돌아와 보일러를 계속 때며 출발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장제스, 천리푸 두 사람을 체포하여 출항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중산함 사건의 원인은 키산카와 공산당원들에게 있으며, 이들은 공산당원이 아닌 장제스의 존재에 부담을 느껴서 장제스를 납치해서 모스크바로 압송하고 군사정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3월에 행해진 장제스에 대한 음해도 이들 공산당원의 사주란 것이다."나는 모욕을 당했다. 예산이 삭감되고 무기는 다른 군단에게 넘어가는 등 러시아인과 중국 공산당원들은 나에게 반대했다. 그리고 나는 코민테른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4.2. 우파 음모론
반대로 중산함 사건은 장제스나 우파의 자작극이라는 주장도 있다. 중국 공산당의 현재 입장이 이러하며 이들에 따르면, 장제스는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불만을 품어 좌파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레고리 보이틴스키는 중산함 사건이 제국주의자들의 작품이라고 논평했으며 장제스 평전의 저자 조너선 펜비 경은 장제스가 자신의 권위를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는 가설을 '가장 그럴싸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장제스가 아니라 서산회의파나 쑨원주의학회를 비롯한 국민당 반공우파들을 배후로 지목하는 경우도 있다. 우파들은 장제스를 확실한 반공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장제스로 하여금 공산당이 자신을 납치하려 한다고 믿게 하였고 결국 장제스가 중산함 사건을 일으키는데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예컨대, 체포된 리즈룽은 어우양중과 어우양거가 공모하여 자신의 중산함 함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1927년 4월, 서산회의파가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장제스의 의심을 부추겼고 천자오잉, 어우양거 등 쑨원주의학회 회원들을 사주하여 사건을 일으켰다고 말을 바꾸었다. 실제로 중산함 사건에 참여했던 왕바이링, 류즈, 후이둥성, 머우빈 등은 모두 쑨원주의학회의 주요회원들이었다. 이시카와 요시히로는 우파들의 모략에 장제스가 과잉대응한 것을 진실이라 추론했다. 하지만 배경한 교수는 서산회의파 배후설이 정황상 제일 그럴듯하다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4.3. 사실 좌파 토사구팽?
조너선 펜비 경은 당시의 언론 자림서보를 인용하여 흥미로운 주장을 소개한다.
흥미로운 견해지만 어디까지나 근거가 불명한 당시의 언론 보도가 출처이며 조너선 펜비 경이 역사학자가 아니라 언론인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하는 주장이다.
4.4. 사실 그냥 우연?
배경한 교수는 다음과 같은 분석을 한다.
5. 결과
중산함 사건으로 인하여 왕징웨이가 외유하고 그의 정치적 권위가 실추되면서 1925년 8월 이래로 유지되어 오던 장왕합작 체제는 붕괴되었고 장제스 1인 체제가 열리게 되었다. 좌파와 공산당도 일단 자신들의 과오를 표면적으로 인정하고 장제스가 추진하던 북벌에 협조하게 되었다. 광저우에서 국민당 제2기 2차 중앙전체회의가 개최되어 장런제, 탄옌카이, 장제스, 우징헝, 구멍위를 연석회의에 참석할 대표로 선정했고 공산당은 3인의 대표를 낼 수 있었으나 명단을 제출하지 않았다. 또한 당무정리안에 따라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직이 신설되어 감찰위원 장런제가 추대되었으나 곧 장제스로 교체되었다. 또한 당무정리안 4조에 따라 장제스를 군사부장 겸 조직부장, 샤오위안충을 청년부장, 구멍위를 선전부장, 간나이광을 농민부장, 엽초장을 비서장에 임명했다. 당의 대권을 장악한 장제스는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게 된다.
허나 더 이상 장제스가 좌파가 아님을 확신하게 된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 국민당 좌파 세력은 이러한 장제스 1인 체제의 견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게 되었고 그의 영향력 축소를 위한 정치적 공세에 돌입하게 되었다. 장제스의 정치, 군사적 권력 집중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외유를 떠난 왕징웨이의 복귀를 촉구하는 영왕운동 등 여러 정치적 공세가 국민혁명 내내 이뤄지게 되었으며 양측의 첨예한 정치적 대립은 결국 4.12 상하이 쿠데타에서 폭발하게 된다.
6.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저, 민음사.
- 국민혁명시기의 장개석과 왕정위, 배경한, 신라대학교.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국민혁명 초기 국민당 우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김영신, 동양학 49권 49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黨務에 관한 결의를 통해 본 西山會議의 본질, 김영신, 유지원, 중국학연구 58권 58호, 중국학연구회.
- 西山會議 召集에 대한 各界의 反應, 김영신, 동국사학 31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 제1차 국공합작기 왕정위(汪精衛)의 정치적 역할과 혁명전략의 변화 - 무한국민정부 시기를 중심으로 -, 이재령, 사학지 25권, 단국대학교사학회.
7. 관련문서
- 국민당의 1차 북벌
- 영왕운동(1926.5.25~1927.4.1)
- 천도논쟁(1926.10~1927.3)
- 상하이 폭동(1926.10.24~1927.3.22)
- 난창 군무선후회의(1927.1.1~1927.1.7)
- 한커우 사건(1927.1.3)
- 난징사건(1927.3.24)
- 4.12 상하이 쿠데타(1927.4.12)
- 4.15 광저우 쿠데타(1927.4.15)
- 마일사변(1927.5.21)
- 1차 산동파병(1927.5.28)
- 국공결렬(1927.7.15)
- 난창 폭동(1927.8.1~1927.10.4)
- 영한합작(1927.9.15)
- 당계전쟁(1927.10.20~1928.1.25)
- 장제스-다나카 회담(1927.11.5)
- 장황사변(1927.11.17~1927.12.11)
- 광저우 폭동(1927.12.11~1927.12.13)
-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