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폭동
1. 개요
1926년 10월부터 1927년 3월까지 군벌 쑨촨팡의 지배를 받던 상하이를 장악하기 위해 3차례에 걸쳐 일어난 중국 공산당의 무장봉기. 국민당의 1차 북벌과 맞물려 3월에 상하이에서 쑨촨팡의 병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2. 배경
1926년 7월 장제스가 영도하는 중국 국민당이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한 이후, 국민혁명군은 우페이푸, 쑨촨팡의 병력을 격파하고 호남, 호북, 강서, 복건을 장악하고 강소, 절강성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강소성에 위치한 고도로 경제가 발달한 상하이는 국제도시로 일찍부터 노농운동이 활발한 곳으로 1919년 5.4운동을 시작,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이곳에서 창당되었으며 1922년 홍콩 선원 파업 원조 시위, 1925년 5.30 사건 등을 전개하는 등 공산당의 영도 아래에서 많은 파업과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문에 군벌군은 물론이고 국민당 좌파와 국민당 우파도 서로 상하이를 선점하기 위해 알력을 벌이고 있었다.
1926년 7월 중국 공산당은 군사소조를 파견하여 상하이의 노농운동을 사주했고 중국 국민당도 9월 4일 강소 특무위원회를 조직, 국민당원 유영건과 우징헝으로 하여금 상하이의 국민혁명 공작을 지휘하게 하였다. 북벌 직후 중국 공산당과 나역농을 서기로 하는 중국공산당 상하이구위원회는 북벌의 전진을 예의주시하며 대중을 동원, 상하이의 군벌군을 무력으로 축출하려 했다. 중국 공산당이 이것이 북벌을 환영하려는 인민대중의 노력이었다는 식으로 미화하지만 이면에는 영왕운동, 천도논쟁으로 우한에 설립된 국민당 연석회의와 충돌을 빚고 있던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가 부유한 상하이를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상하이의 자본가들은 중국 산업발전의 부진이 다름아닌 열강의 경제적 침략에 있다고 보고 국민혁명에 발맞추어 강력한 반제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파업이나 폭동 역시 제국주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한가지 '외교보조수단이자 유일한 방패'로 인식하여 공산당의 폭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3. 전개
3.1. 1차 상하이 폭동의 실패
1926년 9월, 상하이구위원회 조직부장 조세염은 무장인원훈련대를 조직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공인규찰대를 조직, 10월에 2천명에 달하는 병력을 확보했다. 상하이의 공인규찰대는 군벌군을 제외하는 상하이의 최대 무력이었기 때문에 상하이의 자본가들은 규찰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규찰대와 접촉했고 심지어 두웨성을 비롯한 청방이나 프랑스 조계지를 비롯한 열강 세력조차 규찰대를 두려워하며 총공회와 연계하려 했다.
국민혁명군이 강서성을 장악한 직후인 1926년 10월 24일, 중국 공산당 상하이구 위원회는 노조총연합회를 동원, 새벽에 1천여명을 동원하여 1차 무장봉기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체계적인 조직을 마련하기도 전에 준비 없이 급하게 일으킨 봉기라서 상하이 방수사령관 이보장에게 간단하게 진압당했다. 하지만 1926년 12월 상하이에 도착한 조직부 서기 겸 군사위원회 위원인 저우언라이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즉각 2차 폭동을 준비했다.
1927년 1월 1일 개최된 난창 군무선후회의는 송호지역으로의 진격을 결정, 장제스의 중로군, 허잉친의 동로군, 탕성즈의 서로군을 조직하여 절강, 강소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2월 18일 동로군 전적총지휘관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동로군이 항저우를 점령하고 자싱에 이르러 상하이를 위협하자 상하이의 쑨촨팡 부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에 저우언라이는 프랑스 조계지의 라파예트 거리 29번지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상하이로 접근하는 북벌군의 도착에 발맞춰 봉기하기로 결정, 중국 공산당과 상하이구당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노동자들을 조직하였다.
조계지 당국은 공산당의 이러한 움직임을 경계하였고 1927년 1월 한커우 사건이 발생하여 한커우의 영국 조계지가 무력으로 회수되자 공부국은 "한커우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광동군대나 그들이 추종하는 어떠한 기도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맞받아 통격(痛擊)을 주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 방위를 위해서는 사격행위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무력 사용을 시사했다. 1월 11일 조계지 주변지역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집회, 시위, 강연, 정치선전을 금지시켰다. 또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베트남 부대 200명, 영국령 홍콩에 주둔하고 있던 인도 제국군 400명이 차출되어 상하이에 증원되는 등 조계지는 '전쟁기지화'되고 있었다. 이후 난징사건까지 터지면서 조계지에는 2만명에 달하는 열강의 군대가 증파되었다.
3.2. 2차 상하이 폭동의 실패
공산당의 무장봉기 움직임에 상하이의 유영건, 우징헝 등은 특무위원회, 상하이시당부, 강소성당부 3자로 구성된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시정부를 구성하여 상하이를 통제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하이 초공회 수장 왕숴화는 이를 거부하고 시민위원회 설립을 요구했다. 유영건과 우징헝이 거부하자 왕서화는 2월 19일 상하이 총공회의 명의로 총동맹파업 명령을 발표, 파업으로 북벌군을 맞이하자는 구호를 내세워 36만명의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독자적으로 봉기하였다. 하지만 북벌군은 자싱에 이르러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있었고 이에 중국 공산당은 2월 20일 총동맹파업을 무장봉기로 전환하라고 지시, 2월 21일에 노동자들이 상하이의 군경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폭동에 나섰다.
하지만 파업을 선동하는 전단지를 뿌리는 학생들이 군경에게 체포되고 노농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 처형되었으며 국민당 소속의 함정 건강, 건위함이 노동자들을 원조하기로 했다는 계획이 꼬이면서 봉기한 노동자들이 아군 함정에 포격을 가하는 등[1] 상황은 엉망진창으로 흘러갔고 자싱의 바이충시는 노동자들을 돕지 않고 방관하는 입장을 취했다. 결국 2차 봉기도 상하이의 쑨촨팡 부대에게 가차없이 진압당해 2차 폭동도 실패로 돌아갔다.
2차례의 실패에 중국 공산당은 천두슈, 나역농, 조세염, 저우언라이 등을 위원으로 임명하여 봉기를 지휘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특별위원회는 산하에 군사위원회와 선전위원회를 설치, 저우언라이, 조세염, 옌창이를 군사위원에, 인콴, 정차오린, 가오위한, 허창 등을 선전위원에 임명했다. 그리고 2월 26일, 천두슈가 특별위원회에서 "총동맹파업을 바탕삼아 무장폭동을 진행하고 폭동 중에는 무기를 탈취해야 한다. 그리고 무장폭동에는 반드시 광범위한 인민대중이 참가해야 한다."고 교시하면서 노동자 규찰대를 조직, 비밀리에 군사훈련을 진행하면서 3차 폭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3.3. 3차 폭동의 준비
상하이가 위험해지자 장쭤린은 힘을 잃은 쑨촨팡을 대신하여 장쭝창 휘하의 필서징 부대를 남하시켜 상하이 수비를 맡게 하였다. 하지만 이미 상하이를 지킬 수 없다고 여긴 상하이 수비군 사령관 필서징은 동로군 전선 총사령관인 바이충시에게 투항조건에 대해 협상하기 시작했다. 3월 20일 동로군이 상화이 인근 용화를 점령, 3월 21일 상하이 근교까지 진출하자 장제스의 상하이에서의 정치적 주도권의 성장을 우려한 우한과 공산당이 행동에 나섰다.[2] 우한 정부는 각 군장들에게 점령지의 이권을 분배하고 지휘관들에게 정치공작을 통해 반장 선동을 하는 등 장병들을 우한 쯕으로 포섭하기 시작했다. 상하이, 난징 점령에 참여한 동로군과 강우군은 공산당원들로 구성된 당대표와 정치부 주임이 국민혁명군 평균에 비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상하이의 중국 공산당은 시민대표자회의를 여는 등 시민들을 포섭하는 정치공작을 진행하는 한편 천두슈, 왕숴화, 나역농, 저우언라이 4인이 공동으로 책임을 지는 가운데 저우언라이가 총지휘를 맡아 3차 폭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이는 장제스 군대가 오기 전에 상하이 수비군 무기를 입수하여 공산당의 무장을 강화하려는 계획이었다. 3월 19일 저우언라이는 <중공 상하이구위원회 행동대강>을 발표, <각부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따르면 파업 후 곧바로 규찰대가 폭동을 일으켜 경찰국을 통제하고 규찰대가 치안을 담당, 그리고 직로연군 패잔병들의 무장을 해제하며 각 공공기관을 장악하고 시정부를 수립해 북벌군을 맞이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장제스와 공산당의 관계가 크게 악화된 상황이었지만, 저우언라이는 그래도 일단 '북벌군 환영'이라는 명목의 3월 21일의 3차 폭동을 준비했다.
이때 총공회는 바이충시에게 병력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바이충시는 열강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3]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그랬으나, 장제스가 이미 난창과 즈장에서 총공회를 해산시키고,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 소속 당부와 신문사, 농회들을 폐쇄하고, 그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장제스가 총공회를 도울 생각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3.4. 3차 상하이 폭동
3월 21일, 특별위원회가 총파업과 무장폭동을 지시했다. 열강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외국인에 대한 구타, 기계 파괴가 엄금되었다. 이에 80만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호응, 난스, 훙커우, 푸둥, 우쑹, 후둥, 후시, 자베이 등 7개 구역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30시간 동안 군벌군과 격전을 벌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저우언라이는 외국 조계지를 제외한 상하이 전체를 점령했다. 규찰대는 경찰들을 무장해제시켰고 도망치는 필서징 부대를 공격했다. 결국 군벌군 5천명이 전사, 부상, 포로가 되었고 노동자들은 5000여 정의 총기와 각종 무기, 탄약을 입수하여 무장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 과정에서 300여명의 노동자들이 사망하고 1000여명이 부상당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라서 필서징의 부대는 규찰대에 맞서서 완강하게 저항하여 38시간이나 시가전을 벌이며 버텼고, 3월 22일 쉐웨가 지휘하는 국민당 1군 1사단이 상하이에 진입하고 나서야 필서징 부대가 완전히 제압되었다. 바이충시도 입성하여 강남병기공장을 점령하고 북벌군 동로군 전선 총지휘부를 설치했다.[4]
폭동 직후인 3월 21일, 22일, 23일에 걸쳐 공부국은 포고문을 발표, 집회, 시위활동을 금지하며 도로 위에 체류하거나 서성거리는 것조차 금지하고 폭동을 사주하는 예를 제지했다. 난징사건이 발생하자 조계지 당국은 중국군대의 병사, 순경의 출입 및 군복과 휘장을 한 사람의 통행, 글자가 있는 깃발의 휴대를 금지하고 저녁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의 통금령을 발표했다. 바이충시와 회견한 상하이 총상회 회장 우흡경은 "내 생각으로는, 외국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군대가 아니라 노동자"라고 발언했다.
3.5. 상하이 시민정부 조직
북벌군의 입성에 저우언라이는 전투를 중지하고 국민혁명군을 환영하는 예비정부를 수립했다. 3월 22일 상하이 공상학 각계가 시민대표회의를 열고 시민대표 35명을 선출하였으며 바이충시, 유영건, 나역농, 왕숴화, 고순장 등 19명으로 상하이시 임시정부, 즉 상하이 시민정부가 조직되었다. 이 중에서 공산당원과 공청당원이 10명이었다.
공산당 절강 지구 위원회는 상하이 시민정부는 소비에트이며 파리 코뮌이라고 설명하는 등 적화 야욕을 보이고 있었다. 우한의 미하일 보로딘과 왕징웨이 정부는 신속히 상하이 시민정부를 승인하고 4개항을 결정했다.
- 상하이 방면의 외교사무는 외교부장 천유런이 직접 담당한다.
- 외교, 재정, 교통의 3부장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대응책을 지도하도록 한다.
- 쑨커, 구멍위, 천유런, 쑹쯔원, 쉬첸 등 5명을 파견하여 외교 연구회를 조직, 상하이 방면의 외교를 연구케 하고 천유런을 지도위원으로 한다.
- 정치부 부주임 곽말약을 상하이의 정치공작 지도원으로 파견한다.
4. 결과
중국 공산당은 상하이 폭동을 "피와 목숨을 바친 노동계급은 전국에서 제일 혁명적인 계급이고 혁명의 사명을 진정으로 짊어질 수 있다. 그리고 기타 압박받는 계급을 영도하여 군벌의 무력을 이겨내고 새로운 혁명적 민주정권을 수립할 수 있다는 점을 몸소 증명했다."고 고평가하며 이 봉기를 크게 추앙하고 있다.
어쨌거나 상하이의 주도권을 장악한 공산당의 규찰대와 장제스의 북벌군은 크게 충돌하였고 우한의 연석회의와 장제스의 갈등도 거세지던 와중에 양자간의 충돌은 4.12 상하이 쿠데타로 폭발하게 된다.
5. 참고문헌
5.1. 저서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 북스.
- 중국공산주의운동사, 신상초, 집문당.
- 중국공산주의운동사, 벤자민 슈워츠, 형성사.
- 중국국민혁명운동의 구조분석, 민두기 등 공저, 지식산업사.
- 중국공산당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코민테른과 중국혁명관계사, 향청, 고려원.
- 중국 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출판삼화.
- 혁명러시아와 중국 공산당(1917~1923), 서상문, 백산서당.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5.2. 논문
- 蔣介石과 4·12 政變, 배경한, 동양사학연구 38권, 동양사학회.
- 國民革命時期의 蔣介石과 汪精衛, 김영신, 동양사학연구 112권, 동양사학회.
- 제 1 차 국공합작기 왕정위의 (汪精衛) 정치적 역할과 혁명전략의 변화 - 무한국민정부 시기를 중심으로 -, 이재령, 사학지 25권, 단국대학교사학회.
- 國民革命時期 汪精衛와 反帝問題, 배경한, 중국근현대사연구 47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무한 국민정부 성립기 '천도논쟁', 황동연, 학림 13권, 연세사학연구회.
6. 관련문서
6.1. 국민혁명
- 국민당의 1차 북벌
- 영왕운동(1926.5.25~1927.4.1)
- 천도논쟁(1926.10~1927.3)
- 난창 군무선후회의(1927.1.1~1927.1.7)
- 한커우 사건(1927.1.3)
- 난징사건(1927.3.24)
- 4.12 상하이 쿠데타(1927.4.12)'
- 4.15 광저우 쿠데타(1927.4.15)
- 마일사변(1927.5.21)
- 1차 산동파병(1927.5.28)
- 국공결렬(1927.7.15)
- 난창 폭동(1927.8.1~1927.10.4)
- 영한합작(1927.9.15)
- 당계전쟁(1927.10.20~1928.1.25)
- 장제스-다나카 회담(1927.11.5)
- 장황사변(1927.11.17~1927.12.11)
- 광저우 폭동(1927.12.11~1927.12.13)
-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
[1] 국민당은 이를 상하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공산당의 계획적 만행이라고 비난하고 공산당은 정보 누설과 연락 체계의 미비가 빚어낸 우연한 사고라고 변명하고 있다.[2] 장제스의 상하이 진출에 대해서 공산당 내부에서도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말이 많았다. 보로딘은 아예 장제스가 상하이를 점령하게 놔두면 안 된다고 주장했고, 주된 의견은 장제스가 쑨촨팡과 싸우다 쇠약해지기를 노리자는 방안과 장제스가 상하이에 도착하기 전에 그가 관여할 수 없는 혁명정부를 수립하자는 방안이었다 한다.[3]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주도한 과격한 혁명외교가 국민당 우파를 크게 자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그거고 정작 장제스는 반장파가 상하이 공격은 제국주의 열강을 자극할 이유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자 묵살한 바가 있다. 이 시점에서는 아마 허울좋은 구실로 쓴 것에 불과할 듯.[4] 이후 필서징은 북방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국민정부에 투항을 시도하다가 걸려서 장쭝창에게 총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