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바우파초이크
1. 개요
'''Neubaufahrzeug'''[1]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나치 독일군이 운용한 다포탑 전차. 대트랙터를 계승하는 중형전차로, 이 전차의 후속형 개발이 곧 4호 전차로 이어졌다. 차량은 라인메탈사가, 포탑은 크루프사가 설계하였다.
2. 개발사
전간기 독일군은 37mm급 경트랙터와 75mm급 대트랙터를 제작하여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과 군사협력관계였던 소련 영토내에서 시험운용하고 기술적경험을 쌓아올리고, 이후 37mm급과 75mm급을 단일형식으로 통합한 중형전차를 구상하였다.
대트랙터가 아직 소련에 있었던 1932년, 독일군은 대트랙터의 후속형으로 7,5cm 주포와 3,7cm 부포를 탑재한 15톤급 중트랙터(mittlere Traktor)를 구상하고 크루프사와 라인메탈사에 설계를 주문하였다. 앞서 대트랙터의 시제품을 성공적으로 내놓았던 점이 인정받은 라인메탈사가 선택되었고 톤수제한도 18톤으로 완화되었으나, 라인메탈사가 설계한 포탑은 7,5cm 주포와 3,7cm 부포를 상하로 설치한 해괴망측한 모양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크루프사도 포탑의 설계를 주문받았다.
첫 시제품은 라인메탈사의 설계를 완전히 반영한 것으로 1934년 완성되었다. 20톤을 훌쩍 넘겨버린 차체도 차체지만, 문제의 포탑을 시험운용하니까 역시 좀 이상했던건지 다음 시제차량부터는 크루프사의 포탑이 얹혀졌다. 크루프사는 7,5cm 주포와 3,7cm 부포를 좌우로 설치한 포탑을 설계하였으며, 노이바우파초이크의 시제차량 5량중 라인메탈사 포탑을 탑재한 1호기를 제외한 4량 모두 크루프사 포탑을 탑재했다. 시험운용과 기술실증 이외에도 1호기와 2호기는 갖가지 선전작업에 동원되었고, 3,4,5호기는 포수 훈련용으로 사용되었다가 노르웨이 침공에 투입되었다.
2.1. 4호 전차의 시조
당초목표였던 18톤은 고사하고 23톤을 초과해버린 노이바우파초이크를 지켜본 독일군은 조용히 후속형을 준비하였다. 1934년 1월 11일 노이바우파초이크의 실패를 바탕으로 바탕으로 37mm급[2] 주력전차와 75mm급 지원전차라는 기본적인 전차분류와 운용개념이 확립되었고, 1934년 2월 25일[3] , 크루프사는 18톤급 전차 '호위차량'(Begleitwagen)설계를 주문받았고, 다음해인 1935년 2월 26일 라인메탈사는 '개선형 노이바우파초이크'(verbesserten Neubaufahrzeug)를 주문받았다. 크루프사는 7,5cm 주포 포탑과 7.92mm 기관총 부포탑을 탑재한 17.2톤급 20/14mm 장갑형과 18.5톤급 30/20mm 장갑형 설계를 각기 하나씩 내놓았고, 라인메탈사는 마찬가지로 7,5cm 주포 포탑과 7.92mm 기관총 포탑을 얹은 설계를 내놓았으며 후에 '호위차량' 계획에 편입되었으나, 1936년 크루프사의 17.2톤급 설계가 채택되어 4호 전차로 발전한다.
한편, 노이바우파초이크의 본디목표였던 주력전차와 지원전차 역할이 모두 가능한 통합형 중형전차개발은 완전히 포기된 게 아니었다. 가령 1935년 12월 30일의 육군총참모부 보고서 2655/34에는 현재(1935년) 편제내에서 단일형식의 전차로 보병지원, 전차전, 다른 차량화부대와의 보전합동 이상 세가지 임무의 수행이 가능한지 연구가 필요하다고 명시되었으며, 1936년 1월 9일에는 같은 글귀가 반복되는 동시에 전차의 높은 생산비를 고려하면 모든 전투임무에 투입될 수 있는 단일형식의 전차가 지향된다는 언급이 나온다.
3호 전차와 4호 전차를 모두 대체하는 단일형전차 개발은 1938년 20톤급 VK 20.01 계획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 설계는 이후 VK 30.01(1941)을 거쳐 판터로 계보가 이어진다. 판터 전차는 노이바우파초이크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그 시조인 VK 20.01 계획을 단순히 3호 전차와 4호 전차를 계승하는 차기형 중형전차가 아니라 주력전차과 지원전차 양개념을 통합하는 전차개발계획으로서 판단한다면, 판터의 계보가 시작되는 위치는 노이바우파초이크로 볼 수'''도'''' 있다.
3. 실전
노르웨이 침공 당시 3대가 노르웨이에 수송되어 무력시위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독일군이 중전차를 많이 끌고 온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자주 항구 주위를 들락거렸다고. 안달스네스에 상륙한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투에도 동원되었는데, 여기서 1대는 늪에 빠져서 기동불능 상태가 되는 바람에 자폭처리 되었다. . 손실분을 보충하기 위해 연철로(...) 만들어진 프로토타입까지 동원되었다고.
4. 최후
대전 종결 이후 영국에서 노획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1941년 '''전량 폐기 처분'''(…)을 받고 1942년엔 전부 파쇄되어 고철덩어리가 되었다. 그래서 현재 남아있는 이 전차의 흔적은 노르웨이에 남아있던 예비 궤도부품 정도가 전부라고...
폐기처분 되지 않고 노르웨이로 수송되었던 잔존 차량들은 독소전에 투입되었다는 설도 있다. 'German Armored Rarities 1939-1945' 라는 책에 따르면, 노르웨이 침공에 동원된 전차들은 1940년 말까지 노르웨이에 처박혀있다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집단에 소속되어 침공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결국 둘 다 1941년 6월 28일 Dubno 인근에서 격파되었다고.
5.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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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프리뷰 동영상에서 잘보면 '''3티어 프리미엄 중전차'''로 나올 예정이었으나 못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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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차량'이라는 이름의 프리미엄 전차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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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관총에 관통당할만큼 물장갑이지만 BR이 1.3이라는 엽기적으로 낮은 수치라서 부포인 37밀리 포가 유용할정도인 전투에만 배정되므로 아군 뒤에 숨어서 쏘거나 자리좀 잘잡으면 3문의 포탑으로 적을 유린하며 일제포격을 가하는 육상의 모니터함이 될수있다.
[1] 독일어로 새로 만들어진 차량(신축차량)이라는 의미이다. 발음은 노이바우파초이크
[nɔybaufaːɐtsɔyk]
. 영어로 대강 번역하면 Newly Built Vehicle 정도.[2] 그러나 37mm급 주포는 이미 30년대 당대에 화력의 부족이 지적되었으며, 후에 주포를 50mm급으로 환장하도록 미리 고려된 상태였다.[3] 1936년 1월 15일 병기국 6과의 보고에는 7,5cm 포전차의 개발시작일이 1935년 2월 25일로 되어있다. 라인메탈사의 B.W.차량 개발시작일과도 거의 일치하는 점을 고려하면 병기국의 보고대로 1935년에 개발이 시작했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크루프사(2월 25일)와 라인메탈사(2월 26일)는 거의 동시에 개발을 시작한 것이 된다. 그러나 1934년 1월 37mm급 주력전차와 75mm급 지원전차의 분류가 결정된 점을 생각하면 종전에 알려진 1934년 개발시작도 시점상 그리 문제가 있어보이지 않는다. 즉 1934년 1월 75mm급 지원전차의 개발이 확인되었고, 2월에 크루프사가 이 신형 7,5cm급 지원전차의 설계를 주문받았고, 이후 1935년 노이바우파초이크에 매진하던 라인메탈사가 뒤늦게 개발에 참여한 것이라고 설명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