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K 30.01 / 02
1. 개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이미 재무장을 준비하고 있었던 독일군은 소형 트랙터(Kleintraktor), 경 트랙터(Leichttraktor), 대트랙터(Großtraktor)를 개발하고 이후 각기 1/2호 전차, 3호 전차, 4호 전차로 계승시켰으나, 군비에 공식적으로 제약을 걸었던 베르사유 조약가 아직 발효중이었으므로 모든 전차개발은 철저하게 비밀리에 붙여졌고 트랙터로 위장되었다. 그래서 프랑스군의 중전차, 특히 샤르 2C나 B1 전차등에 견줄 중전차를 개발할 형편은 안되었다.
독일의 중전차 개발은 히틀러의 재무장선언 이후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VK 30.01(1939)은 본디 프랑스군이 보유한 중전차의 위협에 대항할 요량으로 Durchbruchswagen라는 이름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그 논의도 1935년에 시작되었으므로 근본적으로 전간기의 중전차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39년 포르쉐 박사가 전차개발에 본격적으로 손을 뻗으면서 본디 VK 30.01 계획을 독점했던 헨셸사와 뒤늦게 뛰어든 포르쉐사의 경쟁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큰 설계변경이 연이어 이어지면서 점차 대형화되었다.
헨셸사는 장갑을 보강한 VK 30.01 (H)의 차체에 10,5cm 곡사포를 탑재하여 화력을 증강한 VK 36.01을 내놓았고, 이후 대전차화력의 문제가 제기되자 7,5/5,5cm 구경감소포의 탑재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비슷한 시기 포르쉐사는 8,8cm 전차포를 탑재한 Typ 100 혹은 VK 30.01 (P), 제식명 'Panzerkampfwagen Leopard'를 제시했다.
히틀러는 구경감소포의 지나친 물자소모를 지적하여 VK 36.01에 실질적으로 딱지를 놓는 한편, 포르쉐와 헨셸 양사에 전면장갑을 100mm로 증강할것과 주포의 관통력을 증강할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포르쉐사는 VK 30.01 (P)를 대형화한 Typ 101 혹은 VK 45.01 (P), 일명 포르쉐 티거의 개발을 시작하고, 헨셸사는 VK 36.01를 개량한 차체에 VK 30.01 (P)용 8,8cm 포탑을 탑재한 VK 45.01 (H) 즉 티거 전차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게 1941년 5월 상황이었다. 이렇게 VK 30.01 (1939)는 실질적으로 종료되었다.
한편 독소전쟁의 발발 직후 T-34 쇼크를 경험한 독일군은 다양한 대전차화력을 급조하여 전장에 투입하는 한편, 당시 주력 전차였던 3호 전차와 4호 전차의 주포를 장포신화하여 관통력의 증강을 꾀하였으나, 기본적으로 30년대 설계였던 3호 전차와 4호 전차의 개량에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궁극적으로는 신형전차로 교체할 필요가 있었다. VK 30.01(1941), 즉 30톤급 전차의 개발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이번에는 중형전차였다. 다임러-벤츠사와 MAN사가 각기 VK 30.01 (D)와 VK 30.02 (M)을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MAN사의 VK 30.02 (M)이 채택되어 장갑강화등의 변경사항을 적용한뒤 판터 전차로 제식채용되었다.
이 두 VK 30.01은 그 개념과 배경이 아주 극명하게 다르지만, 같은 이름을 공유하였으므로 무수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본 문서에서는 이 이상의 오해를 막고 또 작성자의 편의를 위하여 부득이하게 1936년 시작되어 티거 전차로 계승된 30톤급 중전차계획을 VK 30.01(1939)로 표기하고, 1941년의 T-34 쇼크 이후 급조되어 판터 전차를 낳은 30톤급 중형전차 계획을 VK 30.01(1941)로 표기한다.
2. VK 30.01(1939)
15톤급의 3호 전차, 20톤급의 4호 전차에 이어, 30톤급 중(重)전차의 필요성을 느낀 독일 육군은 1937년 Durchbruchswagen의 설계를 주문하면서 본격적으로 중전차 개발에 착수했다. 포탑은 이시기 여느 독일전차들처럼 크루프가 담당했고, 차체는 1937년 설계를 시작한 헨셸사와 1939년에 새로 뛰어든 포르쉐사가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2.1. VK 30.01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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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935년부터 30톤급 전차개발을 논의한 독일 육군은 1936년 크루프사에 30톤급 전차에 탑재할 포탑개발을 주문하고 다시 37년에는 헨셸사에 30톤급 시제전차의 차체개발을 주문하였다. 이들 차량에는 Durchbruchswagen, 전선돌파차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39년 VK 30.01(1939)가 정식으로 시작되자 전선돌파차량은 VK 30.01 alte Konstruktion (VK 30.01 구형)라는 이름으로 VK 30.01 (H) 개발에 공식적으로 포함되었다. 따라서 전선돌파차량은 단순한 VK 30.01 (H)의 조상은 아니고 그 초기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물론 기본적으로 기술실증을 위해 개발되었던 전선돌파차량 1/2와 여기에서 얻은 교훈을 적용해 설계된 VK 30.01 (H)의 차이는 상당하다.
그런데 VK 30.01 (H)이 전선돌파차량의 교훈을 적용해 많이 개선된 상태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화력과 장갑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고쳐진 것은 아니었으니, 전선돌파차량이 설계되었던 1937년 당시에는 3,7cm 대전차포 대응을 상정하여 전측후면에 모두 50mm 장갑을 두르고 7,5cm 24구경장 주포를 탑재하여 프랑스의 중전차를 능히 상대할만한 수준까지는 되었으나, 군사기술의 발달로 빠르게 화기의 구경과 위력이 올라가고 있었으므로 앞으로 새로이 생산할 신형전차로서는 영 부적절한 수치였다. 결국 1939년 5cm 대전차포에 대응하여 80mm 장갑을 두른 65톤급 전차(VK 65.01)의 개발과 10,5cm 28구경장 주포를 탑재하고 100mm 장갑을 두른 80톤급 Artilleriewagen, '포전차'의 개발이 진행되었으나, 프랑스 침공의 전훈을 반영하여 1940년 7월 30톤급을 넘는 전차의 개발을 전부 중단하였다. 대신 장갑을 보강한 VK 30.01의 차체에 80톤급 포전차의 포탑을 경량화하여 탑재시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것이 VK 36.01이다.
VK 36.01의 개발에도 불구하고 VK 30.01 (H)가 완전히 버려진것은 아니었다. 물론 독일군에게 이 구형설계를 되살려볼 생각은 없었던것 같고, 다만 포탑에 미련이 있었던 모양이다. T-34 쇼크 이후 VK 30.01(1941)이 추진되던 1941년 말, 독일 육군은 VK 30.01 (H)의 포탑을 개발한 크루프사에 해당 포탑에 3호 돌격포용으로 개발되었던 7,5cm 34.5구경장 주포를 탑재할수 있는지 문의하였다. VK 36.01에 탑재가 고려되었던 7,5/5,5cm 구경감소포와 KwK 40가 차례로 거론되었다. 결론만 말해서 3종류의 주포 모두 포탑의 설계를 크게 바꿔야만 탑재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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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계에서 더이상 건져낼게 없다고 판단한 독일군은 1942년 VK 30.01 (H)의 차체 2기를 12,8cm 61구경장 캐논포를 얹은 자주포로 개조하였다. 이 차량들은 Pz.Sfl. für 12,8cm K40이라는 제식명을 받았다.
2.1.1. 제원
2.2. VK 30.01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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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사가 본격적으로 VK 30.01(1939)에 뛰어든것은 1939년 12월로, Typ 100이라는 설계명으로 계획이 진행되었다. 차체는 VK 30.01 (H)보다 조금 큰 편이었고 장갑은 VK 36.01과 크게 다른게 없었는데, 구동면에서 특이하게도 가솔린-전기 하이브리드 방식을 채택한 차량이었다. 요즘 상용화된 하이브리드 차량하고는 또 달라서, 가솔린 엔진을 돌려 전기모터를 구동하면 그 전기모터에서 생산된 동력이 스프로킷을 움직인다는 좀 기상천외한 기관이었는데, 이게 놀랍게도 시험주행에서 시속 60km를 찍으면서 성공적으로 기술실증을 해내보였다.
궤도는 헨셸사의 것과 동일한 궤도를 사용하였다.
주포는 VK 30.01 (H)의 7,5cm 24구경장 주포나 VK 36.01의 10,5cm 28구경장 주포등이 거론되었으나 오랫동안 확정짓지 못하였는데 1941년 초 크루프사와 협력하여 8,8cm 주포의 탑재를 결정지었다. 이 결정은 곧 신의 한수로 드러났으니, 체급은 30톤급과 36톤급으로 각기 달랐지만 차기형 중전차채택을 놓고 사실상 포르쉐사와 경합을 벌였던 헨셸사의 VK 36.01의 주포는 10,5cm로 전쟁전에 개발된 80톤급 포전차의 설계요구와 달라진게 하나도 없었으나 전장의 환경과 전차사상이 크게 바뀌어 대전차능력이 크게 중시되었던 1941년과는 맞지가 않았다.
헨셸사가 채택한 10,5cm포는 그 위력이 포르쉐사가 채택한 8,8cm을 능가했지만, 대전차화력은 차기중전차로서 부적합한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VK 36.01의 포탑은 근본적으로 포전차를 상정하고 설계하였으므로 8,8cm를 탑재하는것이 불가능하였다. 결국 헨셸사는 10,5cm 주포를 포기하고 7,5/5,5cm 구경감소포를 탑재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지만, 1941년 5월 히틀러가 자원난을 거론하면서 사실상 딱지를 놓고 VK 30.01 (P)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장갑의 증강이나 관통력의 보강과 같은 추가요구를 제시하면서 포르쉐와 헨셸 양사에 설계의 대형화를 주문했고, 자신감이 붙은 포르쉐사는 VK 30.01 (P)의 몸집을 불리고 그에 맞춰서 엔진의 출력과 장갑의 두께를 늘리는데 그친 VK 45.01 (P)의 개발을 시작한다. 한편 헨셸사는 경쟁제품(?)이었던 VK 30.01 (P)의 8,8cm 주포용 포탑을 받아쓰는 굴욕을 감수하면서 45톤급 전차 개발에 착수하는데...
2.2.1. 제원
3. VK 30.01(1941)
동부전선 개전과 함께 소련의 T-34 전차나 KV-1 전차를 맞닥뜨린 독일군은 급조한 대전차화력, 막강한 항공전력과 우수한 전술로 성능적인 열세를 극복하였으나, 이와 동시에 소련의 신형전차들을 압도할 강력한 중형전차의 개발을 추진하였다. 소련의 차기형전차의 등장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독일군은 당시 라인메탈사에서 VK 45.01에 탑재할 용도로 개발중이었던 장포신 7,5cm 70구경장 KwK 42 주포와 포탑을 탑재하는 32.5톤급 중형전차 개발안을 주문했다. 이 주포는 앞서 1941년 5월 히틀러가 VK 30.01 (P)과 VK 36.01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관통력의 부족을 지적했던 장면의 산물인데, 8,8cm 대신 7,5cm 구경으로 화력을 떨어뜨렸지만 구경장을 대폭 늘려 관통력을 크게 향상시키면서 이후 티거의 8,8cm 주포와 포탑을 라인메탈의 7,5cm 주포와 포탑으로 교체한다는 생산안까지 나왔으나, 8,8cm 포탄의 개량으로 문제가 다소 해소되면서 없던일이 되었다. 그러나 VK 30.01(1941)용 포탑은 계속 개발되어 탑재토록 되었다.
이 신형전차 개발에는 이미 1938년-39년경부터 3호 전차와 4호 전차를 후속할 20톤급(VK 20.0x)/24톤급(VK 24.0x) 전차들을 개발중에 있었던 다임러-벤츠와 MAN 양사가 참여했으며, VK 30.01(1941)은 이들 20톤급/24톤급 전차설계를 계승한것에 가깝다. 헨셸사가 1937년부터, 그리고 포르쉐사가 1939년부터 참여했던 VK 30.01(1939)와는 일체가 무관하다.
3.1. VK 30.01 (DB) , VK 30.02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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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임러-벤츠사의 설계안이며 MAN사의 VK 30.02 (M)에 대응하여 붙은 VK 30.02 (D)라는 설계명으로도 알려져있다. 경사장갑의 효용성이 드러난 이후에 설계되었기 때문에 이전까지의 독일 전차와 달리 경사장갑을 대폭 채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이후 설계된 대부분의 독일 전차에 공통되는 사항이었으나, VK 30.01 (D)는 포탑이 차체 전면부에 치우친 형상을 하고 있어 외형상으로 T-34와 유사함이 느껴지는 편.
외형 뿐만이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기존의 독일 전차와 차별점이 많은 전차였다. 설계사인 다임러-벤츠는 토션 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던 육군병기국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전통적인 리프 스프링 현가장치를 고수했고, 소련전차처럼 후방변속기를 채용하면서 후방변속기의 우수성을 강조하는등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시제차량의 제작 과정에서 토션바를 탑재하고 바퀴의 배치가 판터와 동일하도록 변경되어 본디 설계와는 크게 변모하였는데 이것을 VK 30.02 (DB)라고 불러 구분짓기도 한다.
주포는 라인메탈사의 7,5cm 70구경장 전차포를 채택하였지만 MAN사의 설계와는 달리 포탑링이 50mm 부족하여 라인메탈사가 개발하던 7,5cm 전차포용 포탑을 탑재하는것이 불가능했으므로 신형포탑을 새로이 개발해야하는 문제가 있었다. 엔진으로는 자사의 MB 503(가솔린), MB 507(디젤), MAN사에서 채용한 마이바흐사의 HL 230 모두 호환이 가능하였다. 시제품생산시에는 HL 210가 탑재되었다.
워낙에 이질적인 면모가 많아 독일군은 탐탁치않게 보았으나, 차량 자체의 완성도는 수준급이어서 당시 군수장관이었던 토트는 물론이고 히틀러의 지지를 받으면서 200량 생산을 주문되었다. 그러나 리프 스프링 현가장치와 후방변속기를 문제삼은 독일군의 반대가 심했다. 특히 디젤엔진을 개발하는데 시간이 지나치게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고(선박용 디젤 엔진은 있었고, 이 전차에 사용할 MB507 디젤엔진도 해군의 소형 모터보트에 탑재할 예정이던 엔진을 전용한 것이었다.), 기존에 연구되던 포탑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포탑을 개발해야 하는데 전차가 하나라도 급한 시기에 그럴 여유가 없었고, 개발해도 성능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디젤엔진 개발지연으로 가솔린엔진 탑재가 고려되면서 작은차체에 연료탱크증설로 설계변경 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포탑호환 문제는 심각해서 향후 75mm/L70을 탑재하기위한 개량도 어렵고 앞서 언급한 문제들로 양산지연이 발목을 잡으면서 결국 MAN사의 VK 30.02 (M)가 채택되어 판터로 제식화되었다.
이후 시제차량은 그대로 폐차되어 고물로 전락하여 사진 몇장으로만 전해진다. 이래저래 작은차체는 확장성이 어렵다는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대한민국의 K1전차도 K1A1으로 주포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전량 신규생산이었음도 이와 유사한 사례)
3.1.1. 제원
3.2. VK 30.02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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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사의 설계안으로, 다임러-벤츠의 VK 30.01 (D)와 경합하여 승리하고 장갑을 강화하는 등의 다소간의 수정 이후 판터 전차로서 정식채용되었다. 1938년 3호 전차와 4호 전차의 후속전차로서 시작된 VK 20.01 설계에 참가했던 다임러-벤츠와 크루프 양사가 육군병기국의 의향과는 달리 토션 바 대신 리프 스프링을 채택하자, 당국이 1940년 MAN사에 토션 바를 채용한 20톤급 중형전차설계를 주문하면서 시작된 VK 20.01 (M)이 직계조상으로, 이후 VK 20.02 (M), VK 24.01 (M)등으로 설계가 이어졌다고 알려졌으나 VK 30.01 (M)의 존재는 확인된게 없는 상태다.
3.2.1. 제원
4. 매체에서
월드 오브 탱크에서 헨셸사의 기획안은 5티어 중전차로[1] , 포르쉐, 다임러-벤츠, MAN사의 기획안은 6티어 중형전차로 등장한다.
- VK 30.01 (H)
- VK 30.01 (P)
- VK 30.01 (D)
- VK 30.02 (M)
[1] VK 30.01(H)의 차체를 이용한 슈투러 에밀은 7티어 구축전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