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평가
1. 개요
노태우 개인에 대한 평가를 서술한 문서.
2. 긍정적 평가
2.1. 학도병으로 6.25 전쟁 참전
경북중학교 5학년[1] 재학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일부러 나이를 올려서 학도병으로 헌병 학교에 자진 입대했다. 훗날 국회의장을 역임하게 되는 김수한이 당시 중대장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 6.25 참전 경력이 있는 대통령은 이승만[2] , 박정희[3] ,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4]
2.2. 경청자
모시던 상관(박정희)이나 친구 (전두환)가 죽이려고 까지한 야당 총재 김대중을 국정 동반자로 인정해 꾸준히 여야영수회담을 하면서 조언을 구했으며[5] , 3당합당 후에는 문민정부 수립 의지를 내비치는 김영삼 총재 측의 요구를 경청하며 통크게 수용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당대의 처신이나 '주변' 인망[6] 은 친구(전두환)가 더 나았지만, 노태우는 '''그 부족한 부분을 상대방 의견을 경청하면서 채워'''나갔다. 게다가 노태우가 귀를 기울인 정적들 역시 정책적 역량이나 정치적 역량을 갖추고 대국적인 안목을 견지하고자 노력한 인물들이었기에, 재임기간 동안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도 민주주의로 가는 큰 흐름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과거 군사정권 시절 죽을 고비를 넘겼던 김대중, 김영삼 모두 군정시절 통치자 중 노태우에 대해서는, "셋 중 제일 나았다"는 요지의 호의적 평가를 내렸으며, 또한 노태우 본인으로서는 1987년 대선 당시 공약한 민주화로 가는 중간단계에 부합하는 행보를 실행한 것이기도 하다.
국민과의 대화를 시작하기도 했다.
3. 부정적 평가
3.1. 독재 정권의 후예
육군사관학교 졸업으로 군인 출신이고, 12.12 군사반란의 반란 수괴로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연루되어 있다. 국민들의 들끓는 민주화 열망이 분출한 6월 항쟁을 생각하면 절대 대통령이 못 될 인물이었지만 민주화 세력의 분열로 인한 어부지리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도 여소야대 정국에 리더쉽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아 물태우라는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말이 물태우지, 노태우는 전두환과 오랜 동지이자 2인자였다. 더군다나 이때도 노동 운동가와 학생 운동가는 탄압을 받았다. 노태우 정부부터 탄압하는 사례가 줄었지만, 노태우 정부 당시 군부는 여전히 영향력이 대단했다. 그리고 비교적 큰 야당 탄압만 없었을 뿐 노태우 정부 역시 한국에는 마치 중도절충주의 정치가 불가능한 것처럼 왜곡선전을 하였다.
따라서 노태우를 독재자로 보는 관점도 굉장히 많다. 심지어 전두환보다도 오히려 노태우의 탓을 더 하는 부류까지 있다. 단 사전적 의미의 독재는 아닌지라 독재자 분류가 안 되었을 뿐. 사실 독재자라기보다는 교활자(狡猾者)에 근접하다.
3.2.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망언
1995년 10월 5일, 경북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서 노태우는 상식 이하의 망언으로 국민들에게 지탄을 받았다.
中國(중국) 문화혁명희생 비하면 光州(광주)사태 아무것도 아니다 노태우씨 동창모임서 발언(동아일보)
광주사태 별 것 아니다” 노태우 전대통령(한겨레 신문)
광주사태 별 것 아니다” 노태우 전대통령 충격발언 요지(한겨레 신문)
노태우 대통령 발언 요지(동아일보)
[image]
[image]
이날 노태우는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경북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문화혁명 때 수천만 명이 희생 당하고 엄청난 걸로 말하자면 우리 광주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망언을 했고, 해당 망언이 동아일보사 시사주간지 <NEWS+(현 주간동아)> 10월 18일자에 보도되면서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MBC, KBS) 이로 인하여 노태우는 국민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고 그 당시에 비자금 사건도 터지면서 전두환과 더불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노태우는 또 "처음에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나지 않았으나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자신이 그런 얘기를 했었는가"라며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는 궤변을 늘어놓아 당시 전두환과 더불어 국민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광주 피해자들에게 참으로 미안
노태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일이며 실수라고 자신의 잘못을 거듭 시인했다. 사과 안 한 전임자에 비하면 그나마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니 전두환보다는 낫다는 평가가 있지만, 이전의 행보나 차후 출간된 회고록을 보면 12.12 군사반란, 5.17 내란, 5.18 학살에 대해 반성하는 기미는커녕 왜곡으로 정당화를 시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2019년 8월 26일, 장남인 노재헌 씨가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를 하면서 방명록에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사죄드리고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깊이 새기겠다는 문구를 작성했다. 그리고는 노태우의 뜻이라고 밝혔다. #
그 이후 12월 초에 노재헌 씨가 다시 유족들을 만나 참회하였다.
또 그 이후 2020년 5월 18일 아들 노재헌 씨가 현재 중환자인 노태우 대신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40년만에 '''13대 대통령 노태우 5.18 민주영령을 추모합니다.''' 라는 리본이 달린 조화를 헌화하였다. 5.18 민주화운동 학살 책임자 중 한명이 직접 제단에 헌화하고 사죄한 것은 이번이 ''''유일이자 처음'이다.'''
[1] 당시 6년제 중학교(중고등학교 통합 과정)였다. 즉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2] 당시 대통령으로 국군 통수권자이기도 했다.[3] 전쟁발발 후 9사단 참모장으로 참전해 일선에서 싸웠다. 북파부대장 신분으로 생환한 채명신 장군과 우연히 마주치자, 자신이 입고있는 새 야전 상의를 채장군의 헌 옷과 바꿔입으며, 인연을 맺기도 하였다.[4] 다만 김대중의 해상방위대 경력은 아직도 논란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앙 차원에서 해군 입대자를 바탕으로 정식 창설한 조직이 아닌, 현지(목포경비부)에서 창설되어 협력한 일종의 보조기관에 가까웠기 때문. 목포경비부 부대연혁에는 이들의 활동에 관한 기록이 있지만, 해군 본부에는 이들에 관한 자료가 없다.[5] 2016년 총선에서 야당이 과반수를 점하자, 당시 친여성향을 보인 한국경제신문에서는 이 노태우 정부 시절을 상기시키면서, 국정 운영의 동력을 여야협치에서 찾을 것을 넌지시 권고하기도 하였다[6] 사람들이 우러러 믿고 따르는 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