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징병거부 폭동
1. 개요
New York City draft riots
2. 개요
1863년 7월 13일부터 7월 16일까지 미국 뉴욕시의 빈민들이 징병법에 반발하여 일으킨 폭동사건.
뉴욕 징병거부 폭동과 관련된 내용
3. 발생 과정
3.1. 면제비와 대리복무 가능의 징병법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당시의 새로운 징병법을 서명해 통과했다. 사상자도 많았고 2년의 의무복무기간이 끝나자 제대하려는 자가 많아 새로운 병력이 필요했다. 이 징병법은 20세에서 45세까지 북부의 백인남성을 대상을 징집 대상으로 규정했으며, 군복무시 의무복무기간은 3년으로 규정되었다. 이 법으로 링컨은 30여만명을 충원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징병법에서 부자들에게 합법적으로 병역을 피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군복무를 원하지 않으면 300달러의 면제비를 내거나 대리복무자를 입대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 법이 시행되자 많은 부자들이 이 법에 따라서 면제비를 내서 병역을 피했다. 이중에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아버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아버지, 앤드루 카네기, J. P. 모건 등 있었으며, 나중에 대통령을 지낸 체스터 A. 아서와 그로버 클리블랜드 등은 대리자를 입대시켰다.
이 당시의 300달러[1] 가 큰 액수의 돈이기에 이런 징병법이 빈민들의 반발이 없을리 없었다. 여기에 아일랜드계 빈민들도 이 불만 집단 중 하나였으며, 당시 하원의원인 새디어스 스티븐스도 이 징병법에 대해 비난하기도 했다.
3.2. 뉴욕시에서의 징병대상자 발표
1863년 7월 11일, 뉴욕시에서 처음으로 같은해에 시행된 징병법에 의한 징병대상자 명단을 발표, 다음날인 12일에는 게티즈버그 전투의 명단이 발표되었고, 그 다음날인 7월 13일에 추가 징병대상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뉴욕의 빈민들을 자극했다. 특히 아일랜드계 빈민들을 중심으로 자극을 받았는데, 뉴욕의 빈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해 폭도로 변했다.
4. 폭동의 시작에서 끝
뉴욕시의 빈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폭도로 변하자 이들은 징병사무소와 우체국 등을 공격해 징병대상자의 명단을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한 뒤 뉴욕시 시가지로 몰려다녔다. 이후 이들이 맨해튼 동쪽지역을 장악했는데, 뉴욕경찰과 민병대가 진압을 시도했지만 완전히 진압할 수 없었고, 이 폭동을 일으킨 빈민들의 불만은 흑인에게까지 번졌다. 폭동의 원인이 징병법뿐만 아니라 흑인이 일자리를 빼앗기 때문이라는 생각까지도 있었던 것이었다. 이들은 흑인들을 공격해 죽이고 불태워 죽이기까지 했으며, 이 중에서는 "제퍼슨 데이비스[2] 만세"를 외치기까지 했다.
결국 뉴욕연대 부대에 의해 7월 16일에 유혈 진압되었다.
5. 관련 문서
- 징병제/미국
- 남북전쟁 - 뉴욕시에서 생긴 징병거부 폭동이 이 시기에 발생했다.
- Fuck the Draft - 욕설이 들어간 단어지만 징병제를 반대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 베트남 전쟁 시기 징병제를 반대할때 사용되던 단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