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병제/미국
[image]
엘비스 프레슬리의 징병통지서
[image]
[image]
베트남 전쟁 당시인 1960년대의 징병통지서.
[image]
도널드 트럼프의 Selective Service System 등록카드
1. 개요
Conscription in the United States
미국 정부가 남북전쟁 기간,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냉전 초중반기(1946 ~ 1973, 한국전쟁 휴전 전의 기간,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던 기간)까지 미국의 남성을 징집하던 제도이다. 지금은 없어진지 48년이나 된 제도 이다.
2020년 기준으로 미국 시민권자와 영주권자를 대상으로 징병대상자들의 인적사항을 Selective Service System에 등록해놓고, 유사시 징병하는 제도이다.
2. 역사
2.1. 독립부터 남북전쟁
미국에서는 1783년 독립전쟁 당시에 징병제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는데, 당시에는 추첨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미국이 독립한 후 지원제로 바뀌다가 남북전쟁이 발생하자 전쟁에 필요한 병력이 필요한 남북이 각각 징병법을 도입했다. 남쪽인 아메리카 연합국의 징병제는 18~35세의 백인 남성을 징집대상으로 했으며, 20명의 노예를 제공한 자, 각종 기술자는 병역이 면제되었으며, 돈을 대리입대자에게 보내서 대리입대자가 입대해도 면제가 되었다. 그 당시 흑인남성들은 백인들의 노예였기 때문에 징병되지 않았다. 북쪽인 미합중국은 20~45세의 백인남성을 징집대상으로 했으며, 복무기간은 3년이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에이브러햄 링컨은 약 30여만 명을 충원하고자 했다. 징병에 의한 군복무를 원하지 않으면 300달러의 돈을 내거나 대신 복무할 대리복무자를 입대시키는 것도 가능했는데,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아버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아버지, 앤드루 카네기, J. P. 모건, 체스터 A. 아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등이 돈을 보내 대리자를 입대시켰다. 이 법이 불평등하여 빈민들의 반발이 없을리 없었으며, 이 영향은 1863년 뉴욕에서 징병거부 폭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모병제로 바뀌었다.
2.2. 1,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징병제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군의 병력수는 17~20만이었는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400만명의 대군이 필요해 징병제로 바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미국 정부에서 체계적인 징병제가 필요해 1917년 Selective Service System(SSS)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징병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당시 21~30세의 모든 남성을 SSS에 병역자원으로 등록하도록 했으며 군복무기간을 12개월 기준으로 잡았다. SSS에 등록된 병역자원을 1~5등급으로 분류해 숫자가 높아질수록 징집대상에서 멀어지도록 구분했지만 병력 채우기가 부족해 대상연령을 45세까지 높혔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20년부터 징병을 중단하고 모병제로 바꾸고 병력수를 20만까지 감군했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0년에 징병제를 실시했다. 일본 제국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하자 미국이 일본과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면서 병력을 1600만명까지 증원할 필요가 생기면서 징병을 통해 1600만명까지 증원했다. 21~37세 사이의 남성을 대상으로 18개월의 군복무기간을 두고 추첨식 징병제를 실시했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징병제에서는 1943년에 흑인 남성까지 징병대상에 포함시켰다.
2.3. 냉전 초중반기의 징병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000만명 단위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제하면서 1947년에 징병제를 중단했지만 냉전시기 초중반에도 많은 병력수가 필요해 1948년에 징병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4] 6.25 전쟁이 발생한 1950년 당시 징병대상자 연령은 18.5세~26세로 낮춰졌으며, 의무복무기간은 21개월에서 24개월로 늘어났으며, 이 당시 징병제에 의해 미군에 입대한 군인 중 한국전쟁에 파병된 3만 3686명이 전사했다. 한국전쟁 휴전이 시작된 1953년 7월 27일 기준의 미국 육군의 병력 규모는 152만 9539명이었다.
이 시기의 운동선수와 가수가 징병제의 의해 입대한 것이 유명하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소속 야구선수였던 커트 시몬스(Curt Simmons)도 입영통지서를 받고 1950년 6월 입대, 1951년 한해동안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 1952년 군복무를 마친 후 원팀에 복귀했으며,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도 1958년 입대, 1960년에 군복무를 마쳤다.
베트남 전쟁 당시 병력수를 185만명까지 늘렸으며,[5] 베트남 전쟁 당시 전사자 수가 늘어나 반전 분위기가 펴지기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베트남 전쟁 기간 당시의 미국 본토에서 미국인 청년층 남성은 SSS에 등록하지 않거나 캐나다 등 해외로 도피를 해 징병을 피하기도 했다. 개인 신상기록 조작이나 비리를 통해 징병을 피하거나 전쟁 동원을 피하기 쉬운 후방부대에서 복무[6] 하거나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행하기도 했다. 징병기피는 중범죄로 분류되어 이것으로 기소된 사람은 21만명에 달하기도 했다.[7]
2.4. 징병제의 폐지
토머스 게이츠의 게이츠 위원회에서 징병제 중단 권유로 1973년까지 미군에서 모병제 전환 준비를 위한 준비로 미군의 급여를 크게 올리고, 1972년 12월까지 징병제를 실시하고 1973년에 징병제가 폐지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SSS 등록의무가 사라지기도 했지만 1980년에 SSS의 병역자원 등록의무를 부활시켰다. 대상은 18~25세 남성이며 이것도 어디까지나 전시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중이다. 사실상 전시에는 징병대상자 명부용으로 사용된다. 2020년 들어서 여성도 의무적으로 SSS 등록대상으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권고가 있어 여성도 SSS 의무등록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3. 등급
아래표는 1948년부터 시행된 징병을 위한 등급으로 출처는 Selective Service System의 등급 원문과 영어 위키백과의 Selective Service System의 Classifications 항목이다. 한국처럼 신체등급만 가지고 구분하는 것이 아닌, 신체와 신분을 종합한 등급으로, 굳이 말하면 선병등급이라고 봐야 할듯 하다. 1973년 징병제 폐지 이후에는 전시상황에 사용하기 위한 등급으로 사용중이며, 관련 규정은 미국 연방규정집 제32권 제16장(국방) 제1630.2조에 있다.
4. 같이 보기
- 뉴욕 징병법 거부 폭동(7월 13일): 남북전쟁 당시 뉴욕에서 벌어진 징병거부 폭동과 관련된 내용이 나와있다.
- 유용원의 군사세계 징병제도의 역사: 내용 중 미국의 징병제 역사도 같이 나와있다.
5. 관련 문서
- 미군
- Selective Service System - 미국의 병역자원 관리기관
- 미국 외의 다른 나라 징병제
[1] 이 징병추첨 중계방송 중간에 나오는 광고(5분 24초 장면)는 노엘코(Norelco) 브랜드의 전기면도기 광고로 노엘코는 필립스의 북미지역 브랜드명이다. 영상속 면도기 광고는 크리스마스를 바탕으로 한 광고로 산타가 면도기 모양의 썰매를 타고 집을 지나자 집안에 면도기를 보여주고 소개하는 형태의 광고이다.[2] 이 추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와있는 글을 보면 이 추첨 이전에는 지역 징병 위원회(Local Draft Board)가 징병을 결정했는데, 이것은 불평등하다고 비난받았고 징병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당시 징병대상 연령대인 20대 초중반)에게 불확실성을 줬었다고 한다.[3] 1893년 9월 12일 인디애나주 슈토이벤에서 태어났으며, 1977년 5월 20일 별세하였다. 1941년부터 1970년까지 제2대 Selective Service System 수장으로 있었으며, 최장수 Selective Service System 수장이었다.[4] 당시 미군 병력수가 99만명 이하였다.[5] 당시 의무복무기간은 1년이었다.[6] 전쟁 동원을 피하기 쉬운 후방부대는 주방위군을 말하는데 조지 W. 부시가 이것으로 병역비리 의혹을 받기도 했다.[7] 이 당시 징집영장 불태우기, 징병제에 항의하는 운동인 Fuck the Draft 운동을 하기도 했다. 무하마드 알리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행해 실형 선고를 받았지만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이 나라에서 차별받고 사는데 이제와서 이 나라를 위해 싸우라고?"라는 외침으로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