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도어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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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26대 대통령.'''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 and you will go f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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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부드럽게 하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녀라.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2]
20세기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자, 만 42세에 대통령 직책을 수행하게 된 '''역대 최연소 미국 대통령'''이다. 다만 첫 취임은 전임 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한 승계였기 때문에 선거를 통한 취임은 1905년에 이뤄졌다.[3] 전임자 승계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재선된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는 러일전쟁의 종전을 중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성이 같은 먼 친척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명이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일제의 한반도 병합을 사실상 방관하고 심지어 응원했다는 점에서 일부 한국인들에게는 비판 받기도 했다. 한반도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시키는데 일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이 시기에 맺어졌는데, 직접 조약을 체결한건 당시 장관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였지만, 이 밀약이 맺어진 시기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였기 때문이다.
Theodore라는 인명에 대해서 테오도어, 테오도르, 디어도어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외래어 표기법상 th 발음과 모음화 R을 반영한 시어도어[ˈθiːədɔːr]로 표기한다. Roosevelt라는 성은 네덜란드에서 온 것으로 roos(장미) + veld(들판)가 합쳐진 조어이다. 미국식 영어 발음은 로저벨트[ˈɹoʊ.zə.vɛlt] 혹은 로저벌트[ˈɹoʊ.zə.vəlt]에 가까우나, 관용을 존중한 *루스벨트로 규정용례가 제시돼있다.[4] 이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마찬가지이다.
2.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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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양한 경력을 보여주는 그림. 왼쪽 위부터 '카우보이, 역사가, 경찰청장, 해군장관, 러프라이더(군인), 뉴욕주지사, 부통령, 대통령, 중재자(?), 그리고 역대급 위대한 헌터(사냥꾼)'.(...)
2.1. 부통령이 되기 전까지
뉴욕 주 뉴욕 맨해튼의 상류 가정에서 태어나서 대단히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어린 시절에는 심한 천식으로 고생했고 시력도 지독한 근시였으며[5] 뚱보 소리 듣기도 한 성인이 된 후의 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어릴 땐 말라깽이였다고 한다. 때문인지 요양을 갔다가 요양간 동네의 힘센 아이들에게 몰매를 맞은 적도 있다고. 그러다 12세가 되자 아버지가 "너는 정신력은 강한데 몸이 약하다. 근데 몸이 약하면 정신도 제 능력을 다 발휘 못하니까 앞으로 체력 단련에 힘써라."하고 말한 이후로 매일매일 몸을 단련하여 건강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루스벨트가 가장 좋아한 스포츠는 사냥이었다. 은퇴 후 아프리카 여행을 할 때는 사자, 코뿔소 등을 원없이 잡고 다녔다. 잡은 동물들을 앞에 놓고 당당하게 찍은 사진도 많이 있다.
어쨌든 허약한 몸을 극복하고 하버드에 들어가서 최상위권에 드는 성적[6] 으로 학부를 졸업했고,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했으나 1년 뒤 중퇴하고 공화당에 입당해서 1882년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뉴욕 주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그러나 1884년 그의 아내와 어머니를 2월 14일에 같은 집에서 한꺼번에 각기 다른 병으로 잃는 불행을 겪었는데 이에 충격을 받고 아내가 낳은 딸을 여동생에게 맡기고 노스 다코타(North Dakota)로[7] 가서 3년 남짓 카우보이 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이때의 경력으로 후에 정적들에게 종종 "빌어먹을 카우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재혼한 후 뉴욕 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잡지 기사와 책을 저술하는 데에 전념했다. 그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인물로, 그가 저술한 책은 무려 38권에 이른다. 이후 1888년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에 의해서 미국시민봉사위원회에 임명되었고 7년 뒤인 1895년 뉴욕 경찰국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뉴욕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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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프 라이더 기병대장 시절의 루스벨트. 그러나 이 그림은 당시 모습을 제대로 담아낸 것은 아니다. 명칭과 달리 루스벨트의 러프 라이더스는 거의 보병으로 싸워야 했다.
1897년 윌리엄 매킨리 정부의 해군 차관보가 되었다. 그가 차관보가 된지 얼마 안된 1898년 쿠바를 둘러싸고 미국-스페인 전쟁(미서 전쟁)이 터지게 된다.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스페인과의 전쟁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그는 마침내 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차관보를 그만두고 스스로 의용군 '러프 라이더(Rough Riders - 거친 기수들)'를 조직하여 전쟁에 참전, 공적을 세우고 전쟁영웅이 되었다.[8] 비록 그는 정규 군인이 아니었지만 전쟁 말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특별히 미 육군 대령으로 임관되었다.
다만 객관적으로 볼 때 미국-스페인 전쟁에서의 그의 공적은 과장된 면이 많았다. 그가 빛을 발휘한 산후안 고지 전투 때는 러프 라이더보다 흑인 보병들이 앞장서서 싸우고 피해를 제일 많이 보았다. 오히려 미군의 10분의 1밖에 안 됐던 스페인군들이 가망도 없는 상황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리고 앞서 말한 흑인 부대에서 용맹히 전사한 이들은 루스벨트가 있었던 곳보다 더 위험한 곳에서 싸웠지만 정작 훈장은 못 받은 경우가 더 많았다. 또한 그의 군대는 공식적인 정규군이 아니었는데, 정규 미군의 작전 명령을 무시하면서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엘리트가 직접 전쟁에 나섰기 때문에 미디어에 의해 과대포장되어 이득을 본 셈이라는 것. 여담으로 이와 유사한 문제는 케네디 대통령한테도 일부 제기된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미서 전쟁)이 끝난 후, 전쟁에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그해 말 치러진 뉴욕 주지사 선거에 당선되었다.
2.1.1. 루스벨트 추론(Roosevelt Corollary)[9]
19세기 말은 제국주의적 경쟁이 극대화된 시기였다. 증기선과 전신으로 대표되는 통신상의 혁명은 제국주의로 하여금 그 활동 무대를 지구 전역으로 확장할 수 있게 했고, 특히 군사 분야에서는 무연화약, 기관총, 강철 대포가 출현함으로써 산업국가와 그렇지 못한 나라 사이의 격차를 극도로 벌렸다. 여기서 대표적인 무기체계가 바로 전함이었다. 에릭 홉스봄은 이 시대를 가리켜 전함 외교의 시대라고 했는데, 19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시대를 비교해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함의 출현은 미국의 외교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는데, 종전까지 미국의 방어벽 역할을 하던 바다는 더이상 그 기능을 할 수 없게 되고, 오히려 대서양은 미국으로 유럽의 전쟁을 운송하는 고속 침투로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당시 신흥 산업국가인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동아시아의 전통적 강국인 청나라를 청일전쟁(1894~1895)으로 거꾸러뜨려, 태평양마저도 미국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전략) 1798년 나폴레옹 군대의 이집트 침략 당시 양국 군대는 장비상으로는 막상막하였다. 따라서 승패는 무기가 아니라, 침략성과 잔혹함, 특히 조직력에 의해 결판났던 것이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군사적 측면으로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균형은 깨졌다. 고성능 폭발물과 증기운송과 같은 수단들이 열강의 식민지 침탈을 손쉽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1880년부터 1930년에 이르는 반세기가 전함외교의 황금시대로 불릴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후략)"[10]
게다가 1880~90년대까지 이어진 1차 베네수엘라 위기가 루스벨트의 위기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금광이 발견됐고, 이를 영국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세계 최강의 전력을 보유한 미 해군이지만 당시 미 해군은 세계 해군 순위권은커녕 다 저물어 버린 스페인 해군 정도나 비교 대상이 될 만한 약체 해군이었고, 18세기부터 세계 1위 해군력을 놓친 적이 없는 영국 해군에게는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약체화된 스페인은 아메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아메리카의 스페인령 식민지를 다른 외국에 매도할 가능성까지 있었다. 이는 미국에게 있어 큰 문제였다. 스페인이라면 상대가 가능했지만, 새로 스페인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속한 식민지를 양도받을 나라는 미국이 상대하기 상당히 버거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새로 카리브해에 진입할 유럽 강대국이 독일일 것으로 보았다. 루스벨트는 해군력이 아닌 외교 정책을 통해 미국의 안전을 담보해야만 했다. 참고로 기존 미국의 대외 정책을 대표하던 먼로 독트린의 내용은 다음의 세 원칙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 먼로 독트린은 유럽 열강과의 외교전을 뒷받침해줄 무기가 될 수 없었다. 영국의 아메리카 대륙 내의 신규 식민지의 확보는 1. 항목으로 방어할 수 있지만, 스페인이 독일에 식민지를 매각함으로써 독일 해군이 미국을 위협하게 되는 상황은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이 다른 나라에 식민지를 양도하는 것은(아직은 발생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유럽 열강의 기존 식민지나 종속국의 문제에 해당하고, 스페인이 독일에 식민지를 양도하는 것도 유럽 국가간의 내부문제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1. 아메리카 대륙은 어떠한 유럽 열강에 의해서도 미래의 식민지가 될 수 없다.
1.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기존 식민지나 종속국의 문제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다.
1.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에 루스벨트는 1896년 '루스벨트 추론'이라고 알려진 저작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기존의 먼로 독트린이 아메리카 대륙의 비식민화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1원칙을 고수하자면, 식민지의 양도를 통해 새로운 거대 식민지의 출현을 방기할 수 있는 2, 3 원칙은 포기되어야 했고, 2, 3 원칙을 고수하자면 유럽 국가간의 식민지 거래를 통해 1원칙은 포기되어야 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먼로 독트린의 진정한 목표는 1원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먼로 독트린은 '''"어떤 非아메리카 세력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메리카의 누구를 희생의 대가로 삼아 영토 팽창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대한 선언"이라는 것이다.'''[11] 따라서 2 원칙은 포기되어야 했다. 2원칙의 포기는 논리적 귀결로써 3원칙의 포기 또한 요구했다. 식민지의 문제와 따로 떨어진 식민모국의 문제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먼로 독트린에 그것을 미국의 방위 정책으로 만들 수 있는 4원칙을 추가했다. 4원칙의 내용은 바로 유럽 국가가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를 포기하거나 양도할 경우 그것을 접수하는 나라는 미국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12]
이는 '''먼로 독트린의 제국주의 이론으로의 변화'''를 뜻했다. 먼로 독트린은 애초에는 미국이 유럽 문제에 이끌려 전쟁으로 딸려들어가는 사태를 방어하기 위한 고립주의 정책의 표명이었지만, 2, 3 원칙이 폐기된 이상은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자국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유럽 문제에도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식민지 획득을 시도하는 유럽 국가의 행동을 적대행위로 간주함으로써였다. 그리고 이런 천명들은 유럽 국가들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분쟁의 성격을 판단할 권리를 미국에만 있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1902년 독일은 채무변제를 빌미로 함대를 이끌고 베네수엘라를 위협했는데(2차 베네수엘라 위기), 빌헬름 2세는 채무변제를 빌미로 영토를 차지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항변했지만, 루스벨트는 빌헬름 2세의 항변을 무시하고 전 함대를 집결해 일전을 불사한 각오를 보였다.
새로운 먼로 독트린 추론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미국을 위협하는) 전쟁의 괴물을 좇아 유럽으로 건너가서는 안 된다던 미국의 대외정책은, 전쟁의 괴물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는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어디로도 출동해야 된다는 일방주의로 변화했다. 전함과 전신을 통해 적이 언제든 미국을 침략할 수 있게 된 이상, 미국은 적을 앉아서 기다리기보다 적을 찾아서 해외로 진출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13]
이상 루스벨트 추론 문단의 내용은 최정수, <T.루즈벨트의 '世界政策'>, 2001, 한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을 주로 참조해 작성했다.
2.2. 대통령직 승계
1900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의 두번째 러닝메이트로[14] 선택되었다. 그리고 선거에서 승리하며 1901년 3월 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매킨리 대통령이 두번째 임기를 시작한지 불과 6개월만인 1901년 9월 암살되자 그 직책을 승계받아 대통령이 되었다.[15] 이 때 나이가 만 42세(한국식으론 44세)였다. 미국 대통령 중 최연소 나이에 취임한 대통령. 하지만 그는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최연소 대통령 타이틀은 43세에 취임한 존 F. 케네디에게 붙여지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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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의회 도서관 앞에서 연설하는 루스벨트. 그는 연설할 때 팔을 강하게 휘두르며 쉴새없이 말을 쏟아냈다고 한다.
2.2.1. 대기업 규제-셔먼 반독점법
루스벨트는 공화당 소속이면서도 당시 우드로 윌슨 등이 참여했던 혁신주의 사회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16] 그래서 그가 부통령직에 지명된 것도 사실은 이런 그를 실권없는 자리로 쫓아내기 위한 당내 보수파들의 정략이었다는 소리도 있을 정도. 허나 공화당의 원로인 마크 한나는 "그 카우보이 놈이 호시탐탐 노리는 게 대통령 자리라는 걸 몰라서 이런 짓을 하느냐"며 반대하였고 결국 그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마크는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된 것을 보고 "봐라! 저 무지막지한 카우보이가 대통령이라니!"라고 탄식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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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셔먼 반독점법을 밀어붙였는데[17][18] , 위 만화에서 보이듯이 그 시절의 미국은 강도 귀족(robber baron)이라고 불리던 재벌들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따라서 거대화된 대기업들이 인수합병 등으로 더 날뛰지 못하게 통제했는데, 이 때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이나 존 피어폰트 모건의 노던 시큐리티스 등 대기업들까지 인정사정 보지 않고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당시 기업들의 독점 합병을 '트러스트(Trust)'라고 불렀는데 이 독점금지법을 내세워 대기업에 타격을 입힌 사실 때문에 '트러스트 파괴자(Trust Buster)'라는 별명도 얻었다. 건국 이래 미국의 경제정책은 일관되게 시장 불간섭주의 입장을 고수했는데, 그의 이러한 정책은 자유방임시장에 정부가 통제, 감독을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다만 이렇게 반독점 정책을 펼친 것으로 그가 일방적인 반기업, 친노동 정책을 펼쳤다고 정의해서는 안된다. 그는 기업에게 강하게 나갔던 것 만큼 노조의 노동쟁의에도 강경하게 대응했다. 정부 차원에서 군대와 경찰 등 공권력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한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 이전의 미국에도 자주 있었지만 그 이유는 파업 과정에서 자본가의 사유재산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 차원에서 파업에 개입할 법적인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허나 루스벨트는 공익과 사회안정을 명분으로 노동 쟁의에 개입하였으며, 이러한 방식의 대응은 루스벨트가 최초이다. 물론 '곤봉 정치'의 신봉자였던 만큼 그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입법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19]
이처럼 그의 일관되지 않은 국내외 정책은 특정한 이념적 신념보다, 기본적으로 강력한 미국, 구체적으로 강력한 군대와 경찰력을 가진 미국을 신봉했던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2.2.2. 대외정책 : 팽창주의로의 전환
19세기 먼로 독트린 이후 미국은 유럽에 대한 불간섭주의를 주창했다. 한편으로 미국은 유럽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태평양 쪽에 관심을 가지고 하와이 점령, 쿠로후네 사건이나 제너럴 셔먼호 사건 등의 정책을 펼치긴 했으나 소극적이었다."미국의 미래는 유럽에 면한 대서양보다는 일본, 중국에 면한 태평양에서 우리가 어떤 입지를 차지하느냐에 더 크게 좌우될 것이다."
그러다 이러한 먼로 독트린 하의 미국 대외정책을 전환하여 20세기 공식적으로 팽창적 제국주의를 표방한 것이 루스벨트였다. 물론 실질적으론 이미 전전임자인 클리블랜드 대통령 시절에 이러한 변화가 시작되어, 전임 매킨리 대통령 시절 발발한 미국-스페인 전쟁(1898년)을 미국 제국주의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1901년 대통령을 승계받은 루스벨트는 전임자들보다 노골적인 팽창주의 정책을 내세우며, 미국의 제국주의 노선을 공식화했다. 루스벨트는 당시 일부 서구인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었던 인종개량주의와 사회진화론의 철저한 신봉자였다. 그는 미국인이야말로 가장 진보한 인종이며, 그러한 미국에 의해 세계가 지배되는 것이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먼로 독트린을 수정하여 '''서반구에서는 미국이 국제경찰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정책을 펼쳤다. 미국이 지금도 주장하는 ''''세계경찰''''론의 기틀을 잡은 것이다. 그리고 국방 쪽에서는 해군 강화에 열을 올려 '대백색 함대(Great White Fleet)'를 창설했다. 덕분에 그가 퇴임하던 시점에 미국은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규모의 함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세계경찰론을 자처한 그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은 카리브해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개입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아메리카에서 유럽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미국 패권주의를 실현하려 했다. 그는 산토도밍고, 푸에르토리코 등 카리브 해에 진출했고,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등 남미국가들에 개입했다. 한편, 남미 국가들의 부채를 갚아주는 유화 정책을 펼치며 그 나라들이 유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곤봉 외교'의 대표적인 일면으로 꼽힌다.
또 그는 경제적으로 커다란 가치를 가지고 있는 파나마 운하의 이권을 획득했다. 그는 파나마 운하의 획득을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생각했으며, 자서전에서 내각의 상의없이 자신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업적임을 강조했다. 그는 파나마 운하의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파나마 지역이 속해 있던 콜롬비아와 협상을 벌였으나 콜롬비아 정부가 루스벨트의 제시액보다 더 많은 돈을 요구하자 루스벨트는 파나마 주민들을 설득하여 파나마의 독립을 배후에서 조장했다. 그 결과 1903년 파나마가 콜롬비아에서 독립에 성공했고, 미국은 신생국 파나마를 자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 외 미서전쟁의 결과 스페인으로부터 획득한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 역시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미국식 제국주의 건설을 위해 애썼다. 루스벨트의 궁극적인 목표는 드넓은 태평양에 있었다. 미서전쟁 직후 획득하게 된 필리핀의 처리를 두고 미국 내에서 의견이 분분할 때 루스벨트는 필리핀을 미국이 '''영구 지배'''해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선 이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한반도 문제에도 개입해,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난 후 종전 회담인 포츠머스 조약을 주선했다. 그가 포츠머스 조약을 주선한 것은 궁극적으로 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이 회담을 주선한 공로로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또한 포츠머그 조약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는데,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조약이 맺어지기 두 달전에 이미 일본과 비밀리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묵인했다.[20]
2.2.3. 2기와 3선 불출마 선언 번복
대외적으로 미국의 팽창주의를 주도하고, 국내에서는 반독점법을 추진하면서 서민들 인기도 괜찮은 편이라 연임에 성공했다. 승계받은 대통령이 재선한 최초의 사례.
허나 그의 두번째 임기 동안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1907년에는 불황을 맞게 된다. 그러다보니 이때가 기회다 싶어 그의 지나친 기업 규제가 불황의 원인이 되었다는 반대파들의 비난이 튀어나왔고[21] , 불황의 여파로 의회가 돌아서면서 정치력에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던 와중 그에겐 선택의 순간이 오는데.. 바로 '''3선 출마 여부'''였다. 원래 미국은 헌법에 연임 규정을 따로 두고 있진 않았지만,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2선만 하고 물러난 이래 다른 후임 대통령들도 이를 본받아 최대 2선만 하고 물러나는게 암묵적인 룰이었다.[22] 그러나 유독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절 3선 출마 여부가 주목받은 이유는, 그의 첫 임기가 선거를 통한 것이 아닌 '''승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루스벨트가 자신의 '''두 번째 선거'''임을 주장하면서 3선에 출마할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었다.[23] 그래서 이런 구설수가 지속되는데에 부담을 느꼈던 그는 결국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3선은 없다'''라는 돌출 발언을 한다.
그러나 권력이란게 뭔지, 그는 박수칠 때 떠나지 못하고 '''3선 불출마 선언을 깨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1908년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1912년 삼선 출마를 했던 것이다. 그것도 당을 깨고 나와서 신당을 창당하는 당 입장에선 최악의 방법으로...
사실 1908년 대선 당시만 해도 그는 후계자로 자신의 보좌관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밀었고, 태프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심지어 이때만 해도 사이가 좋아서 시어도어는 윌리엄 태프트에게 "나는 늘 당신이 워싱턴과 링컨을 제외하고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그 두 사람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라는 식의 편지를 보내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자신의 정책적 철학과 측근들을 그대로 계승하리라 생각했지만, 태프트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정치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자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다.
이렇게 전직 대통령의 비판이 이어지자 현직 대통령 태프트는 결국 루스벨트 재임 기간 중의 추문을 들춰내기 시작했고, 루스벨트의 측근을 해고하기도 했다. 결국 태프트에게 앙심을 품게 된 루스벨트는 3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깨고 19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당내 경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현직 대통령인 태프트가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게 되고 이에 루스벨트는 진보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여 공화당을 분열시켜 버렸다. 그야말로 계파 갈등 시궁창 배틀(...).
덕분에 분열된 공화당은 표가 나뉘어 버렸고, 1912년 대선은 어부지리격으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41.8%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참고로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득표율은 27.4%(412만표)로, 이는 공화당의 태프트(23.2%)를 능가하며 미국 대선에서 제3당 후보가 얻은 최다 득표이기도 하다. 물론 루스벨트의 모호한 성향상 당시 민주당 성향 표도 일부는 흡입되었다고 보는게 맞겠지만.[24] 여담으로 이때 루스벨트는 선거 유세 도중 매킨리의 암살을 루스벨트가 사주했다는 음모론 신봉자의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덕분에 그의 치유를 기원하며 한동안 여야 모두 선거운동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2.3. 퇴임 후
3선 선거 전후로는 주로 해외를 돌아다니며 탐험과 사냥을 즐겼는데, 다우트 강 탐사 당시엔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그 후로도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막내아들 쿠엔틴이 프랑스에서의 공중전에서 전사하자 충격을 받았는지 이 무렵부터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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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데스마스크.
그래도 대선에 미련이 남았는지(...), 1917년 공화당에 복당한 이후 1920년 선거에 다시 재출마를 생각하고 러닝 메이트로 워런 하딩까지 정해놨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선거가 시작되기 전인 1919년 1월, 뉴욕 오이스터 만의 자택에서 수면 중에 '''사망'''했다. 향년 60세였는데, 자연사한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세 번째로 수명이 짧았다.[26] 죽은 루스벨트의 베개 밑엔 책이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사인은 관상동맥폐색. 루스벨트의 아들 커밋은 외지에 나가 있던 형제들에게 전하는 부고에 '''"The old lion is dead(노사자가 죽다)"'''라고 썼으며, 그의 죽음 당시 민주당 출신 부통령이었던 토머스 R. 마셜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오늘날까지도 종종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데, 아예 이 말로 만든 밈도 있다."Death had to take Roosevelt sleeping, for if he had been awake, there would have been a fight."
(사신(죽음)은 루스벨트가 잠든 사이 그를 데려갔습니다. '''만약 그가 깨어 있었다면 그와 싸워야 했을 겁니다'''.)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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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TR에 기대 있는 쿠엔틴, TR 본인, 안경을 쓴 시어도어 3세, 앉아있는 아치발드, 흰 드레스를 입은 앨리스, 커밋, 앉아있는 후처 에디스, 에델
전 부인인 앨리스 리 루스벨트(1861년 7월 29일 ~ 1884년 2월 14일) 사이에서 딸 앨리스를 두었다. 이후 후처 에디스(1861년 8월 6일 ~ 1948년 9월 30일)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두었다.
3.1.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의 관계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재임 1933-1945)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12촌 동생이다.[31] 물론 한국으로 치면 사실상 본관만 같은 남남이나[32] , 테디의 조카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프랭클린과 결혼하여 프랭클린은 테디의 조카사위도 된다.[33] 그러다보니 사적으론 둘이 교류가 제법 활발했다고 한다.
우선 둘이 막 결혼한 시절 테디가 프랭클린에게 결혼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 준 편지도 남아 있으며, 1905년 두 사람의 결혼식 때 신부인 엘리너를 테디가 직접 프랭클린에게 인계해 주며 장인 역할을 했다. 테디 본인도 프랭클린을 두고 "그 녀석을 위해서라면 '''총알도 내가 대신 맞을 수 있다.'''"라고 했을 정도로 대단히 프랭클린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하지만 둘의 정치 노선은 다소 달랐던 편. 일단 테디는 공화당, 프랭클린은 민주당이었고 프랭클린은 테디의 정적이었던 윌슨을 지지했다. 야심만만했던 젊은이 프랭클린은 테디를 존경했고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지만[34] 한편으로는 반드시 넘어야 할 라이벌로 생각했다고 한다.
한국 입장에서 특이한 점은, 전술했다시피 시어도어는 한국이 일본에 넘어가도록 하는데 기여했고, 프랭클린은 시어도어가 그토록 좋아한 일본을 아작내서 한국이 해방되는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성이 같다보니 간혹 둘을 혼동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를 방지하려면 관련사항을 인용하거나 행적을 밝힐 때 성에 더해 이름을 함께 써 주거나 약칭 등으로 구분해서 써 주면 좋을 것이다.
일본 문화에 심취했고 일본인을 명예백인이라고 극찬했던 시어도어와 달리 프랭클린은 "백인을 인도인과 아시아인과 교배시키면 그들의 문명이 진보하지만, 일본인은 백인과 교배시켜도 그들의 문명은 진보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의 두개골은 백인의 두개골보다 약 2000년이나 발달이 늦다." 라는 말을 하며 일본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35]
4. 평가
둥글둥글한 외모와 'Teddy(테디)'라는 별명, 그리고 학자, 농장주, 카우보이, 군인, 경찰, 탐험가, 사냥꾼,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력과 대통령 시절 국내에 남긴 여러 진보적 정책, 흥미로운 일화들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다혈질에 가까운 인물로 싸우는걸 좋아했으며 열렬한 인종주의자이자 사회진화론자로 가장 진화된 미국인에 의해 세상이 지배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 취임 후 "미국의 성공은 앵글로 색슨족의 우월한 피 때문이다." 라고 발언하며 앵글로뽕주의자임을 선전하기도 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미국의 팽창주의, 제국주의를 유발한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극단적으로 평가하자면 시어도어의 성향은 대내적으로는 좌익, 대외적으로는 우익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물론 당시 서구권에서 우생학이나 사회진화론은 심지어 버나드 쇼처럼 일부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꽤 수용되고 있었고, 심지어는 아시아권 개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거론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마냥 우익이라고 평하긴 좀 무리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인지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 같은 현대 미국의 상당한 정치권 진보주의자[36] 들도 시어도어의 몇몇 행적은 제법 좋게 평가하는 편이다.[37] 실제로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당시 정치판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정치성향은 중도좌파 내지 좌파로 평가받기도 했다. 대외정책이야 사실 정도의 차이일 뿐 이미 시대 트렌드가 제국주의여서 웬만한 신념을 지닌 대통령 아닌 이상 다수는 시어도어랑 비슷한 길을 걸었을거라고 보는 학자들이 상당하기에.. 물론 후술되어있듯 그래봤자 위선적인 전쟁광 제국주의자일 뿐이라고 디스하는 학자도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반한, 친일적 성향[38] 에다가 한일합방을 강력하게 지지한 까닭에 영 좋게 보기 어려운 인물이지만, 단순히 대통령으로서의 업적과 능력만 놓고 보면 미국의 국력 신장을 이끈 대통령으로 뽑히며, 덕분에 미국 대통령 평가 순위나 인기 랭킹에서도 보통은 10위권 안에 든다. 심지어 2010년 시에나대학교에서 시행한[39] 대통령 업적 평가에선 '''2위'''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는데, 참고로 이 조사에서 1위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3위는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두 루스벨트가 그 유명한 링컨을 누른 셈. 참고로 이 조사에서 44대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15위를 차지했다. 러시모어 산에 있는 큰 바위 얼굴에도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은 그가 미국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40]
영국의 역사가 휴 브로건은 그를 "에이브러햄 링컨 이후 백악관에서 제일 유능한 사람, 앤드루 잭슨 이후 가장 정열적인 사람, 존 퀸시 애덤스 이후 최고의 독서가"라고 평가했으며,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아버지는 장례식에 가면 시체가 되고, 결혼식에 가면 신부가 되고, 세례식에 가면 아기가 되고 싶어하셨지요."[41] 라고 회상했다. 뭔 소린가 하니 '''주인공 기질이 강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놈 촘스키는 그를 "악랄한 제국주의자이자 최악의 정신병자"라고 혹평했으며 미국 진보계열 사학자의 대표적인 인물인 하워드 진 역시 "혁신주의의 탈을 쓴 보수주의자", "전쟁광이자 제국주의자"라고 혹평했다. 전임인 매킨리와 묶어서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전쟁광이자 제국주의자로 혹평받기도 한다. 실제 그는 분명한 인종주의자&제국주의자였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상호 불간섭을 표방한 먼로 독트린에 수정조항을 달아 라틴아메리카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는데, 파나마 운하 건설 중에 콜롬비아와 마찰이 생기자 파나마의 반란과 분리독립을 배후조종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네오콘 계열에게는 전략적 측면, 경제적 측면에서 상반된 평가를 받는데, 전략적 측면에서는 루스벨트 추론과 대백색함대 세계순방 등으로 미국의 세계전략을 수립한 위인으로 평가하는 반면, 경제적 측면에서는 위에 나온 독점금지법 때문에 자유시장경제를 억압하고 후퇴시킨 그들 기준 '''사회주의자'''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말은 부드럽게 하되 몽둥이는 큰 걸 들고 다녀라"라는 시어도어의 말은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을 잘 보여준다. 사실 국내 정책에서도 반대파들 상대로 종종 써먹었다.
자연보호에 앞장선 것으로도 나름 유명하다. 미국의 많은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만들었고, 2억 에이커 이상의 지역에서 산림개발을 금지했다. 루스벨트가 이렇게 적극적인 자연보호 정책을 펼친 것은 그가 자연을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었고, 그의 사회진화론 사상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인들이 자연의 야생과 투쟁을 거치면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진화해왔다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미국이 도시화되고 있는 현상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도시화로부터 자연을 보호하여 '''미국인들의 야생성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국립공원들을 지정하여 개발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었다.
5. 친일 성향
5.1. 일본의 한반도 침탈과 그의 행적
재임 중인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서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묵인했다. 그 해 을사조약의 체결 당시 대한제국의 거중조정[42] 요청에도 불구하고 수수방관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 최대금광인 운산금광의 채굴권과 철도 부설권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일단 미국 사학계에서는 루스벨트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한일병합에 반대의사를 보이지 않았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반적으로 학계에 알려진 그 이상으로 친일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는 단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소극적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방관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지지한 인물이었다. 조선 입장에서 그야말로 최악의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당시 서구인들 사이에 꽤 널리 퍼져 있던 인종개량주의와 사회진화론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는 당시 문명의 상위에 있던 앵글로-색슨계 미국인이 가장 진보한 인종이라 믿었으며, 가장 진보된 미국인에 의해 세계가 정복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팽창주의적 제국주의를 표방한 대외정책에서도 잘 드러난다.[43][44]
이러한 신념을 가졌던 그는 아시아에서 빠른 속도로 문명화를 이루어낸 일본에 대해서도 무척 우호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철저한 인종주의자였음에도 일본만큼은 황인종이 아닌 문명화된 백인의 일원으로 보았다. 그는 '''“터키인들보다 일본인들이 인종적으로 우리(백인종)에게 더 가깝다. 터키인들은 우리의 국제사회(소위 ‘문명권’)에서 구제 불능 회원인 반면 일본인들은 바람직한 신입 회원이라 생각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는 1899년 영문으로 발간된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s-2(Bushido)에 깊은 감명을 받고 사무라이 정신에 심취하여 이 책을 30권이나 사서 지인들에게 나눠줬을 정도였다.
그는 일본과 달리 서구화에 실패했던 중국에 대해서는 매우 배타적이었다. 그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같은 인종이라 말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당치도 않은 말이냐”고 말했으며, 포츠머스 회담엔 조선과 함께 청나라 또한 회담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했다.
루스벨트는 1900년 그는 “나는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루스벨트가 1905년 언론인 G.케난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견해가 보다 구체화되어 있다. "한국인은 본래 일본인 또는 중국인과 같은 수준에서 사물을 파악할 능력이 없으며 사물에 제대로 보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패했기 때문에 자력으로 훌륭한 사회를 만들고 지켜나갈 수 없다. '''조선인이 갖고 있는 인종적 결함과 낡고 뒤떨어진 정치·사회제도 탓에 외부로부터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는 후진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또 루스벨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조선은 극동의 모든 나라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의 나라이며, 조선 민족은 가장 문명이 뒤쳐진 인종이다. 조선인은 자치에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반면 일본은 입헌정치의 나라이며 일본 민중은 지성과 활력, 활기에 넘치는 문명 국민이다." 출처.[45]
이러한 한국에 대한 감정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 실제 미국의 아시아 정책으로도 현실화되었다. 일본의 제국주의를 용인하는 정도를 넘어 조장한 것.
친일 행적으로 인해 그는 일본인들에게는 선호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사적으로도 일본문화에 관심이 깊어서 일찍이 일본의 고유문화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 중 친일 성향이 짙은 편이었다.
약 반세기 후 미국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은 정 반대였다. 그의 집권 초기 일본의 항복으로 한국이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고, 6.25 전쟁 당시에도 한국에 즉각 파병 결정을 내림으로서 한국을 2번이나 구했기 때문.[46]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프랭클린 루스벨트-해리 트루먼의 이런 상반된 성향의 원인은 서양 열강들과 일본의 목표가 어긋난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당시 서양 열강들은 중국에서의 지배권 확보를 위해 일본이 러시아를 견제하고 시베리아로 진출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일본은 자신의 목표를 시베리아가 아닌 중국으로 정하고 있었으며[47] , 이것은 조선 침략기의 미국인(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태프트)의 일본관과 중국 침략기의 미국인(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의 일본관이 정반대인 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그는 철두철미한 와패니즈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국권 침탈의 공범으로 비난받으나, 본국인 미국에서는 그러한 점은 잘 모르는 듯하다. 아래의 7번 문단에 나오는 미국산 매체에서도 친일 성향은 잘 언급되지 않고, 오히려 6번 문단에 나오는 사냥이나 암살 미수 등 다양한 일화에 신경쓰는 모양이다. 본래 위인전에는 위인의 안 좋은 모습을 감추려는 경향이 있어서, 미국보다는 한국에서 잘 알려진 사실인 듯하다. (바꿔 말하면 한국에서는 그가 친일이라는 것만 알려졌지, 미국에서는 러시모어 산에도 조각될 정도로 유명한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와패니즈를 왜 존경하냐고 투덜거릴 수도 있는데 오늘날 군사, 경제, 문화 등 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미국에서 친일만으로 존경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덤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본인은 후술하듯 테디라는 애칭을 싫어했지만 미국산 매체에서는 테디라고 문제 없이 불리는 경우가 많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나 ERB 뉴스의 공지사항 등에서 드러난다.
참고: 네이버 캐스트: 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원했는가?
5.2. 친일의 이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친일 성향은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그런 그조차 차츰 일본이 강성해지자 이를 견제하는 행동과 말을 제법 했다고 한다. 때문에 정작 일본에서는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무조건 친일이라고 평가하진 않는데, 알프레드 마한에게 보낸 1897년 서한에서는 일본의 위협을 거론하며 하와이의 병합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한 적도 있다.
또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우호적이었으나 동시에 필리핀을 향한 일본의 세력확대를 경계하여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에도 지나친 손해가 가지 않게 노력하였다.[48] 이로써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견제하길 바랐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강성해지는 조짐이 보이자 일본에 대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루즈벨트는 하와이의 일본인의 본토 이주를 엄금하고 일본해군의 태평양 상륙을 우려하여 미국 해군의 증강을 촉구했다. 유진 헤일 상원 의원에게 보내는 1906년 10월 27일자 서신에서는 태평양의 반일 캠페인을 우려하며 일본과의 전쟁이 있을 시 미래가 염려된다고 우려하였다. 1907년에는 일본과의 신사협정을 맺어 비숙련 노동자의 이민을 금지하기로 합의하였다.
루즈벨트가 법무장관 녹스에게 보낸 1909년 2월 8일자 편지에서 이민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일본인 노동자는 배제되어야 하는데, 전쟁의 위험을 피하는 똑똑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이 같은 루스벨트의 반이민 정책은 후에 1924년 이민법에서 일본계를 포함한 아시아계의 전면 이민을 금지하는 정책으로 이어진다.[49]
또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를 시켜 반일 캠페인을 전개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샌프란시스코 시 당국이 일본인 학생들을 중국인들이 다니는 동양인 학교로 전학시키려 하자 이를 일본인을 중국인과 동급으로 취급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직접 개입해 무산시킨 사례도 있다. 이 개입은 본인의 일본 애호 성향이 원인이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루스벨트는 일본과의 외교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는 친일 성향이 있었고 일본 문화에 호감을 가졌지만 뿌리 깊은 미국 중심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로서 일본인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진 않은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 미국인이 최고인데, 열등한 줄 알았던 일본인이 우리를 따라하네? 그럼 얘들은 황인종 중에선 그래도 말이 좀 통하는 애들이겠구나.' 정도의 의미. 실제로 당시 동아시아를 보면, 중화사상에 빠져 정신 못 차리다가 서양 열강에게 수도가 유린당한 청나라나, 국운이 기우는 와중에도 전제왕정 지키려고 무리수를 남발하는 한국에 비해서는 그나마 외형적인 입헌군주제라도 시도하고 있는[50] 일본이 루스벨트의 눈에는 낫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미국 위로 올라서는건 안된다는 인식 아래 신흥국을 견제했던 것. 그리고 이것은 사실 루스벨트뿐만 아니라 당시 제국주의 열강 정치인 혹은 현대 정치인들에게서조차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아예 이해 못할건 아니다.
6. 기타
- 시어도어의 애칭이 'Teddy'라서 테디 루스벨트라고도 알려져 있고 미국에서도 테디 루스벨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정작 본인은 테디라고 불리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테디'라는 애칭은 'Teddy', 'Teddie'라는 표기가 있는데 가족들이나 그의 친구들은 그를 부를 때 Teddie라는 표기를 사용했다고 하며, 루스벨트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줄여서 Thee라고 쓴 적이 있다. 당시 국민들이 부른 애칭은 Teddy이고 오늘날에도 Teddy Roosevelt라고 쓰는데 Teddie와는 달리 Teddy란 표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에서는 풀네임 머릿글자를 따서 TR이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언론에서 대통령을 이니셜로만 부른 최초의 사례이다. 한국 언론에서 정치인을 YS, DJ, JP, MB 등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그 원조격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라이트 형제가 비행에 성공한 시기가 루스벨트 재임기였는데, 그래서인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비행기를 탄 대통령이 되었다. 또한 최초로 자동차를 탄 대통령이기도 하다. 해군 잠수함에 최초로 탑승하여 직접 잠수함을 조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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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음에도 어딘가 특이한 면이 있어서 아래의 일화에서 보듯 기행도 많이 일삼았다. 오죽하면 영국 외교관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을까.
- 프랑스 대사인 주세랑이라는 사람과 함께 산책을 했는데 산책하다가 너무 깊어서 걸어서 건너가기 힘든 개울을 만나자 대통령은 갑자기 옷을 훌훌 벗고 주세랑 대사에게 옷을 벗을 것을 권했다. 결국 그 프랑스 외교관도 웃통을 벗고(...) 미국 대통령과 함께 헤엄쳐서 개울을 건넜다. 또한 그와 함께 산책한 영국 대사는 그 날 일기에 죽는 줄 알았다. 산책이라더니 어떻게 2시간 반 동안 등산하냐.며 이런 식의 일기를 남겼을 정도였고, 그 영국 대사가 지쳐서 움직이지 못하자 앞서가다 말고 내려와서 영국 대사를 잡아끌고 끝까지 올라갔다. 또한 한 친구와 산책하다가 산 속에서 폭발음이 들렸는데, 이것은 채석장에서 굴을 터뜨린 소리였다. 당연히 바위조각들이 튀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데 되려 친구에게 '바위조각 많이 떨어지는 곳으로 가 보자'고 억지로 끌고 갔다고 한다. 이게 뭐 산책인지 유격 훈련인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이런 일화를 보면 마이페이스 기질이 있었던 듯.
- 운동을 너무 좋아해서 대통령 시절 복싱선수 존 설리번을 백악관에 불러 복싱 연습을 했을 정도였다. 연습 중 부상당한 적도 많지만 눈이 찢어져도 끝까지 연습을 했다. 정통으로 한쪽 눈을 얻어맞은 적도 있었는데 결국은 그 눈의 시력을 잃었다(즉, 애꾸눈). 국회의원들을 데리고 장애물 경주를 하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하버드 동기였던 일본 외교관 가네코 겐타로[51] 는 루스벨트가 운동을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일본 유도 선수들과 스모 선수들을 백악관으로 초빙해 일주일에 세 번씩 대련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기도 하였다. 백악관에 요코즈나(橫綱)를 초청한 적도 있다.
- 유도와 스모 뿐 아니라 일본 문화 자체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서 오륜서와 추신구라, 무사도(니토베 이나조 저)를 애독했다. 특히 추신구라에 대해서는 최고의 이야기라는 극찬을 했다. 루스벨트 시절 미일관계는 단순히 태평양 방면에서 미국의 외교적 이익을 얻기 위한 차원을 넘어 루스벨트 개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이 작용한 게 아닌가 하는 말까지 나올 정도.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BANZAI"라고 글을 메모하기도 했다.[52] 뿐만 아니라 루스벨트는 도고 헤이하치로의 훈시를 영어로 번역한 후 미군에 배포했다. 일본 외교관들에게서 일본 요리를 대접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일반적인 서양인들은 생선을 사용하는 일본 요리(특히 회)에 기겁을 했지만 루스벨트 본인은 맛있다고 칭찬하며 잘 먹었다고 한다.
- 1912년 대선에 출마하여 밀워키에서 연설을 준비 중에 괴한[53] 에게 피격당해서 오른쪽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갈비뼈가 부러지고 가슴에 총탄이 박힌 채로 한 시간 동안 연설을 한 후에 병원으로 갔다. 그나마 연설도 숨을 헐떡이면서 겨우겨우 해냈으며 연설 후 의사에게도 '들것에 누워 가기 싫다. 내 발로 걸어가겠다'며 끝내 병원까지 걸어갔다. 총탄이 루스벨트의 상의 가슴 주머니에 있던 안경 케이스와 연설문을 뚫고 가슴 근육에 박혔는데, 워낙 운동과 탐험으로 다져진 강건한 체구였던 덕택에 폐를 뚫고 들어오는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 이 행동에 대해서 그의 반대자인 우드로 윌슨 등도 '나는 루스벨트의 정치 노선에는 반대하지만, 그 기개는 존경한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또한 루스벨트가 총상을 치료하는 중에는 같이 대선에 출마한 윌슨과 태프트 모두 선거운동을 중단했다고 한다.
-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당시 대통령 윌슨에게 "나도 1개 기병 사단을 지휘해서 참전하겠소!"라고 요구했다. 물론 윌슨의 대답은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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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험에 대해서는 1909년 대통령에서 퇴임하자마자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지원을 받는 과학탐험대를 인솔하여 바로 아프리카 탐험을 떠났다. 1913년에는 브라질에 위치한 지도에 나와 있지 않는 미탐사 지역인 다우트 강 탐험을 직접 이끌기도 했다. 탐험을 마치고 루스벨트는 "소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 골치를 앓고 있던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정부의 고위관리와 회의하던 도중에 조카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아저씨, 4시가 넘었어요!"라고 말하자 관리에게 "저 아이들하고 4시에 사냥을 가기로 했는데, 미안하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논합시다. 원래 애들에게 있어서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견디기 힘든 일 아니오?"라며 회의도 대충 끝내고 냅다 사냥을 나가버렸다(...).
- 아이들을 좋아해서 대통령 시절에도 자식이나 조카들을 데리고 어울려 놀곤 했다. 함께 사냥을 가거나 승마를 하기도 했으며 베개싸움까지도 했다. 심지어는 아이들과 함께 백악관 만찬장의 쥐잡기를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영부인 이디스는 이렇게 말했다. "제 아이가 7명인데(원래 루스벨트 부부의 아이는 6명인데, 남편까지 합쳐서 한 말) 시어도어가 제일 어려요."
- 스테이크를 좋아해서 즐겨먹었으며 음식을 한가지가 아닌 항상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것을 좋아하는 미식가였다.
- 뉴욕 경찰청장 때와 주지사 시절에는 검은 망토로 변장하거나 경찰관으로 변장하고 공무원들이 있는 곳을 돌며 졸거나 근무를 똑바로 안 하는 공무원들을 보면 즉석에서 질책했다고 한다. 일종의 암행어사를 직접 했던 셈.
- 그림도 취미 중 하나였다. 자식들이나 어린이들에게 직접 편지를 썼는데 어린이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아이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항상 그림을 그려서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의욕과는 달리 실력은 그다지...
- 맥스웰하우스 커피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인 "마지막 한 방울까지(good to the last drop)"[56] 가 오랫동안 이 양반 작품으로 알려져 왔었다. 1907년 그가 맥스웰하우스 커피점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데 커피가 어찌나 맛있던지 저 말을 하며 격찬했다는 내용으로... 그러나 이는 사실 의도적으로 퍼뜨린 루머이며 후에 제너럴 푸즈의 전 회장 클리포드 스필러가 테디 루스벨트의 말에서 따온 게 아니라고 확인해 줬다. 1920년대 코카콜라도 같은 문구를 사용했다고 한다. 어찌됐건 루스벨트가 엄청난 커피광이었다는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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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기억력을 가져 매일 아침 커피타임에 책 한 권씩을 읽었다고 한다. 한 번은 친구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책을 빌려줬는데 책의 분량이 좀 많았다. 그러나 저녁 식사 때 초대되어 다시 찾아가보니 대통령은 이미 그 책을 독파하여 '그 책 읽어보니까 어떤 부분은 어떻고...'라며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해 친구에게 열심히 설명했을 정도. 속독 능력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다독으로도 유명했다. 덧붙여 친척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속독 능력자였다고 한다.
- 루스벨트에게는 38구경 권총이 있었는데, 인생을 함께 한 총이었다. 이 총은 박물관에서 두번이나 도난당했다. 첫번째 도난은 박물관 뒤 숲에서 찾았고 두번째 도난은 어처구니없게 잃어버린 후[57] 20년만에 되찾게 되었다.
- 간혹 웹상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유명 어록이랍시고 "보수주의자를 화나게 만들고 싶으면, 그에게 거짓말을 하라. 리버럴을 화나게 만들고 싶으면, 그에게 진실을 말하라"(To anger a conservative, lie to him. To anger a liberal, tell him the truth.)라는 표현이 떠다니기도 했지만, 실제로 루스벨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옥스포드 영어사전 편집자 베리 포피크(B.Popik)가 현존하는 모든 어록들을 검토해 봤지만, 그런 말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 니미츠급 항공모함의 4번함 CVN-71에 이름이 붙었다. 참고로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별명은 '큰 몽둥이(Big Stick)'.(...)
- 처음으로 시크릿 서비스가 미국 대통령의 경호 임무를 맡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전임 대통령인 윌리엄 매킨리가 암살당하자 더 이상 대통령의 경호 임무를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의회가 재무부 산하 기관인 시크릿 서비스에게 경호 임무를 맡긴 것.
7. 대중매체에서
'박물관이 살아있다' 영화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이 역으로 등장했다.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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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화의 주요 촬영장소가 된 뉴욕의 미국 자연사박물관 입구의 동상 주인공이 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다. 그러나 동상 좌우로 아메리카 원주민, 흑인이 마치 떠받드는 듯한 구도를 취하는 모습 때문에 인종차별의 상징이라는 비판도 받아왔다. 결국 조지 플로이드 흑인 시위가 진행 중인 2020년 6월 철거가 결정되었다. 시어도어 뿐만 아니라 처칠, 콜럼버스 등의 유명인들의 동상이 철거되었다.
2017년 마틴 스콜세지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손잡고 영화 루스벨트를 제작할 것이라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해당작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대두(The Rise of Theodore Roosevelt)'라는 전기를 원작으로 하는데 이 전기는 버락 오바마가 애독하는 책 중 하나라고. 루스벨트의 삶을 다룬 3부작 전기 중 1부에 해당된다. 루스벨트의 탄생부터 전임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듣는 곳까지 1부, 2부인 시어도어 렉스는 대통령 퇴임까지를 다루고 있다. 참고로 이 논픽션의 작가는 80년대 레이건 친화적인 전기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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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작품인 '러프 라이더즈'에도 주인공격. 루스벨트가 러프라이더로 참전한 미국-스페인 전쟁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루스벨트 역으로 플래툰의 번즈 하사로 유명한 톰 베린저가 출연. 철저히 미국 중심적으로 전쟁을 해석하고 있지만, 시대적 고증과 전투묘사는 괜찮은 편이니 19세기 말엽의 무기나 전쟁에 관심이 있다면 볼 만한 영화.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3에서는 러시모어 산에 있는 그의 머리 위에 '''ICBM 발사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름하여 '루스벨트 지구 멸망'이라는 병기로 개조되었다.
타임라인-191 시리즈[58] 에서는 1편에선 농장주를 하다가 의용병을 이끌고 캐나다의 영국군을 무찌르는 영웅으로 나오고 이후 '''민주당''' 대통령이 돼서 북부를 부흥시켜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대통령으로 나온다. 최전선에 시찰가는 장면이 버젓히 나온다. 다만 여기서는 퇴임 후 골프를 치다가 사망하는 걸로 처리된다.
영국에서 나온 대체역사 소설 시리즈에서는 루스벨트가 1912년에 '''진짜로 암살'''된 후 혼란의 와중에서 트로츠키주의에 감화된 사회주의자들이 공산혁명을 일으켜 대통령 일가를 참살하고 유럽 자유주의의 강대국인 '''러시아'''와 냉전구도를 이끄는 이야기도 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PLUTO에 등장하는 캐릭터 Dr. 루스벨트도 이 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특히 테디 베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사살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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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6에서 미국 지도자로 전작인 문명 5의 워싱턴을 제치고 확정되었다. 적당히 데포르메가 가해져서 귀여운 아저씨가 되었다. 본작에서 지도자들 이미지는 실사풍과 캐리커처풍 이미지를 적절히 조합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자세한 것은 문명 6/등장 문명/미국 참고.
엠파이어 어스 2의 미국 캠페인 초반이 미서전쟁을 다루므로 루스벨트도 캠페인에서 영웅 유닛으로 등장한다.
타잔에서 아프리카를 방문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하필이면 몸값을 차지하려는 악당들에게 납치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타잔이 지켜주자 다행히 무사히 돌아간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1회 초반에 잠시 등장한다. 테디 루즈벨트는 유진 초이 대위(이병헌 분)와 카일 무어 소령(데이비드 맥기니스 분)을 백악관으로 불러서 전투에서의 성과를 치하하고 세계 전반에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그들을 한반도로 파견한다. 동양권에서 방영한 드라마 치고, 해당 배우의 외모나 발성 등이 실제 테디와 상당히 일치하는 편이다. 이때 테디가 했던 발언은 당시 시대상과 실제 테디 루즈벨트의 철학을 잘 보여주는 터라 매우 인상적인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칼렙 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에일리어니스트>에서 등장. 그의 경찰국장 시절 행적을 다룬다. 주인공인 크라이즐러와 무어와는 하버드 대학 시절의 친구로, 정신의학적, 법의학적 시선으로 연쇄살인범을 쫓는 주인공들을 도와준다. 사건을 대충 덮기를 바라는 사교계 거물이나, 새로운 수사방법을 백안시하는 경찰 내부 분위기 때문에 주인공들에게 투덜거리거나 차갑게 대하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전반적으로 긍정적으로 그려졌다.[59] 배우는 허트 로커에서 엘드리지 역을 맡은 브라이언 게러티."상냥한 말과 커다란 채찍을 들고 조선으로 가게."
- 미스터 션샤인 1화 중
Epic Rap Battles of History에서 ERB 뉴스의 진행자로 등장하며 "What's up bitches?(잘 지내냐, 새끼들아?)"하는 인사가 특징적이다. 나중에 시즌 5에서 윈스턴 처칠과의 대결로 등장하기도 하며 ERB 뉴스의 해당 인사를 셀프 패러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