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터 A. 아서

 





'''미합중국 제21대 대통령
체스터 앨런 아서
Chester Alan Arthur
'''
'''출생'''
1829년 10월 5일
미국 버몬트 주 페어필드
'''사망'''
1886년 11월 18일 (향년 57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재임기간'''
제20대 부통령
1881년 3월 4일 ~ 1881년 9월 19일
제21대 대통령
1881년 9월 19일 ~ 1885년 3월 4일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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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윌리엄 아서(1796 ~ 1874)
맬비아 스톤(1802 ~ 1869)
'''배우자'''
넬 아서(1837 ~ 1880)
'''자녀'''
윌리엄 루이스 헌든 아서(1860 ~ 1863)
체스터 알란 아서 2세(1864 ~ 1937)
엘렌 핸스브로 헌든 아서(1871 ~ 1915)
'''종교'''
개신교 (성공회)
'''학력'''
유니온 칼리지 (B.A.)
유니온 칼리지 (LL.D.)[12]
State and National Law School[13]
'''최종 계급'''
미국 육군 원수
'''신체'''
188cm, 112kg
'''정당'''

'''주요 경력'''
미국 제20대 부통령
'''미국 제21대 대통령'''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
2. 활동
2.1. 대통령이 되기까지
2.2. 대통령으로서
2.3. 퇴임 후와 평가
3. 인물됨과 일화
4. 한국과의 관계
5.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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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20대 부통령이자 제21대 대통령.

2. 활동



2.1. 대통령이 되기까지


1829년 버몬트 주의 캐나다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1] 1848년 뉴욕 유니언대학을 졸업하고 1851년부터 이듬해까지 강의를 했으며 1854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뉴욕에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변호사로 재직하던 당시 쟁점이 되었던 노예 문제에서 폐지론을 주장했던 인물로, 당시 백인 전용차에서 흑인 여성을 강제로 내리게 한 브루클린 전차 회사를 기소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인종 차별이 없는 대중교통제도를 도입하는 데 노력했다.
이런 성과로 뛰어난 변호사로 명성을 얻어 공화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했으며 당시 공화당 최대 파벌의 영수격인 로스코 콩클링 계파에 속했다. 율리시스 S. 그랜트 행정부 시절에 마침내 뉴욕항 관세징수관에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당시 뉴욕에서 제일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 갖는 권한이었는데, 그 후임인 러더퍼드 B. 헤이스가 대통령이 되자 부패혐의로 해임되었다. 뇌물을 먹기는 했지만 이 조치는 당시 헤이스가 당내 최대 파벌인 콩클링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로 비쳐졌다고 한다.[2]
이후 제임스 A. 가필드가 1880년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자 계파 실세인 콩클링과 가필드의 정치적 타협으로 콩클링 계파의 아서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사실 콩클링은 부통령 후보로 세우는 것을 탐탁찮아했다. 맨 먼저 가필드가 콩클링파였던 리바이 P. 모턴을 지명했을 때, 콩클링은 모턴을 직접 찾아가 거절을 권유했고 모턴은 실제로 사양했다. 가필드가 다시 콩클링파의 아서를 선택하자, 콩클링은 이번에도 아서를 찾아가 거절을 권유했지만 아서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언론인 윌리엄 C. 허드슨의 증언으로는, 아서는 "부통령직은 내가 꿈꾸었던 가장 큰 영예입니다"라면서 콩클링과 말다툼을 벌였다고.

2.2. 대통령으로서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는 콩클링파의 도움으로 집권했지만 콩클링의 발호를 경계하고 있었고, 그래서 콩클링파가 요구하는 자리를 거부하고 일부 인사를 임명했다. 자연히 콩클링파의 메신저 역이었던 '부통령' 아서는 가필드와 사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81년 7월에 가필드가 저격당했고 두 달 반의 투병 끝에 사망하자, 아서는 난데없이 대통령이 되었다. 이 때문에 아서의 후견인이나 다름없던 콩클링 일파의 발호가 우려되었지만[3] 아서는 과감하게 콩클링 일파와의 관계를 끊었고 공화당 내부의 파벌 사람들을 요직에 등용하지 않음으로써 편파적 인사관행의 고리를 끊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콩클링 일파에게는 평생 '배신자'라고 비난받았지만 반대로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4]
아서 정권 최대의 업적은 바로 '펜들턴법(Pendleton Civil Service Act)'의 제정이다. 이것은 당시 판을 치던 연줄이나 계파에 따른 관직 등용, 엽관제매관매직을 금지하고 정치적 거래 대신 공개시험을 치르게 한 것으로, 말하자면 미국판 행정고시를 도입한 것이며, 공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정당 조직에 내는 정치헌금을 금지했다. 아서 자신은 이러한 엽관제나 계파에 따른 관직 등용의 수혜자였지만 이런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많은 정치적 동료들을 격분시켰다. 이때 펜들턴법에 반대하는 공화당 의원들을 향해 날린 발언이 나름 유명하다.

'''"나는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체스터 앨런 아서와 미합중국의 대통령은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소."'''

(Since I came here I have learned that Chester A. Arthur is one man and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is another.)

이 법안은 공직의 청렴도를 높였다는 의의가 있어서 '''미국 공무원제도의 마그나카르타'''로 일컬어진다.
또한 당시 큰 쟁점이 되고 있던 관세 논쟁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공화당과 반대되는 의견인 관세율의 대폭 인하를 주장했지만 의회는 관세율을 조금만 인하할 것을 주장했다. 아서는 이 두 의견 중 고민하다가 의회의 법안에 서명했다.
그 외 업적으로는 미 해군을 강화하려고 노력했으며 전세계의 시간(표준시)을 통일된 기준에 맞추기 위해 표준시간 체계를 만드는 국제협의회를 조직했다. 외교적으로는 니카라과를 관통하는 태평양대서양을 연결하는 운하 건설을 위해 니카라과와 협상했지만 이 계획은 상원에서 통과되지 않았다. 그리고 중남미에서 금융거래를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해 남미북미의 단일통화를 개발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이렇듯 여러 자잘한 일들을 했지만 펜들턴법 제정 외에는 크게 눈에 띄는 업적이나 효과를 본 업적이 없어서 그다지 존재감이 있는 대통령으로 기억되지는 않는 인물이다.

2.3. 퇴임 후와 평가


1885년 퇴임할 때 "퇴임 대통령이 할 일은 시골로 내려가 큰 호박을 키우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다."라는 말을 남겼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고 뉴욕에서 다시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병이었던 신장병이 점점 악화되었고, 이후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자택에 칩거해 있다가 고작 퇴임 1년 8개월 만인 1886년 11월 18일에 뇌일혈로 생을 마감했다. 임기 중 사망한 대통령을 빼면 퇴임 후 지낸 시간이 짧은 셈.[5][6] 시신은 올버니에 있는 루렐 공동묘지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곁에 묻혔다.
대통령으로써의 그는 당시 부패가 만연하던 미국 정계의 부패를 끊고자 노력했고 특히 펜들턴법 제정으로 엽관제도의 고리를 끊었으며 그랜트 이후 떨어지던 대통령의 권위를 어느 정도 회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임기 동안 미국은 남북전쟁의 영향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듯 능력은 그럭저럭 무난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지만 미국인들 기억에는 그다지 뚜렷하게 기억되는 대통령은 아니다.[7]
28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그를 "구레나룻 빼고는 남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혹평했지만 당대 외교관이자 훗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국무장관까지 지낸 거물 정치가 엘리후 루트는 "정직하고 현명한 정치가. 선을 목적으로 한 대의는 친숙하지만, 선이 아닌 나쁜 조치들은 그의 불굴의 의지에 의해 소멸되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3. 인물됨과 일화


미국 대통령 중 윌리엄 태프트,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뒤를 이은 세 번째로 뚱뚱한 대통령으로 키 188cm에 몸무게 112kg의 당당한 풍채를 자랑했다.[8] 취임식 이후에 제일 먼저 한 것이 완전히 개판으로 전락한 백악관 수리였다나... 수리기간인 3개월동안은 다른곳에 지냈다.[9] 이런 풍채에다가 개인적 취향도 대단히 고급스러운 멋을 좋아하던 사람이라서 옷도 항상 화려하게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독특한 수염과 짧은 구레나룻이 당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고(모양새는 콧수염과 구레나룻이 서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신사 보스(Gentleman Boss)'. 옷 뿐만 아니라 입맛 까다로운 미식가라서 백악관에 있을 때 손님이 오면 '''14가지 코스의 만찬에 8가지 종류의 와인'''을 대접하여 식사를 즐겼다. 좋아하는 음식은 양갈비로 만든 요리였다. 그래서 이원복은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대통령 편에서 아서가 그랜트 이후로 완전히 실추된 대통령의 권위와 위엄을 되살리는데 일조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대단한 귀차니스트였는지 하루에 절대로 '''6시간 이상'''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부분 아침 10시에 집무를 시작하여 오후 4~5시 사이에 업무를 마치고 개인시간을 가졌다. 당시 백악관 서기는 "대통령께서는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을 절대 오늘 하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했으며 아서 본인은 "일하는 곳과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우울한 일인지 여러분은 모르실 겁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사람이 덩치나 화려한 외양에 어울리지 않게 소심한 면모가 있었는지 언론과의 기자회견이나 인터뷰를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언론은 항상 아서에 대해 우호적인 보도보다는 '하라는 일은 안하고 놀기만 하는 게으른 대통령' 등으로 혹평했다. 그래도 당시 국민들은 이렇다 할 불평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통령 시절 영부인은 없었다. 원래 1859년에 엘런 헤른던과 결혼했지만 그녀는 아서가 대통령이 되기 1년 전인 1880년에 42세로 사망했다. 대통령이 된 후 백악관에 아내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매일 신선한 꽃을 가져다 놓으며 죽는 날까지 재혼도 안 하고 아내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화려한 외향과는 달리 의외로 섬세한 남자. 실제로도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불쌍하다 자주 울었단다. 영부인이 없었기 때문에 영부인 역할은 여동생 메리 아서 매켈로이(Mary Arthur McElroy)가 대신했다.
'''잠옷 바람으로 대통령 선서를 한 사람'''이다. 1881년 9월 20일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이 새벽에 죽는 바람에 사람들이 자고 있던 그를 깨워서 선서를 시키고, 이틀 뒤에 정식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선서했다고...

4. 한국과의 관계


[image]
보빙사 일행을 접견하는 아서.
미국에서는 그리 지명도가 높은 대통령이 아니지만,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바로 '''조선의 외교 사절을 최초로 접견한 미국 대통령'''이었기 때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다음 해인 1883년 고종이 파견한 보빙사 단장 민영익 일행이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의 피프스 애비뉴 호텔(Fifth Avenue Hotel)에서 아서와 만난 것. 이때 보빙사는 위 그림처럼 일국의 왕을 대하는 방식으로 아서에게 큰 절을 올렸고 고종의 친서를 전했는데, 이때 아서는 이 생소한 인사법을 접하고서는 매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멀뚱멀뚱 서 있었다고 한다.
당시 보빙사 일행도 서양 예법에서 대통령에게 절을 하진 않는단건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인사해야 대통령 의전에 걸맞는 적절한 예절인지 논의하던 도중 아서 대통령이 예정보다 일찍 오는 바람에 조건반사 적으로 왕에게 하듯이 절을 했다고 한다.#[10]

사신 민영익, 홍영식 등은 대아미리가(大亞美里加: America의 음차) 합중국 대백리새천덕(大伯理璽天德: President의 음차)께 아뢰옵니다. 사신 등이 대조선국 대군주 명을 받자와 대신으로 대백리새천덕대아미리가 합중국 모든 인민이 한 가지로 안녕을 누리시기 청하오며, 두 나라 인민이 서로 사귀고 우의를 돈독히 하기를 바라나이다.

그리고 친서를 전해 받자 아서는 보빙사 일행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미합중국은 과거 역사에서 보듯이 타국의 영토점령, 지배할 의도가 없소. 오로지 상호 우호관계와 교역을 통해 이익을 나누기를 바라오."'''

아서의 발언은 조선 정부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한편 아서 대통령과 보빙사의 만남 때는 통역 과정이 참 복잡했다. 조선어-영어의 '''직접 통역이 가능한 사람이 없어서''' 아서가 영어로 말하면 중국어-영어 통역이 중국어로 옮기고, 중국어-조선어 통역이 조선어로 옮기는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하며, 통역에 만전을 기하기 위한(?) 조치였는지 일본어-영어 통역과 일본어-조선어 통역을 따로 두어 이 통역도 활용했다고 한다. 궁금한 위키러는 여기서 확인하도록 하자.
이 점에서 그는 미국에서보다 한국에서 그나마 더 기억되는 대통령이라 봐도 될 것이다. 미국 교과서에는 이름이 언급되는 일이 드문데, 한국 교과서에서는 보빙사 때문에 한번은 언급되기 때문이다.

5. 대중 매체에서


다이하드 3 : 영화 중반에 사이먼이 "42 빼기 21은 뭐지?"라는 문제를 내며 존 맥클레인을 골탕먹이고 도망간다. 이 문제는 21대 대통령이 누구인지를 묻는 문제인데, 지나가는 운전자의 전화기를 뺏어서 콥 반장에게 물어보려 시도하지만 당시 경찰 주파수가 폐쇄됨에 따라 일반 전화로 몰리면서 불통이 되어 통화를 하지 못한다. 이후 송수관 공사 현장에 같이 간 트럭 기사가 자세한 TMI와 함께 21대 대통령이 누군지 알려준다. 위치는 사무엘 L. 잭슨이 분한 전기수리공 '제우스'의 조카가 다니는 공립 초등학교였다.
체스터 A. 아서 공립학교(...). 영화 이야기지만 이렇게 아서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 봐도, 그가 미국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덜 기억되는 인물인지를 보여준다.[11]

[1] 이 점은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뒤 의혹을 사게 된다. 헌법상 미국 국내에서 태어난 사람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데, 캐나다 시민권자 부부가 캐나다 국경 건너편의 마을에서 출생신고를 한 것이 혹시 위조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던 것. [2]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그에게 그정도는 당연하게 여겨졌을거다." 라는 설명과 함께 아서가 "요즘 세상에 나만 돈먹었나 그까짓 가지고..." 라는 대사 첨가.[3] 가필드가 저격당할 당시 아서는 콩클링과 같이 올버니에 있었다. 올버니가 어디냐면 콩클링의 지역구(...) 당시 콩클링은 상원의원 재선을 노리고 있었다.[4] 이후 콩클링파는 머리였던 콩클링이 위세를 잃으며 무너졌지만, 아서가 퇴임 후 얼마 안되어 사망하자 정작 콩클링 본인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5] 사실 아서는 이 사례가 2번째에 가까운 사례며(3번째는 초대인 조지 워싱턴), 가장 짧게 지낸 미 전직 대통령은 제임스 포크로 이 사람은 퇴임 후 3개월을 지냈다.[6] 반대로 퇴임 후 지내는 시간이 가장 긴 전직 대통령은 현재 지미 카터가 해당.[7] 인기도는 가필드보다도 밀리는데 가필드도 인기도가 높은 편은 아님을 감안하면 안습[8] 특히 다음 대통령인 클리블랜드도 덩치가 큰 지라 당시 아서와 클리블랜드가 있던 8년 동안은 2연속 뚱보 대통령의 재임기였다.[9]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아예 '저러니 대통령을 우습게 알지!' 라고 분통 터뜨리는 모습이 있다.[10] 다만 당대의 여러 언론을 비교한 결과, 이것이 아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일어난 반사적인 일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1, #2). 오히려 애초에 조선 예법식으로 한 독립국의 수장에게 보이는 최고의 경의를 나타내자는 의미에서 행해진 일이었으며, 후에 통역관인 로웰이 이를 전하자, 당시의 언론들이 이것에 대해 나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대통령 자신도 이에 대해 만족했다고 한다.[11] 그리고 폭탄을 설치했다는 것은 구라, 폭발 액체는 뿌려먹는 시럽이었다. 이에 사이먼은 "난 군인이지 괴물이 아니야."라면서 아이들이 있는 학교에 진짜 폭탄을 설치할 정도의 미친 놈은 아니라고 변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