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부하린
1. 개요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정치인, 경제학자. 볼셰비키의 일원으로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으나, 스탈린 집권 이후 대숙청에 걸려서 처형당했다.
2. 생애
2.1. 혁명 이전
(추가예정)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모 아래 출생했고 러시아 최고의 대학이었던 모스크바 대학에 진학하였다.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의 저술을 돕기도 하였다.
2.2. 혁명 이후
2.2.1. 신경제정책
>농민 여러분, 부자되시오!
부하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주장[2] 했고, 이는 후에 스탈린이 취하는 포지션이 된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과 대립했다.트로츠키가 중국에서의 대참사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1927년의 정점으로 아예 출당된 뒤에는 트로츠키, 카메네프와 손잡았다가 마찬가지로 몰락한 지노비에프를 뒤이어 1926년 코민테른 총서기가 되어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서 큰 입김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때 스탈린과 맹우로써 이두정치를 지휘하였으나,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농업집단화와 중화학공업화의 급격한 추진 대신 점진적 추진을 당내에서 강하게 주장했다.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 즉 사회주의 열강이 동맹으로 존재하지 않는 한 소련은 결국 붕괴할 것이란 자기실현적 예언만큼이나 부하린의 식견도 사후 해석으로는 그리 틀리지는 않았다. 실제로 소련에서는 1930년대 대기근으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고 농촌사회의 빠른 붕괴로 인한 과도한 도시 인구유입으로 노동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 또한 발생했다. 스탈린, 트로츠키, 부하린 3인방 모두 각자의 근거를 가지고 나름대로의 비전을 제시한 셈이었고 그 비전을 추진하기 위해 친구들까지 냉혹하게 내치는 스탈린의 정치력이 빛을 발했던 것.
많은 트로츠키파들이 스탈린의 급진적 중공업화를 지지하여 전향한 뒤 부하린의 주장은 당내에서 큰 힘을 얻지 못했고, 결국 부하린은 권력을 빼앗겨 1929년 정치국에서 축출되고 자아비판을 하게 된다.
3. 죽음
1937년 1월에 국가전복혐의로 체포되었다. 이후 우익행위 및 트로츠키주의자로 사형판결이 내려진다. 혐의는 "레닌과 스탈린을 암살하려했고, 막심 고리키를 독살했으며, 소련의 영토를 제국주의 국가에게 할양하려 하였다"는 누명이었다.
사실 부하린에겐 목숨을 건질 기회가 있었다. 1936년 2월 즈음부터 부하린은 마르크스의 원고를 얻기 위해 프랑스에 있었는데 이미 그때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아마 스탈린이 날 처형할 거라며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다녔다고. 그래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부하린에게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고 망명 생활을 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지만 부하린 본인이 "나는 소련이 아닌 국가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식으로 그 권유를 거절해 버린다. 다만 부하린의 프랑스 출장은 스탈린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일이었기에 그 상황 자체가 스탈린이 쳐놓은 함정이라는 말도 있다. 스탈린은 결국 부하린이 소련으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고 부하린이 처형당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프랑스로 보냈다는 뜻.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은 "부하린은 고문당한 적이 없고 스스로 모든 죄목을 자백했다"고 말했으나 후에 밝혀진 내용으로는 부인과 아들에 대한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위사실이 적시된 진술서에 서명을 했다고 한다.[3] 부하린의 죄목과 재판에 대한 신빙성으로 인해 해외의 공산주의자들이 재심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1938년 3월 15일 부하린은 처형되었다.
아들과 아내에 대하여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달리 아들과 아내를 굴라크로 보냈지만 둘 다 살아남는다. 부하린의 아내는 당시에는 문서로 남길 수 없어서 암기한 부하린의 유언을 이후 흐루쇼프가 집권하다 공개하기도 했고, 부하린은 1988년 복권되었다.
부하린이 혁명동지이자 친우였던 스탈린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코바, 왜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Коба, зачем тебе нужна моя смерть?)[출처] 였다. 코바는 스탈린의 애칭 중 하나이다. 스탈린이 죽고서 그의 집무실에서 발견된 편지 중에 하나라고 한다. 이에 대해 스탈린이 부하린에 어떠한 감정이 남아서 혹은 '삐뚤어진 애정'이 있어 남겨두었다는 추측이 있으며 다수의 관련 연구자도 이렇게 추측하고 있다. 반면, 레닌과 스탈린 등 혁명가에 관한 연구자로 영미에서 일반 독자 사이에서도 유명한 로버트 서비스는 스탈린이 그 편지를 다시 읽고 떨리는 만족을 얻으려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남겼다.
다만, 스탈린과 부하린은 개인적으로 아주 친한 친구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부하린의 편지 내용 역시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는 트로츠키와 손을 잡지 않은 것"이라는 지노비예프의 유언이나 "날조하는 스탈린 학파" 등의 저서에서 스탈린을 매독환자, 강도 등으로 묘사하며 조롱한 트로츠키와는 달리 자신을 왜 굳이 죽이려고 하는지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에 가깝다는 점, 스탈린이 저 유언장과 별개로 부하린이 옥중에서 집필한 회고록 "늙은 볼셰비키의 편지"의 원고 또한 잘 보관해놓고 있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스탈린에게 부하린에 대한 어떤 감정이 남았기에 이 편지를 간직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더 다수이다.[4] 무엇보다 자신의 승리에 대한 떨리는 감동을 얻고 싶었다면 그 대상은 부하린보다는 트로츠키가 훨씬 적당했을 것이다.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복권되지 못한 트로츠키와는 다르게 부하린은 1988년 복권이 되었다. 부하린의 부인 안나 라리나는 88년까지 살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4. 기타
- 소련 내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레닌이 그에게 너무 자만하지 말라고 지적을 할 정도. 해외에서도 매우 명망이 높아서 대숙청 당시 사형 선고를 받자 많은 해외 지식인들이 "부하린을 사면해달라." 하고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말빨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좋아 레닌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하린의 출중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항상 레닌에게 깨졌다. 이와 같은 레닌과의 논쟁은 이후 숙청의 빌미가 되었다.
- 레닌은 부하린의 식견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으며, 유서에서 차기 지도자 후보 5명 중에 하나로 언급하기도 했다.[5] 하지만 부하린은 기계론적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레닌은 이에 대해 "당내 최고의 이론가이지만 변증법 이해가 부족하다."라고 비판했다(...). 실제로도 유물론자라기보단 기계론자였다.
- 부하린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대한 많은 기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식물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소련 학술원의 창립 회원이기도 하였다.
- 소련에서 최고의 경제학자였는데,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라는 저술을 남겼다.[6] 이후 신경제정책(NEP)의 최고 이론가였다. 허나 스탈린과 중화학 공업에 대한 이견을 보였고 결국 부하린이 자아비판하면서 물러났다. 이와 같은 논쟁은 이후 부하린을 숙청하는 빌미 중 하나로 쓰였다.
- 만화에도 소질이 있어서 혁명 동지들의 캐리커처를 그리기도 했다.
- 부하린은 총 3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는 사촌 여동생과, 두 번째는 동료 혁명가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세 번째 결혼은 45살에 했는데 19살 여인과 결혼했다. 심지어 먼저 대시한 쪽은 부하린이 아니라 아내였던 안나 쪽이었다! 먼저 러브레터를 건냈다고(...). 스탈린도 재혼 경력이 있었지만 어린 신부와 결혼하는 부하린에게 핀잔을 하기도 했다.
- 부하린의 아내가 기억했던 부하린이 남긴 유언 중 하나는 "동지여 명심하라. 혁명 성공의 그날 동지들이 치켜들 깃발 위엔 나의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을 것이다."
- 니콜라이 예조프를 끔찍하게도 싫어했다. 부하린은 예조프를 아래와 같이 평했다.
> 내가 살아온 평생에 예조프만큼 혐오스러운 작자는 보지못했다. 내가 그를 쳐다볼 때면 난 항상 라스테라예바 거리 광장에서 파라핀에 적신 종이를 고양이의 꼬리에 묶고 불을 붙여놓은 뒤 겁먹은 동물을 보며 즐거워하는 악동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예조프 역시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외양만 틀릴 뿐 지금 역시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 니콜라이 부하린이 쓴 "늙은 볼셰비키의 편지(Letter of an Old Bolshevik, 1936)"라는 회고록 중[7]
> - 니콜라이 부하린이 쓴 "늙은 볼셰비키의 편지(Letter of an Old Bolshevik, 1936)"라는 회고록 중[7]
[1] 現 러시아 모스크바 [2] 알려진 것과 달리 스탈린이 먼저 주장해서 트로츠키와 대립한게 아니다. 일국사회주의는 부하린이 먼저 주장했다.[3] 사실 후술할 스탈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라든가, 이 때 수감된 상태에서도 회고록 "늙은 볼셰비키의 편지"를 집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했을 때 정말로 고문'''은''' 당한 적이 없다 해도 이상하진 않다.[출처] :Медве́дев Алекса́ндрович(메드베데프 알랙산드로비치). Unknown Stalin)[4] 실제로 부하린은 재판이 끝나고도 완전히 숙청당하기까지 1년 정도 시간이 걸렸으며 그의 유언이나 회고록이 다른 사람도 아닌 스탈린 본인에 의해 잘 보관되어서 후세까지 전해지는 등, 스탈린이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기까지 상당한 심적 갈등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할만한 정황증거가 충분히 남아있다. 당장 레닌의 유언장에 같이 언급된 나머지 인물들과 비교해봐도 재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처형당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국외로 추방하고 나서도 기어이 직접 암살자를 보내서 담가버린 트로츠키는 누가 봐도 예전부터 벼르고 있다가 기회가 오자 망설임없이 보내버렸음이 명확한(...) 것과 비교했을 때 확실한 차이가 있다.[5] 나머지 4명은 트로츠키, 스탈린,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하지만 이 유서의 내용을 정밀하게 분석해보면 스탈린에 대해선 잔인하다고 비판하면서 서기장에서 해임할 것을 요구했으며, 반면에 트로츠키를 굉장히 추켜세우면서 단지 몇몇 부족한 면이 있으니 주변에서 도와줘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은 각자 장점을 적시하면서도 최고 지도자로선 치명적인 단점들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아마 레닌은 스탈린을 한직으로 좌천시키고 트로츠키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의 보좌를 받아서 국가를 이끄는 집단 지도 체제를 원했던 거 같다.[6] 레닌은 서문을 써줬다.#[7] 이 회고록은 부하린이 실각 이후 감옥에서 작성한 문서이고 부하린이 죽자 스탈린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스탈린 사후 비공개로 보관하다가 1988년 복권이 되고 나서야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