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구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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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했던 前 프로야구 선수. 현재는 친정팀인 오릭스 버팔로즈의 코치.
전직 사회인야구 선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형과 함께 3살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던 타구치는 9살 때부터 유격수를 맡아 프로 데뷔 때까지 계속해서 유격수로 뛰었다.
그 후 칸세이가쿠인대학에 진학해서도 야구부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통산 타율 .327(376타수 123안타) 10홈런 46타점''' 이란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였고 리그 수위타자(타격왕)와 MVP를 각각 1차례 수상했다. 통산 123안타는 현재까지 칸세이가쿠인대학 야구부가 소속된 칸사이 학생야구 연맹 최다 기록이다.
이러한 활약으로 말미암아 대학 졸업 당시엔 드래프트에서 거물 대졸 유격수로 주목을 받았고, 1991년 드래프트에서 닛폰햄 파이터즈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지명을 받아 경합 끝에 오릭스가 교섭권을 획득. 오릭스와 계약금 1억엔, 연봉 1200만엔이라는 대형 계약을 맺고 입단하며 프로에 데뷔한다.
여담으로 드래프트 이전에 타구치는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당시 1985년 우승 멤버였던 유격수 '''히라타 카츠오'''의 노쇠화로 새로운 유격수 자원을 물색하던 한신 타이거스에서 지역 출신 유망주인 타구치에 관심을 보였지만, 타구치는 기자회견을 열어 '''"한신에 가고싶지 않은 10가지 사유"'''를 기자들 앞에서 대놓고 터뜨리는 사상 초유의 드래프트 지명 거부 선언을 해 버린 것. 결국 고작(?) 대학생 야구선수에 크나큰 망신을 당하고 만 한신은 타구치의 지명 계획을 취소해 버렸는데, 이 사건은 당시 한신과 칸세이가쿠인대학 간의 사이가 안 좋아서 대학 관계자들이 타구치를 한신에 입단시키지 않기 위해 타구치에게 지명 거부를 종용한 것으로 추측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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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1991년 드래프트에서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1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한다. 데뷔 당시 포지션은 유격수였지만 오래 가지 않아 포지션을 외야수로 옮겼는데, 첫 풀타임 시즌인 1994년에 .307 6홈런 43타점 10도루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오릭스 부동의 외야수로 안착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꾸준히 2할 후반대의 타율과 세 자릿수 안타를 기록하며 팀 타선의 한 축을 담당했다. 특히 강력한 어깨를 바탕으로 한 외야 수비 능력이 빛을 발했는데, 스즈키 이치로, 모토니시 아츠히로(前 롯데 자이언츠 코치), 말기에는 다니 요시토모 등과 함께 오릭스의 철벽 외야진을 구축하며 5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2001시즌이 끝난 이후 FA가 된 다구치는 한신 타이거즈의 3년 8억 엔 제의를 마다하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3년 300만달러의 계약을 맺으며 만 33세 나이에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다. 하지만 NPB에서도 타격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아니었기에 그의 빅리그 도전에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이적 후 첫 시즌인 2002년, 다구치는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했고, 시즌 중순과 시즌 말에 각각 콜업되어 19경기에 출장하는 데 그쳤다. 이듬해인 2003년에도 트리플A에서 시즌을 시작했지만, 5월 말에 다시 빅리그로 올라왔고 대수비와 대타 등으로 43경기를 뛰었다.
그리고 2004년, 입단 3년만에 빅리그 개막 로스터에 이름을 올린 다구치는 외야 전 포지션을 소화하며 팀의 핵심 백업 선수로 등극했고, 타격 면에서도 .291 52안타 3홈런 25타점 OPS .756으로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이후 토니 라 루사 감독 밑에서 더 뛰고 싶다는 이유로 카디널스와 재계약을 맺었고, 2005년에는 개인 최다인 143경기에 출장, .288 114안타 8홈런 53타점 11도루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2006년에도 시즌 내내 외야 전 포지션을 오가며 백업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3] , 포스트시즌에서도 뉴욕 메츠와의 NLCS 2차전에서 당대 최강의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인 빌리 와그너를 상대로 결승 홈런을 때려내는 등 활약을 펼치며 생애 첫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손에 넣게 된다. 이후 카디널스와 1년 연장 계약을 맺었고, 2007년에도 130경기에 나서며 .290 3홈런 30타점의 성적을 기록했는데, 이 해 내셔널리그 대타 타율 1위(.406)에 오르기도 했다.
2007시즌이 끝난 이후 카디널스를 떠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 2008시즌에는 미일 통산 1500안타를 달성하기도 했지만, 타율은 .220으로 커리어 로우를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이후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고, 2009시즌 말에 빅리그로 콜업되어 6경기를 뛰었지만 재계약은 하지 못하며 미국 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2010년 친정팀인 오릭스 버팔로즈와 계약을 맺으며 두 시즌을 뛰었다. 이미 불혹을 넘긴 나이에 부상 등이 겹치며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는 못했으나 베테랑으로서 후배 선수들을 이끌어나가는 역할은 나름대로 착실하게 수행했다. 2011시즌이 끝난 이후에도 현역 연장을 원했지만, 다른 구단의 오퍼를 받지 못하며 결국 2012년 중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2016년 시즌부터 오릭스의 2군 감독으로 뛰게 되었다. 이후 2019년부턴 1군 야수 종합코치 겸 타격 코치로 보직을 바꾸게 되었다.
1. 개요
일본프로야구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했던 前 프로야구 선수. 현재는 친정팀인 오릭스 버팔로즈의 코치.
2. 데뷔 이전
전직 사회인야구 선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형과 함께 3살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던 타구치는 9살 때부터 유격수를 맡아 프로 데뷔 때까지 계속해서 유격수로 뛰었다.
그 후 칸세이가쿠인대학에 진학해서도 야구부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통산 타율 .327(376타수 123안타) 10홈런 46타점''' 이란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였고 리그 수위타자(타격왕)와 MVP를 각각 1차례 수상했다. 통산 123안타는 현재까지 칸세이가쿠인대학 야구부가 소속된 칸사이 학생야구 연맹 최다 기록이다.
이러한 활약으로 말미암아 대학 졸업 당시엔 드래프트에서 거물 대졸 유격수로 주목을 받았고, 1991년 드래프트에서 닛폰햄 파이터즈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지명을 받아 경합 끝에 오릭스가 교섭권을 획득. 오릭스와 계약금 1억엔, 연봉 1200만엔이라는 대형 계약을 맺고 입단하며 프로에 데뷔한다.
여담으로 드래프트 이전에 타구치는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당시 1985년 우승 멤버였던 유격수 '''히라타 카츠오'''의 노쇠화로 새로운 유격수 자원을 물색하던 한신 타이거스에서 지역 출신 유망주인 타구치에 관심을 보였지만, 타구치는 기자회견을 열어 '''"한신에 가고싶지 않은 10가지 사유"'''를 기자들 앞에서 대놓고 터뜨리는 사상 초유의 드래프트 지명 거부 선언을 해 버린 것. 결국 고작(?) 대학생 야구선수에 크나큰 망신을 당하고 만 한신은 타구치의 지명 계획을 취소해 버렸는데, 이 사건은 당시 한신과 칸세이가쿠인대학 간의 사이가 안 좋아서 대학 관계자들이 타구치를 한신에 입단시키지 않기 위해 타구치에게 지명 거부를 종용한 것으로 추측된다.[2]
2.1.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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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1991년 드래프트에서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1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한다. 데뷔 당시 포지션은 유격수였지만 오래 가지 않아 포지션을 외야수로 옮겼는데, 첫 풀타임 시즌인 1994년에 .307 6홈런 43타점 10도루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오릭스 부동의 외야수로 안착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꾸준히 2할 후반대의 타율과 세 자릿수 안타를 기록하며 팀 타선의 한 축을 담당했다. 특히 강력한 어깨를 바탕으로 한 외야 수비 능력이 빛을 발했는데, 스즈키 이치로, 모토니시 아츠히로(前 롯데 자이언츠 코치), 말기에는 다니 요시토모 등과 함께 오릭스의 철벽 외야진을 구축하며 5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2.2. 메이저리그 시절
2001시즌이 끝난 이후 FA가 된 다구치는 한신 타이거즈의 3년 8억 엔 제의를 마다하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3년 300만달러의 계약을 맺으며 만 33세 나이에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다. 하지만 NPB에서도 타격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아니었기에 그의 빅리그 도전에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이적 후 첫 시즌인 2002년, 다구치는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했고, 시즌 중순과 시즌 말에 각각 콜업되어 19경기에 출장하는 데 그쳤다. 이듬해인 2003년에도 트리플A에서 시즌을 시작했지만, 5월 말에 다시 빅리그로 올라왔고 대수비와 대타 등으로 43경기를 뛰었다.
그리고 2004년, 입단 3년만에 빅리그 개막 로스터에 이름을 올린 다구치는 외야 전 포지션을 소화하며 팀의 핵심 백업 선수로 등극했고, 타격 면에서도 .291 52안타 3홈런 25타점 OPS .756으로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이후 토니 라 루사 감독 밑에서 더 뛰고 싶다는 이유로 카디널스와 재계약을 맺었고, 2005년에는 개인 최다인 143경기에 출장, .288 114안타 8홈런 53타점 11도루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2006년에도 시즌 내내 외야 전 포지션을 오가며 백업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3] , 포스트시즌에서도 뉴욕 메츠와의 NLCS 2차전에서 당대 최강의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인 빌리 와그너를 상대로 결승 홈런을 때려내는 등 활약을 펼치며 생애 첫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손에 넣게 된다. 이후 카디널스와 1년 연장 계약을 맺었고, 2007년에도 130경기에 나서며 .290 3홈런 30타점의 성적을 기록했는데, 이 해 내셔널리그 대타 타율 1위(.406)에 오르기도 했다.
2007시즌이 끝난 이후 카디널스를 떠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 2008시즌에는 미일 통산 1500안타를 달성하기도 했지만, 타율은 .220으로 커리어 로우를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이후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고, 2009시즌 말에 빅리그로 콜업되어 6경기를 뛰었지만 재계약은 하지 못하며 미국 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2.3. 일본프로야구 복귀
2010년 친정팀인 오릭스 버팔로즈와 계약을 맺으며 두 시즌을 뛰었다. 이미 불혹을 넘긴 나이에 부상 등이 겹치며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는 못했으나 베테랑으로서 후배 선수들을 이끌어나가는 역할은 나름대로 착실하게 수행했다. 2011시즌이 끝난 이후에도 현역 연장을 원했지만, 다른 구단의 오퍼를 받지 못하며 결국 2012년 중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2.4. 은퇴 이후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2016년 시즌부터 오릭스의 2군 감독으로 뛰게 되었다. 이후 2019년부턴 1군 야수 종합코치 겸 타격 코치로 보직을 바꾸게 되었다.
3. 기타
- 영어는 잘하지는 못하는 듯. 바로 위의 영상은 2006 NLCS 2차전 경기 후 인터뷰인데, 일본 취재진이 일본어로 묻자 태도가 확 달라진다(...)
- 2003년에 세례를 받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 인품이 매우 좋은 선수라 오릭스 시절은 물론이고 세인트루이스 시절에도 동료들과 팬들 사이에서 무척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 세인트루이스에서 뛸 당시 한국의 메이저리그 팬들 사이에서는 '소 달구지'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 NHK에서 2013년 월드 시리즈 해설을 맡았으며 4차전에서는 시구자에게 공을 전달하는 역할도 하였다. 당시 크리스 카펜터와 아담 웨인라이트 등이 알아보고 반기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