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력
金武力
생몰년도 미상[1]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막내) 아들. 노리부(김세종)의 동생. 김서현의 아버지이며,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금관가야의 왕자였으나, 금관가야가 신라에 복속된 후 신라의 장수가 되었다. 골품은 아버지를 따라 진골.[2]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서는 둘째 아들 무력(茂力)으로 돼 있는데 둘째와 셋째 순서에 착오가 있었던 듯. 삼국유사 김유신조에서는 호력(虎力)으로 써 있지만, 이건 삼국유사가 고려시대에 쓴 책이므로 2대 혜종 왕무의 이름을 피휘한 것으로 원래는 무력(武力)이 맞다.[3]
금관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3남으로 태어났다. 532년 금관국이 신라에게 항복하면서 구형왕과 그의 형제들은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하게 된다.
[4][5] 진흥왕대 한창 신라가 세력을 넓히던 시기 신라의 장군이 되어 550년경 백전노장 이사부의 부관으로서 단양 적성 전투에 참여했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 공략(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에 참여해 군공을 세웠으며, 삼국사기나 단양 신라 적성비에 김무력의 이름이 나온다. 이후 553년에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 새로 신라가 차지한 한강 유역에 설치한 신주(新州) 지역의 도지사격인 초대 군주가 되었고, 나제동맹 결렬의 보복으로 백제의 성왕(백제)이 신라에 쳐들어갔을 때는 신주 국경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해[6]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전사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7] 이후 왕을 잃어 혼란에 빠진 백제군을 크게 무찔러 좌평급 귀족 4명과 군사 29,600여명의 목을 베는 대승리를 거뒀다.
이런 공을 세운 덕분인지 이후 초고속 승진을 한 정황을 여러 기록간의 내용을 비교해서 알 수 있다. 551년 단양 적성비나 553년 7월 삼국사기의 신주 군주로 김무력을 임명할 때 김무력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여섯째 등급인 아찬이었는데, 555년 세워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나 561년 창녕 척경비에서는 3번째 등급인 잡찬으로 관등이 3등급 승진한 상태다. 거의 약 2년만에 3관등 승진인데 신라의 다른 기록을 봐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3단계 승진은 거의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다.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8] 아무튼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창녕 척경비의 561년에도 잡찬이므로 8년만에 3관등 승진이니 이렇게 쳐도 상당히 고속 승진한 것은 맞다.
그 후 신주성주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냈으며, 이러한 발판으로 김무력의 한강유역 쟁취와 관산성 전투의 승리는 신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으며 무력 역시 신흥 무장으로서의 발판을 확보하게 되어 신라 사회의 최고위 인물로 부상되었다.
생몰년도 미상[1]
1. 소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막내) 아들. 노리부(김세종)의 동생. 김서현의 아버지이며,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금관가야의 왕자였으나, 금관가야가 신라에 복속된 후 신라의 장수가 되었다. 골품은 아버지를 따라 진골.[2]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서는 둘째 아들 무력(茂力)으로 돼 있는데 둘째와 셋째 순서에 착오가 있었던 듯. 삼국유사 김유신조에서는 호력(虎力)으로 써 있지만, 이건 삼국유사가 고려시대에 쓴 책이므로 2대 혜종 왕무의 이름을 피휘한 것으로 원래는 무력(武力)이 맞다.[3]
2. 생애
금관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3남으로 태어났다. 532년 금관국이 신라에게 항복하면서 구형왕과 그의 형제들은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하게 된다.
[4][5] 진흥왕대 한창 신라가 세력을 넓히던 시기 신라의 장군이 되어 550년경 백전노장 이사부의 부관으로서 단양 적성 전투에 참여했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 공략(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에 참여해 군공을 세웠으며, 삼국사기나 단양 신라 적성비에 김무력의 이름이 나온다. 이후 553년에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 새로 신라가 차지한 한강 유역에 설치한 신주(新州) 지역의 도지사격인 초대 군주가 되었고, 나제동맹 결렬의 보복으로 백제의 성왕(백제)이 신라에 쳐들어갔을 때는 신주 국경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해[6]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전사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7] 이후 왕을 잃어 혼란에 빠진 백제군을 크게 무찔러 좌평급 귀족 4명과 군사 29,600여명의 목을 베는 대승리를 거뒀다.
이런 공을 세운 덕분인지 이후 초고속 승진을 한 정황을 여러 기록간의 내용을 비교해서 알 수 있다. 551년 단양 적성비나 553년 7월 삼국사기의 신주 군주로 김무력을 임명할 때 김무력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여섯째 등급인 아찬이었는데, 555년 세워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나 561년 창녕 척경비에서는 3번째 등급인 잡찬으로 관등이 3등급 승진한 상태다. 거의 약 2년만에 3관등 승진인데 신라의 다른 기록을 봐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3단계 승진은 거의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다.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8] 아무튼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창녕 척경비의 561년에도 잡찬이므로 8년만에 3관등 승진이니 이렇게 쳐도 상당히 고속 승진한 것은 맞다.
그 후 신주성주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냈으며, 이러한 발판으로 김무력의 한강유역 쟁취와 관산성 전투의 승리는 신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으며 무력 역시 신흥 무장으로서의 발판을 확보하게 되어 신라 사회의 최고위 인물로 부상되었다.
3. 기타
- 한자를 단지 음차해 순수하게 신라 고유어식 이름을 짓거나[9] 불교적 이름을 짓던 당시 대부분의 신라인들과 달리, 그 본인과 아들 김서현, 손자 김유신의 이름은 훈을 고려한 한문식 이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름이 사상적 지향성을 나타낸다는 해석에 따르면 김무력 가문은 일찍부터 유학을 중시하고 유교적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성향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선 그의 첫째 아내가 법흥왕의 왕비 보도부인의 동생 '박씨'라고 하며 둘째 아내가 진흥왕과 사도부인의 딸 '아양공주'라고 나온다. 정사에선 김무력의 아내가 누구인지 나오지 않으나, 김세종의 손녀가 그의 아내라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에서 문무왕이 문명왕후를 소개할 때 구형왕의 아들 김세종의 아들 김솔지의 아들 김서현의 딸이라고 했기 때문. 여기서 일반적으로 김무력의 아들로 여겨지는 김서현을 김솔지의 외손자로 본 것이다. 직계가 아니라 이렇게 표시한 이유는 김수로의 제사를 떠받들기 위해 명목상 왕계 기준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 김무력의 무덤으로 전하는 무덤이 통도사[10] 가 있는 양산 영축산 경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무덤의 이름값 때문인지(...) 세 번이나 도굴을 당했다는 안습의 역사가 있다. 무덤의 위치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속한다.#
[1] 518년 ~ 579년이라는 생몰년도가 떠돌고 있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그의 출생과 사망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532년 항복기사에서 언급된 점을 미뤄보아 최소 532년 이전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2] 단 아무리 같은 진골이라도 일단 신라 입장에서 가야계 신김씨는 굴러들어온 돌이므로, 김춘추를 비롯한 경주 김씨 진골들에 비해서 실질적인 대접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무력 본인을 비롯해 세종, 아들인 김서현, 손자인 김유신 등 가야계 신김씨들이 대대로 큰 공을 세우면서 조금씩 나아진다.[3] 같은 이유로 문무왕은 삼국사기 원문에서는 문호왕으로 표기하고 있다.[4] 참고로 이름의 한자도 흔히 생각하는 그 무력(힘)과 같다(...) [5] 이사람보다 약 200년 후에도 비슷한 사람이 나왔는데 바로 발해의 2대 왕 대무예로 이름부터 그 무예랑 한자까지 같으며 실제로 군사적인 성과를 많이 올린 왕이다. 시호도 무왕이였을 정도.[6] 성왕은 한강의 신주 병력을 간과했던 듯 하다. 신주의 병력을 남쪽으로 보내면 한강 유역은 텅 비기 때문에 당연히 고구려가 신라를 빈집털이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라가 고구려로 오지 말고 백제랑 니들끼리 싸우라고 신라와 불가침 밀약을 맺어둔 상태였으므로 한강이 빈 동안 북방 돌궐 전선에 집중했고 이는 성왕의 패착이 된다.[7] 직접 성왕의 목을 벤 것은 휘하의 비장 도도다.[8] 다만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교과서나 각종 시험 레벨에서는 555년 건립설이 정답이지만 학계에서는 555년설과 561년설, 568년설이 대립하고 있다. 당연히 교과서와 시험에선 정답이 여러 개일 순 없으니 어지간하면 정설 하나만 제시한다. 그리고 진짜로 애매한 사례면 그냥 그 주제로 시험문제를 내지 않고, 내서 논란을 만들면 그건 좋지 않은 출제 예시다. 한 공무원 시험에서 북한산 순수비의 건립년도 문제가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국정교과서에 써 있는 555년이 정답으로 인정됐다. 그러니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555년 건립으로 알고 있는 것이 좋다.[9] 이 때문에 훗날이라면 웬만해선 이름에 안 넣었을 노(奴)나 독(毒) 같은 글자가 음차를 위해 이름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즉 훈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10] 통도사 역시 신라 상대에 창건된 사찰이다.[11] 그것도 요괴의 모습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