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
竹嶺 / Jungn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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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상의 고개이다.
고개 북동쪽에는 소백산이 있는데, 고개 대부분이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한다.
신라 아달라 이사금 때의 죽죽(竹竹)이라는 사람이 닦아서 '죽령'이라 불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1] 이후로도 삼국시대 당시 신라의 북쪽으로 통하는 주요한 길목이자, 낙동강 유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생명선이었다.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장수왕 때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뻗쳐 죽령이 고구려 남쪽-신라 북쪽 국경선이었고, 이는 진흥왕 때 신라가 고구려를 쳐서 빼앗는다. 이 때 죽령 입구에 성을 쌓으면서 만든 비석이 단양 신라 적성비.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죽령 이북의 땅을 찾고야 말겠다"고 달려나갔다가 유시로 유명을 달리했을 만큼 고구려와 신라를 가르는 주요한 경계가 되기도 했다. 나중에 김춘추가 연개소문과 교섭하기 위해 고구려를 찾았을 때도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 땅을 돌려주면 백제를 칠 군사를 빌려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9주 5소경 행정구역을 구분할 때 원신라 영역(현 경상도) 상주와 원고구려 영역 명주, 삭주의 경계선이었다.
과거 영남대로 가운데서 우로의 고비에 속하는 곳으로 한양에서 안동, 경주를 거쳐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로 통했다.
역사적으로도 여러차례 중요한 길목이었으나, 전근대 시절에는 충청도와 경상도를 오가는 고개 중에서, 주로 문경새재와 화령 일대로 교류했기 때문에, 우로에 있으면서, 안습한 신세를 면치 못했다.
조령과 충주를 거쳐 서울과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를 기준으로 그 우로(右路)의 지나는 고개지만, 구한말때 경부선 개통으로 주요 고개가 추풍령으로 넘어가기 전에, 주로 조령과 화령이 경부 간 교통에 적잖은 역할을 했고, 죽령은 고개 자체가 험할 뿐더러, 거의 우회길에 가까웠기 때문에, 한산한 고개였다. 그래도 추풍령보다 선전했는지, 20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죽령 밑자락에 창락(昌樂)이라는 이름의 역참(驛站)이 있어서# 많은 여행객과 물산 등이 머물고 쉬었다 가는 큰 길목이었다고 전하나[2] 구한말 고종의 우정정책 도입과 갑오경장 등으로 역참 제도가 폐지되면서 급속히 쇠락해갔고, 그나마 마필을 끌고 조금이나마 드나들던 길손들마저 일제 말기 중앙선 철도가 개통한 뒤로는 인적이 끊겨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고 전한다.# [3] 그러나 중앙선 철도와 중앙고속도로가 옛 죽령과 거의 같은 구간을 나란히 달리도록 개통되었으므로, 여전히 현대인들도 비록 걸어서 지나지 않을 뿐 죽령 구간을 자기도 모르게 많이 지나가고 있다.
현대에 와서, 죽령을 따라 건설된 5번 국도는 차량들이 별로 없어 한산하다. 풍기, 단양 양쪽 모두 도로가 고개 입구까지만 확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앙고속도로와 중앙선 철도가 해당 고개 밑을 관통하여 건설되었다. 특히 중앙고속도로의 죽령터널은 2012년 3월 3일 현재 대한민국 도로 터널중 두번째로 길다(4,600m)....였지만 계속 경신되어 2019년 기준 6번째가 되었다. 안습... 경부고속도로의 추풍령과 비교되는 점.
죽령터널 개통 전에는 영주, 안동 사람들이 서울을 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가야할 길목이였는데, 구불구불한 산길이라 시간을 매우 잡아먹었다. 터널 개통 전과 개통 후의 서울 도착시간이 거의 1시간 정도 차이 날 정도.. 지금은 정상 즈음에 주막이 자리하여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있다.
백두대간 종주나 소백산 종주를 하는 사람들이 주로 죽령 정상을 시종점으로 삼는다. 그래서 단양과 영주 양쪽에서 죽령행 버스가 운행중이긴 한데 차 시간이 묘하다. 차라리 택시를 타던가 버스가 조금 더 자주 다니는 희방사 쪽으로 올라가던가 하는게 낫다.
죽령터널에서 워낙 과속이 많이 일어나다 보니 현재는 구간단속제가 도입된 상태이다.
죽령이 전근대시절 주요 교통로 였던 조령이나, 화령에 비해 한산한 이유가 고개가 험한 것과 우회길이라는 것이 주요 원인이지만, 과거 제도가 시행될 당시에 '''수험자들은 죽령을 경유하지 않았다.''' 죽령 건너면 죽죽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추풍령도 똑같다.
죽령과 관련된 설화로 다자구 할머니가 있다. 죽령에 산적떼가 창궐하여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관군들이 이들을 소탕하고자 해도 죽령이 워낙 험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초라한 행색의 노파와 여자아이가 관아에 찾아와 묘안을 제시하는데, 그 묘안인 즉슨 기회를 봤다가 산적들이 깊은 잠에 들었을 때 기습하는 것. '더자구야'는 산적들이 아직 보초를 서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뜻이고, '다자구야'는 산적들이 잠을 '''다 자고''' 있으니 빨리 기습하라는 뜻의 암호를 정해 놓았다. 그리고 죽령에 가서 '다자구야 더자구야'를 반복적으로 외쳤다.
이렇게 '다자구야 더자구야'를 죽령 산중에서 매번 외치는 노파의 이야기가 산적떼의 귀에 들어가 이를 수상히 여긴 산적 두목이 노파를 잡아다가 물으니 '다자구'는 이 여자아이의 아버지고 '더자구'는 오래전 잃어버린 나의 아들인데. 애타게 찾던 차에 여기서 산적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둘러대었다. 이에 두목은 노파를 불쌍히 여겨 노파와 여자아이가 식모 일이라도 하게 했다. 며칠 후 두목의 생일이 되어 술과 여러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잔치를 벌였다. 그 날 밤 술기운에 모두들 완전히 곯아떨어지자 이 때다 싶어 "다자구야 다자구야"를 외치니 숨어서 기다리던 관군들이 별안간 습격하여 산적들은 꼼짝없이 붙잡혔다. 그 후 노파는 어디론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 노파가 죽령산신이었음을 깨닫고 '다자구 할머니'라 부르며 해마다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 위치한 죽령산신당이 바로 이 설화와 관련되어 있다.
죽령옛길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갯길로 문경새재, 추풍령과 더불어 영남과 충청도를 이어주는 3대 관문 중 하나였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에 죽령 길이 열렸다"는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 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오랜 역사를 지닌 옛길이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 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던 국경지역으로서 삼국의 군사가 불꽃 튀는 전투를 벌이는 격전장이었다. 소백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죽령옛길은 우리가 소중하게 지키고 보존해나가야 할 중요한 역사 자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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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상의 고개이다.
고개 북동쪽에는 소백산이 있는데, 고개 대부분이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한다.
신라 아달라 이사금 때의 죽죽(竹竹)이라는 사람이 닦아서 '죽령'이라 불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1] 이후로도 삼국시대 당시 신라의 북쪽으로 통하는 주요한 길목이자, 낙동강 유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생명선이었다.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장수왕 때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뻗쳐 죽령이 고구려 남쪽-신라 북쪽 국경선이었고, 이는 진흥왕 때 신라가 고구려를 쳐서 빼앗는다. 이 때 죽령 입구에 성을 쌓으면서 만든 비석이 단양 신라 적성비.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죽령 이북의 땅을 찾고야 말겠다"고 달려나갔다가 유시로 유명을 달리했을 만큼 고구려와 신라를 가르는 주요한 경계가 되기도 했다. 나중에 김춘추가 연개소문과 교섭하기 위해 고구려를 찾았을 때도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 땅을 돌려주면 백제를 칠 군사를 빌려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9주 5소경 행정구역을 구분할 때 원신라 영역(현 경상도) 상주와 원고구려 영역 명주, 삭주의 경계선이었다.
과거 영남대로 가운데서 우로의 고비에 속하는 곳으로 한양에서 안동, 경주를 거쳐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로 통했다.
역사적으로도 여러차례 중요한 길목이었으나, 전근대 시절에는 충청도와 경상도를 오가는 고개 중에서, 주로 문경새재와 화령 일대로 교류했기 때문에, 우로에 있으면서, 안습한 신세를 면치 못했다.
2. 교통
조령과 충주를 거쳐 서울과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를 기준으로 그 우로(右路)의 지나는 고개지만, 구한말때 경부선 개통으로 주요 고개가 추풍령으로 넘어가기 전에, 주로 조령과 화령이 경부 간 교통에 적잖은 역할을 했고, 죽령은 고개 자체가 험할 뿐더러, 거의 우회길에 가까웠기 때문에, 한산한 고개였다. 그래도 추풍령보다 선전했는지, 20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죽령 밑자락에 창락(昌樂)이라는 이름의 역참(驛站)이 있어서# 많은 여행객과 물산 등이 머물고 쉬었다 가는 큰 길목이었다고 전하나[2] 구한말 고종의 우정정책 도입과 갑오경장 등으로 역참 제도가 폐지되면서 급속히 쇠락해갔고, 그나마 마필을 끌고 조금이나마 드나들던 길손들마저 일제 말기 중앙선 철도가 개통한 뒤로는 인적이 끊겨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고 전한다.# [3] 그러나 중앙선 철도와 중앙고속도로가 옛 죽령과 거의 같은 구간을 나란히 달리도록 개통되었으므로, 여전히 현대인들도 비록 걸어서 지나지 않을 뿐 죽령 구간을 자기도 모르게 많이 지나가고 있다.
현대에 와서, 죽령을 따라 건설된 5번 국도는 차량들이 별로 없어 한산하다. 풍기, 단양 양쪽 모두 도로가 고개 입구까지만 확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앙고속도로와 중앙선 철도가 해당 고개 밑을 관통하여 건설되었다. 특히 중앙고속도로의 죽령터널은 2012년 3월 3일 현재 대한민국 도로 터널중 두번째로 길다(4,600m)....였지만 계속 경신되어 2019년 기준 6번째가 되었다. 안습... 경부고속도로의 추풍령과 비교되는 점.
죽령터널 개통 전에는 영주, 안동 사람들이 서울을 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가야할 길목이였는데, 구불구불한 산길이라 시간을 매우 잡아먹었다. 터널 개통 전과 개통 후의 서울 도착시간이 거의 1시간 정도 차이 날 정도.. 지금은 정상 즈음에 주막이 자리하여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있다.
백두대간 종주나 소백산 종주를 하는 사람들이 주로 죽령 정상을 시종점으로 삼는다. 그래서 단양과 영주 양쪽에서 죽령행 버스가 운행중이긴 한데 차 시간이 묘하다. 차라리 택시를 타던가 버스가 조금 더 자주 다니는 희방사 쪽으로 올라가던가 하는게 낫다.
죽령터널에서 워낙 과속이 많이 일어나다 보니 현재는 구간단속제가 도입된 상태이다.
죽령이 전근대시절 주요 교통로 였던 조령이나, 화령에 비해 한산한 이유가 고개가 험한 것과 우회길이라는 것이 주요 원인이지만, 과거 제도가 시행될 당시에 '''수험자들은 죽령을 경유하지 않았다.''' 죽령 건너면 죽죽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추풍령도 똑같다.
3. 관련 설화
죽령과 관련된 설화로 다자구 할머니가 있다. 죽령에 산적떼가 창궐하여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관군들이 이들을 소탕하고자 해도 죽령이 워낙 험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초라한 행색의 노파와 여자아이가 관아에 찾아와 묘안을 제시하는데, 그 묘안인 즉슨 기회를 봤다가 산적들이 깊은 잠에 들었을 때 기습하는 것. '더자구야'는 산적들이 아직 보초를 서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뜻이고, '다자구야'는 산적들이 잠을 '''다 자고''' 있으니 빨리 기습하라는 뜻의 암호를 정해 놓았다. 그리고 죽령에 가서 '다자구야 더자구야'를 반복적으로 외쳤다.
이렇게 '다자구야 더자구야'를 죽령 산중에서 매번 외치는 노파의 이야기가 산적떼의 귀에 들어가 이를 수상히 여긴 산적 두목이 노파를 잡아다가 물으니 '다자구'는 이 여자아이의 아버지고 '더자구'는 오래전 잃어버린 나의 아들인데. 애타게 찾던 차에 여기서 산적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둘러대었다. 이에 두목은 노파를 불쌍히 여겨 노파와 여자아이가 식모 일이라도 하게 했다. 며칠 후 두목의 생일이 되어 술과 여러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잔치를 벌였다. 그 날 밤 술기운에 모두들 완전히 곯아떨어지자 이 때다 싶어 "다자구야 다자구야"를 외치니 숨어서 기다리던 관군들이 별안간 습격하여 산적들은 꼼짝없이 붙잡혔다. 그 후 노파는 어디론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 노파가 죽령산신이었음을 깨닫고 '다자구 할머니'라 부르며 해마다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 위치한 죽령산신당이 바로 이 설화와 관련되어 있다.
4. 죽령옛길 유래
죽령옛길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갯길로 문경새재, 추풍령과 더불어 영남과 충청도를 이어주는 3대 관문 중 하나였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에 죽령 길이 열렸다"는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 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오랜 역사를 지닌 옛길이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 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던 국경지역으로서 삼국의 군사가 불꽃 튀는 전투를 벌이는 격전장이었다. 소백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죽령옛길은 우리가 소중하게 지키고 보존해나가야 할 중요한 역사 자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