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공
(1093 ~ 1161)
1. 개요
고려의 왕족. 이름은 효(侾), 자는 경천(敬天)이다. 숙종과 명의태후의 5남으로 예종의 동복동생이다. 정직하고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로 어려서부터 충효의 정성이 있었으며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에 뜻을 뒀다.
2. 생애
어려서 이름을 받기 전에는 연덕궁왕자(延德宮王子)의 궁호로 불린다. 숙종과 명의태후는 대원공이 아들 중에서 효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해 대원공이 10세가 되던 해인 숙종 7년(1102) 人(亻)자에 孝자를 더해 효(侾)라는 이름을 내린다. 3년 뒤인 숙종 10년(1105) 부왕이 승하하고 형 예종이 즉위하는데, 아직 어렸던 대원공은 모후의 거처에서 지내게 된다.
예종 원년(1106) '봉의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수사도 겸 상서령 상주국 대원후 식읍 2천호 식실봉 3백호'에 오른다. 예종 2년(1107) 윤관, 오연총 등이 원수가 되어 여진 정벌에 나선 때 대원공은 수도에 머무르며 왕성을 지키라는 명을 받든다. 예종 3년(1108) 검교태보에 오른다. 예종 5년(1110) 책문을 받들어 '봉의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보 수사도 겸 상서령 상주국 대원후 식읍 3천호 식실봉 3백호'에 오르며 같은 해에 또 광효공신 수태위가 더해진다. 대원공은 표문을 올려 사양하지만 왕이 허락하지 않는다.
예종 7년(1112) 모후가 승하하니 이듬해 명복궁사의 토지와 노비 등을 상속받는다. 또 그 다음해인 예종 9년(1114) 11월 태묘에 명의태후의 신주를 합사하는데 대원공은 아헌(亞獻)이 돼 두 번째로 제사술을 따른다. 같은 해 12월 수인공신호가 더해지고 공작으로 승진하며 식읍은 3천 5백호, 식실봉은 3백 5십호에 이른다.
예종 10년(1115) 3월 양간공(襄簡公)[1] 의 장녀 이씨를 공비로 맞으며 왕명을 받은 최홍재를 통해 비단과 금은그릇, 말 등을 하사받는다. 왕효묘지명에 따르면 같은 해 7월에 검교태부가 더해지고 작위는 상공(上公)으로 한 단계 더 오르며 대읍(大邑)이 식읍에 더해진다.
예종 17년(1122) 정월 수태보에 오른다. 교서에 따르면 왕이 동생을 총애하는 뜻에서 작위는 오등작의 으뜽이지만 삼공의 지위에는 이르지 못했기에 높은 관직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4월에 예종이 죽고 조카 인종이 즉위한 뒤에는 찬화공신호에 식읍 4천호, 식실봉 5백호에 또 검교태사로 승진한다.
인종 즉위 이후 외척 이자겸이 권세를 잡은 뒤로는 영남 지방으로 유배된다.[2] 대원공은 이자겸 축출 후 왕의 소환으로 인종 7년(1129)에서야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봉순동덕수절찬화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겸 상서령 상주국 식읍 3천호 식실봉 4백호'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새 집과 금은그릇, 비단, 말 따위를 받는다. 인종 11년(1133) 공비 이씨와 사별한다.
대원공은 불교를 믿으면서도 도교에도 뜻을 두고 또 유교의 인의를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유불선 각각에 관한 글을 썼으며 당시 흥왕사(興王寺)의 교장보(敎藏寶), 도교 사원인 복원궁(福源宮), 한림원이라고도 부르는 서적점(書籍店) 등에 붙는다.
인종, 의종 재위 중 공신호와 식읍이 계속 더해져 최종적으로는 '봉의동덕광효수인찬화봉순수절수의좌리보정려익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사 겸 상서령 상주국 대원공 식읍 4천호 식실봉 7백호'에 이른다. 의종 11년(1161) 초 노환으로 죽으며 광제사(廣濟寺)에 빈소가 마련된다. 장평공(莊平公)의 시호를 받았으며 의룡산 동쪽 기슭에 매장된다. 아들로는 강양후 왕감이 있고, 손녀는 의종의 아들인 효령태자의 태자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