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의정서

 



'''언어별 공식 명칭'''
'''한국어'''
한일의정서 (韓日議定書)
'''일본어'''
日韓議定書(にっかんぎていしょ
1. 개요
2. 배경
3. 내용
4. 영향


1. 개요


'''한일의정서'''는 1904년[1] 2월 23일 일본 제국대한제국과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전제로 하여 체결한 외교 문서이다.
사실상 일본 제국대한제국세력권에 넣었음을 확인하는 조약이자 본격적인 일본 제국의 한반도 식민지화 작업이 시작된 조약이다.

2. 배경


1904년 초 대한제국을 병합하려는 일본과 여순 대련항을 조차받고 만주에 주둔하던 러시아만주와 대한제국을 두고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양국의 전쟁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중립을 선언하였다. 이는 10년 전 청나라과 일본 간의 전쟁에서 양국의 전쟁터가 되어 피해를 입었던(청일전쟁) 대한제국의 조치였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원산과 거제에 해군을 주둔시켰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갈등이 고조되자 국교를 단절하고(1904년 2월 6일), 1904년 2월 8일 여순항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기습공격하여 전함 2척을 대파하였다. 다음 날은 인천 제물포항을 공격해 러시아 함선 2척을 침몰시키고 인천과 서울에 주둔하였다. 그리곤 다음 날인 2월 10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러일전쟁 1904년 2월 8일). 그러자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브는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서울을 빠져나갔다(2월 12일).
사실상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일본 공사 하야시는 일본군 제12사단장 이노우에와 함께 공수·조일을 앞세운 한일 간의 의정서 체결을 강압하여 왔다. 그러는 한편, 반일·친러파였던 탁지부 대신 겸 내장원경 이용익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고, 그 밖에 일본에 반대하던 보부상의 중심 인물 길영수 육군 참장 이학균, 육군 참령 현상건 등을 감시 조처하였다. 대외 중립 유지가 어려움을 인식한 대한제국은 하는 수 없이 외부 대신 이지용[2]을 내세워 일본 공사 하야시와 양국 간 협약을 체결하였다(1904년 2월 23일). 이 협약은 '한일의정서'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3. 내용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외부대신 임시서리 육군참장(外部大臣臨時署理陸軍參將) 이지용(李址鎔)과 대일본제국 황제 폐하의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는 각각 상당한 위임을 받고 다음의 조목을 협정한다.
제1조 한일 양국 사이의 항구적이고 변함없는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東洋)의 평화를 확고히 이룩하기 위하여 대한 제국 정부는 대일본 제국 정부를 확고히 믿고 '''시정(施政)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
제2조 대일본 제국 정부는 대한 제국 황실을 확실한 친선과 우의로 안전하고 편하게 한다.
제3조 대일본 제국 정부는 대한 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 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 제국 정부는 속히 정황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 제국 정부는 위 대일본 제국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한다. 대일본 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
제5조 대한 제국 정부와 대일본 제국 정부는 상호간에 승인을 거치지 않고 뒷날 본 협정 취지에 어긋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을 수 없다.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되는 미비한 세부 조항은 대일본 제국 대표자와 대한 제국 외부 대신 간에 정황에 따라 협정한다.
광무(光武) 8년 2월 23일
외부 대신 임시 서리 육군 참장 이지용(李址鎔)
메이지(明治) 37년 2월 23일
특명 전권 공사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
전체적으로 대한제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대 전제를 내세우고, 이를 빙자하여 일본은 '''한국의 영토를 전략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하여''' 러 - 일 전쟁에 대비하였고, 국가 통치(시정)에 있어서 일본의 충고를 받도록 하였다. 이는 일본이 러 - 일 전쟁 시에 한국을 중립이 아닌 확실한 우군으로 끌어들여 전승 전략을 세움과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한국을 침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4. 영향


이 의정서가 같은 해 3월 8일자 관보에 실리자 국민의 비난과 반대가 심했다. 이는 언론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정부의 처사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드디어는 의정서 체결 당사자인 외부 대신 서리 이지용과 동 참사관인 통역 구완희를 매국노로 규탄, 그들의 집에 폭탄이 던져지는 등의 극한 행동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를 한·일 친선 대사로 파견하여 한·일 친선을 강조하고 무력 시위로 민중 저항을 진정시켰다. 거기에 한국 정부는 이지용을 보빙사로 일본에 파견하여 한·일 친선의 분위기 조성에 보조를 맞추었다.
이후 대한제국은 5월 18일자 조칙으로 한 - 러 간 체결되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 양도하였던 이권도 모두 폐기한다고 선언하였다. 사실상 러시아 세력이 한국에서 축출되는 순간인 동시에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종속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러일전쟁은 한반도 북쪽 만주에서 계속 진행된다.
이 모든 사태가 발생할 때까지 고종은 이것을 막기는커녕 모든 것을 각료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사실상 방치하고 있었다. 사실 이 조약은 러일 전쟁 극초기에 맺어졌기 때문에, 어차피 '''"상황은 러일 전쟁이 (당시 예상으로는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면 바뀔 것이다"'''라고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당시 대부분의 예상대로 러일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 혹은 러시아 우세로라도 끝났으면 한일의정서고 고문이고 뭐고 한방에 다 날아간다.[3] 물론 실제로 조약을 체결했던 이지용처럼 한참 전에 친일로 넘어간 사람도 있고.
일본은 이 의정서를 근거로 한국에서의 군사 활동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됐고 여러 이권을 점유하였다. 또한 한국의 통신 기관을 군용으로 접수하고, 경부·경의선 철도 부설권도 일본 군용으로 넘겨 받았다. 6월 4일에는 <한-일 양국인민 어로 구역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여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서해안 어업권을 확보하였다.
한마디로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1902년 영국과 일본이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설정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 동시에 동아시아의 이권을 함께 분할하려고 영일동맹까지 체결한 상황에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우위권 주장은 이미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의정서 1조에 근거하여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면서 서서히 보호국화에 다가서게 된다.

[1] 광무 8년[2] 이 인물은 후에 을사늑약에서도 찬성 쪽 입장에 선다.[3] 역사상 비슷한 사례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당시 블라디미르 레닌 등 볼셰비키 수뇌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