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중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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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대한제국 시기
2.2. 일제강점기
2.3. 해방 이후 ~ 현재
3. 관람
4. 복원 논란


1. 개요


德壽宮 重眀殿[1]
덕수궁의 별전(別殿)이다. 대지 727평, 규모 236평이며 덕수궁 본궁과는 돌담벽 사이로 떨어져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한 장소이다. 즉, 의 출발점인 비극의 장소이다.'''

2. 역사



2.1. 대한제국 시기


원래 주한 외국 선교사들의 숙소로 사용한 곳으로 덕수궁 궁역(宮域)이 아니었다. 1897년 대한제국 정부에서 부지를 매입하여 덕수궁 영역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기존의 숙소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서양식 도서관인 수옥헌(漱玉軒)을 지었다. 이 때 미국인 건축기사 다이가 설계감리를 하였다고 한다. 1901년 수옥헌이 화재로 소실되자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Sabatin)의 설계감리하에 2층 벽돌건물로 재건하였다.
1904년 덕수궁 본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고종이 이 곳에서 기거하였다. 이 때 수옥헌에서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을사오적을사조약을 이 곳에서 강제체결하였다.

2.2.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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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쇼고가 지은 《덕수궁사》에 실린 중명전 모습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덕수궁 궁역 축소화에 따라 덕수궁 궁역에서 분리당했다. 경성구락부가 인수하여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이 되었다. 1925년에는 조리실의 화재사고로 외벽을 제외하고 전부 불탔다가 이후 재건하였다.

2.3. 해방 이후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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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이철원이 편찬한 《왕궁사》에 실린 중명전 모습.
복원 이전 일반 회사 건물로 쓰이던 시절의 중명전 모습.
1945년 해방 이후에는 국가가 소유 및 관리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에는 서울을 함락한 북한군과 공산당이 사용했다가 수복 이후 다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소유하였다. 1963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 귀국한 영친왕이방자 부부에게 중명전 사용권을 이양하여 영친왕 부부가 소유했다가 영친왕이 사망한 이후 다시 민간에게 위탁, 매각하였다. 그러면서 점차 역사성을 상실하며 일반점포로 전락하였다.
1983년에 서울특별시청에서 시장령에 따라 중명전을 인수하여 서울시 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하였고[2] 2003년에 정동극장이 인수하였지만, 앞뜰이 주차장으로 쓰이고 건물 지하는 폐건물마냥 방치된 모습이 2006년 MBC 느낌표 - 위대한 유산 74434에서 방영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후 2007년 중명전의 고증을 통한 결과에 따라 문화재청이 소유하면서 국가 문화재로 승격시켰고 2007년 2월에 사적 124호 지정으로 덕수궁 궁역으로 재편입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시기의 모습대로 복원해 2010년 8월 일반에 개방하였다. 2016년 8월부터 오래 된 시설을 보수하고 20세기 초 권역의 평면도를 검토해 당시 지반 높이를 반영해 석축과 계단을 복원하여 11개월의 공사 끝에 2017년 7월 다시 일반에 공개하였다.

3. 관람


현재 건물은 을사조약 및 대한제국 국권회복을 위한 전시관으로 사용한다. 1층에 제1실 ‘덕수궁과 중명전’, 제2실 ‘을사조약의 현장’, 제3실 ‘을사조약 전후의 대한제국’, 제4실 ‘대한제국의 특사들’ 등 총 4개 실로 전시실을 구성하였다. 2층에는 고종이 외국 사신들을 맞았다는 알현실이 있다. 같은 층에 문화유산 국민신탁 사무실도 같이 위치해있어 개방을 안했지만, 2017년 말부터 알현실에서 특별전을 열어 개방한다.
1전시실에서는 덕수궁과 정동 일대를 축소 모형으로 제작하고 그 위에 영상을 투사하여 개항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명전과 덕수궁 권역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하였다. 2전시실에서는 당시 의복을 고증해 입힌 극사실 인물모형들을 사용해 을사조약 체결장면을 재현함으로써 체결 현장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하였다. 3전시실에서는 늑약 체결 전후로 숨가쁘게 돌아가던 국제정세와 국내외 조약 체결 반대의 움직임을, 4전시실에서는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대한제국 특사들의 활동을 각종 영상으로 재구성하였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관람과 관련한 더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관리소로 문의하면 안내받을 수 있다. 안내실 전화는 02-751-0734.출처.

4. 복원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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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명전을 복원하면서 고증을 잘못했다는 논란이 있다. 근대사료 연구자인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016년 7월 25일 한겨레에 1905년 당시 미국에서 출간한 러일전쟁 사진집에 실린, 당시 미국공사관 마당에 도열한 경비병들의 모습과 그 뒤로 보이는 중명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하였다. 사진을 보면 중명전 건물 정면 가운데 부분에 1층 현관과 2층 베란다까지 함께 튀어나온 포치[3]가 있다.[4] 그러나 현재 복원한 중명전은 1층 현관만 튀어나와 있고, 2층 부분은 다른 면의 테라스와 같이 돌출하지 않은 구조라 복원을 잘못했다는 것이다.
2010년 문화재청이 대한제국 시기 사료들을 토대로 복원했으나 2층과 벽면 부위 등의 고증이 불명확하다는 지적을 계속 받아왔는데 이 사진 자료의 공개로 확실히 밝혀진 셈. 당시 복원공사 자문을 맡았던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는 “구한말 건물 정면을 근접해 찍은 사진은 처음 본다. 복원 당시 건물 정면 원형에 대한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아 벽체의 원형을 추정하면서 복원했던 만큼 이번에 발굴된 사진은 앞으로 건물 지붕과 정면 등을 재복원할 때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문화재청 측은 "당장 재복원 방침을 정하기는 어려우며 앞으로 전문가 자문회의를 통해 원형 사진을 검토해 재복원 여부 등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출처. 그러나 2024-04-19 09:48:49 현재까지 원형 복원을 하지 않았고 관련 계획도 알려진 게 없다.(...)

[1] 현판을 자세히보면 '''명'의 왼쪽 부분이 눈 목(目)자로 되어 있다.[2] 2007년 국가 문화재 승격에 따라 해제되었다.[3] Porch. 비를 피하기 위해 돌출된 구조.[4] 윗 사진에서 빨간 원으로 표시되어 있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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