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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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겨레신문(주)에서 발행하는 조간 일간신문의 이름. 본사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에 있다. 기본 사시는 '''민주, 민족, 통일'''. 조선일보의 보수주의와 중앙일보의 탈이념화와는 달리 진보주의를 추구하는 언론이다. 1980년대 대학 운동권과 시민단체들에 우호적인 해직 기자들이 모여 창간을 주도하였다. 그래서 한겨레는 좌익의 입장을 대변하는 스피커로서 한국언론계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대한민국 중앙 종합일간지 중에서는 최초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단행하였으며, 마찬가지로 한글전용론을 지지한다. 경향신문, 오마이뉴스와 함께 진보 성향의 언론으로 분류되고 있다. 외신인 더 가디언에서는 2012년에 중도좌파 언론으로 보도한 바 있다.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2015년 이후 한겨레미디어의 사시(社是)
발행부수는 일일 20만 부 이상으로, 중앙일간지 순위로만 놓고 보면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에 이어 4위이다. 다만 3위인 중앙일보와의 격차가 3배 정도 난다.[2]
간행중인 잡지는 한겨레21이 있다. 씨네21도 한겨레에서 펴내다가 현재는 분사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겨례 산하에 있는 자회사다. 사실 한겨레 신문사는 본점인 신문사보다는 분점격인 자매지들이 더 잘나가는 기이한 형태를 띄고 있다. 과거 운영했던 씨네21은 영화지 시장의 조선일보라는 수식어까지 붙을 정도로 상당한 위치 겸 점유율을 차지했다. 사실 영화지 시장이란 것 자체가 좀 마이너하다만. 한국 신문 시장이 과도한 판촉 경쟁으로 팔릴때마다 적자나는 점을 감안하면# 그나마 선전한다고 할 수 있는 편. 만화지 팝툰은 2009년부터 만화 판권을 웹하드에 배급하는 등 온갖 시도를 했으나, 적자경영 끝에 결국 망해서 접었다.
2. 사옥
서울특별시 마포구 효창목길 6에 위치해 있다. 공덕역에서 만리재로를 따라 조금 올라오면 보이는 아파트 바로 옆에 있다.
1991년 건립된 사옥으로, 건축가 조건영이 디자인했다고 한다.[3] 준공 당시 여러 건축상을 받기도 했다고. 사진에서 보이는 초록색 기둥은 종종 도색이 바뀌기도 한다. 현재는 붉은 계열 색상으로 도색되어 있다. 편의시설로는 KEB하나은행이 있으며, 건물 일부는 공공 쉼터로 개방해 놓았다. 사옥 옥상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간혹 디너파티 같은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3. 역사
3.1. 설립 배경
1974년 유신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에도 정권의 통제로 언론은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당시 동아일보의 기자들[4] 중 일부는 이에 반발하며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한다. 이 선언 이후 기업들이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동아일보에 광고를 취소, 그래서 백지로 신문을 찍었다. 이를 본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조그맣게 동아일보에 응원광고를 내었고, 동아일보 내의 일부 기자들은 이에 큰 감격을 받아 적극적으로 자유 언론 투쟁을 벌이다가 해고되었다.
해고당한 기자 130여명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대부분 다른 언론사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시장에서 물건을 팔거나 육체노동을 하고, 일부는 사회과학출판사를 차리기도 했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신문사 앞에서 침묵시위를 하는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이 때 생활고가 아주 심했다고 한다. 결국 긴급조치 위반으로 상당수가 투옥되었으며, 1980년 여름 언론계 정화조치 때도 또 한번의 대규모 강제해직 사태가 일어나 또다시 해직 언론인들이 늘어났다. 이들이 훗날 한겨레의 창간 멤버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겨레가 운동권과 노조에 우호적 성향을 띄는 한 이유로 해석되기도 한다.
세월이 지나 1987년 6월 항쟁 및 6.29선언을 거쳐 본격적인 민주주의의 시대가 열려 독재정권 당시 해직된 언론인들이 서서히 복직되었으나, 이미 독재정권에 길들여진 기성 언론인들의 정신적 타락이 심각했다. 이 현상은 민주화 시기 일부 해직 기자들의 복직 때 나타났는데, 1980년 당시 언론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언론인들이 어느새 기득권자가 되어 기득권 사수에 골몰하며 왕따를 시키는 추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해직기자 출신들은 민주화 뒤에도 '소수파'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해직 기자였던 김종배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모든 언론인들이 썩은 건 아니었다. 1988년 6~7월 부산일보 노조의 '편집국장 3인 추천제 관철 투쟁'과 같은 언론사 내부 민주화 투쟁이 있었지만 높은 임금으로 돈독이 오른 유력 언론사 기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찻잔 속의 태풍'이었을 뿐이었다. 그 증거로 강명구 교수는 유력 언론사 기자들이 고임금으로 인해 지배집단의 구성원으로 흡수되었다면서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언론사로 되돌아 왔을 때 우리는 여러모로 덧칠돼 있었다. 부패 언론인으로, 무능 언론인으로, 또는 특정 정치인에 줄선 정치 언론인으로 포장돼 있었다. 80년의 살육은 어느새 신군부의 강변대로 언론계 정화로 분장되어 있었다.
1988년 6월 중앙 6대 일간지의 기자 초임이 월 급여 50만 원에 70만 원 선이고 연봉은 9백만 원에서 1천 2백만 원에 이른다. 이는 우리나라 대졸 이상 사무직, 전문 기술직 종사자들의 평균 임금의 2배에 이르는 수준이며 대학교수와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 대학교수가 대학 졸업 후 대개 10년 내외가 걸려야만 그러한 임금 수준에 도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기자들의 임금 수준이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원 출처: <한국 언론전문직의 사회학> - 강명구 저. 나남. 1993. p190.
3.2. 설립 이후
대선 전 한 달 동안 10억 정도를 모았었죠? 그러던 것이 오히려 대선이 끝난 이후 두 달 만에 40억 가까이 쏟아져 들어왔으니까. 참 그때의 감격이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어떤 날은 하루에 2억씩 들어왔다니까요?''' 이건 뭐 농담이지만 그때 우리까지 그런 얘기도 했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한 2백억 모으겠다고 할 걸... (웃음) 실제로 그 때의 열기로 봐서 50억에서 마감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2백억까지도 단숨에 달려갔을 거예요! 그때 우리 국민들, 참 대단했습니다.
당시 창간기금 모금 총 책임자였던 이병주의 증언. 원 출처: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 한겨레신문 10년의 이야기> - 이민우, 심산 저. 한겨레신문사. 1998. p65~66
위와 같은 정치/사회적 변화 속에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리영희 교수와 임채경 창작과비평사 편집고문, 이병주 동아투위 위원장, 정태기 조선투위 위원장 등 네 분이 1987년 여름부터 구상을 하여 과거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을 중심으로 기자들이 다시 뭉치고, 모자란 자본은 6만 7300여 국민들의 자발적 후원 형식인 국민주주제로 채워졌다. 창간의 움직임은 그해 10월부터 낸 창간준비 소식 및 모금운동 광고의 형태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광고에 실린 카피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는 1987년 대선에 야권이 패배한 뒤 실의에 젖어 있던 국민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어리석은 꿈'에 합류한 사람들이 있었다. 월급은 반으로 줄고 일은 두 배로 늘어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 발로 찾아온 정신 나간 사람들이었다. 촌지와 맞바꾼 자존심을 안주 삼아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현실을 개탄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언론과 세상이 본래 그럴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에 대하여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신문만 만들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원 출처: 위의 책 p8~9 프롤로그 중에서.
이렇게 모인 50억원의 자본금[5] 으로 1987년 12월 15일에 신문사를 차렸고, 1988년 5월 15일 1호가 나왔으며 기존의 활판인쇄 대신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신문편집 시스템이었던 '2세대 CTS'를 도입하였으며 한 사람의 주식을 1% 이상 소유하지 못하게 하여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신문을 지향하였다.
(한겨레 신문 창간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보기
한겨레는 1988년 가로쓰기와 순한글표기를 시작함으로써 1947년 호남신문, 1985년 스포츠서울에 이어 대한민국 일간지로는 3번째, 종합일간지로는 두 번째로 가로쓰기 지면을 선보였다.[6] 종합일간지가 대대적으로 가로쓰기를 시작한 것은 한참 후인 1995년 중앙일보의 가로쓰기 도입 이후로 평가되나[7] 큰 영향력을 끼친건 아니더라도 가로쓰기 전용을 시도한 초창기 신문임은 사실이다.[8] 이때 제호 표기도 한글로 했는데 사실 한글 제호는 한국일보가 1954년 창간때부터 이미 해오던거다.
또 납활자가 주류였던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신문편집 시스템이었던 '2세대 CTS'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 이 시스템은 원고를 컴퓨터로 입력한 뒤 손으로 기사를 이어 붙이는 원시적인 1세대와는 달리 교정, 면 배치, 출력까지 컴퓨터로 처리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사진, 광고, 기사 컷(큰 제목) 등은 사람 손을 거쳐야 했다.
세계 언론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주를 통해 자본을 마련한 언론이기도 하다. 2만 7천여명 주주가 모아준 50억원의 성금으로 설립되었으며 모금에 참여한 국민들에게 한겨레신문사의 주식을 배정해 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게 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때문에 회장이나 이사회가 없고 늘 1인 1주로 처리된다.
다른 신문들이 한자병기를 하는 것과는 달리 한겨레신문은 순 100% 한글로만 사용하며 한자로 표기하는 일이 없다. 심지어 영어도 쓰지 않는다. 예를 들어 KBS를 부를 때 다른 모든 신문은 그냥 KBS라고 쓰지만 한겨레신문에서는 '한국방송'이라고 쓴다.
초대 사장은 동아일보에서 퇴사한 당시 편집장이었던 청암 송건호. 이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 행각을 공개하면서 인기가 상승한다.[9] 그러나 한겨레의 출발은 순탄치 못하였는데, 창간 이후부터 노태우 정권에게 눈총을 받아 청와대 기자실이 비좁다는 이유 아닌 이유로 청와대 출입을 거부당했는데, 이는 1991년 춘추관 완공 때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1989년 9월 초 안기부가 본지 독자들의 성향을 파악한다며 구독에 간접적 압력을 주기도 했다. #
한겨레 역사상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은 것은 1989년 4월 14일 리영희 논설고문이 방북취재 혐의로 안기부에 구속된 사건부터였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 하에서 방북취재 계획을 빌미로 한겨레를 권력에 굴복시키려 했으나, 이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또 7월 12일에는 서경원 방북 사건 당시 윤재걸 기자가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기부 요원들과 전투경찰에 의해 한겨레 편집국이 압수수색되었다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 국민 성금이 1백억 원 이상이나 몰려들어 한겨레는 그 모금을 바탕으로 일약 중앙지로서의 지위로 올라섰다.
다만 창간 이후로도 사세를 크게 넓히지는 못해서 당시 4대 중앙일간지였던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에게 발행부수에 있어서 크게 밀렸는데 이는 1990년대 당시에는 동아일보가 2010년대 경향신문의 역할을 대신해 주었고, 지면수도 많은 데다가 쌓아올린 노하우를 무시할수없다보니까 당대 진보 독자들은 동아일보를 구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199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신문에 한자를 섞어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한자를 많이 아는것이 교양의 척도였던 시절인지라 상대적으로 없어보이기까지 했다는 점도 강했다.
2001년 '심층해부 언론권력' 시리즈로 조선, 동아일보 등 족벌언론의 '무한권력'과 '추악한 과거'를 고발했다.# 이로 인해 조선, 동아일보에게 각각 70억원, 10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당했으나 2008년 2월 14일 대법원에서 조선, 동아일보의 청구를 기각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특히 2심 재판부는 "한겨레의 보도·만평은 국내 중요 언론사의 과거를 재조명함으로써 비대화되는 언론권력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권-언 유착과 친일 행적을 다루고 있어 보도의 공익성이 인정된다"고 할 정도였다.
언론사로는 처음으로 신문에 쓰는 글꼴인 한겨레 결체를 공동으로 개발하여 2005년 5월 16일 신문부터 이 글꼴을 적용하고, 사람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참고로 한겨레 결체는 일간지 최초의 '탈네모글꼴'이다. [10] 한겨레 읽다 조선일보 읽으면 조선일보 글꼴이 굉장히 넓적해보인다.
'''2016년 9월경 미르와 K스포츠재단의 최순실에 관한 첫 기사를 낸 적이 있다.#''' 이후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오게 되는데.. 보통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말하면 JTBC를 먼저 떠올리지만 최순실을 가장 먼저 언급한건 한겨레였다. 다만 취재는 TV조선이 가장 먼저 했다.#[11] 한겨레의 김의겸[12] 선임기자가 쓴 칼럼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님께'를 읽어보면 한겨레의 역량 한계에 대한 해당 기자의 안타까움과 조선일보의 능력에 대한 기대감을 느낄 수 있다.# 이후 별다른 특종들과 세밀한 분석들을 내놓지 못하고, JTBC가 태블릿 PC를 터뜨리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주도권을 가져가 버렸다.
2019년 11월 n번방 사건을 단독으로 취재하여 보도했는데, 차츰차츰 알려지다가 3월에 가서 뒤늦게 터졌다.
4. 성향과 논조
기본적으로 친 민노총, 친 페미, 친 전교조, 친북 성향의 좌파 신문이다.
전체적으로 정치-사회 관련에서 다른 신문들보다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13] 그리고 보수진영 등에서는 한겨레가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현실과 유리된 관점에서 비타협적인 논조로 접근한다고 싫어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노동자 파업 이슈를 예로 들면 조중동이 사회적 손실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때, 한겨레는 그 노동자들이 왜 파업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중심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도록 조명하는 측면도 있다.
인터넷 실명제, 액티브X[14] 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웹표준 준수와 관련된 기사들이 많이 실렸다. 인터넷 실명제로 인해 한국인의 유튜브 업로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는 우회방법을 사용하여 유튜브에 동영상을 업로드한 것과 관련하여 신랄한 비판 기사를 썼다.# 그러나 수년 후 문재인 정권에서 일어나는 인터넷 검열에 대해서는 대체로 침묵하거나 그 중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불법음란물"을 핑계로 검열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삼성그룹 비리 보도 이후 삼성이 광고를 1년간 중단하자 한겨레 측이 삼성 광고 게재를 완전히 거부했으나# 밴쿠버 동계올림픽 때부터는 삼성 광고도 실리기 시작했다. 삼성과의 관계는 논란이 많은데 르몽드 한국판 삼성 보도 참고.
또한 광우병 선동이 전국을 휩쓸었을 때 미국육류수출협회로부터 10억 광고료로 미국산 쇠고기 광고를 제안받았으나, "독자들과의 신의"를 들어 거절하려고 광고주 예우차원에서 직접 거부하지 않고 광고주가 감당하기 힘든 조건으로 거절하려 했으나, 미국육류수출협회측에선 무조건으로 승인해 버리자 결국 임시 임원회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광고를 싣지 않기로 결정했었다.#.
광우병과 관련하여 촉발된 2008년 대규모 시위 당시 한겨레는 철저하게 시위대를 대변하고## PD수첩을 옹호하며 광우병 선동에 앞장섰다.# 그 외에도 시위대가 저지르는 경찰에 대한 폭력은 외면한채 경찰의 진압에만 촛점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광고는 정반대 광고를 같은 면에 동시에 실어서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노골적인 친 페미니즘 언론사로 유명하다. 만물여혐설을 보이는 경우가 많고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에 대해서 시위한다는 명목으로 2016년에 강남역에서 일어났던 메갈, 워마드의 남성혐오 시위를 정당한 여성인권 시위로 포장하며 옹호했다. 이런 특정 사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한겨레의 기사들은 페미니즘적 논조를 보인다. 수많은 거짓말들로 논란이 되고 결국 캐나다로 도망간 윤지오에 대해서도 대단히 우호적이다. 2020년 말에는 윤지오를 '용기있는 의인'으로 칭송하고 그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군중혐오', '다중지성의 범죄화'라고 주장하는 책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2019년 이후에는 중역급 기자들과 젊은 기자들간의 갈등이 가시화 되는 분위기이다. '조국 사태'가 한창이던 2019년 9월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비판한 칼럼[15] 이 “한겨레 논조와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 출고 4분만에 삭제되었을 때 젊은 기자들은 성명을 내고 중역급 기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당시 김어준의 파파이스 등을 제작한 김보협 기자가 한겨레에서 퇴사했다.[16] 1년 후, 2020년에 일어난 '추-윤 갈등'을 다룬 한겨레 보도에 관해서도 젊은 기자들은 다시 한번 성명을 내며 “한겨레는 2019년 9월 ‘조국 보도 참사’ 성명을 발표할 때와 견주어 달라진 게 없다. 조국 사태 이후 ‘권력’을 검증하고 비판하는 데 점점 무뎌지고 있다. 한겨레는 문재인 정권의 법무부에 유독 관대했다”고 주장했다.
[ 젊은 기자들 성명 전문 펼치기 · 접기 ]
이에 한 중역급 기자는 한겨레 노조 게시판을 통해 “거시적이고 신중한 고려가 없는 ‘성역 없는 비판의 칼날’은 어떤 경우엔 망나니의 미친 칼날이 될 수 있다”며 “여러분이 말한 것처럼 ‘특정 정파·좌우 진영 가릴 것 없이 공정한 잣대로 보도하는 것’은 절반만 좋은 저널리즘”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 게시글은 “한겨레는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을 지지하지 않지만, 특정한 가치와 방향을 추구한다. 여러분이 가치와 방향에 대해서도 공정한 잣대를 들이대고 싶다면 한겨레에서 일하기보다 한국일보처럼 중도적인 성향의 매체로 옮기기를 권한다”고 쏘아붙였다. 이어 “젊은 기자들은 법조 보도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않으면 자칫 검사나 판사의 정교하지만 편협한 논리에 휩쓸려 ‘친검’, ‘친법조’ 기자가 되기 쉽다”고 주장했다. “여러분의 성명이 나오자마자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매체들은 신이 나서 기사를 쓰고 있다”고도 했다.이에 〈한겨레〉현장 기자들은 국장단과 사회부장, 법조팀장이 해당 기사와 사설에 대한 경위를 밝힌 뒤 그에 따른 합당한 책임을 지고 공식 사과와 재발방지책 마련에 나설 것을 요구합니다. 탁상공론을 넘어, 현장 기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특정 정파·좌우 진영 가릴 것 없이 공정한 잣대로 보도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것인지 구체적인 대책 마련도 함께 요구합니다.}}}
[ 중역급 기자 반박글 전문 펼치기 · 접기 ]
이 사태에 대해 언론비평지인 미디어오늘은 '''문재인 정부와 그 집권 여당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386 세대의 중역 기자들과, 그렇지 않은 밀레니엄 새대의 젊은 기자들간의 갈등'''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성명을 계기로 편집국에서 진지하고 치열한 논쟁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그 결과에 따라 <한겨레>의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공동의 가치와 방향이 새로 세워지길 기대해봅니다.}}}
정미정 언론인권센터 정책위원은 “논쟁적 이슈를 두고 격렬하게 싸우는 건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기자들이 주장하는 사례로 든 기사가 잘못됐다는 것은 동의한다. '''하지만 밖에서 볼 때 한겨레가 친정부적이었다? 그런 기사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한겨레가 중심 못 잡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기사를 많이 썼다고 생각한다. 편향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을 가지고 한겨레 정체성을 지키는 기사를 얼마나 잘 썼는가에 대한 반성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교수는 “착한 권력이 있고 나쁜 권력이 있는 게 아니라, 권력을 나쁘게 쓰는 경우가 있고 잘 쓰는 경우가 있는 것일 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나쁜 정부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정부가 쓴 권력이 제대로 쓴 것이냐 그렇지않느냐의 문제다”라고 전제한 뒤 “한겨레 기자들이 2019년에도 반발이 있었고 그때 정리가 잘 안 됐다. (청취자들은) 남의 집 불난 것을 이용하는 보도로 이 사안을 판단하지 말라. '''(성명 낸) 젊은 기자들도 이해당사자다. 데스크 목소리도 찾아 균형있게 봐야 한다.''' 이왕이면 이들이 쓴 기사도 찾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5. 한자/로마자 혼용 배제
초창기부터 한자를 쓰지 않아 당시 한자 혼용이 대세였던 분위기에서 상당히 눈길을 끌었다. 현재는 대다수의 신문들이 순한글을 쓰면서도, 동음이의어 때문에 혼동을 줄 수 있는 단어나 중국 및 일본의 인명 같은 것에는 한자를 괄호 병기하는 경우가 많으나[17] 한겨레신문은 이러한 경우에도 한자를 쓰지 않는다. 광고 빼고 1년에 한두 번이면 많다.
로마자를 꼭 써야 하는 경우에는 그 로마자를 한글로 먼저 표기하고 로마자를 괄호병기하고 기사에 계속 그 로마자 단어는 한글로 표기한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KTX, LG, SK 같은 것은 공식 표기가 로마자로 되어 있으나, 한겨레는 '케이티엑스(KTX), 엘지(LG), 에스케이(SK)' 와 같은 식으로 표기하고 기사에 계속 이를 언급해야 할 경우에는 한글로 풀어서 쓴다. 기아(KIA), 다음(Daum)처럼 한글에서 유래되었으나 공식 표기가 로마자인 경우는 '케이아이에이'나 '디에이유엠' 식으로 쓰지 않고 기아, 다음 등 원래 한글명을 쓴다.
스포츠 팀의 경우에는 기업명을 빼고 언급을 하는데, 가령 SK 와이번스, LG 트윈스, NC 다이노스, KIA 타이거즈의 경우 앞의 알파벳은 쏙 빼버리고 뒤의 와이번스, 트윈스, 다이노스, 타이거즈만 언급하는 식이다. 삼성 라이온즈도 라이온즈로 줄여서 부르고 있다.
외국의 로마자를 표기할 경우 그 언어에 맞게 표기하려는 경향이 있다. 영어권의 경우 '''비비시(BBC), 엠에스엔비시(MSNBC), 시엔엔(CNN)'''과 같이 표기하고, 프랑스어권의 경우 '''테제베(TGV), 아에프페(AFP)''', 독일어권의 경우 '''베엠베(BMW), 체트데에프(ZDF)'''와 같이 표기한다. 종종 대한민국에서 생소한 언어권의 로마자 표기도 해당 언어의 발음 표기에 맞게 표기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핀란드의 '''위엘에(YLE)'''#, 노르웨이의 '''엔에르코(NRK)'''#와 같은 표기도 볼 수 있다. 일본의 것은 영어식으로 표기하여, '''엔에이치케이(NHK), 제이아르(JR)'''와 같이 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인의 식자층은 대부분 로마자를 영어식으로 읽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더군다나 한겨레신문을 읽는 독자라면 더욱 그러한 성향이 강할 텐데 이마저도 모두 한글화하여 오히려 가독성을 해친다는 비판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표기가 그 회사의 한국 지사의 표기와 어긋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BMW의 경우 한국 지사는 공식적으로 '비엠더블유'라고 읽고 씀에도 불구하고 한겨레는 '베엠베'라고 쓰는 것을 고집하고 있다.
상술된 지극히 독자적이고 외고집스러운 내적 편집 규정 때문에 사설이나 종합 정치면 등 기사 논조를 제외한 신문 제작 자체 사항에 관한 부분에서 한겨레만 타사와 풀(공유)하지 않고 따로 논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편집(레이아웃)도 기자협회가 따로 있고 교열도 초매체적 기협이 있어 대체적인 사항들은 전파 및 공유가 되지만 한겨레만 그를 벗어나 독자 노선을 걷는 것. 고로 업계 내부를 돌고돌며 일하게 될 때 타회사 간 이동 시 큰 적응 시간이 필요하지 않지만 한겨레는 '한겨레식'을 배우는 데 꽤나 시간이 걸린다. 한겨레에서 나와서 타사를 가도 마찬가지. 독특한 점이다.
그나마 영어를 한글로 제대로나 옮기면 또 모르겠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베스트셀러 1Q84를 '''아이큐84'''로 소개하면서 소양 부족을 드러냈다[18] 당시기사
한겨레의 잘못은 아니지만, R도 한글 '아르'로 쓰기 때문에 IT기사를 읽는 독자들이 '아르에스에스(RSS)'란 표현을 보고 충공깽하기도 한다. 이는 외래어 표기법에서 R을 '아르'로 표기하기 때문인데 정작 일반인들은 '알'이라 읽으니 생기는 현상.[19]
그 밖에, 익명의 경우 이니셜(A씨, B씨, C씨...) 대신에 한글 초성(ㄱ씨, ㄴ씨, ㄷ씨....)을 쓰고 '○모씨' 대신에 '○아무개'라는 표현을 쓰며, 부고란 이름은 '궂긴소식[20] '이다. 또 여성을 칭할 때 사용하는 3인칭 대명사는 ‘그녀’대신 ‘그’를 사용하며, 이외에 ‘홈페이지’, ‘사이트’ 대신 ‘누리집’이라고 표현하는 등 순화어를 많이 사용한다.
6. 비판
7. 사건사고
8. 자매지
- 한겨레21: 종합 시사주간지이다. 시사주간지 업계에서는 본지보다 영향력이 높다.
- 씨네21: 영화 및 영상물 주간지이다. 우리나라 영화잡지 중에서 가장 큰 잡지[21] 이다.
- 허핑턴포스트 한국판
- 이코노미 인사이트: 경제 월간지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미국이 아닌 유럽, 아시아의 시각에서 경제를 보려고 한다.
- 서울&: 2016년 3월 창간한 서울 지역 라이프스타일 주간 섹션. 초기 반응은 나름 좋은 편이었으며, 이후 부산, 경기도 등으로 확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매주 목요일 발행이었으나, 2016년 4월 22일부터는 금요일 발행으로 변경되었다.
- 제주&: 서울&의 절찬 안착에 힘입어 발행되는 제주 라이프스타일 월간 섹션.
- 나·들: 월간 사람매거진을 표방한다. 주로 인물 인터뷰를 다룬다. 2014년 7월 이후로 폐간되었다. 이유는 심하게 누적된 적자 때문이라고 한다.
9. 자회사
- 한겨레21
- 씨네21 주식회사[22]
- 허핑턴포스트코리아
- NEWS BANG[23]
- 롤링스토리[24]
- 씨네룩스[25]
- 한겨레출판
- 한겨레교육[26]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27]
- 사람과 디지털 연구소
- 한겨레 휴
- 한겨레통일문화재단
- 팩트스토리
10. 여담
- 한겨레는 세계 최초의 국민주 신문이라고 한다.[28] 신문이 창간되었을 당시 많은 외신 기자들이 한겨레를 취재하러 오기도 했다고. 이런 이유로 주주총회 역시 소수의 대주주들이 일방적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일반 기업과는 다르게 많은 소액주주들과 사원주주들이 참석하여 토론을 통해 회사의 방향을 결정한다. 한겨레 주주센터
- 국산 농산물 생협인 한살림과 꽤나 끈끈한 관계다. 발족은 한살림이 2년 더 늦지만 한살림의 성향 등으로 봤을때 한겨레와 죽이 맞을수밖에 없다. 덕분에 한겨레미디어 자회사로 착각하기 대단히 쉬우나, 일단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 1995년 중앙일보에 이어 국내 신문사로는 두 번째로 주간지 한겨레21로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듬해 1월 1일에 씨네21, 7월 11일 일간지 한겨레의 인터넷서비스를 시작했다.
- 과거 한겨레에 실린 광고를 가만히 살펴보면 진짜 돈 안 되는 광고들 뿐이었다. 돈 되는 광고는 1면광고와 전면광고인데 이마저도 정부(혹은 공기업)광고나 대기업광고인 경우가 드물다. 유독 책 광고가 많은데, 사실 책 광고는 진짜 푼돈(...)인지라. 그런데도 한겨레는 2005년부터 흑자를 내고 있다. 매년 약 30억 가량의 흑자를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DART에 가서 확인해보면 2005년 결산부터 2014년 결산, 즉 9년간 자본총계는 19억 259백만원에서 30억 722만으로, 연평균 약 5.3% 성장하였다. 그러나 2014년에는 11억, 2008년에는 25억 정도의 적자가 발생하였다.
- 한겨레는 2007년 1월 29일, 취재 보도 준칙을 제정, 공표했다. 한겨레 기자는 이 준칙에 따라 취재 보도를 하고 있다. 그 후 13년동안 위 보도 준칙을 사용했으나 ‘조국 사태’ 국면에서는 “한겨레가 앵무새처럼 검찰 주장만 받아쓴다”는 독자의 비판과 함께 “조국 일가의 불공정에 소극적으로 대처한다”는 질타를 동시에 받은것을 계기로 2020년 5월 15일 새 취재 보도 준칙을 발표했다. #
- 2013년 5월 15일 한겨레 창간 25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당시 국회의원이 축사를 맡았으며 창간 30주년 때도 문재인 대통령이 축하 동영상을 보내왔다.
- 2013년 5월 21일부터 일주일에 한 번 자회사인 (주)한겨레교육을 통해 운영하는 '함께하는 교육'지면에 주요 쟁점에 대한 사설을 자사와 반대편 논조 신문인 중앙일보와 비교, 분석하는 지면을 기획했다. 다른 논조의 사설을 비교해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함께하는 교육'과 NIE교육용 '아하!한겨레'는 (주)한겨레교육을 통해 제작하는 콘텐츠라고.
- 2014년 2월 28일부터 미국의 허핑턴 포스트와 제휴를 맺어 "허핑턴 포스트 코리아"를 출범했다.
- 한겨레 사옥에는 구내 식당이 없다.
- 2015년부터 뉴스 SNS 플랫폼인 "뉴스뱅", 웹툰작가조합인 투니온과 합작하여 설립한 웹툰기업인 "롤링스토리" 등 여러 방면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고, 2016년 주주총회에서는 방송산업 진출을 적극 검토하기도 했다.
- 2005년 정태기 대표이사 재임 당시부터 퀄리티 페이퍼를 공식적으로 지향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재무 상태가 호전되는 대로 증시에 상장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30]
- 2006년부터 시작된 한국기자협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기자들이 신뢰하는 언론 항목 9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 신문 삽화는 주로 김영훈 교수가 1988년부터 맡아왔다. 만평은 권범철 화백이 연재하며, 초대 만평가 박재동 화백은 매주 토요일 '여론' 면에 그림을 싣고 있다. 훗날 역사만화가로 유명해진 박시백, 문화일보에서 왔던 장봉군 화백도 이쪽 만평 출신. 매주 수요일에는 생활 관련 섹션인 esc,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독자투고란 '왜냐면'을 운영하고 있다.
- 2017년 한국대학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17년 연속 대학생 신뢰도 1위를 차지했다.#
- 한국기자협회 주관 2014년 이달의 기자상 최다 수상 언론사에 한겨레가 선정되었다.#
-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1988년 한겨레 창간호에 실린 그의 저서 '거래의 기술' 광고 문구가 그를 미국의 차기 대통령감으로 지목했다는 사실이 주목받았다. 도널드 트럼프/여담 항목 참조.
- 경쟁지들보다 과학 섹션이 허약한 것을 보충하려는 듯 사이언스온이라는 새 온라인 지면을 만들었다. #.
11. 관련 문서
12. 역대 임원
12.1. 회장
- 송건호 (대표이사 · 발행인 · 인쇄인, 1991.4 ~ 1991.7/대표이사, 1991.8 ~ 1993.6)
- 권근술 (대표이사 · 편집인, 1995.3/대표이사 · 발행인 · 편집인, 1995.3 ~ 1997.3)
12.2. 사장
- 송건호 (대표이사 · 발행인, 1988.5 ~ 1989.3/대표이사 · 발행인 · 편집인, 1989.3 ~ 1989.12/대표이사 · 발행인 · 인쇄인, 1989.12 ~ 1991.4)
- 김명걸 (대표이사, 1991.4 ~ 1991.7/대표이사 · 발행인 · 편집인 · 인쇄인, 1991.8 ~ 1993.6)
- 김중배 (대표이사 · 발행인 · 편집인 · 인쇄인, 1993.6 ~ 1994.6)
- 김두식 (대표이사 · 발행인 · 인쇄인, 1994.6 ~ 1995.3/발행인 · 인쇄인, 1995.3/인쇄인, 1995.3 ~ 1997.3)
- 권근술 (대표이사 · 발행인 · 편집인 · 인쇄인, 1997.3 ~ 1999.3)
- 최학래 (대표이사 · 발행인 · 편집인 · 인쇄인, 1999.3 ~ 2003)
- 고희범 (대표이사, 2003.3 ~ 2005.3)
- 정태기[31] (대표이사, 2005.3 ~ 2007.3)
- 서형수[32] (대표이사, 2007.3 ~ 2008.3)
- 고광헌[33] (대표이사, 2008.3 ~ 2011.3)
- 양상우 (대표이사, 2011.3 ~ 2014.3/대표이사, 2017.3 ~ 2020.3)
- 정영무 (대표이사, 2014.3 ~ 2017.3)
- 김현대 (대표이사, 2020.3 ~ 현재)
12.3. 부사장
- 최학래 (광고담당, 1995.3 ~ ?)
- 임재경 (1989.3 ~ 1989.12/편집인, 1989.12 ~ 1991.6)
- 성한표 (1999.3 ~ 2001)
12.4. 전무
- 김명걸 (? ~ 1991.4)
- 조영호 (1999.3 ~ ?)
- 김효순 (2005.3 ~ 2007.3)
- 곽병찬 (편집인, 2009.5 ~ 2011.3)
- 권태선 (편집인, 2011.3 ~ 2014.3)
- 송우달 (경영총괄, 2014.3 ~ 2017)
- 정석구 (편집인, 2014.3 ~ 2017.3)
- 김종구 (편집인, 2017.3 ~ 2020.3)
- 윤종훈 (재무담당, 2017.3 ~ ?)
- 백기철 (편집인, 2020.3 ~ 현재)
13. 역대 주요 간부
13.1. 논설고문
- 리영희 (1988.9 ~ 1989)
- 임재경 (편집인, 1991.6 ~ 1991.7/1991.8 ~ ?)
13.2. 논설주간
- 임재경[34] (1988.5 ~ 1989.3)
- 신홍범[35] (1989.3 ~ 1989)
- 장윤환 (1990 ~ 1994.4)
- 권근술 (1994.4 ~ 1995.3)
- 성한표 (1995.3 ~ 1997.12)
- 김근[36] (1998.1 ~ 2000)
- 정연주[37] (2000.10 ~ 2003.3)
- 박우정 (2003.3 ~ 2004)
- 김선주 (2004.2 ~ 2004.12)
13.3. 논설위원실장
- 이원섭 (1999.3 ~ 2004)
- 이경 (2004 ~ 2005)
- 김지석 (2005.3 ~ 2006.10/2009.3 ~ 2011.3)
- 김병수 (2006.10 ~ 2008.3)
- 정석구 (2008.3 ~ 2009.3/2011.3 ~ 2014.3)
- 오태규 (2014.3 ~ 2017.3)
- 박찬수 (2017.3 ~ 2020.3)
- 안재승 (2020.3 ~ 현재)
13.4. 편집국장
2013년까지는 '편집위원장'이었다.
- 성유보 (1988.5 ~ 1988.8/1990.7 ~ 1991.4)
- 장윤환 (1988.8 ~ 1989.7)
- 권근술 (1989.7 ~ 1990.7)
- 성한표 (1991.4 ~ 1993.4)
- 김중배 (1993.4 ~ 1993.6)
- 최학래 (1993.6 ~ 1995.3)
- 윤후상 (1995.3 ~ 1997.3)
- 박우정 (1997.3 ~ 1999.3)
- 고영재 (1999.3 ~ 2001.3)
- 조상기 (2001.3 ~ 2003.3)
- 김효순 (2003.3 ~ 2005.3)
- 권태선 (2005.3 ~ 2006.6)
- 오귀환 (2006.6 ~ 2007.2)
- 정영무 (직무대리, 2007.2 ~ 2007.3)
- 김종구 (2007.3 ~ 2009.2)
- 성한용 (2009.3 ~ 2011.3)
- 박찬수 (2011.3 ~ 2013.2)
- 유강문 (2013.2 ~ 2014.3)
- 김이택 (2014.3 ~ 2016.2)
- 백기철 (2016.3 ~ 2017.3)
- 이제훈 (2017.3 ~ 2018.4)
- 박용현 (2018.4 ~ 2020.3)
- 임석규 (2020.3 ~ 현재)
14. 역대 법정등록인
14.1. 발행인
- 송건호 (1988.5 ~ 1991.7)
- 김명걸 (1991.8 ~ 1993.6)
- 김중배 (1993.6 ~ 1994.6)
- 김두식 (1994.6 ~ 1995.3)
- 권근술 (1995.3 ~ 1999.3)
- 최학래 (1999.3 ~ ?)
14.2. 편집인
- 임재경 (1988.5 ~ 1989.3/1989.12 ~ 1991.7)
- 송건호 (1989.3 ~ 1989.12)
- 김명걸 (1991.8 ~ 1993.6)
- 김중배 (1993.6 ~ 1994.6)
- 권근술 (1994.6 ~ 1999.3)
- 최학래 (1999.3 ~ ?)
- 김효순 (2005.3 ~ 2007.3)
- 권태선 (2007.3 ~ 2008.3/2011.3 ~ 2014.3)
- 장정수 (2008.3 ~ 2009.5)
- 곽병찬 (2009.5 ~ 2011.3)
- 정석구 (2014.3 ~ 2017.3)
- 김종구 (2017.3 ~ 2020.3)
- 백기철 (2020.3 ~ 현재)
14.3. 인쇄인
- 정태기 (1988.5 ~ 1989.12)
- 송건호 (1989.12 ~ 1991.7)
- 김명걸 (1991.8 ~ 1993.6)
- 김중배 (1993.6 ~ 1994.6)
- 김두식 (1994.6 ~ 1997.3)
- 권근술 (1997.3 ~ 1999.3)
- 최학래 (1999.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