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자

 

'''창덕궁 이왕비'''
제2대}}} '''{{{#fff 이씨'''
<colbgcolor=#4646cd> '''일제강점기 제2대 창덕궁 이왕비'''
'''慈行妃
자행비'''

'''국적'''
[image] 일본 (1901 ~ 1962)
[image] 대한민국 (1962 ~ 1989)
'''작위'''
이왕세자비(李王世子妃) → 이왕비(李王妃) → (신적강하)
'''사시'''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
(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
'''출생'''
1901년 11월 4일
도쿄시 시부야구
'''사망'''
1989년 4월 30일 (향년 87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낙선재
'''장례'''
1989년 5월 8일
'''능묘'''
홍유릉 내 영원(英園)
'''재위'''
'''창덕궁 이왕비'''
1926년(다이쇼 15) 4월 27일[1]
~ 1947년(쇼와 22년) 10월 18일
(21년 18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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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646cd> ''''''
이(李)
'''본관'''
전주[38]
''''''
방자(方子)[39]
'''부모'''
부친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40]
모친 나시모토노미야 이츠코[41][42]
'''부군'''
의민황태자 이은
종교 ||가톨릭 {{{-2 (세례명: 마리아)

}}}}}}}}}
1. 개요
2. 호칭
4. 평가
5. 가족 관계
5.1. 친정 가문
5.1.1. 친가
5.1.2. 외가
5.2. 형제
5.2.1. 친자매
5.2.2. 사촌 여동생
6. 관련 작품
7. 관련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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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계 한국인대한제국의 전 황족. 원래 일본 방계 황족으로, 결혼 전의 이름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였으며 작위는 여왕(女王)[2]이었다. 아호는 가혜(佳惠).
영친왕과 결혼하면서 왕공족의 일원이 되었다. 일본 황족은 본래 성씨가 없는데[3], 영친왕과 결혼하면서 부부가 동성을 쓰게 되어 있는 일본의 민법에 따라 남편과 같은 '이(李)'씨 성이 되었다. 그래서 조선식 이름이 '이방자'가 된 것. 같은 이유로 일본에서는 '리 마사코'(李 方子)라 불린다. 남편의 성을 그대로 따랐으므로 전주 이씨라고 볼 수 있다.

2. 호칭


일제강점기 당시 영친왕의 지위는 이왕세자였고, 순종황제가 사망한 후에 이왕이 되었다. 이에 결혼 후에 그녀는 신적강하 전까지는 '이방자(리 마사코) 비(妃)'나 '방자(마사코) 비'라고 통칭되었다.
대한민국에선 굳이 대한제국에 맞출 경우 영친왕비라고 부르거나 의민태자비라고 부르는데, 사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라는 사시(私諡)[4]를 올렸으므로 대한제국에 맞출 거면 ''''자행비''''가 맞는 명칭이기 때문.[5]
사실 이방자는 '''1897년부터 1910년까지 존속했던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인 1920년에''' 영친왕결혼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황태자비로 정식 책봉받은 적이 없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조선인들은 왕공족을 여전히 황족으로 여겼기 때문에,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왕공족과 결혼한 이나 왕공족으로 태어난 이들도 일반적으로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간주하는 편이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들은 ''''대한제국의 황족'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6]
그래서 당시 왕공족으로서 이왕세자 지위에 있었던 영친왕과 결혼한 이방자를 황태자비로 대우하는 게 맞는지 논란이 있다.[7], 그 때문인지 이방자는 사시의 약칭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다.[8] 대한민국에선 보통 '이방자 여사'라고 불리고,[9] 좀 더 격식을 차리는 경우엔 '이방자 비'[10]라 불리는 경우가 많다.

3. 생애




4. 평가


일본 방계황족 출신이고, 한국어는 사망할 때까지도 서투른 편이라서 대부분의 대화도 일본어로 했다.[11] 당시 MBC 뉴스데스크에 보도되었던 생전 인터뷰 영상을 보면 서툰 한국어 실력을 확연히 알 수 있다.(당시 이방자 여사 인터뷰)
그러나 국적을 묻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이제는 한국인입니다"'''라고 말할 만큼 한국인으로서 살려고 했던 의지를 어느 정도 보였고, 경계인으로서 생애나 사회 봉사 활동 등의 말년 행적 때문인지 국내에서의 평가도 우호적 또는 동정적인 편이다. 여담으로 이방자 여사와 비슷한 사례가 중국에도 있었는데, 바로 옛 만주국 황제인 푸이의 남동생 '푸제'에게 시집간 사가 히로이다. 때문에 이를 두고 "일본가장 못난 사람을 일본의 황후로 삼고,[12] 진짜 황후감인 사람들은 한국(이방자)과 중국(사가 히로)으로 시집 보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일부 다른 관점에서 본 반론도 존재한다. 온당치 못했던 결혼 과정 자체가 결국은 대한제국 황족의 독립운동을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으로, 이 설에 따르면 시집 가기 전 친정 아버지 모리마사 왕이 그녀를 앉혀놓고 "남편을 잘 감시하라"며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물론 아버지와 딸의 생각이 같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이후 이방자 여사의 삶을 보면 딱히 남편을 감시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또 아버지의 말도, 좋게 해석하자면 단순히 딸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사위가 일본 제국과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딸의 인생도 고단해질 게 뻔하니. 애초에 자신의 혼인 자체를 신문을 보고 알게 되었을 정도로, 어찌보면 이방자 역시 정략결혼의 피해자였다.
그 외 황손 이석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방자 여사가 한국에서 활동할 때, 다른 황족을 도우라는 명목으로 정부에서 받은 지원금을 사회봉사 등 자신의 자선활동에만 썼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바로 그 이석의 주장인 만큼(…) 설득력이 낮은 부분도 있다. 자세한 이유는 이석 항목 참조. 참고로 이방자 여사는 장애인 학교 설립 같은 사회봉사 활동이 영친왕의 유지였다고 말한 바 있다. 이로 볼 때 굳이 비판을 하자면 차라리 "금수저 출신으로 고생도 했지만 그래도 서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편한 인생 살다 간 거 아니냐"는 볼멘 소리를 할 순 있을지언정, 그녀의 행적 자체에 어떤 악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보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이방자 여사 생전, 창덕궁 옆에 위치한 중앙고등학교에선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고 교사 몰래 꽁초를 창덕궁 안에 던져 처리하는 일이 있곤 했다는데, 이 여사는 이 모습을 볼 때마다 "어디서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냐"며 크게 역정을 내곤 했다고 한다.

5. 가족 관계



5.1. 친정 가문



5.1.1. 친가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왕'''은 일본 세습친왕가(世襲親王家)[13]의 일원으로,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과 측실[14] 하라다 미쓰코(原田光枝子)의 4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구니노미야 다다(久邇宮多田)였으나, 작은할아버지 모리오사(守脩) 친왕이 창설한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 양자로 입적[15]되면서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로 개명했다. 모리마사 왕의 형제로는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16] 왕,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17] 왕 등이 있다.
메이지 유신 이전의 남성 황족들은 유명한 사찰에서 승려(대처승)로 있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승려 대신 군인이 되어야 했다. 이방자의 할아버지인 아사히코 친왕도 메이지 유신 이후로 환속했고, 아버지 모리마사 왕도 군인이 되었다. 이후 모리마사 왕은 이세신궁의 신주도 맡았는데, 그 때문에 패전 후 일본 황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전범으로 극동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18] 패전 후인 1947년, 다이쇼 덴노의 직계 후손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은 평민 신분으로 '''강등(박탈)'''당했다(신적강하). 황족이던 나시모토노미야 가문도 이때부터 평민 나시모토 가문이 되었고, 신분과 재산을 잃고 어려움을 겪었다.[19]
모리마사 왕은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이복동생 구니노미야 다카(久邇宮多嘉) 왕(1875-1937)[20]의 막내아들인 노리히코(徳彦, 1922-2007)[21]가 1966년 나시모토 가문에 입적되었다.[22] 노리히코는 5촌인 구니노미야 마사코(久邇宮正子, 1926-)[23] 여왕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내 마사코와 자녀들도 노리히코와 함께 나시모토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노리히코와 마사코는 1980년 이혼했고, 이때부터 자녀들과 관계가 소원해진 노리히코는 아들을 후계자에서 제외해 버렸다. 2002년 노리히코는 황족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다카오(隆夫, 1938-)라는 사람을 양자로 입적했고, 이 사람이 현재 나시모토 가문의 당주이다.

5.1.2. 외가


'''어머니 이츠코(伊都子) 비'''는 화족 나베시마 가문 출신으로, 나베시마 나오히로(鍋島直大)와 후처 히로하시 나가코(廣橋榮子)의 차녀[24]이다. 나베시마 가문은 히젠국(肥前國) 사가(佐賀) 번의 다이묘 가문으로, 시조인 나베시마 나오시게임진왜란 때 대규모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한 바 있다.[25] 왜란 이후 나오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가담했고, 사가 성을 짓는 등 가문의 기초를 다졌고, 나오시게의 아들 나베시마 가츠시게(鍋島勝茂)가 사가 번의 번주가 되었다.
이방자의 외할아버지인 나오히로는 제11대 번주였다. 사가 번이 속한 히젠 지역이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과 더불어 토막운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나오히로도 무진전쟁에 참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제도가 생기자 나오히로는 후작 작위를 받았고,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서 일했으며, 영국 유학 이후에는 외교관으로도 일했다. 본래 우메타니 타메코(梅溪胤子)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으나, 타메코가 죽은 후 히로하시 나가코와 재혼하여 4남 4녀를 더 낳았고, 아사치요(朝千代)라는 측실에게서도 딸을 1명 낳았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을 때 낳은 차녀에게 '이츠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이는 '이탈리아(伊)의 수도(都)에서 낳은 아이(子)'라는 뜻이다.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들어 일본청일전쟁, 의화단 운동 진압, 러일전쟁 등을 치르며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해외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본 여성들도 애국부인회[26]와 간호부인회 등의 단체를 조직해 후방에서 일본군을 지원했다. 황족·화족 여성들도 이러한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방자의 외할머니 나가코와 어머니 이츠코도 일본 적십자사 간호부인회에서 활동했다. 나가코는 간호부인회 총괄 책임자로서 1900년 7월 1일 요코하마 항구에서 청나라로 떠나는 적십자사 간호부들을 배웅했다. 이츠코는 붕대 감는 법, 의복 및 침상 교환하는 법 등을 배웠고, 결혼하여 이방자를 낳은 후로도 간호 교육을 받았다.
나오히로의 4녀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는 훗날 다이쇼 덴노의 차남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장모가 되었다. 노부코는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가쿠슈인 동창회장 및 황족·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1959년 평민 쇼다 미치코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시집올 때는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섰다.[27] 나오히로의 5녀 마츠다이라 도시코(松平俊子)[28]의친왕의 장남 이건의 장모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붕괴되고 천황이 직접 일본을 통치하게 되자, 일본의 유력한 다이묘 가문들은 황족 가문과 결혼하려고 애썼다. 다이묘들은 가문의 격을 높이고 싶었고, 대부분 별로 유복하지 못했던 황족들은 경제적인 도움을 원했기에, 일종의 윈 - 윈인 셈이었다.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의 아들 모리마사 왕과 나베시마 가문의 딸 이츠코의 결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에 나베시마 가문은 이츠코를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 시집보내면서, 재물을 그야말로 쏟아부었다.[29]

5.2. 형제



5.2.1. 친자매


친자매로는 6살 아래의 '''여동생 히로하시 노리코(廣橋規子, 1907-1985)'''가 유일하다. 노리코 여왕은 방계 황족인 야마시나노미야 다케히코(山階宮武彦王, 1898-1987) 왕[30]의 후처가 될 예정이었으나, 다케히코 왕의 정신병으로 인해 약혼이 취소되었다. 다케히코 왕은 1922년 방계 황족인 가야노미야 사키코(賀陽宮佐紀子) 여왕과 결혼했으나, 관동 대지진임신 중이던 사키코 비가 건물 붕괴로 사망했고, 그 충격으로 다케히코 왕은 정신병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31]
파혼 후 노리코 여왕은 외할머니 나베시마 나가코의 오빠 히로하시 마사미츠(廣橋賢光)의 아들[32]인 히로하시 타다미츠(廣橋眞光) 백작과 결혼하여 백작부인이 되었고, 3남 2녀를 낳았다.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 딸만 둘이라서 대가 끊기게 되자, 노리코의 3남 요시미츠(儀光)가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 입적되었다. 그러나 요시미츠는 외할머니 이츠코 비와 사이가 나빠져 파양되었다. 이후 (위에서 서술한 대로) 노리히코와 다카오가 나시모토 가문을 이었다.

5.2.2. 사촌 여동생


'''사촌 여동생''' 중에는 훗날의 '''고준 황후'''가 된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쇼와 덴노의 황후)이 있다. 이방자는 1984년 경향신문에 기고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서, 어린 시절의 나가코 여왕에 대하여 "여성으로서 마음씨가 곱고, 우아하고, 총명하며, 노래를 잘 불렀다."라고 회고했으며, 히로히토 황태자의 비가 된 나가코 여왕에 대해 "내 백부님[33]의 딸이며 사촌 여동생이기 때문에, 그녀가 황태자비가 된 것이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이종사촌 여동생인 마츠다이라 세츠코아이즈 번의 마지막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손녀로,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비가 되었다. 또 다른 이종사촌 여동생 마츠다이라 요시코(松平誠子)는 의친왕의 장남 이건의 아내가 되었으나, 패전 후 이혼하였다. 이때 요시코는 이름의 한자를 佳子로 고쳤는데, 고준 황후의 증손녀 카코 공주와 같은 한자이다.

6. 관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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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이방자의 생애가 '''<무지개를 이은 왕비(虹を架ける王妃: 朝鮮王朝最後の皇太子と方子妃の物語)>라는 제목으로 드라마화되기도''' 하였다. 후지 TV에서 '기적 같은 부부의 사랑 스페셜'이라는 제목으로 제작한 2부작 특집 드라마 중 1부로 방영되었다. 방영일은 2006년 11월 24일로, 약 2시간 분량의 단편 드라마이다. 보러가기
칸노 미호가 이방자 여사 역할을 맡았으며, 영친왕 역은 V6의 멤버이기도 한 오카다 준이치가 맡았다. 영친왕과의 첫 만남 같은 것은 다소 각색이 많이 들어갔지만 참고할 만한 작품이다. 해당 작품은 MBC에서 촬영 협조를 받아 한국 궁내 묘사 등이 어색하지 않고[34] 한국 궁녀[35]순종황제 등의 엑스트라는 한국인 배우가 맡아 어색하지 않은 것은 연출상 장점이다.
또한 한국 측에서 촬영 협조를 받았기 때문인지 역사적 서술에서 일제강점기를 의도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일례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가 잠시나마[36] 언급되는가 하면,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에 대해 '''영친왕이 격노해서 뛰쳐나가려 하고 이방자는 학살에 대해 너무 심하다고 한탄하는 장면'''까지 있었다.
그러나 드라마의 타이틀에도 언급되는 주 소재가 부부애인 만큼 둘 사이에서 있었던 일 중 껄쩍지근한 면, 특히 일본에 불리한 측면은 언급 없이 넘어가는 부분도 있긴 하다. 이방자 여사에 앞서 이미 영친왕과 약혼한 상태였던 민갑완의 존재를 일언반구도 없이 그냥 건너뛴다든가… 그리고 경제 사정으로 상당히 고생했던 일본 패망 이후의 삶 전까지의 내용만 다루고 있다. 이방자 여사는 전후, 특히 작은 아들 이구 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던 기간을 가장 행복한 시기 중 하나로 꼽기도 했지만, 이 내용까지 다루려면 120분이 아니라 1기 이상의 방영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참고로 영친왕 역을 맡은 오카다 준이치한국어가 엄청나게 어눌한데, 정작 영친왕은 일본어와 한국어를 둘 다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던 사람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좀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당시 인기 남녀 배우가 대한제국 황족의 역할을 맡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일본 작품임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많이 보이는, 제법 괜찮은 작품.
그 외에 1990년 KBS1 광복절 특집드라마 <왕조의 세월>에선 배우 이휘향이 연기했는데, 부친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은 김진해가 맡았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일본 배우인 토다 나호가 이방자 역을 맡았다. 남편인 영친왕과 금슬이 좋으며, 손아래 시누이인 덕혜옹주를 걱정한다.

7. 관련 도서


자서전으로 <지나온 세월>, <세월이여 왕조여>를 남겼다. <세월이여 왕조여>는 경향신문에 1984년부터 연재하기 시작해 1985년 단행본으로 나왔으며, 2013년에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또한 오타베 유지의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과 송우혜의 <마지막 황태자> 시리즈[37]에서도 이방자의 삶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1] 순종의 승하 일자는 4월 26일이지만, 이은의 이왕위 계승은 4월 27일이다.[2] 일본 황실의 작위 중 하나. 본래 천황의 4대손까지를 친왕(남)/내친왕(여)이라 하고, 5대손부터를 왕/여왕이라 했다. 그러다가 1947년에 현행 황실전범으로 개정된 이후부터는 손주까지를 친왕/내친왕, 증손부터를 왕/여왕이라 한다.[3] 위에 적혀 있는 '나시모토노미야'는 궁호다. 궁호(宮號)는 해당 미야케#s-3(宮家)의 당주에게만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엄밀한 호칭은 그냥 '마사코 여왕(方子女王)'이었다. 다만 성씨가 없는 일본 황족 특성상, 꼭 당주가 아니더라도 궁호를 성씨처럼 쓰는 경우가 많다.[4] 사적인 시호. 영친왕과 이방자는 순정효황후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망했으므로 공적인 시호를 받지 못했다.[5] 기타 존호를 앞에 쓰고 시호를 맨 끝에 붙이는 조선의 관행상, 시호로 호칭할 경우 '자행황태자비'나 '자행태자비'가 된다. 그런데 왜 '자행비'로 부르는 게 맞냐면, 대한제국 황태자비의 시호는 '○○비'였기 때문이다. 순명효황후가 황태자비로서 받은 시호는 '순명비'였다. 중국에선 이런 경우 '○○황태자비'로 시호를 올렸는데, 이방자의 사시는 이를 참고해서 지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6] 이방자 외에 1912년생인 덕혜옹주이우, 1931년생인 이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7] 영친왕의 하나뿐인 아내이기 때문에 보통 황태자비로 간주하지만,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사후에 시호를 올린 것은 '''엄밀히 말하면 잘못이다.'''[8] 게다가 생전에 '이방자 여사'라는 호칭으로 언론과의 접촉을 꽤 했기 때문에 사후에 올려진 사시를 대중들은 더더욱 잘 모른다.[9] 본인 역시 1981년 한 여성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였던 배우 장미희가 “호칭을 어떻게 할까요? 비 전하(妃殿下)라고 해야 할까요?”라고 묻자 ‘그냥 편한 대로 여사라는 호칭을 써 주세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10] 이 명칭은 일본 황실의 호칭 체계에 따른 것(이름+비)이라 현대 한국에선 원칙적으로는 옳은 호칭이 아니지만, '이방자 여사'를 쓰기엔 좀 애매한 경우엔 일제강점기 당시에 쓴 '이방자 비'를 호칭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11] 드라마 작가인 신봉승 선생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2011년), 일본인 혼다 세츠코(本田節子)의 <비련의 황태자비 이방자>(1989년) 등에는 이방자 여사의 한국어 실력에 관해 비판적인 어조로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이방자 여사의 생애 중 한국어에 노출된 시간이 과연 얼마였을지 생각해보면 한국어에 서툴다고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이방자 여사는''' 원래 일본인'''이었고, 결혼한 후에도 내내 일본에서 지내다가, 박정희가 집권한 1960년대에야 한국 국적을 취득, 회복하여 한국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노년이라 외국어를 새로 배우기는 힘들었다. 또한 남편 영친왕도 어려서 일본으로 끌려가 인질생활에 일본 황실교육을 받았던 탓에 일본어가 유창했고, 소위 옥음방송이 있던 1945년까지 눈치가 보였는지 왕래하던 한국인들 앞에서도 한국어로 말한 바가 거의 없었던 사람이다.(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자체는 숨을 거둘 때까지 유창했다고 한다.)[12] 실제로 쇼와 덴노(히로히토)의 아내인 고준 황후(나가코)의 악명이 드높긴 했다.(…) 황족으로서의 프라이드 때문인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맏며느리인 미치코 상황후를 모진 시집살이로 괴롭혔다.(말이 평민이지, 실상은 '''대재벌''' 닛신(日淸) 제분 회장의 딸이었다. 게다가 외가는 옛 화족 가문.) 2000년 6월 16일 사망할 때까지, 즉 평생 동안 나가코 태후미치코 상황후를 대놓고 무시했다고 한다. 결국 미치코 상황후는 시집살이의 스트레스로 우울증과 한때 실어증까지 걸렸을 정도. 참고로 나가코 황후와 함께 미치코 상황후를 괴롭히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이방자 여사의 이모인 마츠다이라 노부코였다. 1959년 쇼다 미치코아키히토 당시 황태자에게 시집올 때부터 극렬하게 반대했고, 결혼한 후에도 갖은 방법으로 괴롭혔으며,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고 미워했다. 이방자 여사의 친정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도 미치코 상황후를 매우 싫어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미치코 상황후도 큰며느리 마사코 황후와 갈등했던 것을 보면… [13] '''세습 친왕가'''란, 천황의 직계로부터 촌수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친왕 작위를 유지하며 세습하는 방계 황족 가문이다. 황실의 대가 끊어질 때를 대비해서, 신적강하하지 않고 일종의 예비 황실로 이어 내려온 것이다.[14] '뇨보(女房)'라는 직위의 시녀였다고 한다.[15] 이는 메이지 덴노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16] 고준 황후(나가코)의 아버지이자 쇼와 덴노의 장인. 훗날 조명하 의사의 타이중 의거에 피습당해 암살당했다.[17] 난징 대학살의 총 책임자. [18] 이세신궁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일본 황실의 조상신을 모시는 신토의 핵심을 이루는 장소이므로, 국가신토에 대한 처벌을 이유로 상징적으로 기소·처벌된 것이다. 모리마사 왕은 스가루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19]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 의하면 GHQ가 구 황족들에게도 막대한 세금을 내도록 요구하자 일자리가 없던 이들 세습친왕가 황족들은 당연히 저택,별장 등을 팔아서 겨우 생계를 잇던 중 누군가가 집에 침입해서 그들의 옷까지 모조리 쓸어가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는 데 이를 알고 불쌍히 여긴 황실에서 옷을 하사해서 한동안 그 옷을 입고 다녀야만 했다고 한다.[20]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의 5남. 다카 왕은 3남 3녀를 낳았으나, 성인기까지 생존한 사람은 2남 1녀 뿐이었다.[21] 1943년 구 황실전범에 의거해 신적강하하여 타츠다(龍田) 백작 가문을 창설했다. 당연히 패전 후 1947년 오늘날의 황실전범이 제정되면서 화족 제도도 폐지되었기 때문에, 노리히코도 이때 평민이 되었다.[22] 다만 모리마사 왕 생전에는 외손자(차녀 노리코의 3남) 요시미쓰(儀光)가 양자로 들어왔으나 관계가 악화되어 파양했고, 이후에 새로이 양자로 들어온 사람이 노리히코. 참고로 현재도 그렇지만 황실전범에서는 황족의 양자 입양을 허락하지 않는데, 역설적으로 신적강하로 평민이 되었기 때문에 양자를 들일 수 있었던 것.[23] 고준 황후의 큰오빠인 구니노미야 아사아키라(久邇宮朝融) 왕의 장녀.[24] 나오히로에게는 차녀(셋째), 나가코에게는 장녀(첫째).[25] 나베시마 나오시게임진왜란 당시 2진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로 참전했다. 휘하라고는 하지만 출정 당시 가토의 본진보다도 병력이 많았다. 선조의 두 서자 임해군순화군을 사로잡기도 했다. 정유재란 때는 4진으로 왔고, 울산성 전투 당시 조명 연합군에 의해 울산성에 고립된 가토 기요마사를 구원하였다.[26] 나베시마 가문의 근거지인 사가현에서, 승려(대처승)의 딸인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에 의해 결성되었다. 이오코는 일본 전역을 순회하며 일본군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한편 그녀는 일본의 폭력 우익 조직 흑룡회를 등에 업고 전라남도 광주에 왔으며, 한국에 일본식 불교를 포교하고 일본인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27] 이츠코도 여동생 노부코와 함께 쇼다 미치코를 반대했다. 이츠코는 평생에 걸쳐 일기를 썼는데,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썼다고.[28] 나오히로와 측실 아사치요 사이에서 태어난 딸.[29] 한 예로, 프랑스 파리까지 하인을 보내어 왕관 등 각종 보석 세트를 만들어왔는데, 하인이 일본과 프랑스를 오가는 시간과 보석 세트를 만드는 시간을 다 합하여 꼬박 1년 반이나 걸렸다고 한다. 왕관 하나에만 2만 몇천원이었고, 보석 세트를 다 합하면 십 수만 원이나 들었다. 당시는 일본 총리의 연봉이 9,600원이었고, 30,000원만 있어도 그 이자만으로 평생 부유하게 살던 시절이었다. 거기다가 하인의 교통비와 프랑스에 머무는 비용까지 합하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게다가 혼수로 왕관과 보석만 마련해 간 것도 아닐 테니, 상상도 되지 않는 규모이다.[30] 아버지 쪽으로 6촌이 된다.[31] 다케히코 왕은 1931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고(최종 계급은 일본 해군 소좌), 1947년 신적강하 때 평민으로 격하되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1987년 8월 사망하였다. 일본/왕실에도 나오지만, 이로써 야마시나노미야 가문은 단절되었다. 다케히코 왕의 남동생인 요시마로(芳麿, 1900-1989)는 전쟁 전에 후작의 직위를 받고 신적강하했는데, 그도 자식이 없어 여동생 아사노 야스코(淺野安子)의 차남 요시마사(芳正)를 양자로 들였다. 그 외 그 아래의 이복남동생들도 신적강하하여 황적에서 이탈했다.[32] 쉽게 말해 어머니 이츠코 비의 외사촌동생.[33]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사실 더 위로도 가야노미야 구니노리 왕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병약해서 구니노미야 가문을 잇지 못하고, 구니요시 왕이 구니노미야 가문을 이었다.[34] 수원 화성행궁 등에서 촬영.[35] 궁녀의 경우 전익령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재연배우인 변신호가 열연했다. 특히 전익령이 연기한 궁녀 이천희는 어린 시절의 영친왕과 매우 친한 사이로 나오고, 이후 궁을 나와 일반인과 결혼해서 낳은 딸이 숙명여학교에 진학하여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영친왕을 만나는 모습도 나온다.[36] 안중근 의사가 손가락을 끊고 단지동맹으로서 맹세하는 장면까지 묘사한다.[37] 1권 : 못생긴 엄 상궁의 천하, 2권 : 황태자동경 인질살이, 3권 : 왕세자 혼혈 결혼의 비밀, 4권 : 평민이 된 왕 이은의 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