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신라)
都刀
신라의 인물. 신분이 장군 혹은 노비로 추정되는데, 이름 앞에 붙은 고간(高干)이 직책이 아니라 이름의 일부라고 봐서 고우도도(高于都刀)[1] 로 보기도 한다. 일본서기에는 고도(苦都)로 기록되어 있다.
삼년산군(충청북도 보은군) 출신, 김무력의 부장으로 관산성 전투에서 직접 성왕을 잡아 목을 벤다. 관산성 전투 문서 참조.
『삼국사기』에 보이는 도도(都刀)의 관등은 고간(高干)이었는데, 이는 외위에 속하는 관등이다. 신라의 관등제는 왕경(王京)에 거주하는 왕경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위와 지방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외위로 이루어져 있는 이원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삼국사기』 잡지에 따르면, 고간은 경위에 견주면 17관등 중 9관등인 급찬(級飡)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 직책은 하급장교에 해당하는 비장(裨將)이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의 아들 왕자 여창(餘昌)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나아가 함산성(函山城, 관산성)을 빼앗고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쌓았다. 이처럼 전황이 백제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성왕은 전선에 나가 고생하고 있을 아들을 걱정하여 직접 이를 위로하러 갔다. 즉 이때 50명만 데려간 건 이 일대를 백제군이 장악했다고 생각해서 방심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군은 성왕이 전선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군사를 내어 길을 막았고, 결국 성왕은 신라의 고도(苦都)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고도는 고간 도도와 동일한 인물인데, 여기서는 도도의 신분을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飼馬奴), 즉 말을 부리는 노비로 묘사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이 천한 노(奴)인 도도로 하여금 백제의 성왕을 죽여 후세의 입으로 전하게 하려는 속셈으로 고도로 하여금 성왕을 죽이도록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머리를 구덩이에 파묻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에 전하는 것처럼 백제의 의자왕이 대야성을 빼앗은 후에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와 사위인 김품석의 시신을 감옥 바닥에 묻어버린 것도 이 일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비장에 불과했던 도도가 독단적으로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점은 의아하게 생각되지만, 당시 신라군이 처한 위급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어느정도 이해가 될 법한 부분도 있다. 비록 도도가 성왕을 사로잡았다고는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백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언제 다시 백제군이 들이닥쳐 성왕을 구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도도는 성왕을 본국까지 압송할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던 듯 하다.[2]
성왕이 죽은 이후로 도도에 대한 기록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그가 어디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도도가 성왕의 목을 벤 남자로서 그 이름을 역사 속에 남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굳이 추정해보자면 상관 김무력이 관산성 전투 이후 2년만에 3관등이나 초고속 승진을 했고, 도도가 공을 세웠음이 지금까지 기록에 잘 남아있는 걸 봐서는 관산성 승리의 군공을 인정받고 상을 받았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이후 행적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은 것이야 그냥 전반적인 기록이 부족한 시대다보니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같은 6세기 중반 인물 중에서도 가야 중 안라국 왕은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기록이 부족한 시대인데 지방민 출신 하급 장교야 말할 것도 없다.
노비가 전장에 나와 다른 군사들을 지휘하여 적국의 왕을 사로잡아 손수 그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비록 도도의 직책인 비장이 아주 높은 자리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고간이라는 외위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지방의 유력자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도 도도가 말을 타고 전장에 나선 비장이었던 점을 들어서 왕의 목을 베어 죽인 원수에게 "사마노"라는 비하적인 명칭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도도에 대하여 "사마노"(말을 먹이는 노비)라고 했던 점을 보더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말은 매우 값비싼 가축이었기에 아무나 다룰 수는 없었다. 더욱이 전란의 긴장감이 끊이지 않았던 고대의 한국에서 말이 지니는 가치는 두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백제인 사기는 실수로 국마(國馬)의 발굽을 상하게 한 후에 벌을 받을까 두러워하여 고구려로 달아났고,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의 아직기는 유학 경전에 능통하여 박사(博士)라는 직책을 지니고 있었으나 동시에 말을 기르는 법에도 능숙하여 마굿간일도 담당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고대에 말을 부린다고 해서 반드시 노비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주보돈 교수는 『일본서기』에서 고간 도도에 대하여 "좌지촌의 사마노" 운운한 것에 대하여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고간 도도는 비교적 최근에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변방 지역인 좌지촌에 속하는 지방 유력자이며, 그를 "사마노"라 일컬은 것은 좌지촌의 주민들이 국가에서 사용할 말을 양육하는 국역(國役)을 부담했던 이른바 집단적 예속민에 속하는 계층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록 추정에 의거한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분명 곱씹어볼만한 가설이라 생각된다.
다만 성왕이 도도를 가르켜 굳이 "노(奴)"라 칭한 점은 좀 더 생각해볼 만한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이 기록은 대체로 백제인들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만큼, 도도를 폄하하기 위해 그와 같이 칭하게 하였을수도 있겠으나 또 한편으로는 지방민에 대해 차별적인 대우를 가했던 당시 고대인들의 입장 또한 반영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울진봉평신라비에서 그 지역 일대의 지방민을 "노인(奴人)"이라 칭하면서 왕경민들과는 다른 별도의 "노인법(奴人法)"으로 다스렸던 흔적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도도가 삼년산군의 고간이었다고는 하지만, 고귀한 왕실의 혈통을 타고난 성왕에게는 감히 왕의 목을 벨 수 없는 천한 이로 여겨졌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KBS의 만화 초롱이의 옛날여행 성왕 편에서는 진흥왕이 부리는 '''요괴'''로 등장해서[3] 성왕을 암살한다.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이동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담으로 이 만화에서 성왕 편은 비현실적이고 판타지스런 요소가 유별나게 많이 들어 있다.
1. 개요
신라의 인물. 신분이 장군 혹은 노비로 추정되는데, 이름 앞에 붙은 고간(高干)이 직책이 아니라 이름의 일부라고 봐서 고우도도(高于都刀)[1] 로 보기도 한다. 일본서기에는 고도(苦都)로 기록되어 있다.
삼년산군(충청북도 보은군) 출신, 김무력의 부장으로 관산성 전투에서 직접 성왕을 잡아 목을 벤다. 관산성 전투 문서 참조.
2. 행적
2.1. 삼국사기
백제의 왕인 명농(明襛, 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와서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湌)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 군주인 김무력(金武力)이 주(州)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겼으니,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을 참하였고,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0년 (554)
이 기록을 종합해보면, 백제가 관산성 일대에서 신라군과 격전을 벌이던 와중에 성왕은 50명의 보병과 기병만을 거느리고 밤에 길을 지나던 중에 매복해있던 신라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에 복병들을 이끌고 백제 성왕의 목숨을 앗아간 신라의 용사가 바로 삼년삼군의 고간이었던 도도였던 것이다.가을 7월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기(步騎)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仇川)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伏兵)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난병(亂兵)들에게 해를 당해 훙(薨)하였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554)
『삼국사기』에 보이는 도도(都刀)의 관등은 고간(高干)이었는데, 이는 외위에 속하는 관등이다. 신라의 관등제는 왕경(王京)에 거주하는 왕경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위와 지방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외위로 이루어져 있는 이원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삼국사기』 잡지에 따르면, 고간은 경위에 견주면 17관등 중 9관등인 급찬(級飡)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 직책은 하급장교에 해당하는 비장(裨將)이었다.
2.2. 일본서기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의 아들 왕자 여창(餘昌)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나아가 함산성(函山城, 관산성)을 빼앗고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쌓았다. 이처럼 전황이 백제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성왕은 전선에 나가 고생하고 있을 아들을 걱정하여 직접 이를 위로하러 갔다. 즉 이때 50명만 데려간 건 이 일대를 백제군이 장악했다고 생각해서 방심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군은 성왕이 전선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군사를 내어 길을 막았고, 결국 성왕은 신라의 고도(苦都)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고도는 고간 도도와 동일한 인물인데, 여기서는 도도의 신분을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飼馬奴), 즉 말을 부리는 노비로 묘사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이 천한 노(奴)인 도도로 하여금 백제의 성왕을 죽여 후세의 입으로 전하게 하려는 속셈으로 고도로 하여금 성왕을 죽이도록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머리를 구덩이에 파묻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에 전하는 것처럼 백제의 의자왕이 대야성을 빼앗은 후에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와 사위인 김품석의 시신을 감옥 바닥에 묻어버린 것도 이 일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비장에 불과했던 도도가 독단적으로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점은 의아하게 생각되지만, 당시 신라군이 처한 위급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어느정도 이해가 될 법한 부분도 있다. 비록 도도가 성왕을 사로잡았다고는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백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언제 다시 백제군이 들이닥쳐 성왕을 구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도도는 성왕을 본국까지 압송할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던 듯 하다.[2]
2.3. 이후
성왕이 죽은 이후로 도도에 대한 기록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그가 어디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도도가 성왕의 목을 벤 남자로서 그 이름을 역사 속에 남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굳이 추정해보자면 상관 김무력이 관산성 전투 이후 2년만에 3관등이나 초고속 승진을 했고, 도도가 공을 세웠음이 지금까지 기록에 잘 남아있는 걸 봐서는 관산성 승리의 군공을 인정받고 상을 받았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이후 행적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은 것이야 그냥 전반적인 기록이 부족한 시대다보니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같은 6세기 중반 인물 중에서도 가야 중 안라국 왕은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기록이 부족한 시대인데 지방민 출신 하급 장교야 말할 것도 없다.
3. 정말로 노비였나?
노비가 전장에 나와 다른 군사들을 지휘하여 적국의 왕을 사로잡아 손수 그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비록 도도의 직책인 비장이 아주 높은 자리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고간이라는 외위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지방의 유력자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도 도도가 말을 타고 전장에 나선 비장이었던 점을 들어서 왕의 목을 베어 죽인 원수에게 "사마노"라는 비하적인 명칭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도도에 대하여 "사마노"(말을 먹이는 노비)라고 했던 점을 보더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말은 매우 값비싼 가축이었기에 아무나 다룰 수는 없었다. 더욱이 전란의 긴장감이 끊이지 않았던 고대의 한국에서 말이 지니는 가치는 두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백제인 사기는 실수로 국마(國馬)의 발굽을 상하게 한 후에 벌을 받을까 두러워하여 고구려로 달아났고,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의 아직기는 유학 경전에 능통하여 박사(博士)라는 직책을 지니고 있었으나 동시에 말을 기르는 법에도 능숙하여 마굿간일도 담당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고대에 말을 부린다고 해서 반드시 노비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주보돈 교수는 『일본서기』에서 고간 도도에 대하여 "좌지촌의 사마노" 운운한 것에 대하여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고간 도도는 비교적 최근에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변방 지역인 좌지촌에 속하는 지방 유력자이며, 그를 "사마노"라 일컬은 것은 좌지촌의 주민들이 국가에서 사용할 말을 양육하는 국역(國役)을 부담했던 이른바 집단적 예속민에 속하는 계층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록 추정에 의거한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분명 곱씹어볼만한 가설이라 생각된다.
다만 성왕이 도도를 가르켜 굳이 "노(奴)"라 칭한 점은 좀 더 생각해볼 만한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이 기록은 대체로 백제인들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만큼, 도도를 폄하하기 위해 그와 같이 칭하게 하였을수도 있겠으나 또 한편으로는 지방민에 대해 차별적인 대우를 가했던 당시 고대인들의 입장 또한 반영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울진봉평신라비에서 그 지역 일대의 지방민을 "노인(奴人)"이라 칭하면서 왕경민들과는 다른 별도의 "노인법(奴人法)"으로 다스렸던 흔적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도도가 삼년산군의 고간이었다고는 하지만, 고귀한 왕실의 혈통을 타고난 성왕에게는 감히 왕의 목을 벨 수 없는 천한 이로 여겨졌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4. 기타
KBS의 만화 초롱이의 옛날여행 성왕 편에서는 진흥왕이 부리는 '''요괴'''로 등장해서[3] 성왕을 암살한다.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이동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담으로 이 만화에서 성왕 편은 비현실적이고 판타지스런 요소가 유별나게 많이 들어 있다.
[1] 干(간)인지 于(우)인지 불분명하다.[2] 다만 이는 김무력의 명령에 따른 행위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시 신라군이 처한 급박한 상황 탓이 컸을 것이라 생각한다.[3] 이 때문에 김무력이 등장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