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

 

'''관산성 전투
管山城 戰鬪'''

'''시기'''
554년 7월 혹은 12월경[1]
'''장소'''

신라, 관산성(현재의 충청북도 옥천군) 및 인근 지역[2]
'''원인'''
나제동맹의 파탄
'''교전국'''
백제·가야·왜국
신라
'''지휘관'''
'''백제군'''
<^|4>'''진흥왕'''(眞興王)
김무력(金武力)
우덕(于德)
탐지(耽知)
도도(都刀)[3]
그외 미상
'''성왕'''(聖王)
부여창(扶餘昌)
모노노베노 마가무
(物部 麻奇牟)[4]
'''일본 지원군'''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
(筑紫國造)[5]
그외 미상
'''병력'''
연합군 30,000여 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최고 지휘관 성왕 전사
좌평 4명 전사
연합군 29,600명 전사[6]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백제 연합군 대패, 성왕 전사.
'''영향'''
나제동맹 해체, 백제의 침체, 가야 멸망, 신라의 굴기(倔起)
1. 개요
2. 배경
3. 전투 양상
4. 전투의 영향
5. 관산성의 위치
6. 창작물에서
7.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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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신라 간의 전투 중 가장 유명하며 또 기록상으로 삼국시대 전투 중 가장 자세하게 기록된 전투다. 흔히 '''백제 성왕의 죽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쟁 당사국인 백제와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 가야, 일본 등이 직간접적으로 엮인 국제 전쟁으로,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후반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이어지는 후기 삼국 시대의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전투다.

2. 배경


고구려 장수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남진 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전성기 고구려보다 작은 나라였던 백제신라는 서로 부족한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결성한다. 이후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오면 신라가 원군을 보내고, 신라에 쳐들어오면 백제가 원군을 보내는 식으로 공동 대응해서 강대국 고구려를 한동안 막아내고 있었다.
5세기가 끝나면서 장수왕이 죽고 고구려의 공세가 좀 약해지자 나제동맹도 다소 느슨해져 후방에 있는 가야를 누가 먼저 차지하냐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거나 서로를 믿지 못해 국경에 방어태세를 갖추는 일도 있었지만, 어쨌든 관산성 전투가 일어나기 몇년 전인 548년 독성산성 전투 때까지도 위기에 빠진 백제군을 돕기 위해 신라가 원군을 파병하여 고구려군을 참패시키며 나제동맹이 유지되고 있는 것을 증명한 바 있었다. 독산성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참패시킨 것은 나제동맹에게 더욱 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550년 1월 백제 성왕은 당시 고구려 땅인 도살성(충북 제천)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러나 두달 후 고구려가 이를 탈환하기 위해 침공해왔고 백제는 금현성을 함락당하고 도살성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 원군이 왔고 신라군의 활약으로 고구려군은 패퇴하여 물러났다. 고구려군 퇴각 후 신라군은 고구려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독살성과 금현성에 방어병력 1천명의 병력을 주둔시켰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성을 증축했다. 이후 역시 고구려가 독살성을 되찾기 위해 재침해왔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를 패퇴시킨 후 퇴각하는 고구려를 따라 북쪽 고구려 본토를 침공했다. 이어 백제 역시 경기도 지역의 고구려 영토를 공격했다. 이 551년 때마침 고구려는 북쪽에서 돌궐의 잇따른 침입으로[7]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비록 돌궐의 침입은 고흘 장군의 활약으로 격퇴했지만 고구려의 관심이 북쪽에 쏠려있어 남쪽 방비는 허술해졌 있었고, 그 결과 신라와 백제는 각각 한반도 중부의 10성과 6성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백제는 개로왕 때 잃어버렸던 한강 하류의 고토를 회복하는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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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歲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漢城 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

이 해(552)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31년(서기 553)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의 딸이 신라로 시집 갔다.

삼국사기성왕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삼국사기진흥왕


553년, 한강 상류를 차지했던 신라의 진흥왕이 역으로 하류로 내려와 백제 측이 점령했던 한강 유역을 단독으로 모두 차지하게 된다. 이에 관해 진흥왕이 백제의 뒤통수를 치고 기습적으로 무력점령했다는 설이 정설이지만, 현재는 일본서기 기록에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백제가 방어 및 관리 능력의 부재로 한강 유역에서 일단 철수했고, 신라가 이 틈을 타서 무력충돌 없이 접수했다는 설이 흘러나오고 있다.[8]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성왕 문서 참조.
이로 인해 백제의 염원인 한강 유역 회복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성왕은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지 3개월 후 자신의 딸을 신라 왕실에 시집보내며 나제동맹을 다시 굳건히 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이 기록은 이후의 흐름을 봤을 때 성왕이 신라를 크게 치기 전에 신라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를 희생하는 수를 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는 당시 급변하고 있던 신라 왕실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염탐의 성격을 띄었을 수도 있다. 같은 시기 일본서기에서도 정월에 백제가 상부덕솔(上部德率) 시나노 차주(科野 次酒)[9]와 간솔(杆率) 예색돈(禮塞敦) 등을 일본에 보내 군병을 요청하고 일본은 6월에 전쟁물자를 백제에 보내주었고 554년 초에도 일본이 구원군, 말, 배를 백제에 보내주고 백제는 역박사, 의박사, 음악가, 승려 등 선진문물을 일본에 답례로 보내주는 등 신라와의 결혼동맹은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일 뿐 은밀히 전쟁준비를 계속 하고 있었다. 일본서기에서는 일본에 원군 요청하고 일본이 원군과 무기를 보내주는 것 위주로 기록되어있지만, 백제 내부에서도 이 시기 전쟁준비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 조정은 정권 교체기에 있었다. 바로 진흥왕이 성년이 된 지 얼마 안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이 즉위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7살에 불과했고 지소태후와 대신들의 섭정이 있었다. 진흥왕의 유년기 동안 신라 조정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지증왕대부터 활약해온 명장 이사부였다. 젊은 나이에 일찌기 우산국(울릉도)을 정복(512년)하는 성과를 올린 이사부는 529년 금관가야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어 합병을 이끌었다. 540년 진흥왕이 어린나이에 즉위한 후 이사부는 군부 최고의 직위인 병부령직에 올라 군권을 장악했다. 이후 이사부는 548년 독성산성 전투의 승리, 550년 독살성, 금현성 전투의 승리 등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551년 마침내 성년이 된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한다. 18세의 청(소)년 군주 진흥왕에게 백전노장이자 그간 권력의 핵심에 있던 이사부는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친정을 시작한 진흥왕은 이사부를 권력에서 배제한 것으로 보인다. 552년 이후 사서에서 이사부의 이름이 사라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사부는 약 10년 후 진흥왕의 권력이 공고해진 후 다시 중용된다. 당시 진흥왕은 이사부를 배제한 채 군부를 재편하고 김무력 등 젊은 장수들을 중용한다. 김무력은 이사부의 부장이었지만, 사실 다소 껄끄러운 관계일 수 밖에 없었다.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마지막왕 구형왕의 아들로 원래 가야왕자였는데, 금관가야를 멸망시킨 인물이 바로 이사부였던 것. 552년 이후 김무력은 신라군의 주력을 자주 지휘하게 된다. 553년 진흥왕의 명을 받아 한강 유역을 접수하고 신주를 설치한 장수 역시 김무력이었다.
이러한 신라 수뇌부의 정권 교체는 백제 성왕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을 것이다. 불패의 명장 이사부가 사라진 것은 백제로서는 절호의 찬스였다. 신중하고 현명한 지소태후와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이사부를 대신하여 신라를 이끌게 된 것은 머리에 피도 안마른 진흥왕과 용맹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젊은 장수 김무력이었다. 진흥왕은 성왕의 아들인 태자 부여창(훗날 위덕왕)보다도 나이가 어렸다. 밖에서 볼 때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젊은 왕이 혈기와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당대 최고의 명장을 좌천시킨 것은 거의 자멸에 가까운 행동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게다가 이사부를 대신하여 신라군을 이끌게 된 인물은 신라에게 반감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야왕자 출신의 김무력이었다.[10]
결국 결혼 동맹 직후인 554년 1월,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신라를 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신라 정벌군에는 규모 미상의 대가야군과 1천명의 일본 지원군도 합세하였다. 마치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4세기 후반 그 때의 구도와 비슷했지만 신라는 그 때의 약소국 신라가 아니었다.
백제의 이와 같은 군사 동원으로 양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직전인 553년 12월에는 왕자 부여창이 군대를 이끌고 백합야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패퇴시키기도 했다.

3. 전투 양상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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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색은 백제군 진격로
푸른 색은 김무력의 한강 점령군 진격로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전쟁 초기에 백제군은 신라의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고, 일본서기에 의하면 12월 9일 관산성을 함락해 불태우는데까지 성공해 일차적으로 우세를 보였다. 한편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는 9월에 백제군이 신라의 진성(珎城)을 공격해 남녀 3만 9천 명과 군마 8천필을 빼앗았다고 하는데, 관산성 전투가 한 곳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면 진성 전투는 9월에, 관산성 함락은 12월에 벌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윽고 백제군을 이끄는 태자 부여창은 신라 영역으로 더 진격해 들어가려 했고이를 백제의 늙은 대신이 반대했지만 부여창은 그 대신을 늙었다고 꾸짖은 뒤 공격을 강행해 신라 땅 안쪽의 구타모라(久陀牟羅)라는 곳까지 들어가 보루를 쌓았다.
그러나 김무력이 북쪽 한강 유역(신주, 新州) 점령군을 이끌고 북쪽에서 원군으로 내려와 도착하자 전세가 백제군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의 군대를 지금의 충청도 지역으로 데리고 내려오면 당연히 위쪽의 고구려가 빈집털이를 할 것이므로 성왕은 한강의 병력이 내려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사실 고구려는 당시 나라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기도 하고 북방 돌궐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신라와 밀약을 맺어둔 상태였으므로 김무력은 안심하고 북쪽을 비운 채 대군을 관산성에 투입할 수 있었다.[11]
이에 성왕은 본인이 없는 전방에서 태자가 분전하는 상황에서 전세를 만회하고자 보병과 기병 50[12]을 이끌고 밤을 틈타 신라군을 야습하려던 중 구천(狗川) 혹은 고리산(古利山)[13]이란 장소에 이르렀을 때 거꾸로 신라 복병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성왕은 신라의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14] 도도(都刀)란 자에게 살해당했다.[15]
물론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백제군이 승리하자 승세를 타고 신라군을 기습하려다 운 나쁘게도 김무력이 이끌고 온 신라 원군과 마주쳤다고 보기도 한다. 어쨌든 이때의 패배는 엄청난 것으로, 백제 전체가 휘청거렸다. 백제가 여기서 입은 타격은 임진왜란 당시의 칠천량 해전과 비교될 정도. 백제가 이 때의 피해를 복구하고 다시 신라에 적극적으로 공세를 시작하는 데는 거의 5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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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차이가 있다. 《일본서기》의 긴메이 덴노 15년에 따르면 태자 여창[16]은 관산성에서 승리한 후 신하들이 말리는데도 멋대로 신라로 더욱 쳐들어간다. 아무튼 여창이 직접 참여한 1차 관산성 전투는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으며, 성왕은 태자의 건강을 염려하여[17] 측근들을 데리고 관산성으로 가고 있었다. 즉 한국 사서의 기록에서 성왕이 신라군 기습을 목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고 한 것과 달리 성왕은 태자가 있는 본군에 합류하러 이동하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사전에 성왕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신라군은 온 나라의 군대를 모아서[18] 성왕 일행을 기습했고, 신라군의 매복에 걸린 성왕은 사로잡혀 고도(苦都)[19]에게 목이 잘린다. 그의 머리는 신라 궁궐 북청(北廳) 계단 밑에 매장되었고, 머리 없는 몸만 백제로 돌아온다. 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성왕의 무덤을 밟고 다니라는 신라 쪽 의도로 추정된다.[20] 한 나라의 왕인 성왕이, 그것도 3만여명을 거느린 상황에서 고작 50여기로 최전방에서 공격에 나섰다는 기록은 믿기 힘들기에 정황상 《일본서기》의 기록쪽이 더 신빙성이 있으리라 추정된다.[21]일본서기》에는 일설로 성왕이 의자에 앉아 자신의 칼을 끌러서 고도에게 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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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고도(苦都)가 명왕(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22]

【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일본서기》

요약하자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성왕이 관산성 전투를 지휘하다가 신라군을 습격하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일본서기》의 경우에는 관산성 전투는 태자가 이끌었고 성왕은 태자의 승리를 격려하고 전후 수습을 하기 위해 소수의 호위 병력만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하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서 사로잡힌 것으로 서술하는 차이가 있다. 성왕이 습격하기에는 지나치게 소수의 병력을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서기》의 내용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 시대에는 십(十)을 천(千)의 오기로 보기도 했다.
또한 성왕을 죽인 도도는 《삼국사기》에는 비장이자 고간이라고 나오지만 《일본서기》에는 자신을 천한 종이라고 지칭하며 이름 있는 왕을 죽여 이름을 높이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사마노(飼馬奴) 고도라고 나오는데, 사마노에는 우마카이얏코(ウマカイヤッコ)라는 훈이 달려있으며 말을 관리하는 하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기록상 적어도 장교 쯤은 되는 계급으로 나오기 때문에 고도가 진짜로 천민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디까지나 성왕의 신분에 비해서 그렇다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본다면 《삼국사기》 기록과 동일해진다. 참고[23] 또한 《삼국사기》에 언급된 인물이 사실은 고간(高干)의 지위에 있는 도도(都刀)가 아니라 이름 자체가 고우도도(高于都刀)이며 이는 《일본서기》의 고도와 같은 이름이라고 보기도 한다. 실제 《삼국사기》 판본들을 봐도 간干이 아니라 우于에 가까운 모습이다. 또한 고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일개 비장을 맡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왕이 사망하고 머리 없는 왕의 시신을 전해받은 백제군 본군 진영은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흔들리기 시작하고, 신라군의 총반격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는 4인의 좌평과 2만 9천 6백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전사[24]하거나 4인의 장수와 1만명이 전사[25]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태자 부여창도 포위당했는데, 일본 지원군의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26]가 뛰어난 궁술로 분전해 신라군의 포위를 겨우 뚫어 태자는 그 샛길로 도망쳐서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후 위덕왕은 탈출한 뒤 자신을 살린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를 칭찬해 쿠라지노키미(鞍橋君)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다만 큰 패배였던 건 맞지만 백제군 전사자의 숫자가 일정 부분 과장이라는 얘기가 여러 전쟁사 서적에서 지적되기도 한다. 위덕왕은 이 패배 이후에도 신라에 보복하기 위해서, 혹은 백제의 동맹이던 대가야를 돕기 위해서 등 계속 병력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후속공격은 한국 기록과 일본 기록을 종합해봐도 관산성 전투 때만큼 매섭지도 못했고 계속 실패해서 신라가 새로 정복한 땅을 영토로 굳히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 말은 이후 동원한 병력의 질이 높지 않았다는 뜻이며, 따라서 국왕 직속의 정예부대가 큰 손실을 입었다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삼국사기》에 전혀 없는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아들인 부여창이 아버지 성왕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왕위 계승을 거부하고 승려가 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이건 원로한 신하들이 신라를 치면 안 된다고 했는데 태자가 그 신하들을 늙었다고 꾸짖은 뒤 공격을 강행했다가 결국 아버지가 죽는 상황까지 이어졌기 때문. 즉 태자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라도 명분상 태자의 책임이 없지 않다. 본인도 스스로의 상황 오판으로 죽을 뻔 하다 겨우 빠져나왔다.
그러자 신하들이 예전에 나이든 신하들의 말을 들었다면 성왕이 전사하지 않았을 테니 이번에는 제발 신하들의 말을 들으라고 설득을 한다... 뭔가 찡하다. 결국 부여창은 즉위하고,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킨다.

4. 전투의 영향


관산성 전투와 후속 전투를 통해 신라는 한반도 중부 지방, 특히 한강 유역을 확고하게 차지했고, 이후 삼국간의 항쟁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반면 영토와 구심점을 잃어 휘청했던 백제와 고구려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특히 백제는 패전의 책임이 있는 태자 부여창이 왕위를 물려받는 과정에서 출가 해프닝이 일어나는 등 권위가 크게 떨어져 50여년 후 무왕 이전까지 신라에 제대로 반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이 권위 하락은 일시적인 약화 문제가 아니었다. 위례성을 빼앗긴 뒤 한동안 위태롭던 백제의 왕권은 성왕 대에 들어서 확립되는 듯 했으나, 이 패배로 인해 다시 왕권이 큰 손상을 입고 대성팔족을 비롯한 귀족세력이 다시 대두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백제의 왕권 세력과 귀족 세력의 대립은 끝나지 않고 지속되었으며, 이는 백제 말기인 무왕~의자왕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고, 간접적으로는 백제 멸망의 원인이 되기까지 한다.
신라는 관산성 전투 이후 주도권을 잡아서 기존에 백제의 후원으로 겨우 버티고 있던 가야 전체를 562년 완전히 합병했다. 가야멸망전 문서 참조. 곧이어 북쪽으로 추가 진출해 오늘날의 함경도까지 북진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 차지한 황해 연안의 항구도시를 통해 백제나 고구려의 방해 없이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게 되어 이후 삼국통일전쟁까지 이런 구도가 이어진다. 어떻게 보면 삼국 시대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 또한 나제동맹이 완전히 파탄난 것은 물론이고, 이후 약 100여년 간의 분쟁이 지속되면서 백제와 신라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다시는 우호 관계를 구축하지 못한다.
성왕을 붙잡고 큰 군공을 세운 장군 김무력은 이후 초고속 승진을 한 정황을 여러 기록간의 내용을 비교해서 알 수 있다. 551년 단양 적성비나 553년 7월 삼국사기의 신주 군주로 김무력을 임명할 때 김무력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여섯째 등급인 아찬이었는데, 555년 세워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나 561년 창녕 척경비에서는 3번째 등급인 잡찬으로 관등이 3등급 승진한 상태다. 거의 약 2년만에 3관등 승진인데 신라의 다른 기록을 봐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3단계 승진은 거의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다.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교과서나 각종 시험 레벨에서는 555년 건립설이 정답이지만 학계에서는 555년설과 561년설, 568년설이 대립하고 있다.[27] 관련 논쟁은 해당 문서 참조. 아무튼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창녕 척경비의 561년에도 잡찬이므로 8년만에 3관등 승진이니 이렇게 쳐도 상당히 고속 승진한 것은 맞다.

5. 관산성의 위치


관산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삼국사기 잡지와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에서는 옥천군 지역에 있는 삼성산에 있는 산성을 일반적으로 관산성으로 보고 있으나 근처 삼양리 토성등 일부 성들도 관산성으로 불렀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느 하나의 산성이 아니라 전체 산성을 통합하여 관산성이라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

6. 창작물에서


1997년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야마토 캠페인 동맹 지원(A Friend in Need)의 원래 버전은 야마토가 한반도에 진출해 백제를 도와 신라를 공격한다는 내용이었으며 관산성 전투를 배경으로 했다. 그러나 일본서기 원문을 가감없이 반영해 당시 임나일본부설로 큰 논란이 되었고 한국에서 마이크로소프트 불매운동 이야기까지 나와 결국 휴가(日向)를 도와 큐슈(九州)를 공격한다는 일본 국내 시나리오 내용으로 바뀌었다.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황산벌 지역에서 던전 중 하나로 등장한다.
영화 황산벌에서도 의자왕이 언급한다.

7. 기록



7.1. 삼국사기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32년(서기 554) 가을 7월, 임금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혼전 중에 임금이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성왕 본기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穠與加良 來攻管山城。軍主角干于德伊飡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15년(서기 554)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을 보수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明穠)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9천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삼국사기》진흥왕 본기


祖武力 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7.2. 일본서기


15년[28]

겨울 12월, 백제가 하부간솔(下部杆率) 문사간노(汶斯干奴)[29]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臣) 명(明)[30]과 아라(安羅)에 있는 왜신(倭臣)들, 미마나(任那) 여러 나라의 한기(旱岐)[31]들은 아룁니다. 시라(斯羅)가 무도(無道)하여 덴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코마(狛)[32]와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미야케(彌移居)[33]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우치노오미(有至臣)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시라(斯羅)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덴노께서 우치노오미(有至臣)를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시라(斯羅)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령(東方領)[34] 모노노베노 마가무노무라지(物部 莫哥武連)[35]를 보내 자기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카무무레노사시(函山城)[36]를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우치노오미(有至臣)가 데리고 온 백성 츠쿠시노모노노베노 마가와사카(竹斯物部 莫奇委沙奇)[37]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덴노의 위령(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 라고 하였다. 따로 아뢰기를 "만약 시라(斯羅) 뿐이라면 우치노오미(有至臣)가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코마(狛)가 시라(斯羅)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38]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츠쿠시노시마(竹斯島)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국(臣國)을 돕고 또 미마나(任那)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또 "신이 따로 군사 만명을 보내 미마나(任那)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탑등(毾㲪)[39] 1영, 도끼 300부, 사로잡은 성(城)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보낸 물건이) 적어 송구합니다."라 아뢰었다.

여창(餘昌)이 신라(新羅)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늙은 재상[40]

이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여창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41] 드디어 신라국(新羅國)에 들어가 쿠다무라노소코(久陀牟羅塞)라는 보루를 쌓았다. 그 아버지 명왕(明王)은 여창(餘昌)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新羅)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新羅)에서 사치스키(佐知村)[42]의 우마카이얏코(飼馬奴) 고도(苦都)【 다른 이름은 곡지(谷智)이다】[43]에게 "고도(苦都)는 천한 노비고 명왕(明王)은 뛰어난 군주다. 이제 천한 노비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苦都)가 명왕(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苦都)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쿠니노코키시(國王)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서는 "명왕(明王)이 호상(胡床)[44]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明王)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苦都)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다른 책에서는 "신라(新羅)가 명왕(明王)의 두개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明王)의 뼈(두개골)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여창(餘昌)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45]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트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 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여창(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여창(餘昌)이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쿠라지노키미(鞍橋君)라는 이름을 주었다.【안교(鞍橋)는 우리말로 쿠라지(矩羅膩)라 한다】[46] 이때 신라 장수들이 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모두 멸하려 했으나 (신라의) 한 장수가 "안된다. 야마토(日本) 덴노가 임라의 일 때문에 여러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 관가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16년(555) 봄 2월. 백제 왕자 여창(餘昌)이 왕자 (惠)【왕자 혜(惠)는 위덕왕(威德王)의 아우다】를 보내어 "성명왕(聖明王)이 적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15년에 신라(新羅)에게 죽음을 당했으므로 지금 그것을 아뢰었다】. 덴노가 듣고서 가엾고 한스럽게 여겼다.

일본서기》권제19 긴메이 덴노 15년(554년) 12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였고 추가 구원병을 요청함, 백제의 명왕은 죽고 여창은 퇴각함


[1]삼국사기》에는 관산성 전투 및 성왕의 죽음이 554년 7월이라고 되어있는 반면, 《일본서기》에는 554년 12월 9일에 함산성(관산성)이 함락되었고 성왕은 그 이후 시점에 전사했다고 되어있다. 다만 백제본기 뿐만 아니라 신라측 기록을 참고했을 삼국사기 신라 진흥왕 본기에도 성왕을 죽인 게 554년 7월로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7월에 일어난 전투였을 가능성이 높다. 혹은 묘사된 전투의 규모상 한 곳에서 한 번에 일어난 전투가 아니라 몇 달간 전쟁이 쭉 이어져서 이렇게 전투 시점에 대한 기록이 엇갈리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관산성과 같은 곳의 다른 이름인지 다른 장소인지 확실치 않지만 삼국유사에서는 9월에 진성(珎城)이라는 곳에서 백제군이 신라군에 승리했다는 기록도 있다.[2] 삼국사기 열전, 삼국유사, 일본서기에서는 관산성 이외에 구타모라(久陀牟羅), 구천(狗川), 고리산(古利山), 진성(珎城)이란 장소도 전쟁 중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정확히 현재의 어느 곳인지는 확인이 어렵다. 이들 모두 관산성, 즉 옥천군과 인접한 지역들로 추정된다.[3] 일본서기에는 고도(苦都)라고 기록되어 있다.[4] 모노노베씨이지만 백제인. 그래서 일본계 백제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관등은 시덕(施德). 백제의 지방 구분인 5방 중 하나를 통솔하는 동방령(東方領)의 관직을 맡았다. 일본서기에는 모노노베노 마가무노무라지(物部 莫哥武連)라는 이름으로 이름 뒤에 카바네(姓)가 덧대어 기록되어 있다.[5] 우지(氏)와 카바네(姓)이고(츠쿠시+쿠니노미야츠코) 이름은 안 써있다. 이 사람보다 먼저 등장한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가 있었는데 이름은 이와이(磐井)이고 가야를 도우러 신라를 공격하려던 일본에서 신라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6] 장수 4명과 병력 1만 명으로 표기된 기록도 있다.(삼국사기 김유신 열전)[7] 북쪽 상황을 요약하면 고구려는 북방 초원의 유연과 동맹관계였는데, 한창 돌궐유연을 무너트리고 초원을 차지하던 상황이었다. 돌궐은 유연과 한 편인 고구려도 공격한 것이다.[8] 다만 아직 이는 소수설이고 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인 임용한 교수는 조선정치제도 전공자라는 사실 또한 감안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노태돈, 송호정, 주보돈 등이 2019년 공동집필한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에서는 '백제의 포기 후 신라 무혈입성'설이 실려, 임용한 교수만의 주장으로 보기는 어렵게 되었다.[9] 성씨가 일본계인데 일본계 백제인으로 보인다.[10] 다만 나중의 역사적 기록이 증명하듯이 김무력은 신라의 대표적인 충신 및 명장 중 한 명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11] 고구려는 나중에 오히려 신라 땅 한강 하류를 통과해서 백제를 공격하기도 한다.[12]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보기 오십'이라 적혀있어 그 50명 중 몇 명이 기병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13]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조상 김무력의 전공을 설명할 때 성왕을 잡은 곳으로 언급된다.[14] 외위(外位)의 제 3관등이다.[15] 일본서기의 기록을 참조해서 신라에서 백제 측의 사기를 꺾기위해 일부러 '''노비''' 신분인 도도를 시켜서 성왕을 참수했다는 말이 나오곤 하는데 신빙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여기서 도도가 자신을 노비로 말한 건 진짜 노비신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왕인 성왕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천한 신분이라는 것을 돌려 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른 기록인 삼국사기에서는 도도의 신분이 비장, 즉 노비는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단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 전체가 쇼크를 먹은 건 사실이다.[16] 부여창, 후일의 위덕왕.[17] 아마도 태자 및 군사들을 치하하고 전후 수습을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18]삼국사기》에 언급된, 금관가야 왕족 출신인 김무력이 신주(지금의 서울, 경기도 지역)에서 원군을 이끌고 온 것을 말하는 듯하다.[19]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간 도도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20] 이 기록은 일본서기 원문에서도 본문이 아니라 그냥 그런 소문을 기록한 책이 당시 일본에 전해지고 있다는 정도로 기록되어있어서, 대패배 이후 덧붙여진 사건이 아닌가 하고 신빙성에 의심을 하는 학자들도 많다. 고대사회에선 왕족은 고귀한 신분이기 때문에 동서고금은 막론하고 적국의 왕을 포로로 잡을 경우 최대한 대우를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일본서기 기록만 봐도 도도가 사로잡은 성왕에게 절을 하였다. 죽이기 직전까지는 신라 측도 최대한 예우를 했던 사람의 시체에게 그런 모욕을 했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21] 임용한은 저서 전쟁과 역사에서 《일본서기》에 실린 성왕의 유언인 "짐은 매양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왔다. 더 구차히 살고 싶지 않다."라는 말도 실제 성왕의 유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22] 주보돈에 따르면 이때 고도가 "맹세한 바를 어기면 왕이라고 해도 종놈한테 죽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신라의 국법" 운운한 부분에서 맹세한 바를 어긴다는 것에 대해, 신라에서는 법흥왕에 의한 율령 도입 이전부터 국가 혹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뭔가 중대한 사안(강역 문제라던지)에 대해서 한 번 결정난 결과에 대해 "결정된 바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겠다"고 하늘에 맹세를 시키는 모종의 의식을 치렀는데, 그 근거로 봉평 신라비나 냉수리 신라비, 남산 신성 비(새로 쌓은 성이 3년 안에 무너질 시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내용) 임신 서기석(3년 안에 유교 경전을 통달하겠다는) 등을 근거로 그 '맹세'의 유효 기간은 관습적으로 3년으로 통용되었을 거라고 해석했다(3년 안에 맹세를 어기면 죄를 받는다는 것). 관산성 공격 1년 전인 553년에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는데, 백제야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앞서서 우호를 지속하려는 척 신라를 방심시키려는''' 책략이었겠지만 신라는 이걸 '''신라가 백제로부터 거의 빼앗다시피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에 대해 백제에서 더는 따지지 않을 것이고 우호도 지속하겠다'''는 표면상의 의미 그대로 해석했고, "어느 한 가지 맹세는 맹세한 시점으로부터 3년 동안 유효하다"는 신라의 관습상 성명왕이 계획대로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한 것을 "먼저 맹세한 바를 어긴 것은 너희 백제다!"고 선언하면서 천한 노비인 고도가 한 나라의 군주인 성명왕을 죽이는 합법적인 근거로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보면 일본 서기의 이 기록은 신라측 입장에서 내세운 법적 근거인 셈이다.(출처: 주보돈 《백제 성왕의 죽음과 신라의 '국법'》).[23] 조선 전기에 국왕을 경호하는 부대인 겸사복이라는 부대 이름도 명목상으로는 국왕의 마굿간지기라는 의미였다는 것도 참고할 만 하다. 비슷하게 중세 유럽에서 국왕군 총지휘관 비슷한 지위였던 constable도 어원을 따지면 왕의 마굿간 관리자란 뜻이다.[24] 《삼국사기》 신라본기.[25] 《삼국사기》김유신 열전.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 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26] 이 이름은 우지(氏)와 카바네(姓)이고(츠쿠시+쿠니노미야츠코) 이름은 안 써있다. 일본서기에는 이 사람 말고도 또 한 명의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인 이와이(磐井)라는 사람도 나오는데, 신라와 내통해 일본 본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즉 위덕왕을 살린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27] 당연히 교과서와 시험에선 정답이 여러 개일 순 없으니 어지간하면 정설 하나만 제시한다. 그리고 진짜로 애매한 사례면 그냥 그 주제로 시험문제를 내지 않고, 내서 논란을 만들면 그건 좋지 않은 출제 예시다. 한 공무원 시험에서 북한산 순수비의 건립년도 문제가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국정교과서에 써 있는 555년이 정답으로 인정됐다. 그러니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555년 건립으로 알고 있는 것이 좋다.[28] 554년[29] 음은 '몬시칸누'.[30] 명은 성왕의 이름인 명농의 축약.[31] 가야 소국들의 왕을 뜻하는 칭호. '칸키'라는 음이 달려있다.[32] 백제 측에서 부르던 고구려의 멸칭.[33] 가야의 왕실.[34] 백제의 지방 구분이던 5방을 통솔하던 방령 중 하나인 동방령. 치소는 현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에 위치해 있던 득안성(得安城)이다. 모노노베노 마가무(物部 麻奇牟)의 관직.[35] 백제에 귀화한 일본계 백제인으로 추정되는 인물.[36] 함산성. 일본서기에서는 관산성(管山城)이 함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카무무레노사시'라는 훈은 고대 일본어가 아니고 현지어를 옮긴 것이다.[37] 츠쿠시(筑紫, 竹斯)는 큐슈의 지명으로 현 후쿠오카현(福岡県)의 일부에 해당한다. 모노노베(物部)씨의 츠쿠시 분파 출신인 듯 하다.[38] 고구려가 신라와 연합한 것을 의미.[39] 직물의 일종.[40] 원문에는 '오키나도모(耆老)'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60세 이상의 신하를 뜻한다.[41] 일본서기의 윤색이다.[42] 현재의 충청남도 보은군.[43] 고도(苦都)에는 '코츠', 곡지(谷智)에는 '코쿠치'라는 음이 달려있다. 우마카이얏코는 말 키우는 하인이라는 뜻.[44] 걸상처럼 되어 있는 간단한 접의자.[45] 우지(氏), 카바네(姓)만 나와있고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46] 쿠라지는 존칭 접미사인 지가 붙은 어형이나 일본 측에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부연설명이 달려있는 걸로 볼 때 고대 한국어로 보인다. 쿠라지에는 '이로움을 얻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