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구

 


'''신라구의 일본 침입'''
新羅の入寇, 新羅寇
'''시기'''
811년 ~ 10세기
'''장소'''
일본 혼슈 지역, 규슈 지역 및 쓰시마, 이키 등 부속 도서.
'''원인'''
신라 말~후삼국시대 혼란에 따른 해적의 발흥
'''교전세력'''
신라구
일본
'''지휘관'''
[1]
현춘[2]

일본인 가담자
山春永
葛津貞津
永岡藤津

신라인 가담자
이빈장(你賓長)
윤청(潤淸)
청배(淸倍)
조창(鳥昌)
남권(南卷)
안장(安長)
전운(全運)
과재(果才)
감삼(甘參)
장언(長焉)
재장(才長)
진평(眞平)
장청(長淸)
대존(大存)
배진(倍陳)
연애(連哀)
향숭(香嵩)[3]
전승(傳僧)
관해(關解)
원창(元昌)
권재(卷才) 등
훈야노 요시토모(文室善友)
사카노우에노 타키모리(坂上瀧守)
오노노 하루카제(小野春風)
다무라노 다카요시(田村高良)
벤균(面均)
시모이마누시(下今主)
도요마루노 하루타케(豊円春竹) 등
'''병력'''
전체 병력 규모 불명
894년의 침입 2,500여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전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일본 해안지역 피해
한반도와 일본의 우호관계 단절
한자
新羅寇
한글
신라구
1. 소개
2. 신라구 기록
2.1. 811년의 신라구(弘仁の新羅の賊)
2.2. 820년 신라인의 난(弘仁新羅の乱)
2.3. 소강기
2.4. 866년 대마도 침공 계획
2.5. 869년의 신라구(貞観の入寇)
2.6. 893년의 신라구(寛平の韓寇)
3. 이후


1. 소개



통일신라 후기 9세기부터 후삼국시대 무렵 10세기 초엽까지, 일본 헤이안 시대 중반기에 존재한 한국의 대표적 해적. 신라 쪽 해안을 근거지로 해서 일본을 약탈한 한국계 해적 집단이다.
일부 중국인이 포함되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름대로 신라인 해적이었다.[4] 신라어 통역이 필요했다는 기록도 여러 번 등장하기 때문. 물론 여기서 신라란 옛날 삼국시대 시절의 경상도에 있던 신라가 아니라 남북국시대의 신라이므로 (그 당시 신라에 포함된) 백제계와 고구려계까지 모두 포함한 한반도 출신의 해적들을 의미한다.
일본에서 해적질하다 사로잡힌 현춘은 자기들이 신라 왕의 명을 받고 쳐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당시 진성여왕해적의 일본 약탈을 사주하거나 지원했을 수도 있고 그냥 현춘이 변명으로 왕명을 사칭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기록의 간략함으로 자세한 것을 알기는 어렵다. 사실 위 현춘의 진술도 그렇고 일본 사서의 몇몇 기록을 문구 그대로 받아들이면 무법자 해적이 아니라 '그냥 신라 해군'일 수도 있다.[5] 일본 기록에서도 '신라 해적'과 '신라'를 구분하지 않고 신라라는 나라가 일본을 호시탐탐 노리고 계속 쳐들어온다는 식으로 써 놓은 게 대부분이다. 사실 사략 해적과 전근대 해군의 경계가 모호한 건 세계사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영국프랜시스 드레이크만 해도 그렇다. 일부 신라구가 견훤처럼 신라군 정규군이 군벌화된 케이스라면 해적과 해군 둘 다일 수도 있고.

통일신라 말기에는 중앙 정부가 정권 다툼으로 지방 통제력이 약화된 사이 지방 세력들이 호족으로 자립하여 지방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되고 치안이 불안정해진다. 게다가 기근이 겹쳐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웠었다. 따라서 생업을 포기하고 도적이 된 사람이 많았는데 신라구도 이렇게 생겨나 한반도 근해에서 활동하다 멀게는 가까운 일본 해안가까지 약탈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해적의 활동이 시작된 것은 대략 9세기 전반부터지만 장보고가 9세기 당시 당나라, 신라, 일본등을 오가며 날뛰던 해적들을 때려잡고 해상을 안정시킨 9세기 중반에는 일본 기록에서도 신라구의 약탈 기록이 크게 줄었다가 장보고와 청해진이 숙청된 9세기 후반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 후삼국시대 초기에 규모에서 절정을 찍게 된다.
한반도는 매번 왜구들에게 털리기만 했다고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 반대도 존재했다. 일본 측 사서들에서는 신라가 일본을 침공한 기록들이 꽤나 많이 확인이 되며 또한 이후의 신라구들 때문에 규슈쪽은 한 때 사람이 못 살 정도가 되었고 일본 정부에서는 신라인 입국 금지 조치를 내리고 일부 지방에서는 징병제를 시행할 정도였다. 일본 측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구가 흥성할 때는 천단위로 되는, 사실상 군사집단이나 다름없는 신라구들이 규슈로 쳐들어 갔다. 이들이 규슈로 간 것은 규슈가 일본 본토 중 한반도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으로 보이며 신라인 이민자가 많아 정보를 얻기 쉬웠다는 점도 한 몫 했다고 보기도 한다. 한반도로부터 거리가 가장 가까운 쓰시마 섬, 이키 섬, 고토 제도도 주요 약탈 대상이었다.
아무래도 신라구가 날뛰는 시기는 워낙 혼란스러운 시기다 보니 한국 측의 사료는 견훤과 왕건이 당대에 날뛰던 한반도 서해와 남해의 해적을 소탕했다는 식의 기록을 제외하면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일본의 사서에서는 자세하게 나온다. 신라 말부터 전국 각지에서 도적이 날뛰어서 백성들이 힘들었다니 세상이 혼란해졌다니 하는 기록은 있는데 도적의 목록이나 일본이나 중국으로까지 가서 약탈을 하거나 무역을 했다는 식의 활약상(?)까지 일일히 나오지는 않으며 그냥 당대에 세를 떨쳤던 도적들에 대해서나 간략하게 나오는 수준이며 장보고견훤, 왕건이 해적을 때려잡아서 기반을 다졌다고는 하나, 해당 해적조직들이 일본이나 중국에까지 가서 어떻게 노략질했는지에까지 대해서 적은 것은 아니다. 한국의 사료에서 기록이 소략하지만 일본 사서의 기록이 매우 상세하기 때문에 신라구의 해외 활동(?)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으며 견훤이나 왕건이 해적을 소탕한 것을 공으로 내세웠을만큼 신라내에서도 해적이 상당한 골칫덩어리였던 것은 마찬가지이기는 하다.[6] 한국 고대사의 경우 동시기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사료가 너무 부족하여 교차검증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신라구는 현춘이나 능창[7]처럼 후삼국시기 해적들이 유력 호족들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일종의 사략 집단이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견훤이나 왕건이 해적을 때려잡았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견훤의 후벡제나 왕건의 고려가 호족연합국가적인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때려잡지 못한 해적들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 반대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왜구도 일본 사서의 기록보다는 중국, 한국 사서에 훨씬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아무래도 피해를준 쪽보다는 입은 쪽이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왜구나 신라구가 발호해서 그 규모가 커져 해외까지 원정나갈 정도면 이미 자국에서는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잃어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막장 상황(일본의 남북조시대와 전국시대, 통일신라 말기의 후삼국 발호 등)이라 국내 치안 문제조차 손도 못쓰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니 국내에서 사서 기록은 커녕 해적에게 신경쓰는 것 자체가 정권 능력 밖의 일이었다. 실제로 신라구가 규모가 커지고 일본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는 시기와 동시대인 진성여왕 치세는 지방 통제력이 무너져 신라 내륙 지방에서 세금 걷는 길이 막힐 정도였다.
오늘날에는 일본혐한 세력들이 원나라의 일본 원정과 함께 "한국인들도 일본을 침략해서 학살, 방화, 강간 등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이 다 틀린 것은 아니나 왜구나 신라구나 해적인 건 마찬가지고 고려 말 시기 왜구의 준동이 단순히 학살과 방화, 강간을 넘어서 고려라는 국가 자체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심각했으나 신라구의 경우 일본이라는 국가의 근간을 흔들지는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 둘을 같은 선상에 넣고 비교하는 건 맞지 않다.

2. 신라구 기록


신라구와 별개로 능백묵서(綾布墨書)와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718년과 720년에 신라가 서일본 변방을 두 차례나 공격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단, 이 기록들은 삼국사기에는 전혀 없는 내용들이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를 참조.
811년 이전까지는 일본에서 신라인의 개별적 범죄 같은 사건은 간간히 있어왔지만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겨우 몇 번 정도로, 사무역이 활발하고 일본 서부에 체류하는 신라인이 많았던 당시 분위기상 흔한 사태는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조직적인 해적들이 등장하는 것은 811년 부터이다.

2.1. 811년의 신라구(弘仁の新羅の賊)


일본후기에 의하면, 811년 8월 일본 다자이후에서 조정에 올린 공문에 의하면 신라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지방의 곡식을 운반하던 도중 바다에서 해적을 만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고 김파형(金巴兄), 김승제(金乗弟), 김소파(金小巴) 세 사람만 겨우 살아 일본 땅에 표착했다. 이들은 신라로 돌려보내줬다고 한다.
811년 12월 6일, 쓰시마 섬 서쪽 바다에 신라 배 3척이 나타났고 그 중 1척의 배가 사스우라(佐須浦)에 다다랐다.[8] 배 안에는 10여 명이 있었는데 신라어가 통하지 않아 사정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다음날 또 20여 척이 나타나 횃불로 서로 연락하는데 그 모양을 보아 해적선이었다고 한다. 전투가 일어나 먼저 표착한 신라인 5명을 죽이고 5명은 도망갔으나 4명은 붙잡았으며 무기고를 지키고 군사를 내었으며 쓰시마에서 신라 쪽을 바라보니 매일 밤 여러 곳에서 불빛이 빛나[9] 일본 조정은 신라에서 쳐들어올까 우려해 쓰시마에 신라어 통역과 군을 파견하고 인접한 나가토, 이즈모 등 요충지에 군사를 배치해 경계하도록 했다.
일본기략(日本紀略)에 의하면 813년 2월 29일에는 신라인 110명이 작은 배 5척에 나눠타고 지금의 나가사키고토시인 오지카시마(小値賀島)[10]에 상륙해 현지인과 맞붙어 9명은 죽고 101명은 붙잡혔다.

2.2. 820년 신라인의 난(弘仁新羅の乱)


이들은 신라 본국에서 출항한 해적이 아니라 일본 내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이 난을 일으켜 해적이 된 사건이다. 지금의 일본 동부 시즈오카현스루가, 토토미(지명)에는 밀무역을 행항 죄 등 다수의 신라인 범죄자들을 유배시켜놓은 상태였는데, 이들이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켜 주민들을 죽이고 관공서를 불살랐다. 현지 병력으로 공격했지만 제압에 실패했고 신라인들은 이즈를 습격한 후, 바다로 나와 해적질을 했다. 무사시간토 7개 쿠니의 병력을 원병으로 동원해 겨우 제압했다고 한다.

2.3. 소강기


이런 사건들로 인해 일본인들이 신라에 대한 감정이 나빠지게 되었고, 834년에는 해적이 아닌 신라인들이 다자이후 앞바다에 오자 일본인들이 마구 활을 쏴 상처를 입히고 활을 쏜 자를 처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835년에는 신라 상인들이 일본 해안을 염탐하는 것이 끊이지 않는다고 해안경계를 강화했다. 그러나 장보고청해진을 설치하고 신라 근해의 해적을 소탕하자 9세기 중반 일본 측 기록에서도 신라 해적에 관한 기록이 거의 사라졌고, 839년에는 일본 견당사가 튼튼한 신라 배를 빌려타고 귀국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가 이어졌다.

2.4. 866년 대마도 침공 계획


866년, 히젠노쿠니 기이군(基肆郡)의 기다이료 관직에 있던 야마노 하루나가(山春永)가 신라인 이빈장(你賓長), 그 외 각급 관직에 있는 45명과 손잡고 신라의 석궁 기술을 이용해 쓰시마섬을 쳐서 빼앗자는 계획을 짰지만 사전에 들통나 무산되었다. 일본 측은 즉각 신라와 가까운 주고쿠와 규슈의 여러 쿠니를 단속하고 경계를 강화할 것을 명했다.
그 외 866년 오키 사람 아즈미노 사키오(安曇福雄)는 越智宿禰貞厚 등이 신라인과 손잡고 반역을 도모했다고 밀고했으나 이건 사실이 아니라 무고였다. 아즈미노 사키오는 모함한 죄로 멀리 유배형에 처했다.

2.5. 869년의 신라구(貞観の入寇)


869년 5월 22일, 신라 해적이 두 척의 큰 배를 타고 하카타(후쿠오카)에 상륙해 부젠국(豊前国)의 수도로 보낼 공물을 약탈해갔다. 일본 측은 군사를 보내 뒤쫓았으나 일본군이 기강이 해이해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아 대부분 사로잡지는 못했고, 해변의 백성 5, 6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쫒아가 싸우다가 활을 쏘아 두 해적에 부상을 입힌 정도였다고 한다. 이 사건에 일본군은 거의 제 역할을 하지 못했는지 일본 중앙정부는 여기를 관할하는 다자이후를 강하게 비난, 견책 처분하고 국방체계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쳤다. 869년 12월 14일, 29일에도 신라 해적의 극심한 일본 침입과 약탈이 신궁과 신사에 보고됐다.
870년 대마도 사람 우라베노 오토쿠소마로(卜部乙屎麿呂)가 신라 바다 근처에 가마우지를 잡으러 갔다가 신라국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그가 살펴보니 당시 신라에서는 큰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고 있었고, 신라인에게 물어보니 신라가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한 준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겨우 탈옥해 일본 본국에 이 사실을 전하고 본국의 지원을 요청, 대비했다고 한다. 다만 개인이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라 당시 신라 경문왕 정권이 국가적으로 진지하게 대마도 정벌 준비를 했는지는 불확실하며, 원종과 애노의 난 발발까지 20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럴 여력이 없었을 가능성도 높다. 혹은 당시 신라구 해적이 일본 연안을 약탈하는 일이 잦았다는 점이나 이후 점점 신라구의 규모가 수천 단위로 커진다는 점을 볼 때 오토쿠소마로가 붙잡히고, 또 봤던 것은 정식 신라 해군이 아닌 대규모 신라인 해적기지였을 수도 있다. [11]
869년의 공물 약탈에 위의 대규모 전쟁 준비 썰까지 겹치자 일본 측은 위기감을 느끼고 결국 다자이후 관할에 있는 일본 서부지역 전체의 신라인들을 무츠 등 일본 동부로 강제이주 시킨 후 구분전(口分田)을 주고 귀화시키기로 결정했다. 신라인을 강제이주시킨 일본 동부는 현대에야 수도권(일본)도호쿠지역으로 일본화가 완료됐지만 이 당시는 야마토 민족과 구분되는 에조와의 다툼이 계속되는 황량한 미개척지였다. 870년 9월, 신라 해적에 가담한 혐의로 신라 상인 윤청(潤淸) 등을 일본 동부 도호쿠로 유배시킨다. 윤청 등은 기와를 만드는 재주가 있어 기와 만드는 일에 종사하게 하고 일본인에게 그 기술을 전수하도록 명령했다.
870년 11월 13일, 다자이후의 쇼니 후지와라노 겐리마로(藤原元利万侶) 등 5명이 신라인과 내통해 모반을 계획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872년 5월 발해 사신단 60명이 배 2척에 타고 사쓰마에 표착했지만, 서로 말이 다르고 의심스러워 신라 해적이 일본과 친밀한 발해인을 사칭해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붙잡았다. 한 척은 예인 도중 도망갔다고 한다.

2.6. 893년의 신라구(寛平の韓寇)


이 시기는 견훤이 무진주에서 892년 왕을 자칭하는 등 신라 말의 혼란이 본격화된 시기였고, 893년부터 있었던 신라구는 그 활동범위나 규모에서 절정기였다.
일본기략과 부상략기에 의하면 893년 5월 11일, 다자이후는 신라 해적을 발견했다. 이들은 히고국(肥後国, 지금의 구마모토현)을 습격해 사람을 죽이고 민가를 불태우고 히젠국(肥前国, 지금의 사가현, 나가사키현)을 습격했다. 이듬해 894년 2월 22일, 3월 13일, 4월 14일에도 신라 해적이 변방의 섬을 약탈했다. 일본 중앙정부는 후지와라노 쿠니츠네(藤原国経)를 보냈지만 해적은 이미 도망간 뒤였다.
894년 9월에 대규모 신라구가 침입했는데, 그 규모는 100여척의 전선에 2,500명의 병력이며 당나라 사람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 병력규모면 후삼국시대 고려후백제의 정규 수군 규모와도 맞먹을 정도인데, 규모가 과장된 것이 아니라면 후삼국시대 초기 해상 대호족의 후원을 받는 세력이었을 것이다.[12]
9월 5일 아침, 45척의 신라 해적선을 맞아 싸운 자는 일본 조정에서 파견된 장군 훈야노 요시토모(文室善友)였다. 그는 일본 국내의 여러 전란에서 10년 이상 뛰어 실전경험이 풍부한 장수였다고 한다. 그는 다무라 다카야스(田村高良)를 시켜 군사를 정비한 뒤, 쓰시마섬 고쿠분지의 승려 벤균(面均)과 가미아가타 군(上県郡)의 부대령(副大領) 시모이마누시(下今主)를 압령사(押領使)로 삼아 100명의 병사를 각각 5명씩 20개 번으로 나누고 도요마루노 하루타케(豊円春竹)에게 40명의 약한 병사를 맡겨 그를 미끼로 요시토모가 있는 곳까지 적을 유인하고 양동작전으로 쇠뇌를 한꺼번에 쏘게 했다. 신라 해적단도 여기에 응해 사격전이 벌어졌지만 비처럼 쏘아대는 화살에 도주했고, 도주하는 신라 해적을 추격했다. 그 후 10월 6일까지 토벌전이 계속되었고 대장 3명과 부장 11명을 포함한 도적 302명을 사살하고[13] 배 11척과 각종 전쟁병기를 노획했다.
이 때 사로잡힌 자로 현춘이 있었는데, 그는 신라에 큰 흉년이 들어 굶주렸기 때문에 자신들은 물자를 얻기 위해 신라 왕의 명령으로 쳐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자신들은 신라 왕이 파견한 수많은 부대 가운데 일부분일 뿐이라고 증언했다. 또한 붙잡히지 않고 퇴각한 자들 가운데 뛰어난 장군이 셋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당나라 사람(唐人)이라고 했다.
이듬해인 895년에도 신라 해적이 이키 섬을 습격해 관사를 불태웠다.

3. 이후


신라구는 930년대까지도 존재했지만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로는 사회가 안정되고 중앙정부의 통제력도 어느 정도 강화되면서 신라구의 존재는 대체로 사라진다. 하지만 후삼국이 통일된 뒤에도 일본에선 여전히 신라구가 공포의 대상이었고 10~11세기에 고려인 해적이 출몰해 규슈를 약탈한 기록이 몇 차례 등장하는데, 아마미 제도 해적이나 여진족 해적으로 추정되는 정황이 일본 여러 기록에서 섞여있다. 11세기 동여진 해적들이 일본을 약탈했을 때는 동여진 배후에 고려가 있을 것이라 의심했으나 고려가 일본인 포로 259명을 다시 일본에 송환하면서 그 오해가 풀리고 처음으로 고려와 일본 간의 국서가 오고가기도 했다.
헤이안시대 일본이 국풍이 발달하고 대외교류가 줄어드는 전적인 원인이 신라구는 아니지만, 한 계기가 되었다. 삼국시대 때부터 백제와 일본이 친했고 신라는 일본과 사이가 나빴다는 쪽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통일신라는 백제 때만큼 밀접하게는 아니라도 아스카 시대, 나라 시대 내내 상당히 활발하게 대규모 사절단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했다. 통일신라가 무너지기 전 9세기까지는 장보고로 대표되는 국제 사무역은 어느 정도 활발했으나, 일본 서부가 해적에 탈탈 털려 학을 떼고 신라인 입항 금지, 귀화 금지, 이미 머물던 신라인은 해적을 도울 수 있다는 구실로 동쪽으로 강제이주시키고 10세기쯤 되면 사무역도 감소. 후삼국 성립 이후 후백제는 일본에 옛 백제 시절 인연을 상기시키며 적극적으로 통교 요청을 했지만 니들도 신라 신하 아니냐고 해서 사신은 전부 대마도에서 문전박대당했고[14] 고려왕조와도 건국 후 약 100여년간 공식 교류가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물론 후백제와 교류를 맺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적대감때문은 아니었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후백제와 우호관계를 맺으면 일단 견훤이 해적을 때려잡아서 기반을 다진 만큼 해적을 때려잡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고 신라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다는 명분도 있지만 우호관계를 맺은 만큼 후백제가 어려움에 처하면 병력을 내보내야 할텐데 현실은 장원제도가 이 시기를 전후해 확산되어가면서 이시기에 중앙집권제도가 붕괴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데다가 무엇보다도 백강 전투에서 병력을 대거 잃고 야마토 인구의 상당수가 천연두로 사망한 경력 때문에 트라우마가 강했다. 그러다보니 해적을 때려잡을 수 있다는 이점에서 볼수있듯이 거부한 것이었다.

[1] 붙잡힌 해적들이 왕명으로 일본을 약탈했다고 주장하지만 확인되지 않음[2] 직접 해적행위를 지휘한 신라구 중 유일하게 이름이 전해지는 인물이다.[3] 신라인 승려라고 한다.[4] 왜구도 전부 일본열도 출신만 있던 건 아니었고 일부는 중국인이나 한반도인이었다.[5] 일본삼대실록 870년 2월 12일 기사[6] 당시 당나라도 막장 상황이라 동아시아에서 당나라 해적들도 골칫거리였다. 장보고가 특히 당나라 해적들을 많이 소탕했다. 마찬가지로 13세기 이후 왜구 또한 일본 본토에서도 커다란 골칫거리여서 막부정권에서도 왜구를 소탕하기위해 꽤나 노력을 하였다.[7] 견훤에게 종속된 해적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독자적인 세력이었다는 설도 있어 좀 애매하다.[8]쓰시마섬 이즈하라의 코모다하마(小茂田浜)인데 훗날 원나라의 일본원정몽골군이 상륙한 곳도 이 곳이다.[9] 지금도 대마도에서 육안으로 부산, 거제 지역이 보인다.[10] 당시 표기는 小近島. 발음은 같다.[11] 국가적인 침공 준비였다면 무엇보다도 보안에 철저해야 했을 텐데 이미 사로잡은 목격자를 살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12] 훗날의 왜구 역시 지방 영주의 후원을 받는 세력도 있었다.[13] 일본기략에서는 200명 정도를 사살했다고 되어있다.[14] 신라구란 당연히 원신라영역(경상도) 출신 해적만 말하는 게 아니라 통일신라의 영역 전체에서 온 해적을 통틀어 말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는 백제 유민이라고 해적질과 상관이 없다고 볼 수가 없었다. 당연히 신라구 중 원신라계나 일부 고구려계, 당나라계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외에 많은 수는 옛 백제 영역 출신이었을 것이다. 신라의 신하니까 안 받겠다는 건 명분상의 이유인데 견훤은 칭왕 이후에도 신라의 신하를 자칭한 경력도 있고 해서 꼬투리 잡히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