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연합군

 



Silla-Tang Alliance
1. 개요
2. 배경
3. 경과


1. 개요


650년 6월 까지 신라의 마지막 연호인 태화(太和)를 사용하였으나, 이후 당 고종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한 시점부터 당 조공질서에 편입해 나당동맹이 성립됐다고 본다. 이후 이 동맹관계를 전제로 결성된 연합군이 나당연합군.

2. 배경


본래 삼국시대의 정세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이래로 전성기의 고구려군을 비교적 열세인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을 맺고 연합해 서로 도와주면서 방어하는 형국이었으나 진흥왕대 신라는 한 세대만에 영토를 2~3배로 늘리는 급격한 팽창에 성공했고, 대신 신라의 영토는 이전보다 넓어졌지만 한반도 중부지방 전체를 차지하면서 북쪽의 고구려와 서쪽의 백제에게 포위당하는 형세가 되었다. 그리고 동쪽의 현해탄 넘어에 있으며 신라의 배후에 있는 일본은 백제와 동맹국이었다. 신라 입장에선 적대적인 세 개의 나라에 둘러싸여 있던 샌드위치 형국이었던데다 백제 의자왕 집권시기에 백제의 적극적인 공격으로 급속도로 영토를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생존을 위해 강력한 외부 세력과의 동맹이 반드시 필요했다. 마침 고구려를 껄끄럽게 여기고 있던 당나라 역시 고구려를 견제할 동맹국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신라와 당나라가 동맹을 맺으니 이것이 바로 '''나당동맹'''이다.

3. 경과


일반적으로 나당동맹에 대항해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관계(여제동맹)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백제 멸망 일보직전인 650년대에나 느슨하게 성립했을 뿐, 백제 역시 고구려와는 고국원왕, 개로왕 시절부터 수백여 년간 쭉 사이가 안 좋은 편이었고 그때문에 백제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꾸준히 중국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즉, 쉽게 말하자면 여제동맹이란 안보를 같이하는 동맹이라기 보단 공공의 적인 신라를 우선적으로 조지자는 제휴 관계 정도였던 것.
백제가 아닌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게 된 결정적 계기는 645년이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제1차 고구려-당 전쟁) 당태종은 백제와 신라에게 고구려의 후방을 공격할 원군을 요청했다. 신라는 이에 응해 고구려를 공격한 반면, 의자왕은 당나라의 요구를 무시하고, 대신 신라가 원정을 간 사이를 틈타 신라의 측면을 침공하여 전과를 올렸다. 이로서 백제는 당의 요청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당을 도운 신라를 공격, 즉 이때부터 당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은 백제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았다.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이 즉위하자 의자왕은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기 위해 651년에 의자왕은 당나라에 한 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이때 당나라 조정에서는 백제로 귀국하려는 사신에게 국서를 보내 더 이상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과 그동안 빼앗아간 신라의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때 백제는 지금의 경상도 서부를 상당히 점령한 상태였고 신라에 이를 순순히 돌려주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었으므로 따를 수 없었다. 이후로 백제는 당과의 관계를 거의 단절하고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652년 정월에 당에 사신을 파견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의자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당과 적대적인 고구려에 좀 더 가까워졌는데 알다시피 당과 고구려는 전면전쟁을 여러 번 벌인 적대관계. 백제가 고구려를 가까이 하면서 당과는 완전하게 척을 진 형태가 되었다.
반면 신라의 경우는 645년에 원군을 파견해 당나라를 도울 수 있다는 제스처를 취했고, 648년, 후에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를 당에 파견하여[1] 신라와 당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을 확인하고, 이어 649년 당고종이 즉위하면서 백제에 신라의 성을 돌려줄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신라를 공격할 경우 당이 개입할 것이라는 것을 천명하였으며, 왜에도 신라 지원을 요구하는 등 650년 부터 본격적으로 나당동맹이 표명되었다.
660년, 당의 소정방과 신라의 김유신이 백제를 협공하여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열흘만에 멸망시켰다. 짧은 시간에 멸망을 당한 이유는 백제는 당시 당나라가 이런 식으로 쳐들어온다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 그 당시의 항해술로는 고구려 앞바다를 거쳐서 와야 정상이지 10만이 넘는 대함대가 황해 먼바다를 바로 넘어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다에서 13만 당나라 수군이 넘어와 백제의 뒷통수를 때리면서 백제는 쉽게 멸망했다.
668년, 당의 이세적과 신라의 김인문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고구려가 승리를 거둔 과거 1, 2차 여당전쟁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고구려에서 내분이 일어나 대막리지 연남생이 고구려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국내성 일대를 당나라에 그대로 가져다 바친 상태에서 당나라가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침공을 해 왔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였음에도 고구려는 2년에 걸쳐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668년 말, 수도 평양성이 함락당하고 고구려는 멸망하게 된다. 신라군은 고구려 남부 방어선을 뚫고 북진하여 당군을 도와 평양성을 함락시키는데 일조한다.
이후 나당연합군은 내분을 겪게 되는데, 발단은 당이 평양 이남을 신라에게 주기로 한 약속을 저버리고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 야욕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당은 평양에는 안동도호부, 공주에는 웅진도독부를 두고 경주에는 계림대도독부를 두어 신라의 문무왕을 계림 도독으로 삼았는데, 물론 당나라는 신라 고유영역까지는 직접 지배하지 못했으므로 계림도독부는 이름만 존재하는 허울뿐인 통치조직이긴 했지만 이는 명백히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당의 지배 하에 두겠다는 당나라의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한편 신라는 이에 대하여 고구려부흥운동을 몰래 후원하여 당을 견제하는 한편 당과 직접적으로 대결하여, 나당 연합군은 와해되고 7년간의 나당전쟁이 일어났고, 이후 나당전쟁에서 당나라가 패배해 한반도 일대에서 세력을 물리게 된다.
사실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예상하고, 고구려가 멸망하기 한달전에 왜에 사신을 보내어, 왜와 중립적 우호관계를 만들어 후방을 안전하게 만들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당나라와 전쟁 중에도 당에 사신을 보내어 "살려만주세요" 또는 "우린 아직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 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금 봐도 전쟁 중에 적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은 독특한 신라의 외교술이다.

그렇게 나당동맹은 깨졌지만 나당전쟁 이후 발해가 발흥하며 각국의 영토가 대강 정해지고 서쪽에서 토번이 세를 떨치자 한반도까지 신경쓸 수 없게 된 당은 성덕왕대부터 다시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 신라는 당의 최우방국으로 취급받았고 각지에 신라방이라는 거주지역이 만들어졌다.
[1] 앞서 김춘추는 고구려와 일본에 각각 한 번씩 직접 건너가 화의를 요청했으나 결렬되어 아무 소득 없이 돌아왔다. 고구려와 매년 싸웠음에도 고구려를 찾아간 이유는 연개소문이 반란으로 신생정권을 세웠기 때문에 그쪽으로 희망을 걸고 갔으나 포로신세로 지내다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