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시대

 


1. 개요
2. 상세
3. 철기의 특성


1. 개요


鐵器時代. 철기를 사용했던 시대.
청동기 시대 이후, 의 가공법이 보급되며 철기의 사용이 보편화된 시대를 뜻한다.
대한민국의 역사교육과정에선 철기 시대 이후 삼국로 넘어가면서 철기 > 삼국 시대라 이해하기 쉽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철기 시대의 정의는 어디까지나 '철기를 보편적이며 주로 사용하는 시대'를 뜻하기 때문에 삼국시대는 물론이요 조선까지도 철기 시대에 소속됨은 물론 관점에 따라선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나라는 철기 시대에서 살고 있다고 볼수도 있다.''' 현재는 플라스틱이나 석유등 다종다양한 자원이 개발되긴 했지만 일상생활, 건축, 병기 개발등 종합적인 분야에서 '철'은 결단코 빼놓을수 없는 자원이기 때문.[1]

2. 상세


사실 이미 청동기에도 인류는 철을 사용하고 있었다. 단지 이때의 철은 대부분 운석에서 나온 운철을 가공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특별히 강도도 높지 않았고, 대량생산도 불가능해서 자주 쓰이지 않았을 뿐이다. 보통 인터넷에서 철기 시대라고 하면 이런 것까지 생각해서 기간을 잡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식으로 따지면 인류 최초의 철기는 기원전 3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인류는 청동기 시대를 시작하자마자 철기 시대에 들어섰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무조건 철의 사용=철기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철기 시대는 철의 상용화 및 청동의 대체와 함께 시작한다.
과거에는 인류 최초의 철기가 히타이트바다 민족에서 시작했다고 보았으나 지금은 둘 다 비판받고 있는 학설이다. 히타이트의 제철 방식은 청동기의 운철 제련 수준에 머물렀다고 보는 것이 최근의 연구이며, 바다 민족의 정체나 영향력에 대해서도 최근 학계에서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최근의 학설은 어느 날 드라마틱한 사건에 의해 청동기가 폭삭 망하고 철기가 갑작스럽게 들어선 것이 아니라 근동에서 청동기 국가들의 몰락은 전쟁이나 기후 변화, 자연 재해, 전염병 등의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며, 철기 시대의 등장은 주조틀의 보급과 제련 기술의 성장, 그리고 무역의 발달로 각각의 문명권에서 기존부터 존재하던 철기가 서서히 발전했다고 보는 추세다. 플라스틱이 등장했다고 해서 철제 도구들과 철강산업이 한순간에 몰락한 게 아닌 것처럼 청동기와 철기도 상당기간 '''공존했다는 것'''이다.
초기의 철기는 아직 청동기의 사용이 더 우세한 시대였다. 생산되는 철기가 기술 부족으로 인해 주조 철기가 대부분이었는데, 주조 철기는 청동기에 비해 딱히 강도에서 유리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당시 철은 '''부러졌다![2]''' 청동은 휠지언정 부러지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기원전 1세기에 들어서야 철제 무기가 청동제 무기를 완전히 대체하게 된다. 어쨌든 중동에서 나타난 최초의 철기는 점차 주변국으로 확산되는데, 대체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기원전 10세기, 이집트는 기원전 7세기, 유럽은 이보다 늦은 기원전 5세기경에 본격적인 철기 시대가 시작하였다.
동양에서는 중국(中國) (殷)대의 유물로 날 부분을 철로 쓴 청동 도끼가 가장 오래된 예가 되는데, 철기가 나타나는 것은 BC 600년경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이고,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것은 (秦), (漢)대에 이르러서이다.[3]
우리나라의 철기 시대는 기원전 5세기(기원전 400년) 중국의 철기 문화가 점차 도입되면서 조금씩 나타난다. 이때의 한국 철기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주조 철기 위주였으며, 위만조선부여가 건국되던 시점인 기원전 2세기경부터는 주조틀이 발굴되어 본격적인 자체 철기 생산을 했다고 추측된다. 이후 점차 중국의 철기 문화와는 독자적인 단조 철기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기원전 2세기 말 한사군이 설치되던 시점에서는 한반도 전역에서 대규모의 철 생산 유적이 발견되고, 중국이나 일본 등지로 철을 수출하기도 했다. 이런 철 수출은 삼국시대 초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일본으로 전래되어 일본에서 철기 문화를 일으키는데, 고대 일본의 철검과 한국의 철검의 동위 원소 비율이 같음이 둘 다 같은 공법으로 제조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청동기와 달리 철이 상대적으로 부식에 약하기 때문에,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더 오래전부터 철기를 썼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BC 1500년 시기의 비파형 동검과 AD 300년인 가야 시대 철검 사진을 비교해 보자. 철검 쪽이 훨씬 더 오래 된 물건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국사 교과서에서 나오는 것마냥 비파형 동검이 기원전 1500년이라는 근거는 현재로써는 희박하며, 다만 고조선이 하가점 상층 문화의 한 종류인 십이대영자 문화에서 출발한걸로 고고학계에서 추정하고는 있기는 하다.
다만 옥저의 영역으로 비정되는 함경도~연해주 지역의 경우, 얀콥스키 문화의 무렵 기원전 8~5세기 유적인 페스차느이 유적, 말라야포두세치카 유적에서 주조철부를 비롯한 철기가 발굴되었고, 얀콥스키 문화의 가장 늦은 시기인 기원전 5~3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바라바시-3 유적에서 제철 시설이 발굴되어 고조선의 영역으로 비정되는 동만주~서북한 지역에 비해 훨씬 더 이른 시기에 철기 사용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해주 북쪽 지역의 숙신-물길-읍루로 비정되는 아무르 지역의 경우 기원전 12~10세기 무렵 우릴 문화의 유적인 부킨스키 클루치-1유적에서 철슬래그가 발굴되어, 제철이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4]

연해주 지역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숙신-읍루-물길로 비정되는 아무르 지역의 경우, 러시아 학계에서는 구리의 매장이 거의 없고 소택지와 같은 풍부한 철광석이 존재한다는 환경적인 조건에 기반해서 제철 기술이 매우 빠른 시기에 널리 사용됐다고 보았다.[5] 연해주 지역의 경우도 아무르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카호를 비롯한 주변 소택지에서 사철을 채광한 것으로 여겨진다.

3. 철기의 특성


철은 청동에 비하여 경도가 높고, 매장량이 많으며, 가공하여 다양한 성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럼에도 철의 용융이 청동에 비하여 훨씬 높은 온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당장 구리의 용융점은 약 1030도. 모닥불 정도의 온도에서도 녹일 수가 있다.''' 하지만 '''철의 용융점은 1560도.''' 일반적인 불보다 4-500도 정도가 높은 온도에서야 녹는다. 이런 이유로 인해 역사 만화에서는 둘의 차이를 쉽게 두기 위해 청동은 모닥불/아궁이, 철은 용광로에서 녹인다고 묘사한다.
따라서 고온을 얻기 어려운 초창기의 철기는 철을 녹이는 대신에 직접 환원법을 통해 약 섭씨 900도 정도의 온도에서 처음부터 고체인 해면상(sponge) 괴철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철은 산화 서열이 높아서 이 정도 온도에서도 철광석은 구리 광석에 비해 환원시키기 어려웠다. 영국에서 16세기 말경, 중국에서는 대에 석탄 제철법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다량의 목탄(숯)을 때워 일산화탄소를 만들어 산소를 빼는 방법을 썼다.
때문에 철기 시대는 청동기 시대에 비해 상당히 뒤쳐져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단 보급되기 시작한 철 야금술은 빠른 속도로 세계에 전파되어, 그 많은 매장량에 힘입어 일상 도구 대부분에까지 사용되었다. 그리고 철기의 강력한 강도에 힘입어, 인류의 생산량은 이전 시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도로 발전하였고, 전투력 역시 무시무시하게 증가하였다. 정확히 말해서 중국의 경우 무기는 청동기이지만 농공구는 철기를 쓴 경우가 많다. 이는 철기가 성능보다는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금속기라는 면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초창기의 철기는 액상의 철을 녹이는 것이 아니라 고체 상태의 해면철을 얻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얻은 해면상 철괴는 내부에 기공이 많고 맥석 등을 함유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미칠 듯한 망치질을 통해 이런 기공을 눌러서 도로 접합시켜 붙여야만 제대로 쓸 수 있었다.[6] 이 과정에는 많은 노동력이 소모되었다. 이렇게 얻은 탄소 함유량이 매우 낮은 철을 'Wrought Iron'이라고 한다.[7]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액상의 철을 얻어서 주괴를 만드는 것이 훨씬 유리한데, 이러한 고온을 얻기 위해서 용광로와 용광로에 바람을 불어넣어 고온을 만드는 (수력)풀무가 개발되어야 했다. 문제는 이렇게 얻은 철인 무쇠[8]는, 연료 및 환원제로 사용했던 탄소가 액상의 철에 과량 함유되기 때문에 강도는 높아도 연성·전성이 낮아 소성 가공(망치로 두드려서 모양을 잡는 것)이 어렵고 쉽게 부러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용광로로 만든 무쇠와 직접 환원법으로 얻은 시우쇠는 서로 다른 용도로 별개로 사용되었다. 주로 무쇠는 고성능을 요구하지 않지만 값이 싼 일상 용품과 농기구 등에 쓰였다.
철에 탄소를 약간 포함시키면 구성 조직의 변화에 따라 강도가 높은 강철이 되는데, 처음에는 무쇠로부터 탄소를 제거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강철은 직접 환원법으로 얻은 'Wrought Iron'으로 된 철괴를 침탄시켜서 얻었다. 침탄 과정은 철괴를 탄소가 풍부한 환경에서 수백 도의 고온으로 가열하여 몇 주간이고 기다려야 하는 엄청나게 연료 낭비적인 값비싼 과정이었다.
무쇠로부터 탄소를 제거하기 위해 공기 중의 산소를 불어넣으면 된다는 것은, 서구에서는 중세에 발견되었고 동양에서는 한대에 발견되었다. 참조 논문. 여기서 문제는 무쇠는 비교적 낮은 온도인 1200도에서 녹지만, 무쇠로부터 탄소를 제거한 강철은 1500도 수준에서 녹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무쇠를 공기와 접촉시켜 어느 정도 탄소를 산화시키면 곧 굳어져서 탈탄 작용이 멈췄다. 이렇게 해서 얻은 탈탄 과정에서 생긴 기포와 슬래그가 다량 함유된 고체 상태의 강철괴에 다시 미칠 듯이 망치질을 해서 내부 조직을 다듬은 뒤에야 쓸 만한 강철괴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강철은 직접 환원법과 침탄으로 얻은 강철에 비해 성분을 조절할 여지가 적어 품질은 낮았다. 동양에서는 한대에 개발된 초강법이 여기에 해당된다.[9]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수많은 매체나 역사 만화에서 나오는 것과는 달리, 탄소강 기술이 발당하지 못한 초창기의 철기는 청동기와 비교했을 때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공격 무기로선 어차피 청동으로 치나, 철로 치나, 돌도끼로 치나 사람은 죽거나 다칠 수 있고, 아동용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철검으로 청동검을 박살내는 것은 검술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 노리고 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방어력 측면에선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도 청동기뿐만 아니라 철기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방어 수단이고[10], 청동 갑옷은 당연히 철기가 뚫지 못했다. 그리고 청동제 무기와 철제 무기가 혼용되던 철기 시대 초기에는 철과 청동 사이의 강도 차이도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청동의 경우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도 녹아 합금과 제련이 용이한 데다 몇 천 년에 걸쳐 기술을 발전시킨 반면 철은 그러한 장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
그럼에도 철기 시대로 이행되었던 까닭은 ''''철광석의 매장량이 구리보다 월등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당장 구리는 현대에도 상당히 귀한 축에 드는 금속이다. 하지만 철은? 학교 운동장 모래 퍼다가 자석으로 슬슬 긁거나 물로 일면 물론 불순물이 많긴 하지만 시커멓게 사철들이 쏟아진다. 지질학적으로도 지각의 1/10000%도 안되는 구리에 비해 철은 5%라는 4번째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덕분에 철기는 제조에 필요한 시설비는 구리보다 조금 많이 들지 몰라도, 원료비에서 압도적으로 적게 든다. 심지어 중앙아프리카의 경우 교역을 통해서조차 주석을 구할 곳이 없다보니 청동기 시대를 건너뛰었을 정도. 따라서 같은 자산이면 철 무구를 쓸 경우 청동 무구의 경우보다 갑절에 달하는 병력을 무장 시킬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더불어 철기는 석기보다 재료비는 조금 많이 들지만 가공 비용과 시간은 압도적으로 적게 들었고, 수명도 길었기 때문에 석기로 만들던 농기구들도 빠르게 철기로 대체 되었고, 그 조금 비싼 재료비도 너무 비싸 농기구로 만드는 돈지랄(?)이 불가능했던 청동기보다는 압도적으로 쌌으므로 기존의 나무나 돌로 만든 농기구보다 성능이 훨씬 좋아서 농업 생산량도 늘어난다.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면 청동 농기구는 사용되지 않았다. 청동기시대 항목 참조. 따라서 기술이 확립되고 철제 무기의 성능이 청동 무기를 따라잡으면서부터는 청동을 쓸 이유는 없어졌다.
비슷한 이치로 역시 철기 시대 이후의 발명품이다. 청동이 밥 짓는 열을 버티지 못해서 가마솥을 못 만들었던 건 아니고[11], 귀한 금속이다보니 가마솥 같은 일상 용품을 만들 여력이 없었던 것.[12] 청동으로 농기구를 만들지 않았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현대에도 밥 정도는 냄비로도 만들 수 있는데 이게 뭔 소리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시대의 밥은 백미가 아닐뿐더러 온갖 잡곡까지 섞여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압력 밥솥이 있는 현대에도 현미밥은 물에 몇 시간 불려서 짓지 않으면 먹기가 상당히 껄끄럽다. 굳이 정정하자면 철기 시대 이전에도 토기를 이용해 밥을 지을 수는 있었지만, 철로 인해 가마솥이 대중화된 다음에야 먹을 만한 음식이 되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1] 물론 현대에서는 여러 기술이 발전하다보니 일반 철보다는 다양한 합금이 쓰이는 편이긴 했지만 역사적으로도 여러 실험을 거쳐가면서 현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미숙한 정도긴 해도 합금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이는 말그대로 좀 더 양질의 철을 만들기 위함도 있지만 반대로 철보다 흔하지만 철만큼 튼튼하진 않은 금속을 넣어 철의 사용량을 필요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현대에서도 크게는 이 두가지로 용도가 나뉜다는걸 고려하면 좀 더 전문적이고 다양한 야금술이 개발된 것만 빼면 큰틀에선 바뀐게 없다.[2] 창작물의 사례지만, 드라마 주몽에서는 부여에 기술고문 자격으로 파견된 한나라의 대장장이들이 부여제 철검을 모루에 내리치자, 철검이 부러지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실제 부여와 한나라의 제철 기술 수준의 격차는 나쁜 의미에서 도토리 키재기 수준에 불과했다만(...), 어쨌거나 당시의 철검은 금속이라서 가공이 쉽다는 것말고는 딱히 뛰어난 구석은 없었다.[3] (고고학 사전, 2001. 12., 국립 문화재 연구소).[4] (동아시아 고대 철기문화 연구, 2012. 05. 04, 국립 문화재 연구소 고고연구실).[5] (시베리아의 선사고고학, 200. 02. 05, 최몽룡 이현종 강인욱, 도서출판 주류성).[6] 이런 기공들은 하나하나가 파단의 시발점으로 되기 때문에 기공이 많은 철을 그대로 썼다간 뽀각...[7] 'Wrought'는 고대 영어에서 'Work(일하다)'의 과거 분사형이다. 즉 '일(work)을 가한 철'이라는 뜻. 일반적으로 'Wrought Iron'은 '시우쇠'라고 번역하나, 한국과 서구권의 전통 제철법은 차이가 있으므로 이 둘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8] 무쇠 = 물 + 쇠 - ㄹ.[9] 무쇠로부터 강철을 용이하게 제련하기 위해 액체 상태의 강철을 얻을 수 있을 만큼 고온을 달성한 것(수력 풀무)은, 서구권에서는 반사로가 개발된 18세기 중엽에 들어서의 일이다.[10] 심지어는 어느 정도 야금술이 확립된 시기인 바이킹의 기록에서조차도 '칼이 가죽옷을 베지 못한다'고 징징대는 내용이 있다.[11] 종이컵으로도 물을 끓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가마솥이야 두께가 있으니 100도보다는 온도가 더 올라가지만, 그렇다고 청동이 흐물흐물해질 정도까지 올라가지는 않는다.[12] 구리로 만든 솥인 구정은 천자의 권위를 상징할 정도였다. 그만큼 귀한 물건이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