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요이

 



1. 음력 3월을 뜻하는 일본어 어휘
2. 시대명
3. 인명
3.1. 실존인물
3.2. 가상인물
4. 일본의 음식점
5. 철도역


1. 음력 3월을 뜻하는 일본어 어휘


弥生(やよい). 일본에서는 동네 이름으로도 쓰인다. 아래 나올 도쿄도 야요이초가 그 사례
이런 지명은 국내에서 일제시대의 흔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데, 미생정역(야요이쵸)이 대표적인 흔적이다. 2009년까지 이 미생정역 자리에서 1978~2009년 동안 존재했던 효창역 인근에는 '미생동 건널목'이라는 건널목이 있었는데, 당시 위치는 푸르지오 아파트의 작은 문이 있던 자리다. (이 작은 문에는 과거 계단이 있었다)

2. 시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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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弥生やよい''''''''''''だい'''
일본청동기 시대이자 철기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시대[1]로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가리킨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가 처음 발견된 곳이 1884년 도쿄도 야요이초[2]였기 때문에 이 토기를 연구한 도쿄대학 인류학과에서 야요이 토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몬시대와 마찬가지로 토기에 따라 시대를 구분한 셈. 한반도처럼 이 시기의 야요이 토기는 민무늬 토기가 보편적이다.
야요이 시대의 대표적 유적들로는 후쿠오카현 이타즈케 유적, 시즈오카현 도로 유적, 시마네현 고진다니, 가모이와쿠라 유적 등등이 있는데, 경작이 시작되어 농업 관련 유물들이 많이 출토된다. 농업 생산물을 뺏기 위해 전쟁이 시작되어 전쟁에 대비한 환호취락이 발달했는데 이는 한반도 남부에서도 흔히 보이는 유적이다. 매장 문화는 조몬 시대와 많이 바뀌어 옹관, 석관, 목관 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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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을 짓기 시작하고 청동제 무기[3], 제구[4]가 출현했으며 안정적인 수경경작이 가능해지는 등 이전 시대였던 조몬 시대에 비해 급격하게 문명이 발전했다. 야요이 시대의 유물이 한반도의 유물과 비슷한 점[5]과 한반도에서 가까운 북규슈과 서남쪽 혼슈 지방을 중심으로 야요이 문화가 전개되었다는 점을 들어[6], 금속 문화와 농경 문화를 보유한 한반도에서 이주한 집단이 석기 문화에 채집 생활을 하던 조몬인 세력을 밀어내어 조몬 시대를 끝내고,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는 게 정설이다.
현대 일본인도래인 계통 야요이인의 직계 후손이며, 아이누인을 조몬인의 직계 후손으로 보고 있다. '''도래인 계통의 야요이인은 현대 일본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87~96.7%를 차지한다고 한다.'''[7]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종종 일본인에 관한 생물학적인 연구를 할 때, 일본 내에 존재하는 오키나와인, 아이누인, 본토 일본인(야마토 민족)을 각각 비슷한 숫자로 표본을 수집하여 연구 결과를 낼 때도 있다. 이렇게 되면 1억 2천만 명이 넘는 일본 인구 중 오키나와인과 아이누인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유전 형질 비중(조몬인 계통)이 심하게 과대평가된다. 과학계에서 이런 식으로 표본을 편향되게 수집하여 의도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유도하는 행태가 아예 없는 게 아니므로 주의해야 한다. 의도한 부분은 아니었겠지만 암내 유전자 비율을 조사할 때도 유사한 경우가 있었다.
야요이인이 도래인 계통이고, 그들이 한반도 출신이라는 것은 규슈 북부에서 발견되는 야요이인의 유골과 고대 한국인의 DNA 유사성이나 고대 한반도의 것과 매우 유사한 유물 등 강력한 증거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무덤 양식이나 유물 등을 통해 본다면 야요이 시대와 가장 관련이 깊은 지역은 고대 한반도이다.
야요이 시대 동안 일본 열도에 금속과 농업이 널리 퍼지고 소국들이 생겼으며 이후 고훈 시대로 이어졌다. 일본의 전설적인 인물인 야마타이의 히미코가 이 시대에 활동했다고 한다.
고고학적·인류유전학적으로 도래인은 고대 한반도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세키네 히데유키 교수는 일본 제국 시절 유리할 때는 일선동조(日鮮同祖)론을 내세우고, "일본인은 조선을 조상의 나라로 생각했고,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였다."라고 주장했던 학자(도쿄제국대 인류학 주임교수 도리이 류조, 1919년)도 있었던 일본 학계가 패전 후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특별한 민족론'을 내세우려 한반도와의 관계를 억지로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8]

"일본인의 기원이 고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부정·왜곡하는 일본 학계의 의식이 한일 계통 연구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한국과의 관계를 회피하고 한반도와 다른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왜곡된 인식이 패전 후 계통 연구에 큰 장애물이 됐다"

"1970년대 이후 학자들이 일본인 기원 모델을 내놓았지만 그들조차 도래인(渡來人)의 위상을 가능하면 과소평가하고 단순히 한반도 문화가 일본 열도에 전파된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컸다"

세키네 교수는 "일부 학자는 도래인이 시베리아·만주에서 한반도를 뛰어넘어 일본 열도로 이주했거나 멀리 중국 남부에서 바다를 건너왔다고 해석한다"고 말했다. 왜곡된 형태로나마 한국인과의 직접적 관계를 회피하려고 고안된 고육지책이라는 것이 세키네 교수의 분석이다.

"인류유전학적으로도 도래인은 분명 '고대 한국인'이 맞다"며 "일본 학계가 한일 간에 명백한 문화적 연속성이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적어도 혈연관계만큼은 인정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작용하는 것 같다"

"여전히 일본 학계 연구자들이 왜곡된 잠재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몇몇 뜻있는 학자들은 학계의 냉대에도 꿋꿋하게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며 "과거 짧은 시간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졌듯이 머지않아 한일 계통 연구에 획기적 전기가 찾아오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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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네 히데유키 가천대 동양어문학과 교수, 2016년

그러나 알렉산더 보빈의 연구에 따르면 야요이인의 언어는 한국어 계통이 아니라 일본어 계통이 주류였고, 일본열도로 가지 않은 야요이인의 조상들은 한민족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고대 한반도의 일본어계 인구와 한국어계 인구 사이에도 이웃민족 정도로 유전자 차이가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한국어 사용자도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3. 인명


말 그대로 '삼월이' 같은 느낌의 이름이다.
에로게/미연시에서 가장 많이 쓰인 이름이라고 한다. 다만 독음 랭킹으로는 6위인데, 이 기준에서의 1위는 카오리이다.

3.1. 실존인물



3.2. 가상인물



4. 일본의 음식점


정확한 이름은 やよい軒(야요이켄) 홈페이지. 일본에서 대중적인 일반 음식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밥천국. 대부분 24시간 운영하지만, 점포 상황에 따라 심야에 1시간 정도 닫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여러 지역에 점포가 있으며, 일본의 가정식 위주, 낫토, 가라아게, 가츠동, 돈가스, 햄버거 스테이크 등을 판매한다.
위의 가상인물 중, 타카츠키 야요이와 엮여서 오사카타카츠키시역 근처에 위치한 타카츠키점은 야요이 생일인 3월 25일만 되면 아이돌 마스터팬덤으로부터 반쯤 성지 취급을 받는다.

5. 철도역


[1] 이전까지는 금속기가 유입되지 않았다가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유입되었다.[2] 토기가 처음 발굴된 곳에는 야요이 토기 발굴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주변에는 네즈역도쿄대학 혼고 캠퍼스가 있다.[3] 동모, 동과 등. 그런데 이러한 청동제 무기들은 훗날 제구로 용도가 바뀐다.[4] 청동방울인 동탁. 삼국지의 모 인물과 헷갈리지 말자.[5] 야요이 시대의 석기는 형태, 석재가 한반도의 것과 동일했으며, 철기 및 청동기 역시 거의 동일한 모습을 띠었다.[6] 야마구치현사가현 등지의 간몬(關門) 지역 일대에 한반도로부터 도래인 집단이 정착하여 야요이 문화를 시작했다고 한다.(천선행, <무문토기시대 한일간 지역관계변천>, p.35)[7]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