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빈 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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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29대 부통령이자 제30대 대통령.
잠이 많고 과묵한 스타일로 유명하며 그 유명한 '''잠 자다가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침실에서 취임 선서를 하는 캘빈 쿨리지의 모습. 고향에서 휴양 중에 하딩의 부고를 듣고 대통령에 취임하는 걸 묘사한 그림이다.
2. 생애
1872년 버몬트 주 윈저 카운티에서 잡화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유일하게 독립기념일에 태어난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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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스트 대학교를 졸업하고 공화당에 입당, 이후 매사추세츠 주의 노샘프턴 시장을 지내고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역임했다.
그가 주지사로 재임하던 1910년대 말은 노동운동이 대단히 격렬했던 시기다. 1919년, 매사추세츠 주에서도 보스턴 경찰 노조와 연대 파업에 나선 미국노동총연맹(AFL)의 파업이 거셌다. 이에 쿨리지는 주방위군을 동원하여 파업에 참여한 경찰 노동자를 강제해산, 해고시키고, 노동연맹의 위원장에게 다음과 같이 통보했다.
단호한 이 한마디로 쿨리지는 전국구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Your assertion that the Commissioner was wrong cannot justify the wrong of leaving the city unguarded. There is no right to strike against the public safety by anybody, anywhere, anytime!"
당신 말대로 (경찰 당국) 위원이 잘못된 조처를 했다고 해도, 그게 도시 치안을 직무유기하는 걸 정당화 할 수는 없소.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파업을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언제라도 있을 수 없소!
주목할 점은, 쿨리지의 저런 반응은 '경찰 노조의 파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미국은 경찰이 지역별 독립 조직이다.) 심지어 소방 노조 등의 동조 파업도 예고되었던 상황이었기도 했다. 문자 그대로 '공공의 안전'을 담보하는 경찰들이 파업으로 공백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논지.[3] 물론 공무원 노동운동을 적극 지지하던 AFL는 '여하간에 경찰 노동조건이 헬인 건 사실 아니냐'며 불만을 표출했고, 실제로 노동조합 측 표를 잃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노동운동 자체를 사회주의 운동과 결부시켜 생각하던 공화당 내부에서는 '보수의 샛별'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실제로 쿨리지는 그 해 주지사 선거에서 직전 선거와 동일한 상대 후보를 만나고도 표차를 더 벌리며 재선에 성공하였다.[4]
여하간 저 발언으로 쿨리지는 공화당의 스타가 되었고, 다음해 바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1920년 워런 G. 하딩의 러닝메이트로 대선에 출마하여 승리, 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하딩이 임기를 시작한지 2년이 조금 지난 1923년 8월 2일에 사망했다. 이 때 쿨리지는 고향인 버몬트 주의 아버지 집에 있었는데, 하딩이 죽은 다음날 오전 2시 30분 잠을 자고 있다가[5] 아버지에게 하딩의 부고를 접하고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때 그의 아버지가 한밤중에 잡화점 계산대에 성경을 올려 놓고 불을 밝히고 쿨리지에게 대통령 선서를 시켰다는 일화는 대단히 유명하다.[6] 이 선서가 끝난 후 쿨리지는 다시 세 시간 동안 잠을 잤다고. 이 이야기는 국내에도 《스펀지》를 통해 '미국에는 잠자다가 대통령이 된 인물이 있다'라는 주제로 알려지기도 했다.[7]
취임 후 하딩의 남은 임기 1년간 쿨리지는 하딩 시대의 부패 공무원을 축출하는 등[8] 공무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되찾는 데 힘썼으며,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바로 이듬해 1924년 대선에서 가뿐히 재선되었다. 이때 쿨리지는 1572만표를 얻어 54%(선거인단 382명) 대 28.8%(민주당 후보 존 데이비스 - 선거인단 136명), 16.6%(진보당 후보 로버트 라폴렛 - 선거인단 13명(위스콘신))라는 어마어마한 승리를 거뒀다. 흥미로운 건, 이런 압도적 대승에도 불구하고 쿨리지가 '''전임자보다 표를 덜 받고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이다.[9] 하딩은 여성 참정권이 부여된 이후 첫 선거를 치른 인물이었기도 했고, 또 워낙 미남이었기에 묻지마 표로 1614만표(60.3%)를 얻었다(이후로는 한동안 이런 경우가 없다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후임자 해리 S. 트루먼이 이런 경우에 해당됐다. 2차대전 후로는 존 F. 케네디, 리처드 닉슨, 지미 카터,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이 있다).[10][11]
이 때 쿨리지 캠프는 당대에 홍보 전문가로 유명한 에드워드 버네이스(Edward Bernays)[12] 를 영입했는데 버네이스는 쿨리지의 딱딱한 인상을 풀어주기 위해 백악관에서 연회를 실시, 여기에 당시의 유명한 연예인들을 초대했고 이 자리에서 쿨리지가 환하게 웃는 표정이 포착되었다. 사실 이때 연예인들은 쿨리지를 웃기는 게 거의 불가능했는데, 유머작가인 월 로저스가 성공을 거뒀다. 비서가 "이분이 바로, 쿨리지 대통령님(President Coolidge)입니다."라고 하자 대통령에게 못알아들은 척 '''"예? 성함을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어요?"'''라고 대답했다. 놀랍게도, 쿨리지는 이에 박장대소했다. 그러자 언론은 '''쿨리지가 웃는다!'''는 기사를 일제히 보도했고 이 이미지 전략이 먹혀 무뚝뚝한 이미지와는 다른 면모가 국민들에게 먹혔다고 한다. 로저스는 "쿨리지는 브라이언이나 대로우(Bryan or Darrow)보다도 훌륭한 진화의 증거이다. 말하지 않는 때를 안다는 것인데, 이 점이 바로 원숭이가 인간에게 물려준 가장 좋은 유산이기 때문이다."란 말을 남겼다.[13]
재선 후 쿨리지는 당시 전범 국가였던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는데 당시 부통령이었던 찰스 도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독일의 전쟁배상금을 줄여 경제 안정을 도왔으며, 이 시기에 전쟁을 국가정책으로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어 평화적인 제스처를 국제 사회에 보이려고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시궁창. 이후 독일의 행적이나 미국의 행동으로 인해 이 정책들은 유명무실해졌다. 안습.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된 게 쿨리지의 임기에 이루어진 업적 중 하나. 아래에 추장 코스프레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백악관에서 원주민 추장들과 만나기도 했다.[14] 후버의 러닝메이트였던 31대 미국 부통령 찰스 커티스(1860~1936 - 재임 1929~1933)는 어머니가 미국 원주민이라서 원주민 보호에 앞장서던 인물이었고 쿨리지의 이 점을 칭송했다. 그리고 백인들과 동일한 흑인 및 유색인종의 헌법적인 권리를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남유럽, 동유럽계 이민을 제한하는 법안에 서명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했었다(...). 한편 후임 대통령인 후버 때부터는 상황이 반전되어 흑백갈등이 고착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잠 자다가 대통령이 된 인물'답게 대통령이 되어서 국무회의에서 조는 일이 많아 구설수에 올랐고 매일 11시간은 철저히 수면에 투자했다. 오후에 정기적으로 낮잠을 2~4시간 자고 항상 오후 10시에 취침에 들었다고. 그래서 당시의 저널리스트 헨리 L. 멘켄[15] 은 "그의 최대 업적은 미국 역사상 어떤 대통령보다 가장 잠을 많이 잔 것이고 더 적게 말한 것이다. 그가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는 동안 미국은 추락했다"라고 비꼬았다.
쿨리지 시절은 미국은 미국의 제1차 황금기인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고 불렀으며 연 평균 경제성장률을 9% 이상 유지했다. 당시 재무장관 앤드류 맬른은 자유방임적인 감세정책을 시도했으며 그 덕택에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기와 비슷하게 주식시장은 엄청난 호황을 누리면서 비록 빈부격차는 심하기는 했어도 사회전반적으로 돈이 넘쳐흐르게 돼 일반 중산층들도 당시 신생매체로 각광받던 라디오를 각 가정마다 1대씩은 가질수있게 되었고 그 이전까지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자동차가 중산층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보급되면서 마이카 시대도 열렸지만[16] 어쨌든 이것이 경제의 건실한 성장이라기보다는 거품경제였다는게 문제였다. 경제 대공황의 징조는 이미 쿨리지 말기부터 기업들의 이윤율이 떨어지고 재고품이 늘어나기 시작되었으며 실업률도 조금식 올라가며 예견되어 있었지만 이러한 경고는 주식에 미쳐있던 당시 상황에서 무시되었으며 금융당국에서도 적절한 대처에 실패했다. 그 때문에 호황이 대공황이라는 파국으로 끝나면서 쿨리지가 경제에 무지하다는 비난이 있지만, 감세 정책을 내며 말한 정견을 보면 작은 정부와 가계의 소득을 증대시켜 주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고 당시 주류 학계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가 저축밖에 몰랐다는 사실은 오해이며 쿨리지는 대공황이 터졌을 때도 수요와 공급에 의해 대공황이 저절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했는데 이는 현대의 자유방임 경제학자들이 대공황에 대한 주장과 동일하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경제학계가 얼마나 아둔하게 돌아갔는지 알 수 있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어쨌든 앤드류는 이후 허버트 후버 때까지도 재무장관직을 역임했지만 대공황이 터졌을 때 경제가 회복되겠지라면서 무능하게 대처했고 결국 경제 대공황을 초래한 재무장관이라는 불명예만 안고 해임되었다.
운 좋게도 대공황을 모면했다. 대통령에서 퇴임하던 해는 1929년 3월이었는데, 대공황은 1929년 10월에 터졌다. 퇴임 당시 쿨리지의 인기는 낮지 않았고 당시에는 3선 제한도 없어서 대통령이 될 가능성도 충분했으나 출마하지 않은 것이다. 7개월 후에 공황이 터지는 바람에 비난은 후임자인 허버트 후버가 다 받았고 쿨리지는 별다른 비난을 받지 않았다. 뒷날 로널드 레이건은 쿨리지의 시장 불간섭 정책을 존경해서 쿨리지의 초상화를 백악관에 소중하게 걸어 놓았다고 한다. 또한 간단명료함과 과묵함이라는 캐릭터, 검소함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당시 대중들 사이의 인기는 그럭저럭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1928년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한다는 선언을 했고, 퇴임 후에는 철도위원회 의장, 맹인협회 의장, 미국역사학회 회장 등 여러 자리를 역임했다. 그는 평생 작은 선거부터 대선까지 20여회의 선거를 치렀는데 거기서 낙선한 것은 단 한번뿐이라고 한다. 낙선한 것은 학교 운영회 이사 선거뿐이었다고.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 나름의 능력이 있었던 것인지의 판단은 각자 알아서. 다만 온갖 이권이 걸린 선거들에서 이기고 또 이긴걸 보면 이기는 법을 알든 이기는 판에만 뛰어드는 안목이 있든 유능한 건 확실하다 봐도 좋다.
말년에는 자서전을 집필하고 여생을 보내다가 대공황 와중인 1933년 1월 5일 자택에서 세상을 떴다. 향년 60세. 부인이 시장에 가기 위해 외출을 했고 쿨리지는 면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부인이 시장에 다녀오자 쿨리지는 자택 마루바닥에서 쓰러져 숨져 있었다고. 사인은 심장마비. 그래서 그날 들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자택을 수리하러 온 목수에게 인사한 말인 "Good morning, Robert"라고 한다.
죽기 며칠 전에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는지 친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I feel I no longer fit in these times..."
(나는 더 이상 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네...)
3. 쿨리지 효과(Coolidge effects)?
어느 날 쿨리지 대통령 내외는 생산성이 좋은 양계장을 견학했다. 영부인은 양계장 주인에게 어떻게 하면 이런 많은 달걀을 생산할 수 있고 수탉은 하루에 몇 번이나 교미를 하느냐는 둥의 질문을 했는데 이에 주인은 "우리 양계장의 수탉들은 하루에 수십번(dozens)은 짝짓기를 하지요"라고 말했다. 영부인은 이 말에 놀라면서 흡족한 얼굴(...)[17] 로 이 말을 대통령이 오면 전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주인은 쿨리지에게 이 얘기를 전했는데 쿨리지는 이 말을 듣고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질문을 했다.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매번 다른 암탉하고도 한다고 말하자 쿨리지는 '''"그럼 이 얘기를 아내에게 전해 주시오."'''라고 덤덤히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그럼 그 수탉은) 항상 같은 암컷하고만 합니까?"'''
이 일화에서 나온 용어가 바로 '쿨리지 효과'라는 성의학적 용어이다. 즉 한 마리의 암컷과 여러 번 연속적으로 교미한 수컷은 더 이상 그 암컷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얘기인데 성행위 상대를 바꾸면 욕망이 증대되는 경우를 뜻한다고 한다.
참고로 이 일화는 쿨리지 본인의 실제 일화는 아니다. 일종의 대통령 개그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프랭크 A. 비치(F. A. Beach)라는 동물 행동학자가 1955년 저작에서 처음으로 썼는데, 본인도 이것이 농담임을 밝히고 있다(...). 이게 그럴듯해 보일 정도로 쿨리지의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었단 이야기.
4. 침묵의 쿨리지(Silent Cal)
외모에서 풍겨지듯 대단히 무뚝뚝하고 과묵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말과 글이 대단히 짧은 것으로 유명한데 한 문장에 사용한 단어의 평균이 단 '''18개'''에 불과했다고. 이 당시 정치인들은 한 문장에 단어 50~60개를 쓰는 게 일상이었고 간결하게 정보를 전달해야 할 신문에서도 당시에는 만연체가 한가득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로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도 한 문장에 단어 20개는 들어 있었고, 이 연설은 나중에 재평가를 잔뜩 받아서 그렇지 당시엔 미국인들에게 나라망신이라며 지독하게 욕먹었다. 그리고 그런 링컨도 문장당 35~40단어는 사용했다. 지금 시대에 비유하자면 쿨리지는 모든 대답에 단답형으로 대답하기만 하는 과묵한 사람 정도로 비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그래서 대통령으로서의 업적보다는 그의 과묵함과 관련한 이야기가 더 화제가 되곤 한다.
사실 쿨리지의 고향인 버몬트 주 자체가 무뚝뚝하고 눈치없이 사실만을 말하는 고장이란 인식이 널리 박혀 있는데(기후 자체도 차갑고 건조하다), '''그는 전형적인 버몬트 인이었다.''' 버몬트 사람들의 성격에 대한 농담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버몬트 항목 참고. 쿨리지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있다.
- 쿨리지의 영부인이었던 그레이스 애너의 회상에 의하면 어느 날 쿨리지는 내각의 주요 요인 부부 동반 연회를 개최했다. 한 장관의 부인이 쿨리지에게 "대통령 각하, 오늘 전 다른 부인과 내기를 했는데, 대통령님께서 세 단어 이상을 말하시면 제가 이깁니다. 도와주실거죠?" 그러나 쿨리지는 단 두마디만 했을 뿐이다. "You lose(당신이 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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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쿨리지의 친구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친구(쿨리지)와 저녁 식사를 같이 할 때 그 친구가 침묵하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 사람의 기분을 모르겠어."
- 쿨리지 본인은 자신의 과묵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개 나는 사람들에게 그저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대답할 뿐인데 그것조차도 너무 많아. 단지 그 한마디로 인해 20분 이상이 소요되어 버리거든."
- 1928년의 대선 당시, 쿨리지는 상술한 것처럼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그리고 출마 포기를 발표하는 성명을 냈는데, 다음은 그 전문이다.
> I do not choose to run for President in 1928.
> 나는 1928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정말로 이게 다다. 심지어 여기에 대한 위키피디어의 문서도 있다. I do not choose to run 그나마 이것도 대변인이나 자신이 말로 한 것도 아니고, 백악관 출입기자들을 불러 놓고 쪽지에 적어서 한 장씩 나눠줬다(...).
> 나는 1928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정말로 이게 다다. 심지어 여기에 대한 위키피디어의 문서도 있다. I do not choose to run 그나마 이것도 대변인이나 자신이 말로 한 것도 아니고, 백악관 출입기자들을 불러 놓고 쪽지에 적어서 한 장씩 나눠줬다(...).
- 그의 침묵에 대해선 아들을 잃은 충격 때문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1924년 대선 직전에 그의 아들인 캘빈 3세를 잃었다.[18] 이 충격으로 원래 내향적인 인물이 더 말이 없어졌다고 한다. 아들을 잃은 쿨리지는 "대통령의 영광은 내 아들과 함께 가 버렸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 어느 날 뉴스 담당자가 쿨리지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얼굴 표정 좀 푸시고요, 제발 "Good morning"이나 "Hello"라도 좋으니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십시오." 그러자 쿨리지는 주변 측근들을 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저 친구가 지금 내가 의원들과 한 얘기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하라고 하는군요."
- 열성 지지자가 쿨리지에게 "대통령님 연설을 정말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45분이나 계속 서 있었습니다."라고 하자 쿨리지 왈, "저도요(Me, too)."
- 기자회견 중에 기자들이 "관세에 대해 하실 말씀 없습니까?", "농업 법안에 대해 하실 말씀은요?", "해군 예산에 대해 하실 말씀 없나요?"라는 둥 질문 공세를 폈는데 모든 질문에 대해 전부 "없소."로 일관했다. 기자들이 대통령 집무실을 나가자 그 뒤에 대고 "내 인용은 하지 마시오."라고 웃으며 말했다.
- 백악관을 정기적으로 보수하던 중에 지붕 서까래와 대들보에 불탄 흔적이 있었다. 이것은 1812년의 미영전쟁 때 영국군이 백악관에 불을 지른 흔적이었는데 보수를 맡은 건축가는 대통령에게 이 부분이 너무 오래되어서 교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쿨리지 왈, "좋소, 교체하시오. 하지만 교체 비용은 영국 국왕에게 청구하시오."[19]
- 하루는 일리노이 출신 연방 미국 상원의원 메딜 매코믹의 아내인 루스가 쿨리지에게 청탁을 했다. 자신의 친구였던 시카고의 폴란드계 사람이 연방판사가 되게 하기 위한 로비였는데, 그 청탁의 일환으로 폴란드계 이민자들과 쿨리지의 만남을 주선했다. 어떻게든 주선되어서 대면이 이루어졌는데 쿨리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긴장해서 아무 말도 못했는데, 잠시 뒤 쿨리지는 입을 열고 "바닥의 카펫이 아주 좋지요? 이 카펫 새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는데 쿨리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정곡을 찔렀다. "어떤 여성분이 여러분에게 판사 자리를 따게 해 주려고 예전 카펫을 닳게 했지요." 즉 루스가 청탁하느라 대통령 집무실을 하도 들락거려서 예전 카펫이 닳았다는 의미다.
- 쿨리지의 아내 그레이스가 '우리집 주치의'라는 제목의 책을 하나 사 왔다. 이 책은 많은 질병의 간단한 진단법과 치료법을 소개한 책인데 민간요법도 소개하고 있다(참고로 이 서적은 오늘날에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그레이스가 외판원에게 낚여서 8달러를 주고 책을 구입했다는 것이다(당시 8달러는 적지 않은 가격이었다). 사 놓고 보니 돈을 비싸게 줬다는 후회가 든 그레이스는 남편 쿨리지에게 욕 먹을까봐 책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태연히 탁자 위에 이 책을 올려 놓았다. 며칠 후 쿨리지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했다고 느낀 그레이스가 책장을 펼쳤는데 책 속표지에 쿨리지가 이렇게 적어 놓았다고 한다. "이 책에는 잘 속는 사람에 대한 치료법이 없군!"
- 어느 날 쿨리지가 비서에게 말했다. "오늘 옷이 아주 멋지네요! 정말 매력적이오." 평소 과묵한 대통령에게 이런 칭찬을 들은 비서는 놀라서 몸둘 바를 몰라 하며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그러자 쿨리지가 웃으며 하는 말. "그렇게까지 놀랄 거 없어요. 기분이 좋아지라고 한 말이니까. 앞으로는 공문서를 쓸 때 구두점에 주의를 기울여줬으면 좋겠군요."[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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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사진에서 보듯 이렇게 웃을 줄도 알았다(?). 그리고 의외로 원주민 머리장식이나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사진촬영을 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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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했듯 말 한마디를 꺼내면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명언을 꽤 남기기도 했다.
- "나는 내가 말한 적 없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상처받은 적이 없다."
- "보라, 아직도 그는(=워싱턴은) 저기 살고 있다." - 조지 워싱턴에 대해. 백악관에서 의자를 뒤로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고 한다.
- "미국 국민의 가장 중요한 과업(Business)은 일(Business)이다."[21]
- "우리는 모든 일(everything)을 한번에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something) 한번에 할 수는 있다."
- "세상에 어느 것도 끈기를 대신할 수 없다. 재능도 끈기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천재도 끈기를 대신할 수 없다. 성공하지 못한 천재가 얼마나 많은가. 교육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 세상은 교육받은 낙오자들로 가득 차 있다. 끈기와 결단력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
5. 기타
의외로 워낙 장난기가 많아서 백악관에서 은근슬쩍 장난을 치곤 했는데 이와 관련한 일화도 많이 남아 있다.
미국의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의 초상화를 보고 대머리였던 존 퀸시 애덤스의 머리가 너무 반짝이는 게 안쓰러웠는지 직접 초상화의 머리에 먹칠을 해줬다. 허버트 후버 항목에 나와 있듯이 이 일에 대한 사과는 허버트 후버가 했다(...).
남부가 독립한 가상의 역사를 다룬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실제 역사보다 늦게 대통령에 당선된다. 대신 사회당의 업튼 싱클레어가 쿨리지의 시기에 대통령으로 재직한다. 쿨리지는 '''민주당'''[22] 후보로 1928년 대선에 출마하나 작중 오리지널 캐릭터인 미국 사회주의당의 조슈아 블랙퍼드에게 패배, 그러나 블랙퍼드 임기 중 경제대공황이 터지면서 1932년 벌어진 리턴매치에서 압승한다. 그리고 대통령 당선자 신분인 상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1] 이 날이 다름아닌 '''독립기념일'''이다.[2] 이 영상은 '''역사상 최초로 촬영된''' 미국 대통령의 연설 영상이다. 원본 영상은 당연하게도 흑백이며, 이건 후대에 컴퓨터를 통해 컬러화를 한 영상이다. 이전까지는 미국에서 대통령의 음성 영상이 촬영된 적이 없었기에 그의 취임 선서는 현재 음성 영상으로 남아있지 않다.[3] 게다가 실제로 전체인원의 3/4가 참여한 이틀간의 경찰 파업 기간 동안 보스턴은 약탈 등으로 실로 '무법 천지'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경찰이 폭력 집회를 했다기 보다는, 파업하느라 손 놓고 있으니 무법 천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4] 쿨리지가 그렇다고 완고한 노동탄압가였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산업계가 인간화 되지 않으면 체제가 무너진다면서, 여성과 아이들의 노동을 주 54시간 노동에서 48시간 노동으로 낮추는 법안이 통과되자 적극 실행하기도 했다. 먼나라 이웃나라 등을 통해 쿨리지의 해당 발언의 의도가 마치 '폭력노조 엄벌'이나 '노동운동 탄압'으로 잘못 전달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과 거리가 있다.[5] 하딩이 죽은 곳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였다. 그렇기 때문에 쿨리지가 있던 동북부의 버몬트 주(감을 쉽게 잡으려면, 버몬트 주는 퀘벡과 붙어있다)와는 시차가 +3시간 있었다.[6] 정확하게는 하딩 대통령의 사망소식을 가져온 버몬트주 하원의원 포터 H. 데일이 대통령직의 연속성 문제로 당장 선서할 걸 제안해서 공증인 자격이 있던 아버지와 포터 H. 데일 하원의원이 입회한 가운데 선서를 한 것.[7] 다만 아버지(캘빈 쿨리지 시니어)가 판사라는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명예직인 치안판사 직위와 공증인 자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중에서 공증인 자격으로 대통령 선서를 공증한 것.[8] 대표적인 사례가 하딩의 포커 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 장관 자리까지 차지한 알버트 폴. 그는 이후 구속되면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현직 장관이 체포되는 기록을 세웠다.[9] 미국은 이민자에 기인한 인구 증가가 엄청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심지어 동률 미만으로 득표해도 전임자보다 표를 많이 받는 구조다.[10] 1924년 선거의 또 다른 기록이 있다면 양당제에서의 경쟁자 존 데이비스다. 그는 라 폴렛의 선전으로 역대 미국 민주당에서 가장 적은 득표율을 거뒀다. 그래도 1872년에 당내 분란으로 후보 자체를 못내고 호레이스 그릴리(자유공화당) 지지한 것보단 나은 수준.[11] 라 폴렛은 일생의 거의 대부분을 공화당원으로 보냈고 단 한순간도 민주당원이었던 적이 없었다. 1912년 공화당 대통령 경선에서도 태프트,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이어 돌풍을 일으킬 정도. 1924년 선거가 끝난 직후 심혈관계 질환으로 급사하니, 향년 70세였다. 그의 유지는 아들인 로버트 라 폴렛 주니어가이었는데, 20년간 상원의원을 지내켜 위스콘신 지역당으로나마 진보당을 20여년간 끌고갔지만 결국 공화당에 복당한 1947년 경선에서 탈락했다. 대를이어 40년간 위스콘신 상원의원인 라 폴렛 가문을 끝내고 당선 된 공화당 상원의원이 매카시즘으로 유명한 조셉 매카시다. 후덜덜...[12]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로 심리분석의 의한 선동과 광고로 현대 마케팅이란 개념을 만든 사람이다. 베이컨을 영향학적으로 푸짐한 아침식사와 연관시켜 미국에서 베이컨을 대중화시켰고 여성흡연을 페미니즘과 연결해 담배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13] 윌 로저스는 훗날 쿨리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그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알았대?"(그 사람이 스스로 죽었다고 말을 안했는데, 혹은 그 사람은 죽으나 안 죽으나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았냐는 것)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14] 이원복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백악관에서 추장들을 만난 대통령이 클린턴이 처음이라는 오류를 퍼트린 바 있다. 90년대 당시 《현대문명진단》에서도 미국 원주민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대해 그렸던 편에서도 원주민 추장과 최초로 만난 대통령이 클린턴이라는 오류가 실려 있는 걸 보면 당시 미국 내에서도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그냥 잊혀진 듯하다.[15] 비꼬기와 무신론으로 유명한 저널리스트.[16] 참고로 한국에서 라디오가 대중화된 것은 1960년대의 일이며 자동차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빨라도 198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17] 쿨리지 재임 중에 영부인의 나이는 40대 초중반 정도였다. 여성의 성욕이 절정을 찍는 나이이다.[18] 테니스를 치다가 물집이 생겼는데 하필 그 물집이 곪아서 패혈증이 되는 바람에 손쓰지 못하고(아직 효과 좋은 항생제가 없던 시대) 패혈증으로 사망.[19] 미영전쟁 당시 영국 국왕은 조지 3세, 쿨리지 임기 당시 영국 국왕은 조지 5세.[20] 출처: 데일 카네기, <카네기 인간관계론>[21] 허버트 후버 혹은 해리 S. 트루먼의 말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다.[22] 여기서는 남부와의 전쟁에서 연거푸 패배한 공화당이 망하고 민주당이 보수정당으로서 장기집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