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카르노 조약
Locarno Treaties
1925년 10월 스위스 티치노주 로카르노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승국 및 신생국[1] 이 독일(바이마르 공화국)과 체결한 안전보장조약. 이 조약을 통해 독일은 프랑스, 벨기에와의 국경선을 승인했고 이에 따라 국제연맹 체제와 베르사유 체제는 안정단계로 접어든다.
1925년 당시 독일의 외무장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독일의 현 상황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인정하는 것이 최선이며, 조약을 성실히 이행함으로써 독일의 국제적 지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다. 이러한 판단의 연장선상에서 슈트레제만은 1925년 2월에 ''''서유럽에 관한 베르사유 조약의 규정을 독일이 수락하고 동유럽에 관한 문제는 중재재판에 회부해 해결하며 독일이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포기한다''''는 골자의 제안을 영국과 프랑스에게 하게 된다.
국경 승인의 문제를 서유럽과 동유럽으로 나눈 슈트레제만의 제안은 상당히 절묘한 것이었다. 우선 대외적으로 보자면 1차 대전 이후 프랑스는 신생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고 양면에서 독일을 압박하는 외교전술을 구사했는데 슈트레제만의 제안을 받아들일 시 프랑스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상호 안전보장조약을 개정해야만 했고 이는 프랑스의 외교노선을 밑바탕부터 뒤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베르사유 조약을 반대하는 여론이 대다수인 상황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이려는 슈트레제만의 외교 노선은 정치적 자살에 가까울만큼 무모한 것이었는데 '서부의 영토는 포기하더라도 이를 댓가로 동부의 영토는 다시 되찾자'면서 국민 여론을 설득시킬 여지도 있었다.
영국은 지나친 대독 강경책이 독일과 소련 사이의 외교적 밀월관계를 불러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슈트레제만의 제안에 지지를 보내왔고[2] 프랑스 역시 고심 끝에 '아직 동유럽에서의 국경분쟁이 심각하지도 않고, 독일은 비무장 상태인데다가 여차하면 루르를 점령 중인 우리 군대가 개입[3] 하면 되지'라는 판단을 내리면서 영-불-독 사이의 협상은 급진전을 타게 된다.
9월 영-불-독 사이의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이후 이탈리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합의에 가담했고 마침내 1925년 10월 로카르노에서 최종적으로 비준이 이루어지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로카르노 조약 체결 과정에서 1차대전 종전 후 독일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로 인하여 벌어졌던 관계를 상당부분 회복하면서 동반자 관계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독일 역시 이 조약의 승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비록 일부는 서유럽의 옛 영토를 포기한 것을 놓고 슈트레제만을 비판하면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동유럽의 국경은 변화의 여지가 있었다는 점이 다수의 독일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또한 이 조약 이후 독일은 전범 취급에서 벗어나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것이 1926년 허용된다. 승자가 있는 만큼 패자도 있었는데, 바로 폴란드. 로카르노 조약을 통해 외교적으로 동유럽 국경 문제를 거론할 수 있게 된 독일은 폴란드 회랑을 비롯한 구 영토들을 반환할 것을 공공연하게 폴란드에게 요구하면서 압박을 가할 수 있었다.[4] 소련 역시 다시금 유럽에서 왕따 신세가 됐다는 점에서 패자라고 평가 받는다.
로카르노 조약이 체결되던 날 각국의 대표자들은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희망에 찼다. 로카르노 조약을 통하여 1차대전으로 인해 파생된 각종 문제들은 대다수가 해결될 수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의 외상이었던 [5] 과 브리앙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조약 체결 후 불과 4년이 지난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발하며 어렵사리 안정을 다진 로카르노 체제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1935년 아돌프 히틀러가 라인란트 재무장을 지시하면서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1. 개요
1925년 10월 스위스 티치노주 로카르노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승국 및 신생국[1] 이 독일(바이마르 공화국)과 체결한 안전보장조약. 이 조약을 통해 독일은 프랑스, 벨기에와의 국경선을 승인했고 이에 따라 국제연맹 체제와 베르사유 체제는 안정단계로 접어든다.
2. 과정
1925년 당시 독일의 외무장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독일의 현 상황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인정하는 것이 최선이며, 조약을 성실히 이행함으로써 독일의 국제적 지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다. 이러한 판단의 연장선상에서 슈트레제만은 1925년 2월에 ''''서유럽에 관한 베르사유 조약의 규정을 독일이 수락하고 동유럽에 관한 문제는 중재재판에 회부해 해결하며 독일이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포기한다''''는 골자의 제안을 영국과 프랑스에게 하게 된다.
국경 승인의 문제를 서유럽과 동유럽으로 나눈 슈트레제만의 제안은 상당히 절묘한 것이었다. 우선 대외적으로 보자면 1차 대전 이후 프랑스는 신생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고 양면에서 독일을 압박하는 외교전술을 구사했는데 슈트레제만의 제안을 받아들일 시 프랑스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상호 안전보장조약을 개정해야만 했고 이는 프랑스의 외교노선을 밑바탕부터 뒤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베르사유 조약을 반대하는 여론이 대다수인 상황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이려는 슈트레제만의 외교 노선은 정치적 자살에 가까울만큼 무모한 것이었는데 '서부의 영토는 포기하더라도 이를 댓가로 동부의 영토는 다시 되찾자'면서 국민 여론을 설득시킬 여지도 있었다.
영국은 지나친 대독 강경책이 독일과 소련 사이의 외교적 밀월관계를 불러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슈트레제만의 제안에 지지를 보내왔고[2] 프랑스 역시 고심 끝에 '아직 동유럽에서의 국경분쟁이 심각하지도 않고, 독일은 비무장 상태인데다가 여차하면 루르를 점령 중인 우리 군대가 개입[3] 하면 되지'라는 판단을 내리면서 영-불-독 사이의 협상은 급진전을 타게 된다.
9월 영-불-독 사이의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이후 이탈리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합의에 가담했고 마침내 1925년 10월 로카르노에서 최종적으로 비준이 이루어지게 된다.
3. 주요 내용
-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국경, 벨기에와 독일 사이의 국경의 현상유지를 보장한다. 또한 라인란트 비무장을 규정한 베르사유 조약의 준수를 보장한다.
- 프랑스, 벨기에, 독일은 자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의 전쟁을 상호간에 하지 않는다.
- 분쟁의 경우 법률적 분쟁과 정치적 분쟁으로 구분하고 전자는 상설국제사법재판소를 비롯한 국제재판기구에 회부하고, 후자는 조정위원회를 설치해 해결토록 한다. 위원회 구성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에는 국제연맹 이사회에 회부한다.
4. 결과
영국과 프랑스는 로카르노 조약 체결 과정에서 1차대전 종전 후 독일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로 인하여 벌어졌던 관계를 상당부분 회복하면서 동반자 관계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독일 역시 이 조약의 승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비록 일부는 서유럽의 옛 영토를 포기한 것을 놓고 슈트레제만을 비판하면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동유럽의 국경은 변화의 여지가 있었다는 점이 다수의 독일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또한 이 조약 이후 독일은 전범 취급에서 벗어나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것이 1926년 허용된다. 승자가 있는 만큼 패자도 있었는데, 바로 폴란드. 로카르노 조약을 통해 외교적으로 동유럽 국경 문제를 거론할 수 있게 된 독일은 폴란드 회랑을 비롯한 구 영토들을 반환할 것을 공공연하게 폴란드에게 요구하면서 압박을 가할 수 있었다.[4] 소련 역시 다시금 유럽에서 왕따 신세가 됐다는 점에서 패자라고 평가 받는다.
로카르노 조약이 체결되던 날 각국의 대표자들은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희망에 찼다. 로카르노 조약을 통하여 1차대전으로 인해 파생된 각종 문제들은 대다수가 해결될 수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의 외상이었던 [5] 과 브리앙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조약 체결 후 불과 4년이 지난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발하며 어렵사리 안정을 다진 로카르노 체제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1935년 아돌프 히틀러가 라인란트 재무장을 지시하면서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5. 같이보기
[1]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2] 정확히 말하자면 맨 처음에는 영국도 별로 탐탁치 않아했다. 알다시피 영국은 '대륙의 일에 우리는 신경 안쓸련다'라는 고립주의 노선이 오랜 전통이었기 때문. 하지만 이 당시 주독 영국 대사가 '독일을 이대로 왕따시키면 얘네 진짜로 소련이랑 동맹까지 맺을 수도 있음.'이라면서 강력히 슈트레제만의 제안을 승인할 것을 주장하면서 영국 정부의 입장이 변하게 된다.[3] 다만 보불전쟁 이후로 일찌감치 독일에 대한 군사적 자신감은 상실(...)했기 때문에 영국에게 '우리 개입할 때 너네도 같이 개입해야지 이 협상 승인할 거임'이라면서 영국 역시 유사시 군사적 개입의 의무를 지게 만들었다.[4] 이로 인하여 몇몇 사학자들, 특히 사회주의 계열의 사학자들은 '슈트레제만이나 히틀러나, 로카르노 조약이나 뮌헨 협정이나 다를 게 뭐임?'이라고 대차게 까기도 한다.[5] 저 체임벌린이 아니다. 당시에는 네빌 체임벌린의 형인 오스틴 체임벌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