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평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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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가 시상하는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
다른 노벨상들과는 달리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시상하는 것이 이색적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노벨이 평화상은 노르웨이에 권한을 이임했기 때문이다. 1901년의 첫 수상자는 적십자를 창립한 스위스의 앙리 뒤낭과 국제 평화 연맹을 창설한 프랑스인 프레데리크 파시이다. 또한 학문적 성취와 무관하게 탈 수 있는 노벨상이기도 하다. 물론 '''전 세계가 인정할 수 있을 만큼의 학문적 성취에 준하는 국제적 업적을 달성해야 하지만...''' 물론 과학자, 경제학자, 문학가가 평화상을 수상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먼 볼로그, 무함마드 유누스, 베르타 폰 주트너가 좋은 예.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려면 노르웨이 국회의원 최소 1인의 추천이 있어야 한다.
2. 역사와 이야기들
1948년 마하트마 간디는 노벨 평화상의 유력한 후보였으나 수상자 발표를 얼마 앞두고 암살당했다. 노벨상은 발표 시점에 생존 중인 인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간디의 평화상 수상은 무산되었고, 그 해의 노벨평화상은 이례적으로 공석이 되었다. 노벨상 공식 웹사이트에서도 간디에게 사후 평화상 수여를 여러모로 검토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
전두환도 노벨평화상 후보였다. 상을 받을 수는 없어도 추천까지는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입법부의 의원이면 누구나 추천할 수 있다. 하도 독재 인사를 추천하는 것 때문에 2001년부터 '''노르웨이 국회의원'''으로 추천 가능 인원이 제한됐다. 노르웨이 국회의원한테 접촉해서 노벨상 추천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아돌프 히틀러도 후보로 추천받은 적이 있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었던 E.G.C. 브란트라는 이가 추천했는데, 그에 의하면 안티파로서 풍자를 위해 추천한 것일 뿐 진심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공동으로 추천한 노벨상 후보는 뮌헨 협정의 네빌 체임벌린이었다. # 쿠르드족 학살을 명령한 윈스턴 처칠조차 자신이 노벨평화상 후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다른 노벨상과 달리 2010년대부터의 개인 수상자가 유독 개발도상국이나 최빈국 수상자가 많다. 그 만큼 평화와 인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지역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학부문은 아무래도 기초과학이나 최초 발명, 발견자에게 돌아가는 순수학문분야가 발달한 선진국이나 러시아, 중국, 인도같은 강대국 정도에서나 나올 수 밖에 없기도 하다. 실질적인 이유는 선진국/강대국에서는 정세가 개도국에 비해서 비교적 안정적이기 때문에 평화상의 의미가 퇴색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9년 버락 오바마, 2012년 EU의 수상이 그다지 좋지 못한 평을 받았던 것이 근래의 대표적인 사례.
2.1. 논란
다른 노벨상들과는 달리 논란이 매우 많은 상이다. 근본적으로 '평화'라는 주제로 상을 주는 것은 각 국가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에 다른 노벨상과는 달리 수상자의 업적의 평가가 각 구성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정치적 수장들의 수상은 여러번 논란,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전쟁과 관련되어 상을 받은 헨리 키신저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련으로 상을 받은 양쪽 수장[2] 의 수상에 대한 비판이 많다. 1978년 안와르 사다트[3] , 메나헴 베긴[4] 의 경우도 비슷하다.
- 1906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러일전쟁의 원활한 해결'에 대한 공로를 내세워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평화는 동아시아의 어느 반도국가의 자주 독립이 평화상 수상자를 포함한 강대국들의 야합으로 이웃 섬나라에 빼앗기는 것을 대가로 했다.
- 우드로 윌슨도 민족자결주의와 국제 연맹을 제창했다는 이유로 1919년 평화상을 받았다. 물론 민족 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 대전 패전국에 합병됐던 나라에게만 해당됐던 얘기지, 승전국의 식민지(예를 들어 인도, 한국[5] )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문서 참고.
- 1974년에는 일본의 전 총리 사토 에이사쿠가 비핵 3원칙을 확립해서 수상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당시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가 정적 사토를 회유하기 위해 전방위 로비를 벌였다는 소문도 있다.
- 1973년 파리조약으로 베트남 전쟁을 휴전하고 미군을 철수시킨 공로로 베트남의 레득토와 미국의 헨리 키신저가 수상자로 선정됬다. 노벨상 역사상 최악의 수상자로 꼽히는데 레득토는 자기 조국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고, 키신저는 캄보디아 폭격을 포함해 국무장관 재임 시절 전쟁 범죄와 인권 탄압으로 비판을 받는 인물이다. 레득토의 말대로 1975년 사이공 함락으로 전쟁이 끝난다. 키신저는 반전 시위대를 우려해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사이공 함락 후 상을 반납하려 했지만 노벨위원회가 거부했다.
- 198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루마니아 태생 유대인계 미국 작가 엘리 비젤(1928~2016)도 논란이 컸다. 홀로코스트를 고발한 책자와 수기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시오니즘을 옹호는 그렇다고 쳐도 팔레스타인 학살을 두둔했기 때문이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해 제2차 세계 대전 전사자 추모 무덤을 참배한 걸 나치 독일 참배라고 비난하다가 강제 징집자 전사 무덤 참배를 나치라고 하면 서독 모두가 나치라는 주장이라는 비난으로 까였다. 늘그막에는 같은 유대인인 버너드 매도프에게 사기로 많은 재산을 잃었다.
- 80, 90년대에는 레흐 바웬사(1983), 데즈먼드 투투(1984), 달라이 라마(1989), 미하일 고르바초프(1990), 아웅 산 수 지(1991), 넬슨 만델라(1993), 류샤오보(2010), 드니 무퀘게&나디아 무라드(2018)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마다 적절하게 상이 주어졌다. 동티모르의 독립운동가들과 아일랜드 평화 협상을 타결한 사람들에게도 상이 주어졌다.
- 2009년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상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빌 클린턴을 제외한 지미 카터 이래 모든 민주당 행정부의 지도자들은 평화상을 한 번씩 받게 되었다. 그래봐야 카터와 오바마밖에 없지만.[6] 그런 것 때문에 노벨평화상은 신뢰를 잃고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특히 버락 오바마의 경우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바마가 당선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걸 받음? 뭘 했는데?" 라고 반응할 정도로 미지근했다. 오바마 본인도 조금 당황한 듯하다. 몇몇 사람들의 말로는 "아직 한 일의 결과도 안 나왔는데 받아도 너무 이르게 받았다" 라는 듯. 일각에서는 오바마가 미국에서 그렇게나 멸시 천대를 받던 흑인종으로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이 하나만으로도 인종평등에 대한 커다란 상징이 되었기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오바마가 신 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여 평화상을 받아간 밥값은 충분히 했기 때문에[7] 세월이 흐른 지금은 대충 납득하고 넘어가는 분위기(...).
- 2010년에는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와 관련된 인사인 류샤오보가 수상했다. 그런데 이분은 감옥에 있으며, 앞으로 나오기도 힘든 상황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이 결정되었다. 처음에는 못 믿겠다는 반응이었지만, 실제로 확정되어 버리자 중국 공산당이 뒤집어지고 중국의 높으신 분들 위주로 난리가 났으며, 수상 발표가 난 뒤 '우리는 이번 노벨평화상을 인정할 수 없다.' 라면서 국제문제로까지 만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참류가 수상한 이후 중국에서 류의 가족, 친지, 지지자 등 200명이 넘는 사람에게 출국금지 크리를 먹였는데 그 이유는 노벨상을 대신 받는 걸 못하기 위해서라고.
2010년 12월 10일. 중국 정부는 류샤오보 본인은 물론, 류샤오보의 모든 가족, 친척들과 인권운동가 등 수백여명을 출국금지를 시켰기 때문에, 결국 노벨평화상 수상은 공석으로 진행되었다. 노벨위원회 측에서는 타국에서 활동하는 중국 인권 운동가에게 대리수상을 시켰을 수도 있지만, 특별히 상징적으로 빈 의자에다 노벨평화상 메달을 수여하였다. 빈 자리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것은 1935년 나치 독일 시절에 수상한 카를 폰 오시에츠키 이후 처음이며, 현장에 참여했던 인원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서 3분 동안 기립박수를 쳤다.
게다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2012년 12월에 발표된 AP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류샤오보가 수상자로 발표된 직후부터 26개월째 아무런 법적근거도 없이 아내를 가택연금 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전화, 인터넷도 모두 차단한 채 외부와의 접촉을 금하게 하고 있고, 24시간 10여명의 건장한 감시자들에 의해 철통같은 감시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이 연금은 2017년 류샤오보가 사망[8] 한 후에도 풀리지 않고 있었다. 이후 류샤오보의 아내 류샤는 그가 죽은지 1년이 지난 2018년 7월이 되어서야 자유의 몸이 되었고, 이후 독일로 망명했다.
중국 민간단체가 이에 대항해 공자평화상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국제적으로 무시당하는 건 두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대만에서조차 무시당한다. 결국 이 상은 중국 정부에 의해 폐지. 자세한 것은 공자평화상 문서 참고.
게다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2012년 12월에 발표된 AP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류샤오보가 수상자로 발표된 직후부터 26개월째 아무런 법적근거도 없이 아내를 가택연금 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전화, 인터넷도 모두 차단한 채 외부와의 접촉을 금하게 하고 있고, 24시간 10여명의 건장한 감시자들에 의해 철통같은 감시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이 연금은 2017년 류샤오보가 사망[8] 한 후에도 풀리지 않고 있었다. 이후 류샤오보의 아내 류샤는 그가 죽은지 1년이 지난 2018년 7월이 되어서야 자유의 몸이 되었고, 이후 독일로 망명했다.
중국 민간단체가 이에 대항해 공자평화상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국제적으로 무시당하는 건 두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대만에서조차 무시당한다. 결국 이 상은 중국 정부에 의해 폐지. 자세한 것은 공자평화상 문서 참고.
- 2012년에는 유럽 연합이 수상했는데, 유로화 사태 등으로 인해 유럽 전체가 분란에 휩싸인 가운데 유럽연합 자체에 대해 적대적인 여론이 점점 커지는터라 부적절한 수상이라고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 2020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는 홍콩 시민들과 시위를 이끄는 민간인권전선이 추천됐다고 한다. 기사
- 2019년 수상한 아비 아머드 에티오피아 총리의 티그라이 지역 군사작전이 나옴에 따라 다시 노벨 평화상 이미지가 갈수록 구겨지고 있는 상태이다.#
2.2. 개인만 받는가?
한 개인이 아닌 집단이 받는 경우도 있다. 1910년의 국제 평화국, 1917년, 1944년, 1963년의 ICRC,1977년의 국제앰네스티, 1999년의 국경 없는 의사회, 2001년의 UN, 2007년의 IPCC(International Panel on Climate Change,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2012년 유럽연합, 2013년 화학무기금지기구(OPCW(Organisation for the Prohibition of Chemical Weapons)) 2015년의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등이 좋은 예이다.
2.3. 한국인 수상자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 당시 대통령이던 김대중이 "한국과 동아시아 전반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로 그리고 남북화해와 평화에 대한 노력"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었다.[9] 이것이 한국인이 받은 최초이자 2021년 현재까지 유일한 노벨상이다. 그리고, 동티모르에서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학살된 사건을 APEC 등의 국제무대에서 주도적으로 막을 것을 건의해 결국 학살을 막아낸 것도 수상의 이유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링크 이 때문에 동티모르에서는 아직도 대한민국에 대한 평가가 후하다. 즉, 남북화해분위기 조성의 공 외에도 수상사유에는 DJ가 젊은 시절 펼친 민주주의 운동부터 재임시절의 업적까지 총망라되어 있는 것.[10] 참고로 김대중은 1987년부터 매년 14번이나 후보에 올랐고 결국엔 수상에 성공했다.기사
이 노벨상 수상에 대해 로비가 있었다거나 그 반대의, 그러니까 수상하지 못하게 로비가 있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우선 논란에 대해 올라브 욜스타드 노벨연구소 연구실장이 '''"한국으로부터 로비가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정치적 반대자 등으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또한 가이르 룬데슈타트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은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노벨평화상을 비합법적인(illegitimate) 방법으로 받았음을 암시하는 어떠한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노벨위원회가 그에게 상을 주는 대가로 돈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무례하며(outrageous), 위원회의 심사절차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기사
또 노벨위원회 부위원장인 군나르 스톨셋은 2016년 인터뷰에서 국정원 주도로 노벨상 로비가 존재했음을(그러나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않았음을) 언급하였다. 다만 다른 위원회 관련자의 증언이나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며, 스웨덴 내부 기준으로 군나르 스톨셋 혼자의 증언이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불가능하다.
당시 한나라당 이신범 전 위원을 필두로 한나라당 원외위원장들이 오슬로에까지 가서 김대중 노벨상 저지 시위를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나라의 위신이 깎일 수 있는 당내 일부의 모난 행동이 한나라당의 공식적인 입장인 것처럼 외부에 비쳐지는 것이 부담스럽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1987년 독일의 빌리 브란트 수상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후 사민당 동료의원 80여명과 함께 김대중을 추천한 뒤 줄곧 해외의 여러 유력인사로부터 총 15번이나 평화상 후보로 추천받았다. 따라서, 선거에서 이겨서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 이후 벌인 로비 하나로 수상후보로 지명되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 애초에 위의 군나르 스톨셋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쳐도 결국 그다지 결정적인 영향은 주지 않았다고 언급하였고 말이다.
노벨평화상은 노벨상 부문 중에서도 노벨이 상을 만들게 된 의지와 가장 가까운 중요한 상이었던데다, 김대중이 받은 2000년은 새천년 최초수상자이면서 전세계적 관심이 집중되던 노벨상 100회 수상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시대적 상징성이 있는 수상을 일부의 음해처럼, 부정한 방법으로 받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100년 역사상 최초로 위원회에서 반대 의견 없이 만장일치로 수상이 결정되었다.[11]
노벨평화상 로비설이 잘 먹히지 않자 아예 노벨평화상 자체를 폄하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비록 노벨평화상의 기준이 논란이 있고 친서방적이라는 비판도 있을지언정, 어쨌든 유럽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매우 권위있고 저명한 시상식이다.
한편 2017년 10월 8일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 사망 이후 '''노벨평화상 취소 공작'''을 벌였으며, 사전 공작으로 라프토 상 수상을 취소시켜 노벨평화상을 받지 못하게 하려던 정황 역시 포착되었다.# 국정원은 한 보수단체 간부를 통해 서신을 작성해 노벨위원회에 부치기까지 했다. 이 과정 중에 사용된 비용은 전부 '''세금'''으로 충당됐다. 그 전에도 보수단체가 수상을 방해하는 로비를 행했다는 주장은 꾸준히 나왔지만 어디까지나 보수단체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가정보원이 계획적으로 행한 작업이었다. 당연히 DJ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분기탱천하여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하지만 정의당쪽에선 어떤 반응도 없었는데 이쪽은 민주노총이 일을 벌였기 때문. 김대중은 민주노총 합법화와 민주노동당의 제약없는 활동을 인정해 주었지만, 폭력적인 시위로 인해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되고 은행 파업을 공권력으로 해산시켰단 이유로 민주노총은 자신들이 탄압을 받았다며 노벨위원회에 면담을 신청해 김대중의 수상 반대를 위해 움직인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이 리뉴얼되기 이전, 광화문점 입구에는 여러 나라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캐리커처를 국가별로 진열해놓고, 한 자리는 "한국인 수상자를 기다립니다"라는 문구를 써 놓고 비워뒀다. 그러다가 2000년부터는 김대중의 캐리커처가 들어가게 되었고 '다음 수상자를 기다립니다' 라는 문구가 다시 써졌다.
최초의 한국인 수상자 김대중 이후 한국에선 지속적으로 노벨 평화상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선 2007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2010년엔 이명박이 노벨평화상 수상을 노리고 최초의 대한민국 주도 국제기구인 글로벌녹색성장기구(GGGI)를 창립하였으나 불발되었고 결국 그해 평화상은 류샤오보가 받았다. 이 일화는 이명박 대통령 퇴임 후 한참이 지난 2018년에서야 기사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GGGI 자체는 후임 박근혜 정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잘 운영되고 있다.
2013년-2014년 당시 일부 보수단체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근거로 박근혜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건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13년엔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조용기(...)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건의했다는 기사가 떴었다. 또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역시 임기가 거의 끝나가던 2016년에 노벨평화상 수상 유력 후보로 많은 국내외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었으나, 결국 수상이 불발되었다.
2017년에는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건의하려는 프로젝트가 서울시 주도로 추진되었다. #
2018년에도 국제적인 불량국가인 북한이 전격적으로 비핵화 의지를 보이면서 북한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며 꾸준히 한반도 평화를 주장해온 문재인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나온 적이 있다. 4월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급속도로 진전되자 영국의 공식 도박업체(...) 래드부룩스는 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공동 수상 배율을 1.67배로 예상했다. 이와 관련해서 문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가 이러한 덕담을 건네자 "노벨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받고,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고 밝혔다.[12] 이 때문에 노벨평화상을 발표하는 (한국시간)10월 6일을 전후해서 '노벨 평화상', '노벨 평화상 후보'가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내렸다.
물론 문재인/김정은/트럼프의 수상 가능성이 낮다는 반론도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2018년 노벨평화상의 후보 추천은 2018년 2월에 마감했으므로 이후 남북정상회담 및 북미정상회담의 결과가 반영되지 않았을 거라는 분석도 있었다. 당장 그 북미간 핵협상도 완료된 게 아니고 말이다. 2019년 노벨 평화상은 이웃국과의 국경 분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를 한 공로로 에티오피아 총리 아비 아머드가 받았다.
애초에 어느 대통령이건 대통령이 된 이후 행보 몇 가지만 가지고 노벨상을 받을까말까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이후의 행보 말고도 그 전까지의 민주주의 운동 등의 업적 등으로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걸 명심하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미 '''열 번이 넘게''' 수상 후보자로 오른 전적이 있었다.기사
3. 역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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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수상자 마더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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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수상자 아웅산수지 여사.[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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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수상자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과 드 클레르크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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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수상자 김대중 전 대한민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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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수상자 류샤오보. 본인이 중국 정부에 의해 감금되어 있는 상태여서 상징적인 의미로 빈 의자를 놓고 수상식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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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수상자 말랄라 유사프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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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수상자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14]
[1] 한화 기준 약 10억 6,680만 원.[2] 야시르 아라파트,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3] 군부 독재자로 이집트에서 악명이 높았다.[4]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좋게 평가될 수 없는 인물이다. 또한 극단적 시오니즘 테러 단체인 이르군(Irgun)간부이기도 했다.[5] 3.1 운동이 바로 이 민족자결주의 선언에서 영향을 받은 운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승전국인데다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이었다.[6] 다만 클린턴 정부 시절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가 2007년에 수상했다.[7] 인류 역사상 핵무기를 실질적으로 감축하는데 성공한 협정은 START I과 New START 밖에 없다. 이 정도면 충분히 노벨 평화상을 받을 만한 업적이 맞다.[8] 사망 직전 석방되어 군 병원에서 외부와 차단된 채 생을 마쳤다.[9] 수상자 발표는 2000년 10월 13일(서울 시각 기준)이었으며, 시상식은 2000년 12월 10일에 있었다.[10]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미 외국에서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운동가로 상당히 이름을 날렸다.[11] 당시 가이르 룬데슈타트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은 인터뷰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김대중 대통령 수상의 유일한 결정요인이 아니었다. 우리는 수년동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김 대통령의 투쟁노력을 추적해 왔다."라고 언급했다.[12] 이에 대해선 단순히 겸양의 표시가 아니라 현실적인 정치-외교적 의도가 담겨 있다는 해석이 많이 나왔다. 트럼프에게 노벨상을 양보함으로서 한반도 평화 체제의 구축에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를 이끌어낸다는 구상. 자세한 내용은 도널드 트럼프/외교 문서 참고.[13] 수상 당시 아웅산수지 여사는 미얀마 군사정권에 의해 가택연금 상태였고, 가족이 대신 수상했다. 사진 속의 모습은 수지 여사가 복권된 후인 2012년.[14] 노동계 대표인 총노조, 산업계를 대표하는 산업·무역·수공업연맹 시민단체인 인권연맹 법조계의 변호사회 등 4개의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