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북제)

 


'''북제 초대 황제
顯祖 文宣帝 | 현조 문선제'''
'''묘호'''
위종(威宗) → '''현조(顯祖)'''
'''시호'''
문선황제(文宣皇帝)
'''연호'''
천보(天保, 550년 ~ 559년)
'''생몰 기간'''
526년 ~ 559년 (33세)
'''재위 기간'''
'''북제의 황제'''
550년 ~ 559년 (9년)
'''능묘'''
무녕릉(武寧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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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高)
''''''
양(洋)
''''''
자진(子進)
'''부모'''
부황 고조 신무제 고환
모후 신무명황후 누소군
'''황후'''
문선황후

1. 소개
2. 생애
2.1. 형 고징에게 무시당하다
2.2. 고징이 암살당하고 뒤를 잇다
2.3. 북제를 건국하다
2.4. 정벌에 나서다
2.5. 폭군이 되다
2.6. 사망
3. 일화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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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北齊)의 초대 황제.

2. 생애


동위의 대승상 고환과 누씨(婁氏)[1]차남으로 526년 고환이 이주영 밑에 있을 때 태어났다.

2.1. 형 고징에게 무시당하다


535년, 고양은 태원공에 봉해졌으나, 대인 관계가 무척 서툴렀고 특히 발달 장애가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유능했던 것으로 보이긴 하는데 한 번은 고환이 그의 아들들을 불러 시험을 쳤다. 고환은 아들들에게 얽킨 실타래를 주어 풀어보라고 했는데 모두가 끙끙거리는 사이 고양은 칼을 들어 실타래를 잘라 버렸다. 이 일화는 고사성어 쾌도난마(快刀亂麻), 난자수참(亂者須斬)의 고사가 되었다. 고환은 아이들이 커가자 팽악(彭樂)에게 모의 전투 훈련을 시킨 적도 있었는데 이때 장남 고징을 비록해 모두 두려워했지만 고양만이 침착하게 임하며 팽악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어눌하고 우둔했으므로 형 고징은 그를 깔봤다.

2.2. 고징이 암살당하고 뒤를 잇다


547년, 고환이 죽었을 때 고징은 이미 조정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효정제(孝靜帝)가 고징을 죽이려 하자 이를 알아차리고 효정제를 함장당에 연금했다. 549년, 고징은 황제가 되기 위해 심복들을 데리고 회의를 열었는데 회의 도중에 음식을 나르던 시종 난경(蘭京)에게 살해당했다. 고양은 이때 업성에 있었는데 곧바로 군사를 모아 난경과 그 공모자들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고징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처음에 효정제는 고징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이 권력을 되찾으리라 생각했으나, 고양이 호위병 200명을 데리고 왔을 때 그를 다루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는 동안 고양은 고씨 집안의 근거지인 진양(晉陽)으로 가 군대를 재정비했는데 이전에 그를 깔보던 병사들은 그의 조심스럽지만 과감한 결정들을 보고 그를 다시보게 되었다. 그렇게 고양은 고징 사후 혼란을 잠재우고 자연스럽게 동위의 대권을 손에 넣었다.

2.3. 북제를 건국하다


고양은 후경의 난으로 인해 양나라 내부가 시끄러운 틈을 타서 공격하기 위해 이때 팽악을 국경에 보냈다. 이 전투에서 동위는 회수와 장강 사이의 영토를 얻었다. 550년 고양은 효정제에게 압력을 가했고 두 달 후 그는 제왕(濟王)에 봉해졌다. 여름, 관료들인 고덕정(高德政), 서지재(徐之才), 송경업(宋景業) 등의 제안으로 제위를 얻으려했는데 어머니 누씨가 조금 주저했다. 고양은 업성으로 향했는데 업성과 진양의 중간에 있는 평도(平都)에 도달했을 때였다. 관료들은 고양이 황위에 오르려 예비 교섭을 마쳤다는 것을 모른 체했다. 그래서 고양은 다시 진양으로 돌아갔고, 효정제를 다그쳐 구석을 받은 다음 다시 업성으로 갔다. 이에 효정제는 고양에게 선양함으로써 동위는 멸망하고 북제가 개국되었다. 고양은 치세 초기 제국의 일을 주의 깊게 처리했는데 법전을 교정하고, 국경의 방어진으로부터 선비족이나 한족 가릴 것 없이 정예 병사들을 골랐다. 또 세금을 공평히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부의 정도에 따라 가문들을 9개 등급으로 나누었다. 부자들에게는 세금을 더 거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덜 거둬들인 것이다. 아버지 고환과 형 고징처럼 수도를 업성과 진양 둘로 나누고 진양을 효율적인 제2의 수도로 사용했다.

2.4. 정벌에 나서다


고양은 인종적으로는 한족이었지만, 아버지 고환처럼 스스로 선비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족 문화와 전통을 낮게 보았고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고덕정(高德政)과 고융지(高隆之) 등 관료들은 고양의 이종사촌이자 강력한 장군이었던 단소(段韶)[2]의 환심을 사고 단소의 누이었던 단씨(段氏)를 황후로 삼으라고 황제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고양은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규정에 의하여 이씨(李氏)[3]를 황후로 삼았으며 그녀의 아들인 장남 고은(高殷)을 황태자로 삼았다. 대신 단씨는 놓치지 않고 소의로 삼았다. 고양이 북제를 개국하자 서위우문태가 대대적인 공격을 실시했고 고양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방어했다. 우문태는 북제군이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고환이 죽은 게 아니로구나!

우문태는 방어를 뚫지 못하며 돌아갔고 오히려 국경의 여러 지역을 북제에게 잃었다. 552년 고양은 누이의 집을 방문해서 잔치를 벌였는데 누이는 폐위된 효정제의 아내로 효정제는 선양 후 중산왕으로 강등되어 있었다. 고양은 잔치를 벌이다 누이가 자리를 뜨자 짐새을 타서 중산왕을 죽여버렸다. 고양은 황제의 예로 업성 북쪽에 중산왕의 장례를 치뤄주었지만 이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덤을 파헤쳐 관째로 장수에 던져버렸다.
고양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요하(遼河) 유역의 고막해(庫莫奚) 부족을 공격해 큰 성과를 올렸다. 이때 양나라는 후경이 양원제 소역에게 격파당하고 내적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북제는 군사를 보내 국경 지방을 침공했는데 후경이 패배한 뒤에도 계속해서 소규모 원정은 이어졌지만 고양이 직접 큰 원정을 실시하지는 않았다. 겨울에 원정이 끝나자 양나라 장군인 왕승변과 진패선에게 광릉(廣陵), 역양(歷陽)을 돌려주었다.
552년, 겨울 고양은 대군을 이끌고 진양(晉陽)을 떠나 이석(離石)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장성을 건설하기를 명했는데 이석 근처 황로령(黃櫨嶺)에서 사평수(社平戍)까지 건설했다. 이 장성은 서위와 돌궐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553년 거란족이 북제의 북방 국경을 공격해오자 고양은 친정을 실시해서 거란족을 물리쳤다. 겨울에 고양은 양나라를 자기의 봉신국으로 만들기를 바라고 548년 북제에 귀순한 양원제 소역의 사촌 소퇴(蕭退)를 황제로 앉히려 했다. 고양은 곽원건(郭元建)에게 군사를 주어 소퇴를 호위하여 양나라로 가게 했으나, 북제의 군대는 후옥(侯瑱)에게 패배하고 소퇴는 다시 업성으로 돌아왔다.
554년, 유연은 돌궐의 공격을 받아 힘들어하다가, 결국 북제에 도움을 요청했다. 고양은 친정을 나서 돌궐을 공격해서 승리하고 유연의 을 욱구려암나진(郁久閭菴羅辰)으로 바꿨다. 그리고 유연의 주민들을 북제의 영토인 마읍(馬邑)으로 이주시켰다. 원로 장수인 곡률금(斛律金)과 동생 고연(高演)을 시켜 산호(山胡) 부족을 공격해 승리한 후 11살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군사들에게 전리품으로 나눠주었다. 노휘예(路暉禮)라는 하위 장교가 자신의 상관인 사령관을 구하지 못해 죽는 일이 발생했는데 고양은 노휘예의 배를 갈라 장기를 꺼내어 죽였다. 이연사의 <북사>,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는 이 전투 이후로부터 고양이 폭력적이고, 변덕쟁이가 되어버렸다고 평했다.
유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양은 친정을 나서 욱구려암나진을 쳤다. 이때 장수 하발인은 을 공수했지만 고양이 볼 때 말의 질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벌로 하발인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관직을 박탈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를 탄광으로 보내 일하게 했다. 가을 북위 황족 출신 관료인 원욱(元旭)을 죽인 후 고양은 그가 섭정을 맡기 전에 고융지(高隆之)가 자기를 놀린 것을 기억해냈다. 고양은 고융지를 팼고 고융지는 며칠 안 가 죽고 말았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고융지의 아들들 20명을 체포하고 20명의 사람을 뽑아 그들의 목을 치게 했다. 그리고는 고융지와 그 아들들의 시체를 장수에 던져 버렸다.
위수(魏收)가 고양의 명을 받아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魏書)>를 완성했다. 하지만 <위서>는 북위-동위-북제의 정통성에 기반해서 기록한 역사서였기 때문에 북제의 적들을 아주 나쁘게 평가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책을 예서(穢書)[4]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몇몇 관료들은 위수를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양은 위수를 비난하는 관료들을 오히려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 후 서위가 양나라의 수도 강릉(江陵)을 공격하자 고양은 아버지 고환의 사촌인 고악(高岳)을 보내 서위의 안주(安州)를 공격하게 하면서 강릉을 포위한 서위군을 압박하게 했다. 하지만 고악이 도착했을 때 이미 강릉은 함락되었고 서위가 양원제 소역을 죽인 후였다. 555년, 서위에서는 소역의 조카소찰을 새로운 황제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양나라의 정권을 잡고 있던 왕승변과 진패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소역의 아들인 소방지를 새로운 황제로 삼으려고 건강으로 불렀다. 하지만 고양은 죽은 소역의 사촌이었던 소연명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는 547년, 후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와주러 파견되었다가 포로가 되어 살고 있었다.
고양은 동생 고환(高渙)에게 소연명을 호위하게 하고 양나라로 가게 했다. 더불어 왕승변에게 편지를 보내 소방지는 너무 어리니 소연명을 황제로 삼자고 했다. 왕승변은 처음에 거절했지만 결국 받아들이기로 하고 대신 소방지를 황태자로 삼아달라고 했다. 고양은 이를 받아들이고 소연명을 황제로 삼았는데 이를 보증하기 위해 왕승변은 그의 아들 왕현(王顯), 조카 왕세진(王世珍), 왕현의 어머니를 업성으로 보냈다. 소연명은 북제와 평화 협정을 맺고 양나라는 북제의 봉신이 되었다. 하지만 4달 만에 상황이 바뀌었는데 경구(京口)를 지키고 있던 진패선은 소연명이 황제가 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패선은 건강을 급습해서 왕승변을 죽이고, 소연명을 몰아낸 다음 소방지를 황제로 삼았다. 진패선은 처음에 북제의 봉신임을 분명히 했는데 고양은 사마공(司馬恭)을 파견하여 경제 소방지와 양나라 관료들에게 충성 맹세를 시켰다. 하지만 얼마 후 죽은 왕승변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양의 마음이 바뀌었는데 특히 서사휘(徐嗣徽), 임약(任約) 등이 북제로 귀순해오자 고양은 이들을 시켜 건강 가까이 있는 요새 석두성(石頭城)을 함락시키고 소궤(蕭軌)를 보내 이들을 도와주게 했다. 하지만 진패선은 서사휘와 임약의 군대를 패배시켰으며 진패선군이 석두성을 포위하자 소궤의 부하였던 유달마(柳達摩)는 진패선에게 평화 협정을 제안했다. 진패선은 이 협정에 합의하고 자신의 조카 진담랑(陳曇朗), 소방지의 조카 소장(蕭莊), 최고 관료중 한 명인 왕충(王沖)의 아들 왕민(王珉)을 인질로 보냈다. 북제는 물러났지만 유달마는 북제로 돌아간 후 처형당했다.

2.5. 폭군이 되다


양나라 원정 도중에 고양은 더 난폭해졌다. 그는 후궁 설씨가 사촌인 고악(高岳)과 사통한 걸 알고 이것을 질투해 고악에게 자살을 명했다. 그 후 설씨를 죽이고 머리를 잘라서 연회를 시작한 후에 쟁반에 던져놓았으며, 그녀의 몸을 조각낸 것을 놓고 연회를 했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멘붕했으며 연회가 끝난 후 고양은 그녀의 몸을 한데 모아놓고 울었다. 또한 그녀를 실은 수레를 따라가며 통곡했다. 555년 고양은 불교도교를 통합해야겠다고 생각해 불교 승려들과 도교 도사를 불러놓고 자기 앞에서 논쟁하게 했다. 그는 불교가 승리했다고 선언하고 도교를 불교에 통합시켜 버렸으며 도사들은 모두 승려가 되게 했다. 도사들은 처음에 반발했지만 고양이 4명의 도사를 끔살해버리자 나머지는 이에 따랐다. 이후 북제에서 도교는 금지되었다.
556년 고양은 대규모 원정을 준비해 양나라 수도 건강 부근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진패선 부대에 막혀 교착 상태에 빠졌고 급기야 식량도 다 떨어졌다. 결국 이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북제의 많은 장수가 사로잡혔으며 처형당했다. 고양은 이에 대한 복수로 인질로 잡혀있던 진담랑을 처형했다. 말년에 그는 술만 마시면 부도덕하고 잔인하며 기이한 행동들을 했는데 이는 알코올 의존증의 영향도 있었다.
  • 하루 종일 노래하고 춤춘다.
  • 머리를 풀고 야만인의 옷을 입는다.
  • 알몸으로 몸에 밀가루를 바른다.
  • 당나귀, , 낙타, 코끼리를 안장 없이 타고 다닌다.
  • 갑자기 귀족들이나 관료들의 집을 찾아간다.
  • 자주 길거리로 나아가 앉아있다가 자기도 한다.
  • 따뜻할 때는 알몸으로 일광욕을 즐기기도 했고 추울 때도 알몸으로 뛰어 다닌다.
  • 알몸으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

이렇게 해괴하고 괴악한 일을 저지르자 신하들은 도저히 그의 비위를 맞출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변복하고 길거리에서 노파에게 물었다.

고양: 그대는 천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노파: 그는 미쳤습니다. 전혀 천자처럼 보이지 않아요.

직후 고양은 시크하게 그녀의 목을 베어버렸다.
고양이 술에 취하는 날이 많자 황태후 누씨가 그를 조금 나무랐다. 그러자 고양은 그녀를 야만인과[5] 결혼시켜 버린다고 위협했다. 누씨가 화를 내자 그는 웃는 얼굴을 하고 땅을 기어 그녀가 앉아 있는 곳까지 간 다음 그녀의 의자를 뒤엎어버려서 누씨가 다쳤다. 고양은 술이 깬 후 자신이 한 짓을 알게 되자 불을 지르고 거기에 뛰어들어 자살하려고 했다. 이에 누씨가 겨우 그를 잡아 구하자 고양은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이는 겨우 열흘만 유효했다.
그 뒤에는 문선황후 이씨의 어머니에게 화살을 쏘고 그녀를 때렸으며 더 나아가 고씨 일족의 여자들과 강제로 관계를 맺었다. 아버지 고환의 첩인 이주씨(爾朱氏)[6]강간하려고 했으나 이를 거부하자 살해했다. 고양은 술에 취하면 언제나 사람을 살해했는데 재상으로 있던 양음(楊愔)은 고양이 사람을 살해하려고 할 때마다 사형수들을 데리고 왔다. 이때 사형수가 3개월을 죽지 않고 버티면 풀어주었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에도 불구하고그는 제국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세심히 관리했고 관료들의 부패도 확 줄였다. 특히 양음은 유능한 재상이었기 때문에 고양은 그에게 사법적인 모든 권한을 일임했다. 그래서 황제는 미쳐 날뛰었음에도 제국은 효율적으로 돌아갔다.
557년, 동생 고환이 황제가 되리라고 의심하여 고환을 체포하려 하자 고환은 저항했지만 끝내 사로잡혀 업성으로 압송되었다. 이에 동생 고준(高浚)이 고양의 행동을 비판하자 고준 역시 체포했고 두 명의 형제는 나란히 지하 감옥에 갇혔다. 558년 겨울 진패선은 소방지를 몰아내고 진나라를 세운 후 소방지를 암살했다. 양나라 장군 왕림은 진패선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양나라의 황족을 찾았는데 북제에 억류되어 있던 소방지의 조카 소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558년 봄 북제군은 소장을 왕림에게 보냈는데 왕림은 소장을 황제로 옹립하고 북제의 봉신이 되어 강하(江夏)를 수도로 삼았다. 559년 고양은 잦은 원정과 낭비벽으로 국고를 바닥냈다.
아울러 황태자 고은과도 관계가 틀어졌는데 고은이 너무 한족의 풍습에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은을 폐위할까 생각했는데 한번은 고은에게 사형을 직접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즉, 고은에게 금봉대에서 죄수의 목을 직접 치라고 명령내렸지만 고은은 이를 하지 못했다. 화가 난 문선제가 채찍을 들고 그를 때렸으며 이때부터 고은은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졌다. 그 후 고양은 술만 마시면 황제의 자리를 동생 고연(高演)에게 물려주겠다고 말했는데 이런 말이 황위 계승의 분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한 양음과 위수가 말렸다.
고양은 동생인 고준과 고환이 갇혀있는 감옥에 방문했는데 처음에는 이들을 동정해 풀어 주려고 했다. 하지만 동생 고담(高湛)이 그럴 겨를도 없이 창을 들어 그들을 찔러버린 다음 감옥에 불을 질렀으며, 이들의 아내와 첩들을 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여름, 고양은 북위의 황족 원씨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의심해서 효정제의 세 아들을 포함해 원씨 일족들 700여 명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한 다음 그 시신들을 장수에 버렸다. 이후 장수에서 잡히는 물고기에서 사람의 손톱과 손가락이 나와 주민들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2.6. 사망


가을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고양은 병이 들었고 문선황후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이니 난 두렵지 않소만 아들 고은이 너무 어려서 그것이 걱정이오.

그래서 고연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제가 되고 싶다면 네가 황제가 되거라. 하지만 고은을 죽이지는 말라.

직후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고은이 황제가 되었으며 관료들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가장 슬퍼하고 진정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고은 뿐이었다. 사후 무녕릉(武寧陵)에 안장되었다.

3. 일화


청나라의 사학자 조익이 찬술한 <이십이사차기>에는 고양이 술에 취해 황음무도한 짓을 많이 저질렀으나 그 와중에도 간혹 앞날을 내다보곤 했다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였다.
하루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궁금해진 고양이 점쟁이를 불러 점을 쳤다. 점을 친 결과 30이라는 숫자가 나와서 '앞으로 30년은 더 사실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에 '10을 세 번 더하면 30이 아니냐. 나는 그것이 두렵다.'고 말했는데 고양이 세상을 떠난 날짜가 천보 10년 10월 10일이었다.
아들이 태어났을 때 신하들이 이름을 '은'(殷)으로 지어 올리자 '은나라는 아우가 형의 자리를 이었던 일이 잦았으니 이 아이가 장차 자리를 보전하기 어렵겠구나'라고 말했고, 기겁한 신하들이 이름을 바꾸자고 주청했지만 '이미 정해졌으니 어쩔 수 없다'며 거부했다. 임종하면서 동생 고연에게 '자리는 빼앗더라도 다만 목숨은 보전시켜 주어라'라고 말했지만 고연은 형의 부탁을 저버리고 조카를 폐위시킨 후 살해했다.
진양성에는 오랫동안 닫혀 있어 열리지 않는 성문이 있었는데 이걸 본 고양은 '뒷날 성인이 와서 이 문을 열 것'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고양이 말한대로 이 문을 연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을 통일한 수문제 양견이었다.

4. 둘러보기


'''북제의 역대 황제'''
동위 초대 효정제 원선견

'''초대 현조 문선제 고양'''

2대 폐제 제남왕 고은




[1] 이름은 누소군(婁昭君)으로 무명황후(武明皇后)로 추존되었다.[2] 단소의 모친 누씨가 고양의 모친 누씨의 언니였다.[3] 이름은 이조아(李祖娥)로 문선황후(文宣皇后)[4] 더러운 책.[5] 정확히는 선비족 노비[6] 이름은 이주영아(爾朱英娥)로 이주영의 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