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사할린 / Sakhalin / Сахали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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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언어
표기
발음
러시아어
Сахалин
사할린[1]
일본어
樺太/サハリン
가라후토[2]/사할린
중국어
庫頁島/库页岛
쿠예다오[3]

1. 개요
2. 면적
3. 자연
4. 역사
5. 경제
6. 교통
7. 인구
7.1. 민족구성
8. 여담
11. 사할린 섬을 포함하는 러시아의 사할린 주
11.1. 문서가 있는 도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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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섬은 북태평양에 있는 러시아 연방의 섬이자 주로 타타르 해협오호츠크 해 사이에 있으며, 쿠릴 열도와 함께 러시아의 사할린 주를 이룬다. 면적 72,492 km²짜리 상당히 큰 섬으로[4], 러시아가 영유한 섬 중에서 가장 크다. 북극해에 있는 노바야 제믈랴 섬은 실제로는 섬 2개이다. 러시아의 동쪽 해안, 일본홋카이도쿠릴 열도 북쪽에 있다. 인구는 50만 명(2016)인데 러시아인이 다수이고 한국계가 3만 명으로 2번째로 많으며 중심도시는 섬 남쪽 유즈노사할린스크이다.
일본과 사할린 섬 사이의 해협을 라페루즈 해협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라페루즈 백작이 해도에 최초로 기록했으며 이때는 일본인이 홋카이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던 시기와 동시대로, 일본인이 사할린에 진출하기 전이었다. 일본인들은 사할린을 에조치의 북쪽이라는 의미에서 북에조치라고 불렀다. 이 해협을 소야 해협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유라시아 대륙과 사할린 섬 사이에 존재하는 해협은 타타르 해협이라 한다. 폴로베츠 해협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사할린을 탐험해 사할린이 섬임을 일본 최초로 밝혀낸 마미야 린조(間宮林藏)의 이름을 따 마미야해협이라고 부른다. 섬 북서쪽의 포기비와 대륙 측의 라자레프와의 간격이 가장 좁아 불과 7 k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연륙교를 지을래도 충분히 지을 수 있는 너비라는 뜻. 겨울에는 타타르 해협의 바다가 얼어 붙기 때문에 썰매를 타고 사할린섬과 러시아 본토를 오갈 수 있다.
그래서 과거에는 아무르 강 하구에 큰 시장이 열려 사할린 사람들이 러시아 본토에 장을 보러 오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사할린 원주민들은 물자를 구하러 겨울에 썰매를 타고 해협을 건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과거 스탈린 정권 시절 사할린 주둔군 보급도 할 겸 해서 죄수들을 동원해서 해저터널 공사를 시작했지만, 얼마 안 가 스탈린이 사망하고 죄수들이 사면되면서 공사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2020년에 다시 2035년까지 완공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

2. 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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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의 빨간 네모 중 위의 3개는 북사할린(사가렌), 아래의 3개는 남사할린(카라후토)이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 패망 전까지 영유했던 곳이 남사할린이었다.
북위 45~54도 사이에 위치하니 남한의 한참 북쪽에 있다. 남한 최북단이 북위 38도 36분, 남북한(한반도) 최북단인 온성군이 북위 43도이니까(...). 대충 중국의 헤이룽장 성과 비슷한 위도이다.
면적 72,492 ㎢인데 길이는 948 km에 달해서 남북으로 길쭉한 형태다. 남한 면적이 100,210 ㎢, 남한 총 길이가(제주도 제외) 506 km쯤 된다. 면적으로는 남한보다 약간 작은 수준이며 일본의 홋카이도보다 약간 작다. 사할린 섬은 산이 많은 지형으로서 섬의 2/3는 산지이며, 두 개의 산맥이 나란히 남북으로 펼쳐져 있다. 섬이지만 크기가 크다 보니 큰 도 2개 있다. 그 중 팀 강은 길이 400 km에 달하는 긴 강이다. 서울특별시-부산광역시 거리가 대략 400 km쯤 된다.

3. 자연


오호츠크해로 인해 춥고 다습한 기후를 띤다. 쾨펜의 기후 구분으로는 Dfb ~ Dfc. 찬 바다로 인해 같은 위도의 내륙보다는 시원한 여름이 있다. 겨울은, 바다 덕에 약간 덜 춥긴 하지만 그래도 위도가 높으므로 추운 편이다. 여름 평균 최고 기온이 섭씨 21도, 겨울 평균 최저 기온이 −19 ℃. 사할린은 남북으로 긴 연유로 지역차가 있다. 가령 1월 평균 최저기온의 경우 남단의 코르사코프에서는 -11.9 ℃지만 북단의 오하에선 -21.9 ℃에 달한다. 습한 기후라 여름에는 안개가 많이 끼고, 겨울에는 눈이 많다. 산에는 눈이 5 m씩 쌓이곤 할 정도다.
동물은 불곰, 순록, 사향노루, 스라소니, 여우, 수달, 담비, 다람쥐, 토끼, 딱따구리, 뇌조, 까마귀, 독수리, 연어, 물개, 바다표범, 고래 등이 서식하고 있으며 가문비나무전나무, 상수리나무, 눈향나무, 갯씀바귀, 마가목, 취나물 같은 여러 식물들도 서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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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으로는 모네론 섬(Остров Монерон)[5]이 있다.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서쪽으로 차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네벨스크(Невельск)라는 조그만 항구도시[6]에서 보트타고 1시간 정도 가면 있다. 러시아 최초의 해양자연공원이라고 하며, 수백 마리의 희귀 조류와 물고기, 바다사자, 15m 높이의 폭포가 하이라이트라고 한다. 러시아인들도 잘 모르는 곳이라고 하니 사할린을 방문하는 이라면 한번 가보도록 하자.

4. 역사


본래 북부 지방에는 퉁구스계 민족인 윌타인(Ульта)과 고유한 계통의 니브흐족(Нивхи) 등이 거주했고, 남부 지방은 사할린 아이누가 거주한 땅이었다. 탈해 이사금의 출신지가 이곳이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7] 한반도의 부족국가들과는 어느 정도 교류를 해 왔던 것으로 보여지나, 뒷날 중국당나라가 들어설 때까지 동북아시아에서는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당시 당나라의 기록에서 이들은 유귀국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한 차례 조공을 한 적은 있으나 지리적으로 중국에서 너무 멀었던 지라 외교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고 또다시 잊혀져 버렸다. 운송 수단이 발달한 오늘날이면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겠지만, 가까운 한반도를 가는데도 목숨을 걸어야 했던 옛날에는 까마득히 먼 나라로 여겨졌을 것이다. 당 멸망 이후엔 금나라가 이곳을 지배했고 금나라의 중심지인 만주랑도 나름 가까웠으나 별로 가치가 없었는지 관련 기록은 그다지 남아있지 않다. 그러다가 13세기 이후에 몽골 제국이 수 차례 침공해 지배했던 적이 있으나,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복속만 확인 했을 뿐이다. 다만,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당시에 몽골군이 잠시 이곳에 들른 적은 있는데, 가까운 홋카이도를 통해 일본을 공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청나라가 1616년 이곳에 군대를 보낸 이후로 자국 영토로 간주해 관리를 보내기도 했지만 실제로 지배권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 러시아일본이 각각 식민개척정책을 시행하여 자기 땅이라고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 이후로 1844년에 일본의 탐험가인 마미야 린조가 에도 막부의 지원 하에 지금의 타타르 해협까지 탐사하고 사할린이 섬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때문에 뒷날 사할린 남부가 가라후토라는 이름으로 일본령이 되었을 때 이 해협이 그 동안 마미야 해협으로 불렸다. 1855년 맺어진 러일화친조약 이후 사할린은 양국의 공동 관할구역이 되었다.
그 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일본측 명칭은 가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으로 인해 쿠릴 열도 전도를 일본이 영유하는 대신 사할린은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전후에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의해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남부는 일본령으로 편입되었으며 일본은 이 지역에 가라후토 민정서를 설치하였다. 이후 1907년에는 가라후토 민정서를 가라후토 청으로 개편하였으며, 그 이후에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이 사할린 섬의 남쪽을 지배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령 가라후토 문서 참고.
한편 1905년 이후에도 북사할린은 러시아의 영토로 남았으나,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한 뒤 시베리아 출병으로 간섭한 일본군에게 1925년까지 지배되면서 일시적으로 사할린 전체가 일본령이 된다. 유럽 러시아를 간수하기 바빴던 소련은 당시 사할린 개발에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할린 섬의 석유 개발권을 일본에게 양도했다. 또 레닌은 사할린 영유를 로마노프 왕조의 제국주의에 의한 불법 점유라고 주장했고[8], 일본에게 사할린 섬 전체를 반환하려고 했지만 결국 일본은 북사할린 반환과 함께 소련을 승인하면서 실행되지는 않았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섬 전체가 다시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전쟁 이전 북사할린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하바롭스크 크라이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소련이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통째로 흡수하였다.[9] 스탈린은 쿠시로-루모이선을 경계로 북해도를 분할하거나 전 북해도까지 점령하려 획책했다가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어 7월 이후 북사할린, 남사할린, 쿠릴 열도까지 포함해서 1947년 사할린 주로 독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1952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은 사할린 남부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였다.

5. 경제


사할린은 석유, 천연가스, 석탄의 채굴 및 임업, 어업이 주요 산업이다. 소련 붕괴 후 석유 붐이 일어서 석유와 가스의 비중이 커졌다. 2006년에는 석유와 가스가 공업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비중이 높다. 석유와 가스 덕택에 실업률이 2%에 불과할 정도로 경제는 계속 활황이다.

6.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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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사할린 섬의 수도나 마찬가지인 유즈노사할린스크유즈노사할린스크 역철도 교통의 중심이다. 위 지도에서 특별히 이름이 빨간색인 역.
사할린 섬의 철도 남쪽은 일제강점기에 깔아놓은 철도를 바탕으로 약간씩 연장한 것이다. 북쪽 부분은 제정 러시아 말기/소련 시대 지은 산업철도이다.
특이한 것은 본토의 러시아 철도광궤인 것과 달리 이 곳은 일본 철도와 같은 케이프 협궤 철도가 깔려 있었다. 한동안 일본이 옛날에 깔았던 철도를 갈고 닦아가며 써서 그렇다. 북쪽 부분도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러시아 본토의 광궤가 아닌 700mm/762mm 협궤 경편철도로 부설된 것을 1945년 이후 단일 철도국으로 통합되면서 운영편의를 위해 남사할린와 같은 1067mm 케이프 협궤로 개궤. D51형 증기 기관차도 굴러 다녔고 차량 한계도 일본 기준으로 맞춰져 있어서 소련 시기에 자국산 차량을 사할린에 맞게 변경하는 대신 아예 일본산 디젤 동차를 굴렸던 적이 있었다. 오랜 개궤 공사 끝에 2019년부터 러시아 본토와 동일한 1520mm 광궤 차량이 운행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치하쿠 연락선을 통해 일본 홋카이도소야 본선 철도와 연계되어 운행했었다가 2차대전 이후 소련이 사할린을 탈환, 병합하고 냉전기 내내 일본과 소련은 적국이어서 끊어졌다. 지금은 냉전이 끝나고 일본과 정기여객선이 다시 취항하고 있지만 해운을 이용해 양국의 철도를 연계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있다. 해저터널 건설계획이 수십년간 꾸준히 제안되고는 있지만 일본 측에 비해 러시아 정부 쪽은 미적지근한 반응. 러시아 정부도 몇 번 계획을 촉구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공사가 쉬운 일은 아니기에 아작도 삽을 뜨지도 못하는 중. 대신 러시아에서 소베츠카야가반을 연결하는 연락선을 통해 BAM 철도와 연결, 블라디보스토크연해주만주중국 쪽으로 접속시키고 있다.
그 외 일반교통은 주로 자가용과 시외버스로 이뤄지고 있으며 장거리 여객은 항공편을 주로 이용한다. 한국 인천국제공항과의 직항편은 아시아나항공오로라항공 등이 운항하고 있으나, 아시아나항공은 노선 구조개선의 일환으로 2019년 9월부터 운휴에 들어갈 예정이다. 사할린 노선은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는 아시아나항공의 국제선 노선 중 가장 낮은 탑승률(56.8%)를 기록했다.
러시아가 2035년 완공을 목표로 사할린과 본토를 잇는 철도 교량의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7. 인구


소련 말기인 1991년에는 71만 명에 달하였으나, 그 후 계속 인구가 줄어들어 2016년에는 48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그나마 최근(2016년 이후)에는 인구감소세가 반전되었다.

7.1. 민족구성


사할린에는 사할린 한인들이 상당수 산다. 2002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이 주민의 83%를 차지해서 1위인데, 2위는 바로 한국계 러시아인이다. 약 3만 명으로 주민 수의 5.5% 남짓이다. 이들은 구한말부터 사할린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후손이다. 이중 일부는 자발적 이주자도 있으나 대부분 일제에 의한 강제징용 피해자의 후손이다. 연해주 지역 고려인은 주로 현재 북한 쪽에 속해있는 평안도, 량강도, 자강도, 함경도 지역에서 사할린 한인은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지역에서 이주한 지라 서로 간 정체성 차이가 좀 있는 편.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자 일본은 한국계들을 방치한 채 일본인들만 데리고 본국으로 무책임하게 철수해버렸다.
일본에서는 예전 자신들 땅이라고 아쉬워하면서 투자하고 반일 감정을 줄이고자 노력한다. 이후 한국계 귀국 문제로 일본에 소송을 제기한 적도 있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1989년부터 실무자 접촉 등 가시적 진척이 있었고, 그 후 2000년에 407세대(814명)가 귀국하는 등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아직도 영구 귀국을 희망하는, 미처 귀국하지 못한 사할린 한국계들이 있다. 이러한 문제가 있어서인지 유즈노사할린스크에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 총영사관의 출장소가 생겨 관련 업무를 담당한다.
어쨌든 이 사할린 한인들 덕분에 사할린섬은 러시아에서 한식이 융성한 지역이 되었는데, 그 사정은 이러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50년대에 사할린에서 거주하던 러시아 사람들은 땔감은 있는데 먹을 게 없어 석탄 더미 위에서 배급받을 식량을 기다리며 쫄쫄 굶었다. 그런데 한인들은 맨날 무언가를 먹으므로 잘 보았더니만 문어, 오징어, 조개, , 새우[10][11], 명태,[12] 두부, 돼지 머리, 꼬리, 내장, 족발,[13] 다시마미역 등 해초류들,[14] 고사리[15] 등 뼛속까지 내륙 문화권이었던 러시아에서는 식재료로서 천대받던 것들이었다. 사할린의 한인들은 바다로 가면 물고기와 게, 조개가 널렸고, 산에 오르면 산나물도 많은데 러시아인들이 쫄쫄 굶는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고 한다. 물론 한인들도 전파만 한 게 아니라, 교류 과정에서 러시아 요리의 식문화를 도입, 적용하기도 했다. 순대에 비계를 많이 넣는다거나, 김치돼지볶음에 두꺼운 비계를 그대로 넣는다든가, 사할린 한인과 결혼한 러시아 가정주부가 된장찌개에 연어를 넣는다든가.
사실 러시아가 해양을 개척하기는 근대의 일이고 음식 문화 같은 건 여전히 육지의 농경, 유목, 수렵 문화를 중심으로 육고기, 채소, 과일 위주로만 즐겼으니 어류, 두족류, 해초류 등 다양한 해물을 잘 안 먹었음이 당연하다. 이전에도 바다가 있긴 했지만, 얼음이 꽝꽝 어는 북극해에서 어업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거기다 표트르 대제 이전에는 발트해 연안 지역은 스웨덴이, 흑해 연안은 오스만 제국이 장악했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폴란드,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등 슬라브 민족권 동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그렇다. 우크라이나, 불가리아, 폴란드는 흑해, 발트 해 등 바다와 접해 있는 국가들임에도 불구하고 바르나, 오데사, 그단스크, 그다니아 같은 해안 지역들을 제외하고는 어류, 두족류 등 해물을 잘 먹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러시아의 이웃나라인 노르웨이나 불가리아의 이웃나라인 그리스는 어류, 갑각류, 두족류 등 해산물을 잘 먹으며 해산물을 활용한 전통 요리도 풍부한 편이다.
어쨌든 러시아인들도 처음에는 뭐 저런 걸 먹냐는 반응이었지만, 배가 고프니 얻어 먹기도 하고, 먹어보니 맛있기도 해서 한식 재료나 한식을 곧잘 먹게 되었다고 한다.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성게, 조개, 다시마나 산나물 채집도 하러 돌아다니고, 채집한 걸 사할린 한인들에게 되판다. 가장 인기가 많은 식재는 고사리라고. 옛날에는 그냥 내버리던 문어갑오징어도 지금은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도 옛날에는 금방 쉽게 얻는 해산물도 요새는 사할린 러시아인들이 자신들도 먹겠다며 값 비싸졌다고 푸념하는 할머니의 증언이 있다. 막걸리는 재료를 못 구해서 사라져버렸지만 육개장, 닭도리탕도 먹고 90년대부터는 두부도 먹고 배추도 중앙아시아와 달리 구하기 수월했는지 김치도 당근김치를 먹는 것이 아니라 배추김치를 먹고 있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에서 가끔 오는 본토인들은 사할린 사람들이 이런 걸 먹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기도 한다. 문화적으로 약한 사할린이나 극동지방에서 한류 등 한국문화가 점점 강해지면서 한국식 식재료 가격도 더 오를 것이다.
정작 사할린의 원주민이었던 니브흐, 윌타, 사할린 아이누는 인구 비중에서 극소수를 차지한다.[16]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격.

8. 여담


현재는 지하 자원 창고로서의 가치가 높지만,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일본도 러시아도 큰 가치를 두지 않던 땅이었다. 워낙 기후가 험하고 땅 자체도 경작이 거의 불가능한 불모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일본에서는 이 땅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러시아가 남하하기 전까지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사실 당시의 일본으로서는 홋카이도, 쿠릴 열도도 사실상 버거웠다. 전통적으로 더위를 피하기 위한 구조로 짜여진 일본식의 가옥과 의복은 사할린에서는 무용지물이었고, 지금만큼 교통과 운송이 발달한 때도 아니라서 멀리 떨어진 사할린까지의 물자의 보급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실제로 일본이 남사할린을 얻어낸 것에 대해서 그 따위 쓸모 없는 땅을 얻어서 뭐하냐는 식의 부정적인 여론도 다수 존재했다. 물론 땅이야 가지면 가질수록 좋은 거라서 북사할린 전체까지 차지하려고 했지만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사할린보다는 훨씬 이점이 많은 연해주만주 방면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서, 그래도 도시의 꼴은 갖추고 있는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나홋카 같은 도시들과는 다르게, 현재도 사할린은 코르사코프, 유즈노사할린스크 등 섬 내 주요 도시들이 종전 당시와 인구나 인프라가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남사할린이 일본 영토였을 적에 이곳에서 하드로사우루스류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학자들은 '일본의 도마뱀'이란 뜻의 니폰노사우루스라는 학명을 명명했다.
의사이자 극작가로 유명한 안톤 체호프가 이곳의 유형지를 답사하면서 만든 보고서인 사할린 섬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사할린의 지질학, 지리학적 정보 뿐만 아니라 당대 시베리아 지역 유형지의 모습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비록 형식은 실무 보고서이지만 글 좀 쓰는 사람이 써서 그런지 딱딱한 느낌이 아니라 기행문처럼 술술 읽히므로 관심 있는 사람은 읽어봐도 좋을 듯. 한국어 번역본도 소개되어 있다. 체호프의 사할린 기행은 그의 문학관에도 큰 변화를 주었다. 기존작들은 레프 톨스토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사할린을 여행하면서 그의 영향에서 탈피하고자 한다.
이 섬 근방에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일어났다. 1983년 9월 1일 사할린 서쪽 근방에서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어 269명의 승무원 및 승객 전원 사망했다. 1995년 5월에는 네프테고르스크라는 소도시에서 리히터 규모 7.5의 강진이 일어나서 무려 2천명이 죽었다. 인구의 반을 한참 넘는 수로, 이 지진으로 네프테고르스크는 유령도시가 되었다.
일본스님이자 아이키도의 유파인 대동류합기도 당주이고 방송인인 야나기 류켄이 바로 여기 태생이다.

9. 영토 분쟁


일본에서 발간되는 지도에서는 북위 50도 이하의 남사할린 지역이 어느 나라의 영토로도 표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사할린과 쿠릴 열도 귀속 문제를 보류했는데, 그 직후 쿠릴 열도 분쟁이 발생하여 영토 관련 협의가 모두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남사할린이 러시아 영토임을 아직 공식적으론 인정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 뿐이지, 쿠릴 열도와 달리 일본 정부는 이 지역의 영유권을 별로 주장하지 않는다. 한때 자기네 영토였던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일본 총영사관마저 두었으므로 러시아의 영유권을 묵시적으로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남사할린이 러시아 영토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코 총영사관을 두면 안 된다. 정부 입장과는 별개로, 일부 일본의 극우 단체들은 북방영토에 쿠릴 열도와 남사할린도 포함하여 러시아로부터 돌려받아야 한다고 영유권을 주장한다.

10. 스포츠


아이스하키, 축구, 여자 배구 선수단으로 구성된 PSK 사할린이라는 팀이 있다. 아이스하키팀은 2014-15 시즌부터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에 참가하여 항상 상위권을 지키는 강팀.
축구단은 러시아 프로페셔널 풋볼 리그에 소속되어 있다. 2014-15 시즌에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2부리그까지 승격을 했는데 당시 같이 2부리그에 소속되어 있었던 FC 발티카의 연고지인 칼리닌그라드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7,500km에 달한다. 그야말로 세계 최장거리 원정경기. 이 팀이 1부리그로 올라가면 모스크바에서 오자면 12시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1시즌만에 다시 3부 리그로 강등당했다.
배구단은 오랫동안 우승과 인연이 없다가 2017년에 시베리아-극동 여자배구 컵에서 첫 우승. 러시아 선수권에서는 중하위권 정도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11. 사할린 섬을 포함하는 러시아의 사할린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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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주
Сахалинская область
주도
유즈노사할린스크
주지사
발레리 리마렌코
인구
488,453 (2020)
면적
87,101㎢
인구밀도
5.61명/㎢
시간대
UTC+11[17]

Сахалинская область(사할린스까야 오블라스찌). 주도는 유즈노-사할린스크(Южно-Сахалинск)로 러시아에서 1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 중엔 두번째로 동쪽에 있다. 면적은 87,100km²로 위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를 포함하고 있다. 인구는 497,973명(2010). 인구의 86.5%는 러시아인이며, 한국인(5.3%)이 그 뒤를 잇는다. 원주민 인구는 거의 없다.
사할린 주의 서쪽과 북쪽에는 하바롭스크 지방이 있고, 서남쪽에는 프리모르스키 크라이(연해주), 동북쪽에는 마가단 주, 캄차카 지방이, 남쪽에는 일본 홋카이도가 위치해 있다.
주지사는 아무르 주의 주지사를 지냈던 올레그 니콜라예비치 코제먀코이다. 소속 정당은 통합 러시아당.

11.1. 문서가 있는 도시



[1] 만주어 지명 사할리얀 울라 앙가 하다(Sahaliyan ula angga hada)에서 따왔다. 흑룡강 맞은 편의 섬이라는 의미. 정확히 말하면 앞의 사할리얀은(Sahaliyan)은 '검은', 울라(Ule)는 '하천'으로 '검은 하천'이라는 뜻이라는 의미도 존재하고 있다. 러시아어를 비롯하여 서양에서 부르는 부르는 "사할린"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2] 아이누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카무이 카르 푸트 야 모시르(Kamuy kar put ya mosir)에서 따왔다. 신이 강의 하구에 만든 섬이라는 의미.[3] 역사적으로는 당나라 때는 窟說(쿠웨), 원나라 때는 骨嵬(구웨이), 명나라 때는 苦夷(쿠이), 苦兀(쿠우), 청나라 때는 庫葉/庫野/庫頁(쿠예)로 불러왔는데, 이것들은 모두 아이누어로 사람을 뜻하는 kur와 땅을 뜻하는 il, 즉 우리 사람들의 땅이라는 의미인 Kur-il의 음역어로 본다. 쿠릴 열도의 그 쿠릴이다.[4] 남한 3/4 정도 크기.[5] 일본어로 카이바토(海馬島), 아이누어로 토도모시리(의미는 바다사자의 섬.)라고 불린다.[6] 말이 좋아 항구도시지 실제론 인구 만 명도 안 되는 촌동네다. 2020년 기준으로 인구 9,815명. 같은 사할린에 위치한 코르사코프홈스크랑은 비교도 안 되게 초라해 보인다.[7] 그 이외에 인도 남부 출신이라는 설과 캄차카 반도 출신이라는 설, 말갈족 출신이라는 설에서 강원도 지역에 존재한 한국계 부족 출신이라는 설 등, 가설이 다양하다. 이 중 주류 학계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는 설은 남인도 출신설과 캄차카 반도 출신설, 그리고 지금 언급하는 사할린 출신설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8] 레닌의 오바만은 아니고 체호프도 사할린은 원래 일본의 땅이라고 기록하는 등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할린은 일본으로부터 획득한 외지로 여겨졌다.[9] 소련군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8월 15일에 사할린을, 8월 18일부터 9월 4일까지 쿠릴열도를 장악한다.(9월 2일에 일본이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10] 그리스,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프랑스, 몰타, 몬테네그로, 스페인, 튀니지, 모로코, 키프로스 등 지중해를 면한 남유럽, 중동의 몆몆 국가들과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정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백인들은 두족류, 갑각류, 패류(조개, 소라, 고둥 등)를 종교적, 문화적인 이유로 질색하거나 거부한다. 게다가 그 미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도 해안 지역에서나 해산물을 많이 먹지, 바다가 없는 내륙지역에서는 유통 문제로 해산물을 잘 먹지 않고 먹어도 냉동 가공품 정도밖에 먹지 않는다.[11] 중동, 북아프리카의 아랍권 국가들은 대부분이 바다와 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늘 없는 해산물 섭취를 금기하는 이슬람 교리 때문에 해산물을 바닷물고기 빼고는 도통 먹지 않는다. 그나마 튀니지와 모로코는 이슬람교도(무슬림)들이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 국가인데도 바닷물고기뿐만 아니라 새우, 바다가재, 조개, 굴, 문어 같은 갑각류, 패류, 두족류들을 잘 먹거나 요리 식재료로 활용한다. 서남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로 진주해온 아랍 세력들에게 이슬람/아랍국가화가 되기 훨씬 전부터 두족류와 갑각류, 패류를 즐겨 먹는 식문화가 있었다. 사실 식문화조차 규율이 엄격한 것으로 유명한 이슬람교지만, 세계 각국에 퍼지다보니 그 나라에선 맞지 않는 것 때문에 어떻게든 현지 신학자들이 금기 식품 해석을 수정, 현지화해서 허용하기도 한다. 할랄 푸드 문서 참고.[12] 유럽에서 같은 과 생선인 대구가 식용생선으로 대접받는 것과 달리 명태는 낚시밥이나 고양이 사료로나 썼다.[13] 슈바인스학세, 콜레뇨, 크루빈스, 골롱카 등 돼지의 족발이나 뼈 부위로 만든 전통요리가 존재하거나 돼지의 족발을 먹기도 하는 독일, 스위스, 체코, 폴란드, 아일랜드 같은 일부 유럽 국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기독교 문화권의 백인들은 돼지고기의 살이나 비계 부위만 먹고 뼈, 발, 내장, 꼬리, 머리 등 돼지의 다른 부위들은 식용하지 않고 버리거나, 아교 등 접착제를 만들거나, 동물원에서 사육하는 육식동물 먹이로 사용한다. 최근에 와서야 한국이나 독일처럼 돼지의 뼈 부위와 족발을 즐겨먹는 타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14] 대다수의 백인들은 해초류를 잘 안 먹는다. 다만 아일랜드에서는 해초류를 먹는데, 영국의 식민통치 시절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굶주려 아사하고 기근을 못 이기고 국민들 대부분이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다른 영어권 국가들로 이민을 떠나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거라도 먹던 게 식문화로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15] 동양과 달리 서양권에서는 고사리를 잘 먹지 않는데 중세시대에 기근이 들 때 밀가루 대신 고사리 전분으로 빵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16] 니브흐족은 하바롭스크 지역 인구를 제외하면 절반인 2천명대이고, 월타족은 2002년 기준으로 3백명대였지만 현재는 더 감소했을 것이고, 사할린 아이누족은 홋카이도로 추방된 뒤 대부분 일본인에 동화되거나 남아있던 이들도 러시아인에 거의 혼혈 동화되면서 사실상 사멸해버렸다.[17]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 시간이 같다.